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여 오소서
[379호 교회력, 계절의 독서] 성령과 동행하도록 안내하는 두 권의 책
시간 위에 임하는 말씀
“성경에도 없는 교회력을 왜 지키나요?” 교회력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자주 묻는 말 중 하나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어느 신학자는 성서는 기록된 말씀이고, 설교는 선포된 말씀이라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보태서, 교회력은 시간에 새겨진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대답에 확신이 있다. 부활절은 내 주장의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된다. 부활절기는 부활주일에서 시작하여 성령강림절로 맺는다. 이 기간은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와 일치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40일간 머무시고는 승천하셨다.
승천일 전으로는 이후의 제자들 삶을 준비시키는 이야기가, 승천일 후로는 예수 승천 후 성령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제자들 이야기가 담겨있다.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것처럼, 부활 후 50일째인 성령강림주일로 부활절기의 대단원을 마친다.
교회력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우리는 성서 속 제자들과 같은 시간을 사는 것만 같은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글과 말이 줄 수 없는 현실감,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입체감이다. 교회력을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이라는 우리 삶의 토대에 말씀이 새겨지는 셈이다. 성령강림절을 맞게 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시간 속에 오신 성령과 함께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보탬이 되는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몸 위에 임하는 성령
《성령》은 성령과 함께하는 삶을 친근하면서도 새롭게 안내해주는 책이다. 북미 교회를 이끄는 이론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목회신학자 윌리엄 윌리몬의 하모니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역작을 시작으로 《십계명》·《주여, 기도를 가르쳐주소서》(복있는사람)와 같은 ‘실천하는 신학’ 저술에 함께했다.
이 책은 만연한 성령의 몰이해를 지적한다. 첫째는 성령을 ‘영화’(spiritualized)하여 현실과 유리하는 것이다.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말한다. “성령은 예수의 몸 위에 임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가 되어 이 일을 온전히 수행한다. 성령이 예수의 몸 위에 임한다는 것은 성령이 물질 친화적 성향, 특히 몸의 물질성에 대한 친화적 성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를 모호하고 ‘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몸으로 체화하려는 성향을 지닌다는 사실은 난감한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34쪽) 앞서 설명했듯 교회력에서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절기에 속한다. 이는 성령의 강림 역시, 새로운 ‘몸’을 말하는 부활의 테마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성령강림절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흔히 성령강림절을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령의 사역이나 활동이 오순절에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태초부터 활동해오고, 예수께 임했던 그 성령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성령은 늘 예수의 몸 위에 머물렀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몸이 교회로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 교회는 말씀과 행위로 예수를 증언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갖는다.”(64쪽) 이제 교회는 예수를 증언하며 그가 하셨던 일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이런 진술이 낳게 될 대단한 오해도 함께 지적한다. 성령과 교회가 각별한 관계를 이룬다고 해서 성령의 사역이 교회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교회는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이다(89쪽). 이 일은 ‘보편성’이다. 이 보편성은 기계적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는 성령을 개인적이고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몇몇 현실 교회는 물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증오와 혐오, 폭력과 다툼을 일삼는 우리 세상이 바라보아야 할 ‘산 위의 마을’이 된다.
교회력 절기 승천일 전후로 제자들의 삶을 준비시키는 이야기, 성령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야기에서도 하나 됨은 계속 메아리친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 제자로 준비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이 하나 됨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정교회에서는 삼위일체 축일을 성령강림절에 경축한다. 차이는 있지만, 성령강림과 삼위일체의 밀접한 연관성은 성령이 우리를 이끌고 초대하는 곳이 어디인지, 성령과 동행하길 원하는 사람이 바라보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일깨워준다.
예배 위에 임하는 하나 됨
성령강림주일과 삼위일체주일을 보내면, 교회력에서는 특별한 축일이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연중시기’라는 비축제기간, 일종의 비성수기다.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통상 11월 말)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는 5-6개월로, 교회력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긴 시간의 뭉치다. 그러나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 기간이야말로, 우리 신앙과 삶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우리의 매일은 축제가 아니다. 마침내 만물을 새롭게 하실 주께서 왕으로 오시기까지, 우리는 쳇바퀴 돌 듯 지겹고 긴 시간을 살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지루하고 평범한 삶이야말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묵묵히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나 됨을 이루어가는 시기이다. 정녕 제자의 시간이다.
교회는 교회력의 비성수기뿐 아니라 2천 년간 제자의 삶을 살아왔다. 우리는 먼저 살았던 선배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사학자 알렌 크라이더가 쓴 《초기 기독교의 예배와 복음전도》(대장간)는 녹록지 않았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신실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특별히 ‘예배’가 초기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의 중심에 있었음을 주목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유의 공동체를 만들게 하였는가? 그것은 매 주일 가정집에 모여 행동으로 함께 표현하고, 자신들의 삶을 주님께 드린 예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세상이 자신들의 구별된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72쪽)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한 것은 다름 아닌 예배였다. 그가 주목하는 예배의 요소는 평화의 입맞춤, 기도, 연보, 성찬, 설교다. 이 모두 하나 됨의 위에서 하나 됨을 위한 것이었다.
평화의 입맞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화해를 이루어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관습이자 새로운 인사법이었다(73쪽). 그들은 기도를 통해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를 발전시켰으며, 분노에 싸이거나 관계가 어긋난 상태에서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효과도 없거니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78-79쪽). 성찬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80쪽). 성만찬은 공동체의 공적 예배에 맞춰진 ‘결속의 의식’, 하나 됨의 의식이었고, 구별된 삶을 살도록 능력을 부여하는 일이었다. 연보, 봉헌은 부의 축적이라는 중독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나눔’과 ‘관대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한 특별한 예배 의식이었다(86쪽). 설교는 공동체 대표가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공동체의 삶에 적용했던 것으로, 때로는 연설뿐 아니라 대화의 형식을 갖기도 했다. 말씀을 해석하고 나누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권고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를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게 하는 방법, 성령과 동행함을 기억하게 하는 방법,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가장 검증된 방법은 다름 아닌 ‘예배’다. 그러나 크라이더 말처럼, 이 예배에서 예식만 지키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예식이 담고 있는 정신과 가치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우리가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이여 오소서!”
다시 처음의 질문을 꺼내본다. 우리는 왜 교회력을 지킬까? 이 연재의 결론이다. 시간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이며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성령은 몸이라는 구체성 위에 임한다는 윌리몬과 하우어워스의 말마따나, 교회력은 우리의 구체적인 시간 속에 성령께서 오시도록 초대하는 기도이다. 그와 동시에 예배는 그리스도인을 형성하고 하나 되게 한다는 크라이더의 주장처럼, 교회력은 시간을 공유하는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시간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 되게 하는 끊임없는 실천이다.
■ ‘교회력, 계절의 독서’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이광희
그렇게나 교회를 좋아하더니 교회의 일꾼이 되어 ‘덕업일치’를 이루었다. 한신대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팟캐스트 〈모두의 아멘〉과 유튜브 〈예배에 관한 아무 말〉 등 이것저것을 시도하고 있다. 가끔 글도 쓴다. 옮긴 책으로 《내일의 예배》 《예배의 감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