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만들다 ― 아일랜드 수도회, 베네딕트회

[379호 수도회, 길을 묻다]

2022-06-06     최종원

수도회의 시대

중세 유럽은 게르만 민족이동으로 형성되었다. 독자 문명이 없는 이주민인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중세가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간편하게는 로마 교황에게 그 공로를 돌릴 수 있다.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과 별개로, 유럽의 지형도를 들여다보면 그리스도교가 유럽인들의 삶 속에 스며들기 쉽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우선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 로마는 알프스산맥이라는 거대 자연 장벽으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심지인 독일, 프랑스, 영국과 서로 소통하기 쉽지 않았다. 교황의 영향으로 유럽 왕국들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했지만, 그것이 곧 그리스도교 문명의 계승과 확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럽 문명은 교황청이 있는 로마나 프랑크왕국의 중심 도시가 주변부를 흡수하기보다는, 주변부가 확장해 중심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서유럽의 그리스도교화를 구현하는 실마리는 남부 로마가 아닌 유럽에서 떨어진 섬 아일랜드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가톨릭이 로마로부터 잉글랜드에 전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독자적인 켈트 영성을 형성했다. 이 켈트 기독교는 중세 초기 유럽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남유럽에서 시작된 베네딕트 수도회가 그 역할을 계승하여 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의 기반을 놓았다. 수도사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 초기, 지역으로 보자면 아일랜드가 단연 그 중심에 있었다. 중세 형성기인 7-11세기를 베네딕트회의 시대라 한다. 아일랜드에서 시작해 브리타니아를 거쳐 대륙으로 남하한 아일랜드의 영성과, 남유럽에서 형성되어 북진한 수도회 전통은 아래로부터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만들어온 두 축이 되었다. 중세를 로마가톨릭교회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아일랜드 수도회, 켈트 영성을 빼고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해하기는 충분하지 않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두 수도회 전통이 빚어낸 역동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한 이유이다.

아일랜드, 성인과 학자의 섬

‘성인과 학자들의 섬’이라는 문구가 고대 아일랜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1) 아일랜드 그리스도교는 잉글랜드 출신 성 패트릭(c.385-c.461)의 선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는 그리스도교 초기 형성기에 헬라 문화권 선교사들이 무역로와 군사로를 따라 잉글랜드로 이주하여 형성되었다. 고대 영어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민스터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모나스테리온에서 파생되었다. 오늘날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의미하는 고대 브리타니아에서 교회는 곧 수도회를 의미했다. 교회와 수도회 공동체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브리타니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엄격하고 금욕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의 지형적인 영향도 있다. 브리타니아에서 아일랜드로 건너간 그리스도교는 아일랜드 문명 형성의 중심 역할을 했다. 지형 특성상 큰 도시가 형성되지 못하고 고립된 산악 지대 곳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수도원은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심지였다. 돌로 쌓은 성벽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교회와 수도사들의 거주 공간 및 외부 방문객들을 위한 숙소 등으로 구성되었다. 수도원은 수도원장이 가부장적으로 관리하는 자치 공동체였다. 엄격한 수도회가 교구의 사목 활동을 하다 보니 처음부터 더욱 금욕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났다.

수도회의 삶과 재속의 삶을 연결하자 켈트 수도회가 강조한 금욕에 대한 더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해졌다. 수도회의 삶은 참회 고행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나타났다. 켈트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땅의 욕망을 버리고 순례하는 순례자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들은 정주 공동체가 아닌 이주 공동체를 지향했다. 아일랜드의 산속 공동체에 머물지 않고 아이오나섬을 거쳐 스코틀랜드까지 확장되었다. 스코틀랜드 전통과 문화는 아일랜드에서 건너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스코틀랜드의 켈트 그리스도교가 잉글랜드로 내려왔고, 다시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심에는 스코틀랜드 서안의 작은 섬 아이오나가 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이어주는 지리적 교두보인 아이오나는 성 콜룸바(521-597)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선교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아일랜드 망명객이었던 콜룸바는 563년, 12명의 동료와 함께 아이오나섬으로 들어가 수도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로부터 약 60년 후 이 수도회는 내륙을 가로질러 확장되어 노섬브리아(오늘날 요크-더럼-에든버러까지 이어진 지역)의 린디스판까지 확장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비롯한 켈트 영성이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와 노섬브리아 지역까지 촘촘하게 연결되었다.

