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훌륭한 대중문화를 사용하는 법

[380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2-06-30     이민형

이번에는 오징어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조만간 교회에서 써먹을 텐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교회에서 ‘예수님은 깐부’라는 문구가 들어간 전도지를 만들어 배포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어떤 직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대중문화 창작물을 ‘패러디’해서 사람들 이목을 끌려는 한국교회의 대중문화 사용은 이미 상당 시간 지속되어온 현상이다. 다만, ‘슬픔 예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이런 식으로 대중문화를 사용하는 데 대해 교회 밖 사람들이 그리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위 기사 뉘앙스도 그러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더 그러했다. 사람들 반응이 부정적이었던 것은 단지 ‘예수님은 깐부’라는 문구가 재미없어서라거나 전도지 품질이 조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교회가 대중문화를 사용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교회가 대중문화에 접근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교회를 (혹은 복음을) 알리겠다는 전도지의 목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슬펐다.

생귄님은 지난 글(2022년 6월·379호)에서 훌륭한 대중문화를 제대로 읽기 위해 한국교회가 대중문화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언어는 이해를 낳고, 이해는 관계를 낳는다. 한국교회와 대중문화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대중문화 문해력이 필수다. 어쩌면 슬픈 예감을 통해 발견한 한국교회의 대중문화 ‘패러디’가 아직 대중문화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현상에 반영된 한국교회와 대중문화의 관계를 살펴보고, 바른 관계의 필요성을 역설하려 한다.

기독교 하위문화?

처음 한국교회의 대중문화 ‘패러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행하던 즈음이었다. 기독교와 대중문화 그리고 전도를 전공하던 나는 당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주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강남스타일〉의 ‘패러디’로 소개된 ‘교회스타일’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엔 얼굴이 후끈거려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도대체 왜 이런 영상을 만든 것일까? 단순한 반감이 아니었다. 학문적으로 분석해보고 싶은 욕구. 결국 몇 번 시도한 끝에 영상을 끝까지 보았다. 대략 한 교회에서 열리는 수련회를 홍보하는 영상이었는데, 그 교회 홈페이지가 아닌 불특정 다수가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에 업로드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교인들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스타일’ 영상을 제작한 사역자는 국내 기독교 언론 중 하나와 인터뷰했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열려있음’을 알리기 위해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기사는 이런 제작 의도를 두고 기독교 문화를 ‘당당하게’ 전하는 일로 소개했다. 심지어 기사 하단에는 그의 소명이 문화선교라고 소개되었다. 제작 의도 자체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식에 설득이 되지 않았다. 기사 내용에는 더욱 그랬다. 이런 ‘패러디’물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열려있음을 어떻게 알릴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영상이 추구하는 문화선교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유행하는 대중문화를 ‘패러디’하는 것이 기독교 문화라는 말인가.

하나의 영상을 수식하는 표현의 무게가 너무 커 보였다. 정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정말로 기독교 문화인지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교회’ ‘패러디’를 검색어 삼아 그동안 한국교회가 만들어온 모방물들을 찾아봤다. 유명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가요, 광고 등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이미지들이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연예인 얼굴이 사역자 얼굴로 바뀌어있거나, 제목이 종교적 언어로 편집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내용은 주로 일반적인 전도지 혹은 교회 행사 홍보 전단 정도였다. 디자인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재치를 제외하면 퀄리티가 조악하고 내용도 억지스러웠다.

반면 영상의 경우 이미지에 비해 내용물 자체 퀄리티는 훨씬 높았다. 당시 유행하던 대중문화 작품들을 모방하여 사역자, 교회 구성원이 연기하거나 춤추거나 노래하는 영상이 대다수였다. 그 가운데 상당히 공을 들인 것처럼 보이는 영상도 있었다. 다만 영상 퀄리티와는 별개로 내용 면에서는 지적할 부분이 많았다. 특히 폭력적인 영화나 선정적인 광고 등을 사역자들과 교회 구성원들이 따라 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고,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는 기독교 문화로 여기기엔 종교적 가치와 대치되는 것들이 많았다. 결국 이런 이미지와 영상의 내용 자체로 이를 기독교 문화라고 정의하거나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저 기독교인들이 만든 하위문화 창작물 정도로 평가하는 게 가능할 뿐이었다.

