평화를 위한 약속을 무겁게 여기며 걷다
[378호 송지훈이 만난 활동가] 로힝야 난민촌으로 떠나는 ‘개척자들’ 아샤·하띠
안녕하세요. 앞으로 몇 차례 활동가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성서한국 송지훈 사무국장입니다. 성서한국에서 햇수로 9년째 일하면서 많은 활동가를 만나왔습니다. 활동가들의 일은 어디에서든 발견되지만, 그들의 말과 생각을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활동가’라는 호칭도 다소 애매한 표현인 듯합니다. 그래서 명확한 경계선을 찾아 활동가 영역을 구분하기보다, 제가 일하면서 만나왔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하려 합니다. ‘개척자들’1)의 아샤 님과 하띠 님은 제가 먼발치에서만 뵙던 분들인데요. 최근 두 분이 로힝야 난민촌으로 출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목소리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2년간 치열하게 평화를 살아냈던, 그리고 지금은 로힝야 난민촌을 누비고 다니실 두 분의 이야기입니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아샤: 저는 아샤라고 합니다. 제 활동명인데 로힝야 언어에서 따왔어요. ‘희망’이란 뜻이고, 제주도에서부터 불리게 됐는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척자들에서 활동한 지 5년 차 되는 스텝입니다.
하띠: 저는 하띠라고 하고요 제 활동명의 뜻은 인도네시아 말로 ‘마음’(heart)이라는 뜻이에요. 원래는 활동명이 따로 없었는데요. 개척자들에서도, 또 강정에서도 다들 활동명을 사용하다 보니 친구 추천으로 쓰게 됐어요. 2020년 개척자들에 합류했고 활동도 그때부터 강정에서 시작했습니다.
- 개척자들에서 평화 활동을 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리더십 센터에 들어가서 교육 강사로 일했어요. 학생들, 교사들을 교육하고 가끔 군대에 가서 초급장교들을 교육하기도 했고요. 진로를 계속 고민하다가 평화를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개척자들로 오게 되었어요. 대학생 때 한국기독학생회(IVF) 안에 있던 산돌학교에 참여하다가 개척자들에 방문한 것이 인연이었습니다.
하띠: 저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생이었어요. 학교의 ‘교회 밖 현장 실천’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개척자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한 철인 3종 경기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개척자들을 알게 되었어요.
- 학생 때부터 사회적인 활동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아샤: 학생 때는 막연한 마음만 갖고 있었던 듯해요. 산돌학교 시절부터 배우고 기도하면서 점점 평화 활동에 대한 마음이 커졌고, 사회생활을 3년 정도 하고 나니, 삶에 안주하기보다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게 제가 원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 하띠 님은 어떠셨나요? 신대원 시절부터 평화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하띠: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개척자들을 통해 제주 강정마을에 가기 전에는 그곳 상황도 잘 몰랐거든요. 어릴 때부터 약간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스무 살 무렵 신앙이 한창 뜨거울 때는 대형교회에 다녔었고요.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봉사하며 지내다 신대원에 들어갔죠. 그런데 그때부터 제 안에 어떤 갈급함은 있었어요. 성경을 보고 신학을 하며 본 예수님의 삶은 보면 볼수록 세상으로 계속 나아가고, 길 위에 사는 모습이었거든요. 정작 저는 계속 교회에만 머물러 있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만 하고, 세상에서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고요. 그런 다급한 마음이 있던 중에 개척자들을 통해 세상을 좀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합류했습니다. 그래서 강정에 갔을 때 모든 것이 다 새로웠고 평화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과 삶을 경험하면서 참 행복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얼마나 아득하고 힘든 길인지 실감하기도 했지만요.
- 2년 동안 제주에서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하셨어요?
아샤: ‘브라더송’(개척자들의 활동가와 강정마을 사람들은 평화운동가 송강호 박사를 주로 브라더송이라고 부른다)이 제주 팀의 팀장이셨는데 제주로 간 지 두어 달 만에 구속되면서 저로서는 꽤 방황했어요. 활동 방향이나 구체적인 계획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가버리셔서…. 강정에서 개척자들의 위치 혹은 역할은 ‘발’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그나마 단체로 가있어서 인력도 있고 차량도 있다 보니, 도움이 필요한 곳에 발 빠르게 가서 이사도 도와드리고, 농사도 도와드리고 하면서 지냈어요. 처음 6개월은 매일 아침 백배 시간이나 정오의 ‘인간띠잇기’도 날마다 새롭더라고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일상이 버거워졌어요. 인간띠잇기를 하고 있으면 어떤 분이 ‘빨갱이들’이라고 욕하면서 지나가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미움받는 느낌을 매일 겪으니 그게 내상으로 쌓이게 되더라고요. 그럼에도 그곳 일상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존재하려고 노력했죠. 제주의 다양한 이슈에 함께 연대하면서요. 누군가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단신 뉴스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직접 제주에 살아보니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어요. 기사 말고 내가 직접 겪는 사건이 되니까 삶이 달린 중대한 문제로 다가왔어요.