켈트 수도회는 선교를 중심으로 하는 이주 공동체를 형성했고 동시에 고대 로마 문명의 담지자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브리타니아는 유럽 내에서 드물게 고대 로마 문명의 자취를 간직한 지역이었다. 수도회는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 문헌들을 연구하는 학교의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였다. 라틴 신학의 중심지였던 북아프리카가 이슬람 서진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상황에서, 아일랜드의 켈트 수도회는 고대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문명을 계승, 발전시킬 중심으로 떠올랐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고대 교부들 저작을 필사하고 화려하게 채색하여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승화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켈스의 서》(Book of Kells)이다. 성 콜룸바 수도회 수도사들이 8세기경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채색 성서는 아일랜드가 꽃피운 그리스도교 문명의 정수이다. 이 문명과 학문의 전통은 켈트 수도회를 통해 노섬브리아 지역으로 이어졌고, 노섬브리아는 유럽 초기 그리스도교 문명의 결정적인 시기를 형성했다.

《 켈스의 서》 일부.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노섬브리아 출신의 베네딕트 비스코프(628-690)는 잉글랜드에서 학교를 설립하는 교육 사업에 힘쓰다,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재로(Jarrow)에 수도원을 지었다. 이 수도원 출신으로 가장 명망 있는 학자는 존자 베다(Venerable Bede, c.673-735)이다. 그는 중세 초기 잉글랜드 교회사를 저술한 역사가인 동시에, 여러 권의 성서 주석과 역사서를 남긴 학자였다. 잉글랜드는 지리적으로 프랑크왕국이 중심인 유럽 세계와 한참 떨어져 있었다. 노섬브리아는 아일랜드 켈트 그리스도교와 연결될뿐더러, 로마에서 시작된 가톨릭이 북진하면서 가톨릭과의 접촉도 이루어져 서로 다른 두 그리스도교 전통이 만나는 장소였다. 같은 그리스도교이지만 상이한 전통을 지닌 두 문명의 조우는 긴장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664년 휘트비 교회회의이다. 이 교회회의에서는 서로 다른 부활절 날짜 등 켈트 그리스도교와 로마 가톨릭 전통의 차이를 조율하고 통합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노섬브리아 통치자 오스왈드가 로마 가톨릭 전통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켈트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로마 가톨릭에 스며들게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이 승리를 차지한 듯 보이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잉글랜드 수도사들이었다. 이 회의 결과, 켈트 전통에 따른 수도회와 학교들이 가톨릭 중심의 유럽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었고, 노섬브리아 출신 수도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베다가 활동한 노섬브리아는 유럽이 간직한 로마 문명의 중심지라는 평가를 받았고, 성격이 다른 두 문명의 접촉은 하이버노-색슨(Hiberno-Saxon) 양식이라는 독특한 전통을 만들었다.

노섬브리아의 명성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유럽 대륙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요크의 앨퀸(Alcuin, c.735-804)이다. 앨퀸은 유럽 대륙 프랑크왕국의 통치자 카롤루스 마그누스에게 초청받아 그의 궁정이 있는 아헨에서 교육개혁을 실행했다. 프랑크왕국의 통치자들은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그리스도교의 가치 아래에서 왕국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수도회에서 시작한 그리스도교 문명이 세속으로 확장되어 왕궁이 그리스도교의 지식과 문명을 발전시키는 중세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한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지역은 로마가 아닌 잉글랜드 노섬브리아였다. 782년 노섬브리아 수도사 앨퀸을 궁정 교사로 임명하여 프랑크왕국의 교육정책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요크 성당학교의 책임자로서 라틴어와 문법과 수사학을 가르쳐 대중 교양 교육을 실행한 경험이 있던 앨퀸은 카롤루스의 교육개혁을 향한 이상과 맞아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앨퀸은 교양 교육의 기초로 3학(문법·수사·논리)과 4과(산수·기하·음악·천문)를 정했다. 이 3학 4과는 12세기 이후 형성된 대학(우니베르시타스)의 기초 교육과정으로 채택되었다. 교육이 그저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데 머물기보다 국가의 관료와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적 발명품 하나가 카롤링 서체라고 불리는 표준 라틴어 서체 개발이다. 라틴어의 등장 이래 1600년 만에 통일된 서체가 없던 때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쓰고 읽을 수 있는 표준 소문자 모델이 만들어졌다. 라틴 유럽을 하나로 묶는 데 공헌한 매개물도 물론 이 서체였다.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넘어 대중의 교육과 교양 수준을 높이려는 카롤루스의 시도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9세기 교육혁명을 성취했다. 카롤루스는 자신들의 문화적 토대인 게르만의 가치 위에 그리스도교를 융화하여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문명을 형성했다.2) 잉글랜드에서 건너온 수도사들은 카롤루스의 뜻을 실현하는 지적 토대요 자산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럽의 라틴 그리스도교 문명의 한 축은 변방 아일랜드에서 출발하였다.

유럽의 수호성인 베네딕트

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을 이루어낸 또 다른 축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출발한다. 브리타니아에 성 콜룸바 수도회가 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을 만들어갔다면, 이탈리아 누르시아 출신 성 베네딕트(c.480-c.550)가 만든 수도회가 전 유럽으로 확장되었다.

