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시대를 마주하기 위한 질문들
[379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나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계획된 임신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태중에 있는 아기를 지우라고 했다. 정확한 이유는 12년 전 봄을 기점으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임신중절 권유가 내가 가진 병 때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보인자’인 어머니가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 병을 안고 태어날 확률은 50%였다. 당시 부모님은 이 사실을 몰랐고, 근이영양증의 가능성을 알게 된 시점은 내가 태어난 뒤였다.
출산에 영향을 준 변수 하나는 ‘점’(占)이었다. 이웃집에 살았다던 점쟁이는 내가 가족을 화목하게 이어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당시 아버지는 술을 마시느라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고, 가족들의 기다림이 일상이었다는 점만 언급해둔다. 돌아보면, 점쟁이 말은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아이 한 명이 더 생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수더분한 형과 달리, 애살맞은 면이 있어서 집안일에 먼저 의견을 내고, 가족 모임을 소집하는 등 대체로 내가 말 많은 참견자를 자처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화목을 책임지는 역할은 아니었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내 뜻도 많이 관철했다. 이따금 모질었다. 왜 나를 낳았느냐고, 어머니에게 대들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왜 나를 낳았느냐’, 이 질문을 다른 관점에서 곱씹을 날이 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연애가 이뤄져도 미래를 기대하거나 약속한 적이 없다. 갈수록 안 좋아질 몸뚱이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생각을 번복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장애인 여성이었던 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여러 차례 양해를 구하곤 했다. 내 몸, 그로 인해 발생할 장애에 대해서. 데이트 장소의 접근성을 비롯하여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있었으니까. 미리 해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세간의 인식도 한몫했다. 사랑한다는 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마는, 어떤 사랑‘들’은 설명을 요구받는다.
‘여자가 떠나기 전에 빨리 임신시켜’라는 둥, 어느 장애인-비장애인 커플이 들었다던 폭력적인 말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적은 있었다. 일례로, 고속버스 터미널 카페에서 어머니가 처음 만난 여자친구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정말 고맙다”라는 말을 연발한 것이다. 적어도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눈물 보일 일은 아니었다. 연인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만나주는’ 관계는 아니지 않은가. 사실 장애인과 함께하는 비장애인을 마냥 ‘착한 사람’인 양 납작하게 인식하는 경우는 제법 흔하다. 장애인-비장애인의 사랑은 ‘장애를 극복’한 ‘순수한 러브스토리’로 손쉽게 포장되기 일쑤다.1)
외모·집안·직장·재산 등 결혼하는 두 사람의 배경과 조건을 저울질하면서 품평하는 오지랖이 흔하디흔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지나가는 커플을 보면서도 누가 더 낫다며 일순간 판단을 내린다. 손상이 가시화될수록 시선이 집중된다. 두 사람을 아래위로 훑는 무례한 눈길, 공간을 타고 흐르는 묘한 분위기는 장애인의 세계에서 예사로운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런 눈길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걷는 도중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경직된 자세로 오르막길을 오르거나, 난간에 의지하여 계단을 오갈 때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흘낏 봤을 때 손상 여부를 눈치채기 어려워서 그렇겠다. 물론 지팡이 같은 보장구를 사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전 문제를 고민하다
남들과 별다르지 않게 연애해오다가, 만난 지 3년쯤 됐을 때 결혼 약속을 했다. 양가 허락을 받으려면 전략을 짜야 했다. 특히 여자친구 부모님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더 자신감 있게 보일지, 장애를 어디까지 설명하면 좋을지 따지기 시작했다. 낙관할 수 없었다. ‘정상성’을 연기하며 몇 차례 자리를 모면해볼까 고민하기도 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병은 솔직하게 털어놓되 심각한 분위기는 피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둘이서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어필하자고 했다.
예상 질문을 뽑으며 두 가지에 잘 대처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바로 ‘정확한 병명’과 ‘2세 문제’를 물었을 경우였다. ‘근이영양증’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은 내 몸 상태보다 훨씬 안 좋았다. 무엇보다 이 병은 유전질환이었다. ‘X염색체 반성 열성 유전’, 일반적으로 내 자녀들은 증상이 없으나 딸을 낳으면 딸의 아들이 50% 확률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잘 설명해내려면 충분한 정보가 절실했다. 또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여자친구는 자녀를 낳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치의였던 부산의 한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외래 진료를 받는 그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듣고 말았다. “아들이면 확률이 반반이고, 딸이면 증상은 없지만 100% 보인자입니다. 양수 검사가 있겠지만, 아이를 가지면 그것으로 끝이잖아요. 지울 수는 없잖아. 그냥 둘이서 행복하게 사세요. 아이에게 증상이 없어도 노심초사 불안해하는 부모들을 참 많이 봐왔습니다.” 여자친구는 크게 당황했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여러 차례 확인한 내용과 달랐으나,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의사의 어투 때문에 더는 따지지 못했다.
