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 2: 《서준식의 생각》 운동가의 글쓰기 혹은 책 읽기
[380호 나의 최애들]
대학 시절 내가 선교단체의 간사로 지원해 캠퍼스에 남겠다고 하자, 이를 말린 건 같이 활동했던 선배였다. 나를 아낀다는 그 선배는 이미 캠퍼스 간사로 활동하고 있는 동문 선배를 레퍼런스 삼았다. “○○도 간사를 해서 아까운데 너까지 그래. 너네 같은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쩌고저쩌고….” 유행 지난 고지론인가? 나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아깝다고 하는 걸까?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이 단어의 실체를 그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을 끼칠 재질이어서 간사를 하기엔 아깝다는 걸까? 그럼 캠퍼스 간사는 누가 해야 하는 거지? 누가 해야 안 아까운 일인가? 지금도 궁금하다.
같은 비전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었고, 함께 대학 시간 대부분을 공동체와 사람들에게 내어주었고, 캠퍼스 간사님을 같은 마음으로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젊음과 지성과 열정을 드려 이 공동체와 복음주의 운동에 집중하겠다는 걸 말리다니. 애정하는 곳이 맞긴 한데, 한창 커리어를 쌓아야 할 20대를 갖다 바치기엔 부족한 곳이란 의미인가? 복음주의 운동을 하려면 20대가 적기 아닌가? 지금 외에 언제 시간을 들여야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 가치에 헌신할 수 있다는 거지? 생각이 많아졌다.
내적으로 공동체를 사랑‘은’ 하는데, 큰 그림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캠퍼스 선교 운동단체로서 이곳의 정체성을 공유하기에 그 선배와 나는 다른 차원에 서있었던 것 같다. 애당초 그런 비전과 방법을 배운 적 없이 우리끼리 알콩달콩 행복한 친목 동아리였던 거였나? 내가 친목 동아리에서 운동에 임했던 거였나? 아무래도 그랬던가 보다. 혼자, 또 진지하게.
캠퍼스 운동가라는 유령
돌봄가도 교육자도 설교자도 아닌 운동가 정체성을 우위에 두고 캠퍼스에 남고자 했을 때, 내 결정을 처음 이해하고 인정해준 이는 선교단체 선배가 아니었다.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문화인류학 수업의 강사님이었다. 매주 쪽글을 제출했는데, 그때도(!) 난 주로 여성으로 살며 경험한 일들을 수업 주제에 맞춰 줄줄이 적어냈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 수업 때, 강사님과 따로 인문대 앞 벤치에 앉아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린 서로를 알아보았던 거다. 동일한 질문, 동일한 고단함. 4학년이라고 하니, 앞으로 뭐할 거냐고 물어보셔서 대학생 단체의 간사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좋은 선택이라고, 자기 가치를 따라가는 선택을 지지한다고 하셨다. 처음 받은 지지였다.
그렇게 남아 캠퍼스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현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견디고 사소한 문제들에 시달리는 날들이었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시간이었고, 공동체 문화가 무너져 내리는 캠퍼스를 직시하는 지난한 싸움이었다.
그런 싸움의 와중에 대기업·공기업·방송사에 취직한 동기들은 가끔 캠퍼스에 격려차 방문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사회생활도 안 해봤으면서 학생들한테 뭘 가르친다고 여기 있냐? 사회가 어떤 곳인지 알아?”로 시작하는 블라블라…. 그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대기업·공기업·방송사 직원들은 학교 앞 시장 골목 사이 식당에서 오천 원도 안 되는 저녁을 먹고 자기가 먹은 음식값만 내고 식당을 나왔다.
내가 간사가 아닌 학생일 때, 직장을 다니는 선배들이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모임에 참석해 공동체를 격려하는 방편으로 후배들 저녁을 모두 사준 기억들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그런데 내 동기 혹은 후배들은 캠퍼스에 와서 후배들에게 지갑을 잘 열지 않았다. 2000년대 중후반의 대기업 직원들은 계산이 철저했다고나 할까. (혹시 사준 동기가 있다면, 이 글을 보고 노하지 말기를. 내 기억력 문제이므로.) 당시의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물결의 가혹함 때문일 것이라 이해하려 했다. 몇 달 후 누구 결혼식에서 한 동기가 부동산 매물을 보러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집은 이런 사람이 사는 거구나, 생각했다.