베네딕트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스도교 중심지인 로마에서 목격한 부도덕과 종교적 냉담함에 크게 실망한 그는 수비아코 인근의 한 동굴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529년, 그의 나이 50을 넘겼을 무렵 이탈리아 남부 몬테카시노로 이주하여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 생을 마치고 묻혔다. 그의 사후 수도원은 롬바르드족 침입 때 파괴되었다. 그가 설립한 수도 공동체의 직접적인 전통은 끊어졌다. 흔히 베네딕트회라고 할 때 특정한 수도원을 떠올리기 쉽지만, 베네딕트라 이름한 수도원들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수도원이라도 베네딕트가 마련한 회칙을 따르면 베네딕트회라고 부른다. 오늘날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연상하는 기도, 노동, 학습 공동체로서의 수도회가 베네딕트회가 내세운 정신이다.

하지만 베네딕트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심지어 그가 만들었다고 한 회칙 역시도 독창적인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시 다른 여러 수도원에서 활용되던 회칙을 기반으로 했다. 그럼에도 베네딕트는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작성했다고 알려진 회칙이 서방 수도회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대교황 그레고리오(재위 590-604)의 역할이 크다. 교황은 593년 《성 베네딕트의 생애》(국내 번역서 제목은 《베네딕도 전기》이다. ― 편집자 주)를 저술한다. 이 책을 통해 죽은 지 45년이 지나 잊힌 베네딕트와 그가 남긴 회칙이 다시금 생명을 얻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가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그는 잉글랜드 선교를 위하여 캔터베리 대주교 아우구스티누스를 파송했던 인물로,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를 향한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그에게 베네딕트는 어떠한 영감을 주었을까? 베네딕트의 출생 시기는 서로마 멸망기와 정확히 겹쳐있다. 고대 로마의 문명과 사상이 끝 모를 심연으로 빠져들던 때다. 제국과 황제를 대체하는 역할을 맡은 가톨릭교회와 교황은 그리스도교를 통한 로마 문명의 계승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떠안았다. 어쩌면 희망을 잃어버린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희망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을 그레고리오는 느꼈는지 모른다. 그는 베네딕트가 실천했던 수도사의 삶을 해답으로 찾았다. 그레고리오가 복원해낸 베네딕트는 무너진 제국의 윤리와 도덕에 실망하여 수도 생활의 가치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 또한 그레고리오는 베네딕트가 남긴 회칙에 주목했다. 그 회칙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게르만 유럽 문명을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모두가 따를 수 있는 표준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했다. 베네딕트 회칙을 그 기준이 되는 전통으로 삼았다. 베네딕트는 이집트로부터 시작된 수도회의 가르침을 자신들에게 맞게 적용하여 이 회칙을 작성했다. 베네딕트 회칙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금욕적인 닫힌 세계와 열린 현실 세계 사이의 균형감이었다. 베네딕트회는 일부 수도사나 수도회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으며, 기도와 노동의 균형 잡힌 생활을 통해 종교적 헌신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적 기여를 추구했다.

베네딕트 회칙은 긴 서문과 73개 장으로 구성된 수도 생활 지침이다. 베네딕트는 가혹하지 않은 약간의 엄격한 규칙을 마련하여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려는 자들의 삶을 도우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이집트의 수도원이나 아일랜드와 브리타니아에서 나타난 엄격한 금욕적인 전통에 비해 훨씬 더 완화되었다. 이 규칙을 신뢰하고 따라갈 때 수도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을 약속하고 있다. 서문에는 수도회를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로 표현하고 있다. 스콜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나타낸다. 첫째는, 가르치고 배우는 학습 공동체이다. 수도회는 기도와 노동, 그리고 학문의 공동체였다. 중세 유럽에서 글을 깨친 문해자의 90% 이상이 수도회 출신일 정도로 수도회는 중세 초 문명의 암흑기를 밝히는 작은 촛불과 같았다. 둘째는, 스콜라는 그리스도교를 방어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는 군대를 의미했다. 스콜라는 로마시를 방어하던 특수부대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기도와 묵상, 학습 등을 통한 훈련을 받는 공동체가 베네딕트회가 지향하던 가치였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의 삶의 수준은 이집트 은둔 수도사들보다는, 하루 한 끼는 먹을 수 있는 이탈리아 농민에 더 가까웠다. 회칙에는 금욕적인 삶의 유익을 열거하면서,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순종과 겸손을 강조했다. 이는 모두 학교나 군대의 운영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와 같은 실천 가능성이 베네딕트회가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베네딕트회는 597년 베네딕트회 선교사가 잉글랜드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장되었으며, 독일·덴마크·아이슬란드 지역으로 넓혀나갔다. 베네딕트의 규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유연한 통찰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최초 등장 후 현재까지 1,500년 이상 이어질 수 있었다. 베네딕트회가 추구한 기도, 노동, 학습 사이의 균형은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덕목이다. 완화된 수도회 정책이 오·남용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도 필요했다.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하는 이들은 며칠 동안 자신의 선택을 재고할 기회를 준다. 그 후 정식으로 수도회에 들어오기까지 1년간 견습 수도사 생활을 한다. 이 과정을 마친 후에 모든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사는 청빈, 독신으로 사는 정결, 수도회의 규칙에 순종하는 순명을 약속하는 수도 서약을 한다.