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후로, 의사에게 2세 문제를 상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전도 유전이었지만, 나는 한동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반출생주의에 끌렸다. 아무리 삶에서 의미를 찾더라도, 인생 전체 시간을 고려할 때 뜻깊은 즐거움은 아주 짧은 순간들로 분절돼있다. 대부분은 힘들여 수고하고 애쓰는 시간이 아닌가. 전체 인생에서 고통과 쾌락의 무게를 따진 뒤 저울에 달았을 때, 고통 쪽으로 기울어지는 ‘압도적인 비대칭성’을 고려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개미지옥에 빠진 것 같은 운명에 처한 비참한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차고 넘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흉터로 가득한 풍경을 등지고 사는 듯한 감각을 떨치지 못한다. 나는 생의 굴레, 인간의 한계 상황이 서글펐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신앙했지만, 생명을 갖는 데는 회의적이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니까. 병원을 방문한 때가, 이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와중이었다.
기존에 알던 대로라면, 아들을 낳으면 병이 끊겼다. 딸을 낳으면 ‘보인자’임을 알려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증상이 발현되지 않을뿐더러 치료제 개발도 유의미한 성과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아들을 낳았을 경우 이환 가능성이 반반이라니. 여자친구는 며칠 동안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유전 문제에 관해서 조금 더 명확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의사가 확답을 주면,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여자친구가 안심하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도 있었다. 안일하다면 다소 안일한 계산이었을까. 여자친구는 의사로 일하는 친구에게 SOS를 청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논문을 참고해서 확인해주었다. 그는 내가 알아본 사실이 맞다고 했다. 다만 환자를 오랫동안 만나온 의사가 한 말이니만큼 근거가 있을 것 같다며, 이메일로 문의해보라는 조언을 줬다.
‘의학의 불확실성’이 드러나는 자리
단지 메일을 하나 쓰는 일이었지만, 이 과정이 심히 불편했다. 쓰고 보내기까지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이때 느낀 압박감과 혼란스러움이 스스로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아서 한동안 곤혹스러웠다. 물론 오늘날 ‘의사-환자’ 관계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는 했다. 병원에서 전문의가 갖는 권위는 환자를 압도한다. 현대의 의료 시스템에서 그 권위에 맞서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의사가 입는 옷은 “마법의 흰색 가운”에, 그 존재는 “불사신”에 비유되겠는가.2) 나는 ‘착한 환자’ 배역을 충실히 수행해온 사람이었다. ‘환자는 질병이나 몸 상태를 이해할 능력이 없기에 의료진 결정은 전적으로 도움이 되며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개념의 ‘의료부권주의’(medical paternalism)는 내게 뿌리 깊은 것이었다.
내 몸은 치료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가장 젊은 과학’인 ‘의학의 불확실성·부정확성·불완전성’이 드러나는 장소3)인데도, 이를 비중 있게 성찰하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병의 진행을 체감하던 시기, 불안한 마음에, 과거 근이영양증을 확진한 서울의 대학병원 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이때의 불쾌한 경험이, 지금의 의학이 내 병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자명하게 일깨웠다. 그는 짜증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투로 응대했다. 병의 진행은 당연하고, 상태가 훨씬 안 좋아 누워 지내는 사람도 많은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왜 찾아왔느냐고 타박했다.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안 좋아지면 오라고 했다. 외래 환자가 밀려있었으니 마음도 급했을 테고, 그가 주로 다뤄온 중증 환자에 비해 양호한 상태인 내가 배부른 소리 한다 싶었겠다.
