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 1: 〈아웃사이더〉 창간호 “나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는다”

[379호 나의 최애들]

2022-06-07     박혜은

내 삶을 바꾼 건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무크지였다. 인생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없다”고 짧게 대답하지만, 인생 잡지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이내 할 말이 풍성해진다. “인생 첫 잡지는 〈새벗〉이었는데, 이렇게 시작한 잡지 덕질은 저널리즘을 전공하는 데 보이지 않게 영향을 끼쳤으며 … 블라블라….”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신 〈새벗〉을 밤낮 끼고 읽으며 무의식적으로 인생 방향과 정신세계가 형성됐다면, 내 돈 주고 정기구독을 시작한 거의 첫 잡지인 〈아웃사이더〉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겨우 잡지 한 권이? 응, 겨우 잡지 한 권이.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를 알아본다

2000년대 당시 내가 대학 1-2학년 때, 가장 진지하게 공들여 쓴 글들은 여자 선배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이었다. 그 내용은 대개 교회 공동체와 대학 선교단체 및 대학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와 불만 토로였는데, 또렷한 분별력과 지성을 가졌고 후배에 대한 애정마저 갖춘 선배 언니들은 내가 쓴 글보다 더 긴 글로 답장을 써주었다. 많은 순간, 선배 ‘오빠’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 후배가 되지 못했던 나는 남자 동기는 물론이고 남자 선배들과 때때로 불편한 갈등 관계에 처하곤 했다. 그런 밤마다 집에 돌아와 언니들에게 편지를 썼다.

언니들은 때로 날 대변해주었고, 내 편이 되어주었으며, 대화를 나눠주었고, 객관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길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던 중, 한 선배가 이런 도전을 했다.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지만,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공동체의 ‘대표’를 해서 구조적 문제와 문화를 바꿔보라는 조언이었다. “못 할 이유가 없잖아?”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표는 남학생, 부대표는 여학생, 총무는 남학생, 회계는 여학생으로 아름다운(?) 4분할을 이루고 있었다. 난 언니의 급진적 상상력에 깜짝 놀라버렸다. 읭? 학년 순서상 이제 공동체 대표는 열 명에 달하는 동기 남자 혹은 같은 학년의 복학생 오빠가 할 차례 아니던가. 그런데 나보고 대표를 해보라고? 부대표 아니고요? 더 이상 밤에 고뇌하지 말고, 낮에 네가 직접 주체가 되어 바꿔봐, 이런 깊은 속내였을 터.

후보 추천과 민주적 투표 방식이 체계적으로 돌아가던 몇십 명의 대학 조직 체계 속에서 누구도 나처럼 작고 여리여리하며(!), 어린, 무엇보다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군대를 갔다 와야 어른이지…) 대학 2학년생 여성을 몇십 명의 대학 조직을 이끌 리더십을 발휘할 ‘대표’ 후보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때, 선배 언니는 내가 2년간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충실히 훈련받았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근거를 논리적으로 정리해 날 대표 후보로 추천했다. 이외에 대표 후보로 추천된 여학생은 없었다. 복학생 오빠들과 동기 남학생들 사이에서.

언니의 그 급진적 상상력에 따른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밤은 또 고뇌로 채워졌다. 동기 남자들이라면 당연히 돌아오는(!) 순번에 따라 자연스레 대표를 맡아 공동체를 이끌고, 신입생을 받고, 엠티를 기획·진행하고, 회의를 주관했을지 모르지만 내겐 큰 결심과 설득이 필요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향해.

그 고뇌의 밤에 읽은 게 〈아웃사이더〉 창간호에 실린 ‘아웃사이더를 찾아서’라는 인터뷰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인권운동가 서준식을 만났다.

나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는다

‘맑스를 좇아 예수에 기대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는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중 한 명인 김규항이 쓴 글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찾아보는 인터뷰들 중 하나로, 이 글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당시 좋아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모두에게 이 인터뷰를 읽혔다. 이런 글을 혼자 볼 수 없어! (참고로, 〈복음과상황〉에 실렸던 인터뷰 중에도 그런 기사가 몇 있다. 이 연재 중 한 번은 꼭 언급할 것.)