기도, 일, 예배, 독서, 학습 등으로 구성된 성무일과(opus dei)는 촘촘하게 짜여있다. 그중 베네딕트회가 추구하는 가장 앞선 가치인 기도는 다른 말로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한 침묵이다. 필요 없는 말이나 헛된 농담이 금지되었다. 침묵을 무조건 강제하지는 않았지만 수도사들은 가능한 한 말을 적게 하고, 엄격한 침묵을 지키라고 권고받았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강조는 베네딕트회 수도원들이 재정 자립과 맞닿아있다. 맥주나 포도주 제조 기술이 중세에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필요한 대규모의 인력을 조달할 수 있어서였다. 양조장 하나를 운용하는 데 100명 가까운 인력이 필요했다. 학습 시간인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는 수도회 내 교육을 통해 고전을 보전하고 그리스도교 학문을 발전시켜 나가는 역할을 했다.3)

아일랜드 브리타니아의 수도회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유럽의 수도회들이 베네딕트회를 중심으로 재편된 사건은 베네딕트 회칙이 지닌 균형과 실행 가능성의 덕이 크다. 8세기 초에 잉글랜드 수도사들은 성 콜룸바 회칙이 아닌 베네딕트 회칙을 수용하기로 선언했다. 그리고 816년에 열린 아헨 교회회의는 베네딕트회를 프랑크왕국 내의 유일한 정식 수도회라고 선포했다. 콜룸바 수도회칙에 비해 온건한 회칙을 표준으로 수용해, 수도 공동체는 종교적 이상과 금욕이 아닌 그리스도교의 삶의 가치를 보편적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베네딕트회 창시자인 성 베네딕트는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된다. 중세 유럽이라는 문명 형성기에 수없이 많이 등장한 교황과 왕, 제후의 역할을 넘어 베네딕트와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이 유럽 형성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수도회는 세속을 등진 은둔 공동체가 아니라, 고전 문화를 보전하고 중세의 학문 전통을 형성하는 가장 전위에 서있었다. 오늘날도 베네딕트 회칙을 따르고 있는 2만 명 이상의 수도사와 수녀들이 전 세계 약 400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에 흩어져 있다.

중심을 흔드는 주변부 공동체

수도회는 유럽 그리스도교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 출발은 교황청이 있는 로마나 프랑크왕국의 수도였던 파리나 아헨도 아닌, 변방의 아일랜드, 노섬브리아, 이탈리아에서였다. 유럽 형성에서 수도회, 그중에서 베네딕트회의 기여와 역할은 반론의 여지 없이 인정된다. 그에 비하면 베네딕트회와 더불어 서방 문명 형성의 한 축을 맡았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수도회의 기여는 충분하게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유럽에서 베네딕트회가 표준 수도회로 자리매김하면서 역사의 뒷자리로 물러난 데 있다. 또한, 세기를 넘어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유지하기에는 지나치게 금욕적이고 엄격한 성격 탓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주목받지 않고 잊힌 과거가 더 많은 진실을 말해줄 수 있고,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켈트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잃어버린 소중한 한 조각이다. 고대 세계의 지적 전통이 아일랜드와 브리타니아에서 보존·계승되고, 다시 유럽으로 전해졌다. 늘 대륙의 나라들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영국이 실은 유럽 본토의 지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수도사들이 영국과 대륙을 하나로 엮어주는 역할을 했다. 수도회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세속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곳이 아닌, 현실 세계의 가장 전위에 서있는 공동체였다. 주변부에서 중심을 파고들어 흔드는 공동체였다. 그것이 수도회의 존재 의미이자 목적이었다.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랬다.

■ 주

1) James Lydon, 《The Making of Ireland: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London: Routledge, 1998), 1쪽.
2) Marcia L. Colish, 《Medieval Foundations of the Western Intellectual Tradition, 400-1400》(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65-75쪽.
3) C. H. Lawrence, 《Medieval Monasticism: Forms of Religious Life in We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London: Routledge, 2000), 66-68쪽.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