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훌륭하다
[379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개는 훌륭하다
〈개는 훌륭하다〉는 ‘개통령’ 강형욱과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경규, 장도연 등이 출연해 ‘고민견’을 상담하고 교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물 전문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이를 보면서 인간과 반려견의 동거에 필요한 유용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특히 강형욱은 단순 조련이나 동물행동 교정 그 이상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에게서 감탄을 자아낸다.
인상 깊은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강형욱이 통역해주는 개의 언어와 소통 방식,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문제의 원인이 반려견이 아닌 보호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선, 반려견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개를 이해해야 한다. 강형욱은 고민견을 유심히 관찰하고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마치 빙의(?)라도 한 듯 고민견의 마음을 보호자에게 알려준다. 고민견의 눈빛·소리·동작, 심지어 공간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강형욱은 개의 언어를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해주는 통역사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개의 세상을 잘 알지 못한다. 왜 짖는지, 왜 우는지, 왜 폭력적인 행동이나 입질을 하는지, 이면에 담긴 의미를 선뜻 알지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야 알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을 하겠지만, 개와 인간의 언어는 엄연히 다르다. 개의 언어를 익히고 배워야 개와 소통할 수 있다. 물론 개도 인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때로는 보호자의 과도한 애정이 개를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문제견’으로 만든다. 문제의 원인은 반려견이 아니라 보호자인 경우가 대다수다. 엄밀히 인간과 반려동물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보호자와 반려동물의 관계이다. 반려견을 자연 상태로 규정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적어도 인간과 반려견의 관계에서 책임은 보호자에게 있다.
관찰: 텍스트 중심의 기독교 문화 담론을 벗어라
기독교 대중문화 논의와 〈개는 훌륭하다〉가 무슨 상관일까?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하나는 교회가 대중문화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국 교회가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문화의 사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가 유독 대중문화를 적대적이거나 도구적인 방식으로 대해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지난 글(2022년 5월·378호 참고)은 우리(한국교회)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아직도” 니버의 다섯 가지 유형으로만 구분하고,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분석했다. 마치 기독교와 문화라는 두 영역이 칼로 무 자르듯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성질을 가진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독 문화적 혼종성(hybridity)을 꺼리는 현상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대중문화 변용은 ‘반-대중문화 운동’을 거쳐 아직 ‘문화선교’ 수준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대중문화를 악한 것으로 보거나 도구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로 요약될 수 있다.
두 태도는 모두 ‘텍스트’ 중심으로 대중문화를 분석해왔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어떤 대중문화가 가진 의미(메시지, 관념)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에만 유독 집중해왔다는 말이다. 그 텍스트가 ‘기독교적 메시지’와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기독교적 메시지와 어긋난 작품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심지어 반대 운동을 벌인다.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좋은 평가를 하고 주변에 적극적으로 권장하거나 심지어 교회 단위의 단체 관람도 장려한다.
이런 텍스트 중심의 대중문화 분석은 대중문화가 가진 다양한 맥락과 메시지, 수용과 소통의 과정을 축소하고, 단지 ‘기독교적 메시지인가 아닌가’에만 매몰돼 좁고 왜곡된 평가를 하게 만든다. 대중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비하려면 먼저 ‘대중문화’라는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대중문화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생산·소통·수용되는지 입체적인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통역: 대중문화의 언어를 습득하라
대중문화의 구성 요소는 크게 텍스트, 콘텍스트, 그리고 수용자로 나뉜다. 먼저 텍스트는 우리가 가장 쉽게 이해하는 부분이며 어떤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 의미, 혹은 메시지를 말한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메시지도 있으며, 간접적인 메시지도 있다. 의도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비의도적 메시지도 존재한다. 대중문화 특성상 메시지는 미디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재현되고 전달되는데, 이 과정에서 매체의 특성이나 저자(창작자)의 숨은 의도나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의미 등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종종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표현의 의미를 오해하곤 한다. 그는 이 문장을 통해 대중매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텍스트와 함께 매개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전달하는 바가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다. 어떤 매체를 활용했느냐에 따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재현과 수용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메시지를 장난기 가득한 소년이 말할 때와 짙은 주름이 인자한 미소를 띤 할머니가 말할 때는 사뭇 차이가 난다. 어떤 미디어로 재현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메시지(텍스트)도 달라질 수 있다. 언어적 표현과 시각적 표현이 다르고 음악과 미술의 표현 방식이 다르듯이, 다양한 대중매체의 속성에 따라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르게 재현되고 수용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의 경우, 여러 영역 중 유독 음악이라는 장르가 발전했는데, 이 또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콘텍스트이다. 좁게는 문화상품이 만들어진 제작 환경을 말하고, 넓게는 시대적·사회적 맥락이 포함한다. 특별히 우리가 소비하는 대중문화 상품 대다수는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사고파는 상품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텍스트 중심의 기독교 문화 담론 방식에서 종종 간과하는 부분이다. 물론 대중문화의 탄생을 이념이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대중문화 비평은 자칫 또 다른 문화전쟁 프레임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문화 영역은 인간의 모든 인식과 행동의 집약체이며, 지속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한 영역이다. 대중문화가 만들어지는 콘텍스트는 의도·입장·집단·견해·정치·경제·체제 등 복잡한 이해관계 가운데 존재한다. 그중 소비자본주의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가장 강하고 분명한 콘텍스트로 작용한다. 대중문화는 근본적으로 상업적이며, 사고파는 소비 상품이자, 가능한 많은 소비자(대중)의 의식과 선호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대중문화가 상품이라는 관점은 대중문화의 세 번째 요소인 수용자 역할과도 연결된다. 대중문화의 수용자를 지칭하는 용어는 독자·관객·시청자·참여자·사용자 등 다양하다. 여기서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소비자라는 점이다. 대중문화를 문화상품과 소비자의 관계로 보는 태도는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잣대로 문화를 분석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돕는다.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과잉 정치화된 경향이 있다. 어떤 문화를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이념적인 잣대로 해석하려는 방어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런 시각은 정작 현실에서 막강한 권력과 체제로 군림하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나 폐해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도록 만든다.