이 병에 관한 한, 내가 ‘치료’를 목적으로 병원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주로 희귀난치성질환자 의료비지원사업이나 장애인 등록 및 재판정 서류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산의 의사가 주치의를 맡았는데, 지역에서 이름난 명의이자 ‘좋은 의사’였다. 장애 판정은 ‘의료적 관점’에서 진행되기에 의사의 진단이 중요하다. 그는 재판정 서류를 위해 방문할 때마다 후속 처리가 복잡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다. 나처럼 손상이 비가시적이면 특히 의사 말에 실리는 비중이 커지기에, 때마다 배려해주는 그에게 감사한 마음이 컸다. ‘불친절한 태도’ ‘시큰둥한 반응’ 등 일부 의사와의 좋지 않은 만남, 실험 대상처럼 다뤄졌던 몇몇 검사에서의 기억이, 이 의사를 향한 마음을 더 크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유전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몸 상태를 판단할 때 그간 얼마나 수동적 태도로 일관해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사실을 크게 보면서, 내가 재활치료 등 관리에 소홀했던 것도 이와 관련 있을 터였다.
그에게 긴 이메일을 보냈고, 다음 날 바로 답장이 왔다. “진료 중 잘못 전달되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들이든 딸이든 이론상 어떻든지 돌발적 발현을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부모에게 자녀를 선택할 권리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잘못 전달한 사실은 바로잡았으나, 메시지는 지난번 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마침, 같은 병을 가진 큰외삼촌과 통화해서 받은 답을 어머니가 전달해주었다. 큰외삼촌은 이 의사와도 아는 사이였고, 각종 장애인 단체에서 직임을 맡았기에 정보가 많았다. 이미 이 병을 앞서 경험해왔고, 비장애인 아들을 둔 큰외삼촌에게 먼저 묻는 것이 순서상 맞았으리라. “그 사람은 전공이 다르니까 정확히 모르지. 유전의학 전문가를 소개해줄 테니까 찾아가.”
‘유전상담’을 받다
‘희귀 질환자들의 대모(代母)’라고 불리는, 연세 지긋한 교수와의 만남은 한 달 반 뒤에 성사되었다.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유전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이날 상담을 받기 위해서 병이 확진됐을 때의 유전자 검사 의무기록지를 처음 떼보았고, 여자친구까지 포함하여 상세한 가계도를 그리며 1시간여 대화를 나눴다. 일가친척 가족관계를 포함해 증상과 현재 상황을 묻더니 유전적 특징을 설명해주었다. 아들에게는 유전이 안 되며, 딸은 100% 보인자이나, 그 딸이 아이를 가질 시점이면 치료제가 개발되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봤다.
“나라면 감사해할 거야. 증상도 이 정도밖에 안 되고, 2세에 문제가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요? 인간에게 2만 5,000개의 유전자가 있는데,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모르는 거예요. 누구든 드러나지 않은 돌연변이가 있을 수 있거든. 검사해도 확실하게 안 나오는 유전질환도 많아요. 이 병은 검사하면 잡혀. ‘유전자’라는 것의 특별함을 알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해요.”
꼭 복음적인 설교 한 편을 들은 느낌이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고, 마침내 정리된 답을 들었기 때문이겠다. 그는 한국에 유전학을 잘 모르는 의사도 많으니, 유전 문제를 문의하러 갈 때는 꼭 최신 논문을 들고 가서 진료받으라고 덧붙였다. 추후 자녀를 계획하는 시점이 오면, 배우자 될 사람도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 좋겠다고 권하며 유전상담을 마무리했다. 어찌 되었든 만족스러운 답을 얻은 여자친구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기는 했지만, 나는 어딘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생명’들은 국가와 의료 시스템의 관리체계 아래서 평가절하된다. 유전질환자와 장애인은 재생산권을 통제해야 할 대상이다.4) 유전상담은 이와 관련 깊은 전문 의료 서비스이다. 유전질환의 효율적 관리 및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한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보편화했지만, 한국은 아직 보험급여조차 적용되지 않는다.5) 2020년 기준으로 대한의학유전학회 인증을 받은 유전상담사는 고작 36명이고, 이 또한 산전·소아·성인·암 4가지 분야로 나뉘어있으니 매우 열악한 상황인 셈이다.6)
확실히 그럴 만했다. 대학병원에서 1시간여 의사와 얼굴을 마주해보기는 처음이었다. 2020년 ‘공공의대 파업’ 이후 더 거리가 벌어진 한국의 의료인과 환자 사이에 다리 놓기를 시도하는 《의사들은 왜 그래?》(스리체어스)는 의사들이 ‘불친절하고 바쁘며 오만한’ 이유를 ‘집단적 번아웃 증후군’ 키워드로 풀어낸다. 책에 따르면, 저수가(抵酬價) 시스템이 안착한 한국 사회에서 속전속결 3분 진료는 문화로 정착된 지 오래다. 박리다매(薄利多賣) 진료 환경에서 1인당 이 이상 시간을 내기는 힘들다. 결국 친절이 아닌 ‘효과적 치료’에 방점이 찍힌다. 이 상황에서 1인당 30분 이상 소요되는 유전상담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장애학은 유전상담의 작동 방식에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 직접 상담을 받아보니 그 이유를 알 듯싶었다. 유전상담은 ‘비지시성’ ‘자기결정권 존중’을 기본 원칙 삼아 내담자가 선택을 내리는 데 필요한 간접적 도움을 주는 것을 지향한다. 다만 ‘삶의 질’을 평가할 때 제시되는 선택지는 ‘의료적 관점’에서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손상을 장애화하는 공간과 제도의 장벽을 허물기보다, 손상 자체를 ‘비정상’으로 여기며 ‘정상’을 더 우월한 것으로 보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유전학적 진단과 평가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장애학 연구가들은 지적하기도 한다.
