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현장의 언어로 풀어내다
[379호 송지훈이 만난 활동가] 사회선교사로 파송받은 평화누리 사무국장 김희석
이번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오랫동안 평화누리 사무국장으로 일해오시고, 최근 제가 일하는 성서한국에 협동사무처장으로도 합류해주신 김희석 국장님을 만났습니다.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묵묵히 함께하시는 국장님의 모습을 보며, 모습 너머의 감추어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제게 있어서도 이제 몇 안 남은 선배 활동가이기도 한 김희석 국장님을 성서한국 회의실에서 만났습니다.
- 2014년에 처음 국장님을 뵈었으니, 저희도 함께 활동한 지 벌써 햇수로 9년째가 됐더라고요. 그래서인 더 어색한 것 같네요.(웃음)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저는 평화누리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고요. 올해부터는 성서한국 협동사무처장으로도 섬기게 됐습니다. 또 지금 출석하는 높은뜻덕소교회에서 올해 2월에 사회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2009년부터 복음주의 사회선교 운동에 전업 활동가로 뛰어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네요.
- 활동가로 살기까지의 신앙 여정이 궁금하네요. 학생 선교단체 ‘새벽이슬’에서 활동하셨죠?
네. 그런데 그전에는 예수전도단에서 활동했어요. 어느 해 여름 예수전도단 대학생 대회에 갔는데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일차적 회심의 순간이었죠. 그래서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과 헌신을 결의하고 그랬네요. 그리고 당시 선택특강을 들었는데, 성토모(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 ‘희년함께’ 전신)의 강의를 골랐죠.
- 예수전도단 학생 대회 선택특강에 성토모 강의가 있었군요. 뭔가 묘하네요.
맞아요. 아무튼 그 강의가 정치학을 전공하는 당시의 저에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번의 계기가 있었지요. 제가 부산에서 대학을 다닐 때인데요. 한번은 부산에 유명한 분들이 많이 오는 청년집회가 열린다는 거예요. 거기에 갔는데 기독인들이 총학생회에 출마하는 캠퍼스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거죠. 너무 끌리더라고요. 당시 연세대학교는 기독인들이 중심이 돼서 비운동권 총학생회(총학)가 출범한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연세대 총학에 전화해서 나도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총학 출마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나 말고도 다른 대학 학생들이 문의해와서 다음 주에 모이기로 했다는 거예요.
- 굉장히 적극적이셨네요. 당연히 모임에 나가셨고요?
네.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금요일 저녁에 모여서 밤새 이야기를 했어요. 그 자리가 소위 새벽이슬의 모태가 된 모임이었습니다. 그렇게 10개 대학의 기독 학생들이 총학에 출마했는데 세 군데만 되고 나머지는 다 떨어졌어요. 저도 그때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제가 그해에는 큰 차이로 낙선했는데 다음 해에 또 출마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아쉽게 떨어지긴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선배가 있었는데요. 그 선배가 나중에 이러더라고요. “나는 운동권도 싫고 예수쟁이는 더 싫은데 이번에는 희석이 너 찍었다.” 왜 찍었냐고 물어보니까 작년에 떨어지고도 1년을 꼬박 다시 준비하면서 말하는 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찍었다고 하더군요. 참 뿌듯했습니다.
- 파란만장한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졸업 후에는 일반 직업인으로 사셨죠? 어떻게 전업 기독 활동가가 되셨는지요.
졸업해서는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졸업 앨범이나 인쇄물을 제작하는 사업이었어요. 제일 처음 받은 주문은 목동에 있는 한 교회의 주보 제작이었는데요. 한 주에 2만 원 정도 버는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일이 절실했으니 뭐든 해야 했죠. 나이 서른에 큰돈 없이 시작했던 터라 결국에는 사업을 접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에 둘째 아이를 막 가졌을 때인데 마침 좀 좋은 조건으로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수락하고 이직 전에 여행을 가려고 했어요. 사업할 때 생겼던 빚도 거의 다 갚고 조금 여유가 생겨 숨을 돌리던 때였죠. 그때 직장이 광화문에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2009년은 광우병 촛불 시위가 한창이었습니다. 그 현장을 지나가는데 마음이 무거웠어요. 빚 때문에 늘 압박을 받다가 이제야 좀 여유가 생겼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불편한 마음도 드는 거죠. 이렇게 나만을 위해서 살다가는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아빠는 그때 뭐 했느냐고 물으면 해줄 말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여행 다녀오고 마음을 정리한 다음에 이직할 회사로 가서 안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지내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복음주의권에서 정치 참여 운동의 일환으로 ‘희망정치시민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지역의 좋은 후보를 찾아서 ‘희망후보’라는 타이틀을 걸어주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 단체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 이후에 ‘평화누리’라는 단체로 활동을 이어가시면서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평화누리를 소개해주시죠.