대중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창작자가 주로 대규모 자본을 가지며 상업적 목적으로(이윤을 남기기 위해) 문화상품을 제작한다는 데 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와 분리할 수 없는 속성을 갖게 된다. 심지어 언론사도 저널리즘이라는 고유하고 공적인 목적과 사명을 갖지만, 동시에 뉴스나 신문이라는 상품을 사고파는 비즈니스의 속성을 갖는다. 이는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다.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상업적 속성을 가지며, 그 결과 소비자인 대중의 취향과 선택을 따르는 경향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문화는 대중의 사회적 인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야 많은 사람에게 팔리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집단적 의식의 경계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교재이며 시각화된 기표와 같다.1)
그러나 우리를 소비자로 보는 관점은 우리 자신을 수동적인 역할로 제한한다는 단점을 가진다. 대중매체는 특성상 제작자와 소비자가 정해져 있고, 일방적 소통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이런 한계 속에서 소비자로서의 기독교 운동 방식은 주로 언론과 매체를 감시하고 비판하거나 특정 문화상품을 불매하는 등 소비자 운동에 머물렀다. 하지만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고 제작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양방향을 넘어 다방향 소통이 가능해진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역할은 단순히 소비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용자로 진화하고 있다.
솔루션: 검열과 속박을 벗고 문화의 향유자로
앞서 대중문화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면, 이제는 문제 해결 책임이 대중문화 자체에 있다는 시각을 넘어, 그것을 향유하는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논의를 위한 질문은 ‘한국교회는 누구인가?’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로 ‘이 대중문화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독교적인가 반기독교적인가’를 구분하고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이런 접근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로 보는 소위 ‘분리주의형’으로 이해하는 태도와 유사하다. 이는 기독교를 선하고 거룩한 문화로 여기는 반면, 세속문화는 악하고 타락한 문화로 상정한다. 따라서 대중문화를 반기독교적인, 부정한, 유혹하는 혹은 타락하게 하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치부한다. 대중문화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로 이해하는 ‘영적 전쟁’이자 그 싸움 영역이 문화로 이동했다는 ‘문화전쟁’ 프레임이 그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은 유독 세속문화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을까? 첫째, 한국 개신교가 19세기 이후 청교도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청교도 경건주의의 특징은 회심에 따른 금욕주의적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구한말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인 선교사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교회와 사회를 분리하여 접근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개인 경건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둘째,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떠올릴 수 있다. 냉전은 이념에 따라 피아(彼我)가 분명하게 구분되던 시대이다. 이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보는 영적 전쟁 프레임과 유사한 연결 고리를 가진다. 특히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집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념과 신앙의 구분이 모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권 체제에 들어서자 이념은 하나의 통치 방식으로 작동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수많은 시민에게 씌워진 죄목은 빨갱이·간첩·사상범 등이었다. 이 시기, 교회의 경건은 더욱 정치와 사회에서 멀어진 사적 영역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2)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문화 담론은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경향과 세속 사회로부터 분리된 교회 안의 사적 신앙과 경건의 형태로 발전돼왔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비록 일부이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종북 게이’라는 표현은 냉전체제와 문화전쟁 프레임이 절묘하게 섞인 개념이며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 통용되는 집단적 분단 트라우마의 상징과도 같다.3)
이제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문화를 바라볼 때 이분법적이고 적대적이며 단 한 개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무의식적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문화가 가진 창의적이고 풍부한 속성들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다. 대중문화(예술도 마찬가지)는 판단이나 분석보다 감상과 향유가 먼저여야 한다. 이성과 합리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의미를 전달하고, 인생의 본질과 궁극적 질문들을 떠오르게 하는 경험이 대중문화를 통해 체득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 안에 내재한 정형화된 검열과 비판의 잣대를 거두어야 한다.
하나의 기독교 세계관?