하띠: 저도 비슷해요. 강정에서의 일상은 버티는 것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간띠잇기를 하고 있으면 가끔 와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거 얼마 받고 하느냐고요. 근데 이거 돈 받고 하는 거 아니거든요. 돈 받고 하면 못 하죠. 다들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아니면 적은 후원으로 버티면서 어려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아샤 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일손을 돕기도 하고, 제주 제2공항이나 비자림로 공사 등 연대가 필요한 현장에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개척자들은 사실 2020년부터 강정에서 세계평화대학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개강하고 일주일 만에 한 번 수업하고 팀장이 구속되신 거예요.
아샤: 수업 한 번, 그러니까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가셨어요.(웃음)
- 이후 평화대학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하띠: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저희와 몇몇 활동가가 함께 4학기, 2년 동안 학기를 열고 저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공부할 수 있는 그룹을 만들었고요. 가끔 활동가분들이 특강도 해주셔서 각자의 활동과 삶을 공유해 주시기도 하는데 그 시간이 참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캠프를 몇 번 했어요. 코로나라 조심스러워서 대대적으로는 못 했지만, 그렇게 이따금 와주시는 분들이 참 감사했어요.
- 대안학교 같은 곳에서도 종종 오시는 것 같더라고요.
하띠: 맞아요. 대안학교 학생들이 해외를 못 가니까 강정을 많이 찾아주셨어요. 그럴 때 저희가 굉장히 힘을 많이 얻었죠.
- 지금이야 저희가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사실 2년 전에 송 박사님이 구속되실 때는 두 분이 참 막막하셨겠네요. 두 분도 같이 재판을 받기도 하셨죠?
아샤: 일단 주변 분들이 저희 둘 걱정을 정말 많이 해주셨어요. 덕분에(?) 저희가 강정에 머문 기간이 짧았음에도 강정 분들과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긴 했거든요. 많이 챙겨주시면서 집에도 초청해주시고 위로해 주셨어요. 젊은 애들이 고생한다고 걱정하시면서요. 특히 강정 활동가들이 많이 위로해 주셨어요. 저는 재판이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다만 이번 재판은 제가 뭔가 능동적으로 했던 활동 때문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받게 된 측면이 강해서 좀 아쉬웠을 뿐이죠. 원망 같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브라더송이 구속되긴 했지만 사실 저는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저한테는 브라더송이 선배이면서 동료이고 공동체 식구잖아요. 같이 살면서 브라더송의 장점도 알고 단점도 많이 알아요. 서로 너무 잘 아는 거죠. 그래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쉽긴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역량껏 메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지냈습니다.
- 어쨌든 그런 시간 속에서 오히려 남은 분들은 더 결속이 강하게 되셨던 거네요.
하띠: 저는 사실 되게 힘들었어요. 기존 멤버들은 서로를 잘 알지만 저는 처음이었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상황에 부닥치니까 너무 답답했죠.
- 그렇네요. 아샤 님은 그래도 양평에서 3년을 함께 보내셨지만, 하띠 님은 완전 처음이었죠?
하띠: 송 박사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근데 돌아보면 이 시간이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어찌 됐든 제가 직접 재판을 받으면서 사법 처리 과정을 보니까 우리가 얼마나 환상 속에 있었나 싶었어요. 법이라는 테두리에 너무 막연한 신뢰를 하고 있었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평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왜 법을 넘어서느냐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지금의 법 테두리 안에서는 평화 활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런 문제들을 직접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경험이 좋았어요.
아샤: 재판이 없었다면 제주에 살면서도 그냥 주변인으로 머무는 데 그쳤을지도 모르겠어요. 강정마을에서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던 수많은 이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마을에 살고 있고 활동하고 있는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어요.
- 이제 얼마 후면 두 분이 로힝야 난민촌에 들어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결정하게 된 건지 궁금하네요.
아샤: 개척자들은 2017년 로힝야 대학살 사태가 있던 그해 12월부터 로힝야 난민촌을 1년에 두 차례 방문하거나, 3-4개월씩 꾸준히 머물렀어요. 제가 로힝야 담당자인데, 지금까지 4년째 로힝야 친구들과 함께 관계를 이어오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에 있으면서 계속 마음이 무거웠어요. 제가 그 친구들한테 ‘너희가 로힝야로 돌아갈 때까지 옆에서 내가 친구가 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약속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면서 약속의 무거움을 실감했어요. 그런 한계를 느끼면서 이번에 로힝야에 가겠다고 결심했죠.