그래서 시선을 제작 의도로 돌리기로 했다. 한국교회는 왜 이런 이미지와 영상을 제작하는 것일까? 굳이 이러한 이미지와 영상을 교회 내부에서 구성원들끼리 소비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사이트와 유튜브라는 대중 채널에 업로드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교회스타일’을 제작한 사역자의 인터뷰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문화를 유용(流用)한 기독교 문화를 통해 기독교 혹은 교회를 알리는 것. 넓은 범위의 ‘선교’였다.

기독교 선교 매체?

우리는 이 연재 첫 번째 글(2022년 5월·378호)에서 한국교회가 ‘문화선교’라는 개념을 실용주의적으로 이해하고 목회 현장에 접목하게 된 상황을 살펴봤다. 20세기 말, 교회 성장률이 감소하고 있다는 위기감에 부담을 느낀 목회자들은 일종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선교전략으로 들림 직한 문화선교 개념이 소개되자, 이를 바탕으로 문화를 적극적으로 유용하는 목회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목회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살펴보던 문화 중 단연 으뜸은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강한 대중문화였다. 대중문화의 유용은 형식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출발했다. 유행하는 음악 장르에 맞춰 기독교 (예배) 음악을 만들거나 대중화된 기술을 교회로 가져와 활용하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실제로 이런 형식의 차용은 상당히 현대화된 기독교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 내부에서 소비되는 경향이 강했을 뿐, 기독교에 관심 없는 외부인들에게는 존재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대중문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대중문화 ‘패러디’이다. 당대에 유행하는 대중문화를 차용한 이런 매체는 사람들 이목을 끌 만했다. 물론 이목을 끌었다는 것과 ‘선교’가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지는 않다. 게다가 이런 매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극적으로 나뉘었다. 상당수 기독교인이 대중문화 차용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비기독교인들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 그런데도 이런 매체가 ‘기독교 문화’로 평가될 정도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좋지 않은 이목이라도 끄는 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가 반영된 듯하다.

더불어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한국교회의 태도가 변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 않기에 이를 종교 중심 사회의 세속화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서구 사회 세속화 과정에서 교회가 보인 태도와 비슷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세속화 전까지 혹은 기독교 영향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던 시기에 교회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자연히 적당한 수준으로 분배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이를 ‘교회 쇼핑’이라고 한다. 어감이 다소 부정적이지만, 현상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신앙생활에 어울리는 교회를 찾는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교회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 속에서 ‘매력을 어필할’ 필요를 느꼈다. 이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교회가 문을 열었다 해서 사람들이 알아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앙의 형태, 취향, 가치관 등을 고려하여 어울리는 교회를 찾아 나섰다. 따라서 교회는 그에 맞는 모습을 갖춰야 했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교회가 외부로 전달하는 메시지에 있어 복음과 더불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안내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해진 것이다.

마침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발전된 디지털 기술이 한국 사회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디지털카메라 열풍은 수많은 사람을 출사와 편집의 세계로 초대했다. 특히 필름 카메라 시대에는 불가능하던 사진 편집이 디지털화된 사진 파일과 포토샵 등 편집 프로그램의 확산으로 대중화되었다. 사람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재치 있는 편집 사진을 만들고 공유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쉽게 이미지를 만들고 편집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누구나’에는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대중문화 ‘패러디’는 문화선교 개념의 실용주의적 이해, 교회를 쇼핑하는 문화 그리고 디지털 사진 기술의 확신이 합쳐진 상황에서 교회를 알리고 복음을 전하고자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선교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방안이 등장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이 형식이 기독교 선교를 실천하기에 적합한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마셜 매클루언 주장을 고려해볼 때, 선교를 실천하는 형식은 그 자체로 선교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진지한 고민 없는 선교 방안의 고안이 때에 따라 선교라는 본질적인 목적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연 대중문화를 ‘패러디’하는 선교적 방안은 과연 선교의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이라 할 수 있는가?