사회주의자이면서 “맑스주의로 해결하기 어려운 인간의 도덕성이나 사랑 같은 부분을 예수에게 기대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이 경계인의 삶과 사상에 매혹되고 말았다. “하느님과 사회주의가 같이 갈 수 있다고 본다”(163쪽)라니. 이후에 복음주의 운동을 한다고 선교단체에서 일할 때, 아니 그 이전에 2000년대 초중반 대학 사회에서 운동권이 사그라져 가는 것을 목격한 한 명의 대학생일 때, 그러니까 운동하는 영성가로서 내 정체성을 규정하던 그때, 얼마나 자주 그의 세계로 들어가 길을 찾아보려고 애썼던지.

각설하고, 최초로 그를 만난 그 고뇌의 밤에 내게 다가온 계시는 인터뷰의 이 부분이었다.

질문_어머니가 강한 분이었다고 들었다. 선생의 비타협적 성격은 어머니 영향을 받은 건가.

대답_내가 조선인이란 걸 되새긴 게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일본인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한복 입고 김치 먹고 하는 걸 보고 소문이 났다. 놀림 받고 따돌림당하고 이유 없이 몰매를 맞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내게 어머니는 “숨길 필요 없다. 조선인이라는 게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후 나를 놀리는 아이들과 매일 학교 가서 싸웠다. … 중학교에 올라가선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대개 몰랐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지냈다. 그러다 3학년 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내는 게 부끄러워 웅변대회에 나가서 3천 명 앞에서 이야기를 해버렸다. 내 환경을 바꾸기 위해 내 몸을 던진 건데 그런 행동 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는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으면 우선 몸을 던져 내 환경을 바꾸면 자연스럽게 내 의식도 바뀐다. 몸을 던지지 않고 그런 변화를 가져오기는 대단히 어렵다.

―〈아웃사이더〉 창간호, ‘맑스를 좇아 예수에 기대어’, 148쪽.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는다고? 환경을 바꾸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게 먼저라고? 태초에 말씀이 계신 줄로만 알았던 나 같은 모태신앙인에게 저 문장은 (그래, 카프카가 친구에게 썼다는 그 표현대로) 도끼가 되어 내 생각을 쪼개버렸다. 밤마다 가부장적 집단 조직과 군대 문화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 대해 ‘말’할 줄만 알았고,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므로 예배의 중심은 ‘설교’라고 굳게 믿었으며, 말하고 듣는 일만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믿는 세계에서 안온하게 터를 잡고, 그저 변화하지 않는 사람과 세상에 쉽게 절망했던 유약한 인물에게 다가온 저 한 문장.

1948년 재일교포 2세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조선놈’이 되기 위해 서울대 법대로 유학 온 서준식은 1971년에 이른바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7년 형기를 살고,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10년의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했던 양심수였다. 1988년에 사상 전향을 하지 않고 처음으로 석방된 비전향 좌익수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인권운동사랑방을 이끌어온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런 서준식 선생님과 아무 접점이 없을 것 같던 한 명의 대학생은 그 밤, 그 문장을 사이에 두고, 그와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재일조선인 소년이 자기 환경을 바꾸기 위해 몸을 던진 방식이 2000년대를 사는 한 여성의 삶에 침투해 이후 삶의 방식을 바꿔버린 밤이기도 했다.

아마 난 저 문장을 공동체 사람들 앞에서 읽은 듯하다. 몸을 던지지 않고 변화를 가져오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내가 제기했던 문제들과 나만 볼 수 있는 문제들을 누구도 대신 바꿔줄 수 없으므로 난 조금이라도 조직의 모순을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 어린(!) 여학생은 대표가 되었고, 한 학기 동안 처참한 실패와 갈등을 겪으며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고, 누구도 자연스레 쥐여주지 않았던 ‘실패할 기회’를 거머쥐었다. 이 지면에 다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순간에 나는 이 원형의 경험을 반복했고, 무수히 실패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이 되어갈 기회들을 획득해나갔다.

최호철의 그림 〈을지로순환선〉

헌책방 서가에서 만난 〈아웃사이더〉

5월 어린이날을 전후한 연휴를 맞아 가족들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으로 나들이를 갔다. 마침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이라는 소장품 상설전이 진행 중이었다. 긴 시간을 들여 1900년대 초부터 2020년에 이르기까지 120년의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을 감상하던 중, 전시의 거의 마지막 순서인 2000년대 중반 이후 ‘일상과 대중문화’ 섹션에서 〈아웃사이더〉 창간호 부록으로 붙어있던 최호철의 그림 〈을지로순환선〉을 만났다. 〈최호철의 생활그림1 - 을지로순환선〉이라는 제목으로 잡지 맨 뒷장에 접혀있던 이 긴 그림을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마주하며 그 앞에 오래 서있었다.