하띠: 저희가 올해 1월 초에도 단기로 로힝야에 3주 정도 다녀왔어요. 제가 개척자들의 세계 기도 뉴스 담당인데 전 세계의 내전, 분쟁, 전쟁 소식을 모으는 일을 하면서 로힝야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 벌써 대학살 이후 5년이 흘렀고, 그사이 코로나와 군부 쿠데타까지 터지면서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는데요. 현재 로힝야는 어떤지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샤: 캠프 상황은 점점 더 통제가 심해지고 있어요. 로힝야 친구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현재 통행의 자유도 없고,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거주의 자유 등 한국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할 어려움을 겪으며 계속 제약을 당한 채 살아가고 있어요. 로힝야 난민촌 규모가 정말 큰데요. 처음에는 어느 곳으로 들어가도 상관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큰 난민촌 27곳을 다 철조망으로 둘러쌌어요. 정식 통로가 단 한 곳뿐이에요. 난민촌에는 화재도 자주 일어나요. 집들이 대부분 대나무와 비닐로 만들어져 있고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화재에 너무 취약합니다. 1월에 갔을 당시에도 저희가 운영하는 학교 학생들 집이 세 채 탔고, 총 500여 채가 타는 큰 화재가 일어났더라고요.
하띠: 20년도 더 된 난민촌도 있는 반면에 비교적 최근인 2017년에 생긴 난민촌도 있어요. 그래서 최근에 생긴 난민촌의 친구들은 해가 갈수록 박탈감과 상실감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상황이 불투명해지니까요.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도 난민에 대한 규제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고 NGO들도 사업을 조금씩 철수하고 있거든요. 여전히 많은 NGO가 돕고 있긴 하지만 전과 비교해서 관심이 많이 줄어들고 있어요.
- 젊은 친구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있을 텐데, 직업을 가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니 너무 힘들겠네요.
아샤: 그래서 이 친구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영어를 배워서 NGO들 업무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마을을 다니면서 코로나 감염 조사를 하거나 건강 관련 조사를 하는 식의 일을 맡아서 하는 거죠. 그나마 그런 일들도 점점 줄고 있죠. 생계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 아샤 님은 5년, 하띠 님은 2년 정도 개척자들을 통해 평화 활동을 하셨지요. 두 분은 한국의 평화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저는 활동가들 고충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생각과 의견도 꼭 듣고 싶었거든요.
아샤: 대답하기 참 어렵긴 한데요. 그냥 제가 느낀 것을 이야기해 보자면, 한국의 평화 활동은 크게는 남북통일 관련 활동과 전쟁 반대 활동 등으로 구분된다고 느껴졌어요. 분명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함께 있으면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서로 관련된 이슈가 정말 많고 활동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뭔가 서로 연결이 잘 안 되는 느낌이었어요. 활동하는 분들의 열정이 서로 더 많이 연결되어 한목소리를 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죠.
- 맞아요. 또 그런 분들은 열심히 활동하시다가도 어느 순간 찾아오는 고립감이나 외로움이 아주 클 것 같거든요.
하띠: 저는 평화라는 것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원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화 활동이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단어가 되어 버렸달까요. 그리고 몇몇 소수의 활동가만 외치는 구호로 굳어진 듯해 아쉬워요. 그러면서 또 시민들은 활동가들을 과격한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런데 제가 만난 활동가들은 그냥 시민이었거든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평화 활동가들도 그저 같은 한 사람, 시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평화운동의 문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해요. 작은 실천이라도 시민들과 함께 쉽게 동참할 수 있는 활동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 평화 활동을 잘 모르는 시민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세요?
아샤: 강정에 있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저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순간들이 솔직히 무서웠어요. 저는 제가 당신과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저는 누군가를 설득해낼 만한 능력은 부족하지만, 강정의 이야기를 기사로만 만나지 말고 직접 와보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띠: 저희 같은 활동가들에게 동의하지 않고 싫어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의 활동과 삶, 방식이 낯설다고 해서 이 평화 활동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에 대한 관점이 다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다수의 눈에 거슬리고 불편하다고 해서 보이지 않게 치워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그런 혐오의 세상은 결국 나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저는 평화 활동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예언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때로는 과격하게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희가 무엇을 추구하고,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좀 더 깊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갈지 더 많은 논의와 대화의 장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인터뷰는 3월 23일에 진행되었고, 아샤 님과 하띠 님은 인터뷰를 하고 5일 후에 로힝야 난민촌으로 떠나셨습니다. 지면에는 다 못 실었지만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두 분과 더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었던 로힝야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고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활동가가 정해진 일정을 무사히, 건강하게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1) (사)개척자들은 1999년 작은 기도 모임으로 시작되어, 20년 넘게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제주 강정마을 평화 활동, 로힝야 난민촌 사역, 인도네시아 평화캠프 등을 이어가고 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