‘패러디’? 패러디?

지금까지 이 글에서는 ‘패러디’라는 표현에 모두 따옴표를 사용했다. 이는 선교적 방안으로서의 대중문화 ‘패러디’가 가지는 형식의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대중문화를 ‘패러디’하는 일은 선교를 실천하기에 옳은 방안인가? 한국교회가 만들어온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들은 ‘패러디’물이 맞는가? 토론토 대학의 린다 허천은 ‘패러디’ 장르를 정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작과의 거리’, 즉 원작과의 ‘차이’에 담긴 패러디 작가만의 메시지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작품을 ‘패러디’라고 부를 때, 사람들은 원작과 유사한 부분을 지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교회에서 만들어진 대중문화 차용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패러디’로 소개되는 이유는 차용한 원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러디’의 학문적 정의에 따르면 이들은 ‘패러디’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형식은 무엇인가? 1982년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주의 사회’라는 글에서 ‘패스티시’ 장르를 소개한다. 그는 모더니즘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가치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오며 상실되었다고 여겼으며,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포스트모던 문화는 대체로 깊이가 없고, 주제 의식이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예술형식 중 하나로 꼽은 것이 ‘패스티시’이다. ‘패스티시’란 작가가 자신의 취향과 의도에 맞추어 다양한 이미지를 짜깁기하는 예술형식을 말한다. 혼성모방으로도 알려졌고, 흔히 말하는 ‘Ctrl+C(복사), Ctrl+V(붙여넣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제임슨은 패스티시를 ‘공허한 패러디’라고 불렀는데, 멋대로 짜깁기된 이미지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짜깁기에 사용된 원작과 짜깁기를 통해 만들어진 패스티시 작품들은 대부분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 그저 원작과의 유사성을 통해 사람들 이목을 끌고, 이를 통해 작품이 선보여지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혼성모방이 가장 잘 사용되는 분야는 상업/마케팅/광고와 같이 사람들 시선을 끄는 게 중요한 분야이다.

따라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영화나 광고, 뮤직비디오 등을 이미지화하여 사역자들 얼굴을 짜깁기하거나 글귀를 바꾸거나, 몇몇 장면들을 모방한 영상을 만드는 것은 ‘패러디’가 아니라 ‘패스티시’에 가깝다. 무엇보다 원작과의 차이점을 강조하지 않을뿐더러, 들어있는 메시지가 없다. 차라리 대중문화를 모방하되 몇몇 다른 장면을 연출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면 ‘패러디’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만들어낸 모방물들은 그저 원작과의 유사성을 강조하여 교회 혹은 기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데 목적을 둔다.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빌려 복음을 소개하고 교회를 홍보하려는 것이다.

‘패스티시’가 ‘패러디’와 가장 구분되는 점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 즉 기의를 잃어버린 기표의 조합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이는 대중문화 ‘패러디’를 선교적 목적, 즉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만들어낸 한국교회에 커다란 모순점이 된다. 복음을 전달하는 것도 교회를 홍보하는 것도 ‘패스티시’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혹자는 표면상 드러나는 교회의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 또한 관심의 표현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전에 목적에 맞지 않는 매체를 선교 방편으로 삼았다는 점 자체가 또 하나의 메시지로 남아 기독교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짜깁기된 이미지와 영상이 기독교의 가치와 무관하다는 데서 허상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허상의 복음, 하이퍼 가스펠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복제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는 현상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다양한 이미지들을 임의로 복제하고 편집하여 만들어진 시뮬라크르(simulacre)는 대중매체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복제된 이미지들이 가득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재를 대체하고 있는 가상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은 그저 짜깁기된 이미지를 즐기고, 느끼며, 욕망한다. 현대인들이 소셜미디어 속의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계 맺는 모습은 보드리야르의 예측이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예다.