여기서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바로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인가?’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적 관점’이란 하나의 일치된 견해인지 아니면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기독교 문화 담론은 시대에 따라 유지되기도 수정되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초대교회 신학과 결코 같을 수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 신학은 중세 교회의 신학적 체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일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신학은 근대 계몽주의 사상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통시적 관점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같은 시간 안에서의 기독교 담론은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게 적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종교사회학에서 주로 다루는 세속화 이론은 서구 사회에서나 지성 사회에서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종교 전통이나 배경이 강조되는 국가나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국가권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민주적이고 자본화된 나라인가, 종교와 권력의 유착이 심한 독재국가 상황인가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당대 상황에 따른 분석과 판단력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라도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의 동일한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과 전통에 속해있다. 대표적인 예는 성별과 집단이다. 한국교회 내 세대 갈등 혹은 통합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된 주제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진다. 한국의 기독교적 문화관은 하나로 동일한가? 그렇다면 그 기준은 누가, 무엇에 의해 정해진 것일까. ‘성경적’이라는 가치는 기독교 정체성을 타 집단과 구별하는 중요한 근원이 되지만, 그 텍스트의 해석 역시 다양하다.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기독교적 문화관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일반적인 원칙이나 공유하는 개념은 가능하지만, 세부적인 입장 차이는 부인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다양성은 풍부함이고 살아있다는 뜻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대중문화를 정의·경제·평화·젠더·세대 등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적용은 조금씩 달라진다. 보고 듣고 읽는 이의 관점(관심)에 따라 문화 텍스트 해석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창작자의 의도(메시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이 창작자의 의미보다 더 중요하며, 문화는 그렇게 풍성해진다. 이를 인정한다면, 기독교 문화 담론은 ‘이 텍스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와 함께 ‘이 텍스트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왜 기성세대에게는 당연한 문화가 젊은 세대에게 불공정한 것이 될까? 다양한 문화 수용자에 대한 연구가 힌트를 제공할 수 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문화를 재단하는 태도는 문화의 풍부함을 쪼그라뜨린다. 입체적이고 총천연색으로 이뤄진 세상을 흑백의 평면 세상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비판적 관점은 모든 집단과 계층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대중문화를 하나의 관점으로만 (그것이 정의·경제·젠더 등 무엇이든)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태도는 창작자 의도를 왜곡할 뿐 아니라, 창작자와 수용자의 다양한 역동을 훼손할 수 있다. 그동안 쉬쉬하며 말하기를 주저하고, 생각하기를 주저하게 했던 교회 문화는 어쩌면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고 본 오랜 습관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개는 훌륭하다, 문화도 그러하다
처음 〈개는 훌륭하다〉라는 제목을 보고는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문제견’의 동물행동 교정 프로그램인데 개는 훌륭하다는 제목이 모순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개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훌륭하다. 개의 언어와 습성을 잘 이해한다면 개는 언제나 보호자와 가족에게 ‘사랑’으로 보답할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친구로서 개의 유전자에 심어진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반려견은 보호자의 어떠함을 따지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친밀함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개통령 강형욱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모든 개는 훌륭합니다. 그러니 반려견의 언어를 배우세요. 그래야만 개와 인간의 동거가 가능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의 반려견은 언제나 당신의 충성스러운 반려동물이 되어줄 것입니다.”
반려견과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유비할 수 없겠지만, 그 맥락을 차용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은 역시 독자들 몫이다.
“대중문화는 훌륭합니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향유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 그러니 대중문화의 언어를 배우고 우리의 편협한 잣대를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대중문화는 당신에게 수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이 세상을 알아가는 길의 소중한 안내자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민민의 한마디
지난 글은 한우, 이번에는 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생귄님 글을 읽으며, 그래도 예전에 비해 많은 기독교인이 대중문화를 읽고 소비하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상상을 해봤습니다. 물론 늘 그렇듯 상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지만요. 어쩌면 기독교 내 대중문화 소비 인구 비율보다 더 심각한 것은 생귄님 이야기처럼 해석 능력의 부재일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가치관에 근거한 문화적 산물 역시 기독교적으로만 해석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조악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로버트 영이라는 후기식민주의 학자는 ‘문화 번역’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의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결이 조금은 다르지만, 이는 대중문화 안에 담긴 문법을 기독교적 세계관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결론은 ‘우리는 개의 말을 배워야 한다’일까요?
1) 이런 대중문화적 속성은 매체의 다변화와 개인화에 따라 점차 세분화되고 계층화되고 있다. 더 이상 대중이라는 동일한 집단이 존재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개인화되어 있고, 각각의 취향에 따라 분절되어 있다.
2) 물론,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외치던 그리스도인들의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된다.
3) 서명삼은 이러한 연결 고리에 극우주의적 개신교 집단이 자리한다고 말했다.
김상덕(생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언론사진의 역할에 대한 공공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의 문제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회의 공적 역할과 다양한 창조적 실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커피를 좋아하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미술 작가인 아내(민정See)와 평범한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학교 강의와 글쓰기, 방송 및 유튜버 등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