평화누리는 사회적 약자와 연대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사랑을 실천하는 단체인데요.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찾아가서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필요하면 함께 기도회도 드리고, 예배도 드려요. 예배가 부담스러우면 미니 콘서트도 하고 커피 나눔도 하면서 이웃이 되어주는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제 전임자부터 시작해서 4대강,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활동들을 꾸준하게 연대했고 지금도 여러 현장과 함께 연대하고 있습니다.
- 저도 성서한국에서 일하면서 현장에 가서 보면 복음주의 단체는 많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복음주의 운동에서 이런 역할을 이어온 단체가 평화누리라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원래 저희 단체 이름이 ‘통일시대 평화누리’였어요. 처음에는 한국의 분단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큰 과제가 있어서 통일 영역도 아우르기 위해 만들어졌던 거죠. 아시다시피 저희뿐 아니라 많은 단체들이 한두 명, 많아야 4-5명 활동가로 사무국을 꾸리잖아요. 그래서 모든 현장을 다 대응할 수는 없게 됩니다. 평화누리도 고민하다가 제 전임자 때 여러 영역에 연대를 해나가긴 하지만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저희는 ‘노동’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복음주의 내에서는 노동 현장에 연대하는 단체는 거의 없거든요. 보수적인 교회 안에서는 ‘노동’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많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고도 판단했습니다.
- 요즘은 어떤 현장과 연대하고 계시나요?
‘아시아나케이오’라는 아시아나항공 청소 노동자들이신데요. 팬데믹 상황에 따른 경영난을 이유로 사측으로부터 무급 휴직 또는 희망퇴직을 강요받았어요. 이를 거부하니까 해고가 된 거죠. 얼마 전에 투쟁 700일을 넘으셨어요. 재작년 5월 11월부터 이분들이 농성을 시작하셨는데요. 평화누리는 작년 2월부터 기자회견도 함께하고 매주 목요일 기도회를 열고 있습니다. 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하는 아침 선전전도 함께하고 있고요.
- 아시아나케이오뿐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현장들이 많이 보이실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너무 많아요. 지난 시간 동안 재능교육 투쟁 현장부터 삼척에 있는 삼표시멘트 해고 노동자들, 콜트콜텍 현장, 그리고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라가서 투쟁하셨던 파인텍 현장에도 연대했었고요. 지금은 아시아나케이오 현장에 주로 연대하고 있지만 이외에도 지금 노량진수산시장 현대화로 쫓겨나신 분들도 찾아뵈었고, 또 얼마 전 갑자기 새벽에 강제 침입을 당한 을지OB베어 같은 경우도 저희가 함께해야 할 현장입니다. 제가 몸은 하나인데, 또 개인 사정도 있어서 일일이 다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고 아쉬울 뿐입니다.
-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이 승리로 끝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잖아요. 안타까운 순간이 많을 것 같아요.
복직되더라도 실은 온전한 복직이 아니라 약간은 편법적인 복직이 꽤 많았어요. 예를 든다면 정년을 넘기고 복직 결정이 나면 결국 회사에 다닐 수 없게 되는 처지가 됩니다. 그냥 ‘명예복직’ 같은 것이 되는 거죠. 현재 아시아나케이오 같은 경우도 작년 5월에 한 분, 그리고 6월에 한 분이 정년을 맞으셨고 얼마 전 3월에 또 한 분이 길에서 정년을 맞으셨습니다. 이제 한 분 남으셨는데, 내년이면 정년이세요. 이런 상황을 보면 이게 과연 온전한 해결이고 승리인가 하는 아쉬움이 있죠. 그리고 전에 연대했던 삼성 해고 노동자 두 분이 복직 투쟁을 하셨는데요. 강남역 사거리 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하셨죠. 그런데 한 분은 건강 등의 이유로 오르지 못하시고 한 분만 고공농성을 진행하셨거든요. 결국 올라가셨던 분만 사측과 합의가 이루어지고 말았어요. 나머지 한 분은 아무런 보상도 제대로 못 받으시고 명예도 회복되지 못한 채 그냥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저희(개신교대책위)가 그 현장을 정리하면서 저희 안에서 깊은 회의감이 들기도 했어요. 왜 이렇게밖에 마무리하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크죠. 이런 해고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연대하다 보면 정말 여러 일이 발생합니다. 이런 투쟁들은 당연히 고통이 따르고 힘이 들기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시는 노동자분도 많으세요. 그러나 그분들을 결코 탓할 수는 없고, 누군가는 계속 현장에서 함께 연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 저희 활동가 실무자 그룹에서는 이제 40대 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국장님은 이제 저희 안에서 맏형 같은 느낌인데요.