은연중에 ‘장애인의 삶’은 ‘비극’과 같은 단어로 평면적·일률적으로 치부되기 쉽다. 린지 브라운은 ‘장애 관련 법률의 형성에서 의료 전문가의 역할’7)을 다루면서 ‘삶의 질’에 대한 의사의 판단이 온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음을 지적한다. 장애인의 일상 경험을 오롯이 알 수 없기에 제한된 시각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공적 영역에서 장애인의 삶을 평가할 때 이 점은 비중 있게 고려되지 않는다. 당사자나,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회복지 혹은 보건의료 종사자들 견해는 가볍게 인식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전상담을 비롯하여 질병과 장애와 관련한 문제를 다룰 때 장애학 관점에서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착상 전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시대의 논의들
유전 문제를 들여다보는 여정은, ‘착상 전 유전자 검사’라는 가능성까지 따져보는 것으로 이어졌다. 내가 진단받은 근이영양증은 생명윤리법상 이 검사가 가능한 질병이었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 제50조(유전자검사의 제한 등) 2를 보면, “유전자검사기관은 근이영양증이나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전질환을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배아 또는 태아를 대상으로 유전자검사를 할 수 있다”8)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이에 관한 상담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관련 논문들과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체외수정’과 ‘유전자 검사’가 결합된 형태이기에, ‘과배란 유도’ ‘다수의 난자 채취’ 등 여성에게 부담이 가는 형태였다. ‘배아’를 선별해서 소수만 사용하고 나머지를 폐기하는 문제도 있었다. 일종의 ‘유전자 선별’인 셈인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기독교적 가치에 맞는 것인지, 이렇게 집요하게 방법을 찾는 것이 옳은지 되물으면서 많이 지쳤다. 미국·멕시코·이탈리아·태국 등에서는 이를 이용해 돈을 주면 ‘성별’을 고를 수도 있는 데까지 왔다고 하니9) 가히 ‘유전자 시대’라고 할 만하다 싶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을 지난하게 풀어냈는데, 이후에야 여자친구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예상했던 두 가지 질문은 그대로 날아들었고, 반대에 부딪혔다. 내가 가진 질병, 특히 유전 가능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어떤 설득도 가닿지 못했다. 설득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친구는 ‘착상 전 유전자 검사’로 ‘건강한 아이’를 얻을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과정이 어렵더라도 ‘시도하려는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나는 복잡미묘한 마음이었다. 저 방법 자체가 나와 같은 질병을 가진 존재를 배제하는 길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겠다. 기술이 존재하는 이상, 인간은 무언가를 통제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 이상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생각해보니, 한편으로 이 여정은 어쩌면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생명공학 기술의 오래된 욕망의 발로와 잇닿아있지 않나 싶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21세기 문턱인 1999년에 《바이오테크 시대》(민음사)라는 책 한 권을 내놓는다. 그는 이 책에서 ‘생물학의 세기’로서 21세기를 예견한다. ‘생명공학 혁명’이 잇따르면서 발생할 진보를 향한 희망과 현실적이고 잠재적으로 야기될 위험이 촉박할 ‘윤리적 난제’에 우려를 표했다. 이 예견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비롯한 여러 흐름을 거쳐, 혁명적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10) 발견으로 적중되어가는 듯하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유전체 내에서 특정 유전자 부위만 선택해서 잘라낼 수 있도록 해준다. 이를테면 인간 유전체 내 30억 개 DNA 염기쌍 중 특정 유전정보를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수십 년 전부터 생명공학이 꿈꿨던 ‘장밋빛 미래’가 바로 펼쳐지기는 어렵겠지만, 시간과 비용, 효율성 면에서 획기적인 기술이라는 점에서 과학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다. 코로나 진단 및 백신 개발에도 이 기술이 쓰였고, 유전자 치료, 농작물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인간 증강’에 대한 논의도 이따금씩 쏟아진다.