시장 골목을 나와 2차로 후식을 먹으러 가곤 하던 맥도날드에서 후배들이 “○○ 형, 후식은 사주실 거죠?”라고 장난치고 놀리면 그 대기업·공기업·방송사 직원의 얼굴은 모아이 석상마냥 굳어졌다. 천 원이 안 되는, 혹은 천 원에서 2천 원인 후식을 30명이 먹으면 3만 원 정도 나왔을 거다. 굳어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고, 지갑이 열렸는지 끝내 열리지 않았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그렇게 화기애매한 분위기의 동문 선배 방문이 끝나고 집에 갈 때, 대기업·공기업·방송사 친구는 헤어지는 지하철에서 이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애들, 맛있는 것 좀 사줘라. 밥들 잘 먹던데….” (이노무 시키, 멱살 한 번 잡자.) 그가 맥도날드에서 얼굴이 굳어졌듯, 내 얼굴도 같이 굳어졌다. 이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자괴감도 깊어졌다.
어느 날은 역시나 선교단체 후배가 캠퍼스에 무슨 볼일이 있는지 갑자기 온다고 전화하며 이런 소리로 가뿐하게 날 제압했다. “누나, 아직도 캠퍼스에서 놀고 있어요?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이제 그만 놀아야죠.” 역시 대기업 직원이었다. (간사를 하며, S기업, H기업, D기업, K방송사, K공사에 원한 생김.) 이들 눈에 선교단체 간사는 복음주의 운동가도 활동가도 뭣도 아닌, 그냥 사회생활 안 해본, 세상 물정 모르는 호구였던 걸까. 사회생활 안 하고 캠퍼스에서 “애들”하고 노는 사람, 후원받아 편하게 사는 미성숙한 비사회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걸까. 그러면서 학교에 뭐 필요한 일 있어서 들르면 늘 자신들을 반갑게 반겨주고 도움을 줘야 하는 존재로 상정하며.
이렇게 단체 내부에서도 어정쩡한 스탠스로 기우뚱대는 가운데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캠퍼스에서는 모든 종류의 운동이란 것들이 더 빠르게 소멸해가고 있었다. 복음의 능력이란 무엇인지 처음부터 물어야 했다. 캠퍼스에서 복음 운동을 한다는 게 착하고 재미있는 ‘동아리’ 모임을 유지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있을까를 질문하며 괴로워했다. 캠퍼스에 버티고 앉아 성경을 붙들고 역사를 공부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청년과 캠퍼스 이슈를 연결하고자 했지만, 회의가 밀려왔다. 저들이 말하듯 난 사회생활도 안 해보고 후배들에게 비현실적 이상이나 가르치며 캠퍼스에서 놀고 있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문득 《공산당선언》의 첫 문장이 내 얘기인 것만 같아 뼈가 시려왔다. “하나의 유령이 캠퍼스를 배회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가라는 유령이.”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 그러니까 운동가의 책 읽기
그런 생각이 몰려오는 밤에는 집에 돌아와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권운동가 서준식을 만났다. 존 스토트의 책이 복음주의의 성경적 토대를 다지게 도와주고,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를 보여주고, 《역사를 바꾼 복음주의 학생운동 이야기》(IVP, 2008) 같은 책을 읽으며 세계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만났지만, 지극히 한국적 맥락에서 요청되는 동력이 2010년 전후 시기의 캠퍼스 운동가에게 필요했다. (단순하게 후려쳐서 미안하지만) 내가 속한 세계는 ‘번듯한 사회생활을 하며 중산층 핵가족을 이루어 교회 생활’하는 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의 전제 같았다. 번듯하지 않고 중산층 핵가족을 이루는 일과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는 비사회인은 다른 정체성의 비전이 필요했다.
그 다른 동력과 비전은, 나와 같은 사회에서 변혁을 꿈꾸며 몸부림치던 서준식이 지니고 있었다. 동시대 운동가이자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온몸으로 통과한 서준식. 그의 글을 읽으면 비로소 길을 찾을 수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며 그가 치열하게 빚어낸 운동가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마주하면.
젊은 활동가들에게
저마다 쓰라린 상처를 부둥켜안고 오늘도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
활동가들!
세상이 변해도,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변한 세상에 익숙해져도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슬픔과 분노를 우리는 꼭꼭 간직하고 있어야 하네.
그것은 우리의 전부여서는 안 되지만 분명 우리의 생명일 터이네.
서두르지 말기 바라네. 서둘러 세계나 사회를 설명하려 하지 말기 바라네.
자기에게 세계나 사회를 설명할 능력이 없음을 개탄하지 말기 바라네.
법률가나 교수의 지식은 우리에게 분명 부러운 것이지만 그러나 결코 기죽지 말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삶, 우리의 희망에 비하면 결국은 왜소한 것들이네.
슬픔과 분노로 말미암아 운동가는 이 악덕과 폭력에 가득 찬 오늘을
래디컬하게 거부하고 내일을 고대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네.
우리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고 현실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는 기쁨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네.
우리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고 현실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는 기쁨 때문에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네.
지식을 부러워하지 말고 단심(丹心)을 간직해 주게.