교회에서 만들어낸 패스티시 이미지들은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하는 시뮬라크르와 맥을 같이 한다. 복제되고 짜깁기된 이미지들은 그저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메시지를 담지 못하는 껍데기와 같은 모사품이다. 물론 대중문화 패스티시 매체들 속에도 기독교적인 내용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선교 메시지라 할 수 있는 기독교 복음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대중문화를 복제한 이미지와 영상 속에 간헐적으로 입력된 몇 마디 기독교 용어들을 복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예수의 삶 전부를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 편집해 넣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뮬라크르로 전락해버린 복제물들은 기독교인들이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해 증거가 돼야 할 사랑과 정의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같은 기독교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이러한 매체 속에 복음을 담는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근원적인 의미를 내파하는 행위와 같다. 내파된 복음은 더는 기독교인들이 증거해야 할 선교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저 흥미로운 이미지와 영상으로 재현된 복음, 즉 허상의 복음(hyper-gospel)이다.

대중문화를 편집해 만든 기독교 홍보물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교회스타일’ 영상 제작자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 교회가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있다는 점이 이 매체의 중심 메시지라면, 결국 기독교 복음보다는 한국교회가 대중문화 콘텐츠를 유용할 만큼 문화적으로 포용력이 넓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대중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목회자 모습이나 영화 포스터에 짜깁기된 성경 구절 등은 선교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는 문화적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이런 매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익숙한 대중음악과 뮤직비디오 영상, 그리고 영화 포스터나 TV 프로그램 등에 편집된 목회자나 성경 구절의 일부만 잔상으로 남는다. 결국 대중문화 패스티시 매체는 흥미를 자극하는 허상의 복음을 내포한 시뮬라크르를 전달하여 진정한 복음의 존재를 잊게 만든다.

결국 대중문화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와 대중문화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은 기독교 중심적인 목적, 즉 선교를 실천하기에도 부족하다. 어쩌면 대중문화 패스티시를 만드는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바른 관계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그저 재미로 혹은 관심을 끌기 위해 오늘도 모방할 거리를 찾고 있을 뿐이라 믿고 싶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5년 전 발표한 박사논문에 포함된 내용이다. 물론 박사논문을 누가 찾아 읽겠냐마는, 그동안 세미나와 소논문을 통해 연구 결과를 각색하고, 보완하여 발표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교회는 때가 되면 혹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영화나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나 광고가 나오면 이를 복제하여 온라인 세계에 퍼뜨린다. 그런 매체를 발견할 때마다 한편으론 부족한 학자임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런 매체에 불편함을 느낄 누군가가 그동안 이것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을 찾아봐주길 바란다. 문제점을 느끼고 저자를 찾아봐주기를 바란다. 저자는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생귄의 한마디

글머리에 ‘오징어’가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엔 바다 동물 차례인가’ 하면서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그동안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참 쉽게 소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판도 쉽고, 활용도 피상적이었죠. 사실 개신교는 다른 종교에 비하면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편이에요. 문제는 대중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도구적으로만 활용했던 것이겠죠. 사실 문화가 훌륭한 이유는 개별적인 문화 상품이 모두 훌륭하단 뜻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대중문화가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관계들 속에서 일어나는 역동이 중요하죠. 어떤 문화이든 그 너머에 숨겨진 의미들이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동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교회가 정말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면, 무엇보다 세상을 이해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연재의 기본 전제이자 목적이고요.

‘액체교회’(Liquid Church)란 말이 있죠? 복음이라는 본질(내용)만 변하지 않으면, 외형은 유연하고 다양해도 좋다는 말이죠. 외피론이라고도 하고요. 동시대의 다양한 구성원에게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선교 전략일 겁니다. 그런데 정말 외형 혹은 외피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외형이 곧 미디어이고 메시지인데,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사용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따라 하면서 ‘교회스타일’을 외치는 실수는 반복하지 말아야 하니까요. 민민님과 제가 이 연재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내용도 대중문화의 선교적 활용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담긴 질문을 드러내고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 아닐까요?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살피는 우리의 연재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추신: 흥미로운 글 잘 읽었어요! 그런데 왜 그 논문, 왜 출판 안 하세요? 제가 1호 독자 하겠습니다.(웃음)

이민형(민민)
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