이 글을 쓰려고 몇 달간 〈아웃사이더〉 창간호를 마음에 품고 지내서였을까.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 내내 20여 년 전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전율이 느껴졌다. 어느 한 시절 텍스트와 잡지 디자인과 부록으로까지 감동케 하며 내 삶을 관통했던 잡지에 붙어있던 그 예술 작품이 이제는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소장품이 되었구나, 생각하며.

그날 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1995년생 동료에게 최호철의 〈을지로순환선〉 작품 사진을 보냈다. 이 그림 기억하느냐는 메시지와 함께. “네ㅋㅋ 그림 끼워져 있던 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느 날 내가 일하는 헌책방 서가에서 일련의 〈아웃사이더〉가 창간호부터 8호까지 입고되어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내 오랜 친구를 소개하듯 〈아웃사이더〉 창간호를 꺼내 95년생 동료에게 권했다. “놀라운 잡지야.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디자인에 관심 있는 네가 읽으면 좋을 것 같아. 랭보 이야기와 힙한 잡지 디자인을 볼 수 있거든. 무엇보다 헌책인데도 부록까지 온전히 살아남은 2000년 잡지가 겨우 3천 원. 안 살 이유가 없잖아? 부록으로 붙은 이 그림부터 이 안에 실린 인터뷰까지 모두 나의 최애”라며 영업했다. 영업을 가장해, 20대 여성 동료에게 숨은 보물을 선물하고 싶었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어보자, 그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열망으로.

그렇게 우리 헌책방 서가에 꽂혀있던 〈아웃사이더〉 창간호는 1995년생이 가져가고, 2호와 4호는 2000년과 2001년 생년문고에 넣어 당시 비정기 간행물을 상징하는 잡지로 큐레이션했다. 5호 혹은 6호는 ‘디자인이 멋진, 역사가 생생히 숨 쉬는, 오래된 잡지’라는 주제의 랜덤박스로 큐레이션해 시민들에게 소개했다. 내 삶을 바꾼 잡지를 오랜 시간이 지나 일터인 헌책방 서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다른 동료 시민에게 건네고 있으니,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은 헌책의 신비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아웃사이더〉 2000년 창간호는 이런 글로 시작한다.

모든 새로운 것이 다 그렇듯 《아웃사이더》 역시 몽상에서 출발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9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이른바 전투적인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들이 힘을 모으는 잡지가 있으면 좋겠구나, 그게 가능만 하다면 세상에 참 유익하겠구나, 혼자 생각했던 게 《아웃사이더》의 시작이었다. 한 사람의 몽상은 이내 네 사람의 열정과 신념이 되었다. … 《아웃사이더》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꾼다. 좌파든 우파든 혹은 다른 어떤 생각을 가진 이든 나름의 생각을 분명하게 펼치고 공정하게 경쟁함으로써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세상을 《아웃사이더》는 꿈꾼다. … 《아웃사이더》의 목표는 번창이 아니라 쇠락이다.

―〈아웃사이더〉 창간호, ‘아웃사이더를 세상에 내놓으며’ 중에서

전투적인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들이 힘을 모으면 세상에 참 유익하겠구나, 라고 생각한 사람의 몽상이 네 사람의 열정과 신념이 되었고, 이것이 혼자 고뇌의 밤을 보내던 어느 대학생에게 도착해 ‘서준식’이라는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인권운동가의 신념이 그 대학생의 삶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으니, 어떤 종류의 신비는 이미 20년 전부터 시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

이 글은 〈아웃사이더〉라는 잡지 창간호에 대한 나의 애정 어린 헌사이자, 서준식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인트로다. 이 연재가 ‘나의 최애들’, 그러니까 풀어 설명하자면 ‘나의 최애 작가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번 글에서만큼은 한 무크지의 창간호가 그 대상이 된 셈이다. 그래서 다음 글은 본격 서준식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행동이 있었다고 믿고 살아낸 서준식의 이야기를.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모든 글쓰기는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는다.”(서준식, 《서준식의 생각》)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