그리고 그 단심에 긍지를 느껴 주게!
운동가에게는 운동가만의 본령이 있고 사명이 있고 능력이 있네.
… 그러나 단심은 그저 선량한 것과는 다름을 명심해야 하네.
… 살아가 주게.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고, 그러나 운동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 주게. 자기 운동의 철학적 의미를 천착하면서, 그러나 대중과 함께.
살아가 주게. 때로는 아득하게 깊숙이, 때로는 한없이 넓게 운동의 의미와 기술을 추구하면서.
저마다 쓰라린 상처를 부둥켜안고 오늘도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
젊은 활동가들!
험한 밥을 먹고 닳아빠지도록 싸구려 옷 빨아 입어야 하는 너희.
휴가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는 너희.
용기를 가지고 버티어 주게.
너희 나이 40이 넘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충만한 능력 있는 활동가가 될 때까지.
그런 너희를 보는 것이 나의 꿈이란다.
너희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 바로 나의 큰 꿈이란다.
― 《서준식의 생각》(야간비행, 2003), 67-69쪽.
이 글에서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으로 바꾸면 곧 내게 전하는 말이었다. 돈도 벌지 않고 “휴가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이 캠퍼스에서 움직이던 운동가는, 슬픔과 분노를 꼭꼭 간직해야 한다. 그 슬픔과 분노로 말미암아 “악덕과 폭력에 가득 찬 오늘을 래디컬하게 거부하고 내일을 고대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서준식의 생각’을 부여잡고 내일 다시 캠퍼스로 나갈 동력을 얻었다. 예레미야도 있었고 바울도 있었지만, 동시대 운동가 서준식의 글만큼 절절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것이 동시대에 같이 불화하는 자의 힘이던가. 그의 언어 하나하나가 오늘의 언어로 그리스도의 길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운동가의 후일담이 아니다. 이제는 위에 언급한 이들이 말하던 사회생활하는 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서준식의 글은 내게 운동을 독려한다. 전업 운동가는 아니지만, 삶의 자리에서 운동가 정체성으로 선택하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가가 사회생활에서 제외된 자가 아니듯, 그리스도인인 사회인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자리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이제는 절판된 이 책을 중고 서점에서 두 권 구입했다. 한 권은 운동가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고, 다른 한 권은 내가 가졌다. 소중히 읽었던 책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서가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이 소멸되기 전에 얼른 구해 놓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중고 책에는 놀랍게도 저자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최영도 선생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2003년 봄 서준식
민변 창립을 주도한 최영도 변호사. 그가 별세한 후 몇 달이 지나 그의 책이 내게 온 것이다. 이 책에서 돼지 한 마리가 귀엽게 그려진 서준식의 서명을 보았다. 현대사의 두 인물과 내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처럼 특별한 감정이 들었다. 둘 사이에 있던 책이 내게 도착했다는 건,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네가 꿈꾸고 믿는 신념의 길을 가라는 계시가 아닐까. 자본과 권력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 이 세계 어디서나 불화하는 것이 운동가의 핵심이라고 믿는 이의 고단한 매일매일에 도착한 반가운 계시.
사라졌기에 오히려 남았다
작은 선교단체에서 미미하게 활동하던 캠퍼스 운동가마저 일으켜 세우던 그 가열한 운동가는, 이제 우리 사회에 없다. 2004년쯤 사회운동에서 물러났고 2005년 인터뷰에서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말하며, 떠났다. 2007년 연말에 출간된 《서준식 옥중서한》(노사과연, 2008) 머리말에서 고백한 내용이 마지막 공식 기록일지도.
독일로 ‘피난’온 지 2년 반이 되었다. … 4년 전 나의 삶의 두 기둥, 즉 ‘운동’과 ‘가정’은 한꺼번에 무너졌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무너진 폐허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깊은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 가끔 나는 나의 불행이 이 시대의 불행과 뿌리에서 맞닿아 있다고 실감할 때가 있다.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를 거부하고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가는 언제 어디서나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지금 이 시대에 특히 불행하다. 그 이유는 ‘세계사적 현대’가 변혁에 대한 기대와 꿈을 잃고 큰 담론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끊임없이 왜소해질 것을 강요하는 이런 시대에 변혁에 대한 꿈이나 큰 담론은 무미건조한 ‘거대담론’으로 매도당하고, 구조적인 악에 집단의 힘으로 맞서려는 기도는 종종 ‘폭력’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 ‘거대담론’이 힘을 쓰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도 아니고 희망 있는 사회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변혁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운동가는 불행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다.
변혁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운동가였기에 그는 이 사회에서 불행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런데 불행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지금까지도 내 최애의 세계에 또렷하게 살아남아 형형히 빛나고 있다.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