최신 합성생물학을 둘러싼 과학·신학·윤리학·철학 담론을 다루는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는 이렇듯 과학기술의 변화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이를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한 도구로 보기만 하지 정책적 고민이나 열린 논의가 없다는 점을 꼬집는다. 과학기술 영역들에 관한 대화와 성찰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우생학’에 열광했던 지난 세기처럼, 오늘날 모든 게 유전자로 결정된다는 환원주의적 ‘유전자 결정론’이 횡행하고 있다. 언론은 연일 호들갑스럽게 이를 보도한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고민을 밀어붙이면서, 희망의 서사를 만들어가야 할까.
1) 타이완 작가 천자오루가 쓴 책으로,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다루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사계절) 한국어판에 수록된 김원영의 글 ‘용기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성에 관한 이야기’(5-13쪽)는 장애인을 사랑·섹스·출산·육아와 무관한 무성적(asexual) 존재로 보는 경향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가 장애인-장애인 커플을 ‘불편한 사람끼리 서로 돕는 관계’로 인식한다거나, 장애인-비장애인 커플을 ‘헌신적인 사랑’ 등으로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2) 우울증을 경험한 정신과 의사 로버트 클리츠먼이 쓴 《환자가 된 의사들 – 고장난 신들의 생존에 관한 기록》(동녘)은 심각한 병을 경험한 의사들 인터뷰를 담았다. 하나같이 의사로서 환자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지와 이전에 느끼지 못한 의료 권력, 현대 의학이 부추기는 치료에 대한 ‘낙관 편견’을 체감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의사들은 마법의 흰색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 그 마법으로 질병을 치료합니다. … 근데 병이 의사를 공격한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45쪽)
3)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의학의 법칙들》(문학동네)을 참고하여 가져온 표현들이다. 저자는 의학이 채택하는 질병 모델은 관찰에 따른 규칙들을 바탕으로 두기 때문에, 보기보다 일관성 있지 않고 ‘정상 범위’ 바깥에 있는 이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전 지식’ ‘예외’ ‘편향’을 의학의 법칙으로 꼽으며, “불확실하고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내려지는 판단이야말로 의학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104쪽)고 강조한다.
4) 모자보건법 제14조 1을 보면,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라고 나온다.
5) 김현주, 〈한국 의료제도와 유전상담 서비스의 구축〉, 《Journal of Genetic Medicine Vol. 8 No. 2》(2011) 참조.
6) 2020년 9월 25일 자로 BRIC(생물학연구정보센터) 뉴스에 실린 글 ‘[친절한 유전상담 이야기] 〈3〉 한국의 유전상담’을 참고했다.
7) 크리스트야나 크리스티안센 외 2인 엮음, 《철학, 장애를 논하다》(그린비, 2020), 11장 참조.
8)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생명윤리법’ 부분에서 가져왔다. 제29조(잔여배아 연구)의 1 “배아의 보존기간이 지난 잔여배아는 발생학적으로 원시선(元詩選)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체외에서 다음 각 호의 연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에 나오는 2번째 항목에서도 ‘근이영양증’이 ‘희귀·난치병의 치료를 위한 연구’ 대상으로 적시된다.
9) 김선혜, 의료기술과 재생산 정의: 산전진단에서 착상 전 유전자 진단까지, 〈비마이너〉(2022.3.20.)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이 검사에 대한 한국 장애계의 관점을 보려면 이 기사를 참고하라.
10)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 대한 설명은, 김응빈 외 4인 지음, 송기원 엮음,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동아시아, 2017) 중 2장 ‘신의 기술,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