또래 동료가 별로 없어서 아주 아쉬워요. 제가 처음에 활동가로 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제 또래가 꽤 있었거든요. 서로 의지도 하고 또래 모임도 가지고 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제 또래들이 하나둘 현장을 떠나요.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주로 생계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끼리 우스개로 ‘활동가들끼리 결혼하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된다’는 말을 하곤 했어요.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다 보니,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신학을 했던 친구들은 목회로 떠나고, 저 같은 평신도들은 예전에 했던 일을 찾아 떠나죠. 전혀 새로운 일을 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분들이 이 운동을 통해 정말 좋은 경력을 쌓았음에도 결국 그렇게 현장을 떠나는 것들이 너무 아쉬웠어요.
- 더는 경력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빨리 찾아오는 거죠.
저희 선배 그룹에서는 자신만의 전문 영역을 찾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제 또래와 그 이후부터는 그런 분들이 별로 없어요.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희생인 거죠. 가족들한테 제일 많이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또 주변의 많은 응원과 도움의 손길이었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8년 전에 저희 아들이 크게 아프면서 사실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히 금방 끝나겠지 생각했지만, 이런 시간이 8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평화누리의 관계자분들과 후원자분들도 그 시간을 함께 참고 견뎌주시고 이해해주신 거죠.
- 올해 2월에 출석하시는 높은뜻덕소교회에서 사회선교사 파송을 받으셨어요. 곁에서 보니까 이번에 사회선교사 파송을 받으신 것이 국장님께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셨던 듯합니다.
솔직히 처음 그 제안을 받았을 때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작년 11월인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담임목사님(오대식 목사)께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부르시더라고요. 목사님께서 ‘집사님이 하시는 일이 참 소중하고 또 한국교회로 봐서도 중요한 일인데 혹시나 생계 문제 때문에 힘들어서 포기하면 개인적으로도 아쉽고 또 높은뜻덕소교회로서도, 한국교회로서도 아쉬운 일이라 생각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전적으로는 못 도와드려도 조금이라도 계속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그 뒤에 사회선교사 파송 제안을 해주신 거죠. 고민이 되더라고요. 아무리 담임목사님이 그런 좋은 뜻을 가지신다고 해도 교회 전체가 반드시 그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교회 안에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분도 계실 테고요. 예민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또 에큐메니컬 교회 중에는 사회선교사를 파송하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한데 복음주의 교회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어느 정도 규모가 큰 교회에서 사회선교사로 파송받는다는 것의 무게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제대로 못 하면 안 좋은 선례가 될까 봐 우려도 됐고요. 열흘 정도 고민하고 결국 수락했습니다. 파송받는 날 예배 때 목사님께서 설교 때 이렇게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너무 늦게 파송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걱정과는 다르게 성도님들도 굉장히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사회선교사를 파송하는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도 계셨어요.
- 마침 성서한국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선교사 파송에 대해서 더 고민하고 일을 시작하고 있는데요. 복음주의 운동에 사회선교사 양성과 파송에 대한 생각을 더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성서한국도 올해 주요 사업 중에 사회선교사 파송이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광교산울교회가 헌신해주셔서 박득훈 목사님이 성서한국 1호 사회선교사로 활동 중에 계시고 올해에는 2호 사회선교사로 길가는밴드 장현호 님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가능하다면 좀 더 많은 분을 성서한국 이름으로 파송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 교회가 사회선교사 한 분을 온전히 책임지며 파송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여러 교회와 단체, 개인이 함께하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펀딩도 필요하고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지평이 넓어지려면 결국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 모든 운동이 그럴 테지만, 결국 사람이 길러지지 않으면 그 운동은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분들은 여전히 사회선교의 개념과 사회선교사가 하는 활동을 낯설게 느낍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엿새는 사회에서, 현장에서 부딪히며 살아가잖아요. 그리고 주일 하루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죠. 교회에서 위로도 받겠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고민을 함께 머리를 맞대면서 나누고 바꿔가기 위해 사회선교가 그 통로와 접점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노동 현장, 기후환경 문제, 장애인 이동권 등의 문제는 결코 멀리 있지 않잖아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인데 한쪽의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들리는 현실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같이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세상의 언어로 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에 사회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교회와 성도님들이 더 함께해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선교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누구나 접하는 문제에 대해 예수의 정신과 사랑으로 함께 연대를 이어가는 일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선교에 관심 있는 분들은 성서한국으로 연락해주세요. 함께 고민하며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선교사 파송을 받는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희석 국장님은 한동안 이야기를 잇지 못했습니다. 아마 오랜 시간 활동해오면서 김희석 국장님이 겪었던 어려움과 외로운 순간들이 스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그래도 교회의 배려와 지원이 국장님께 위로가 된 것 같아서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외롭게 각자의 현장과 일상을 버텨가고 있는 다른 동료 활동가들에게도 연대의 손길이 늘 함께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