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개혁자들 ― 클뤼니 개혁 운동과 시토 수도회
[380호 수도회, 길을 묻다]
교황권의 암흑기
서유럽 교회 역사에서 10세기는 교황권의 암흑기(saeculum obscurum)라 불린다. 서유럽 중세를 형성하는 데 강력한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교황권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교황들의 세속화와 타락을 꼽기는 조심스럽다. 오히려 교황청이 있는 ‘로마’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그 이유를 찾는 시도가 적절하다. 7-9세기 유럽은 북쪽의 바이킹과 노르만족, 동쪽의 마자르족,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반도의 사라센 이슬람의 공격으로 위태로운 날들을 보냈다.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은 외부 침입에서 보호해줄 황제나 군주가 가까이 있지 않았다. 또한 교황을 로마 귀족 가문에서 선출하게 되면서 교황의 권위와 영향력은 한없이 추락했다. 교황은 로마 귀족의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출되고, 폐위되었다.
가톨릭교회 상징인 로마 교황청의 위신 하락은 유럽 전역 교회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수도원을 포함한 교회는 세속 군주들과 ‘주군과 봉신’이라는 봉건제 계약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늘의 관념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영주나 귀족, 제후가 자기 영향력 아래 있는 교회의 주교나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임명하게 되었다. 서유럽 형성 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와 수도원은 철저하게 세속 군주에 예속되었다.
이제 성직자들이나 수도사들에게 세속을 뛰어넘는 더 높은 수준의 종교적 삶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성직자들 삶은 세속 귀족이나 기사들 삶과 차이가 없었다. 수도원들도 엄격한 수도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교황권의 암흑기는 교회의 위기이자 수도회의 위기였다. 이런 중에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여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들이 생겼다. 중세의 개혁 운동은 곧 수도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도회를 통한 교회 및 사회 변혁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운동으로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를 들 수 있다. 수도원 정신의 회복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정신적인 지향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클뤼니 수도회를 통한 개혁 운동은 교회의 자정을 통해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갈등 속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반면, 시토 수도회는 교회 및 수도회가 가지고 있는 세속성 및 권력의지를 지적하며, 좀 더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종교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한 정신적 갱신 운동에 가깝다.
교회 개혁을 이끈 클뤼니 수도회
중세의 개혁 운동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직자가 가진 이중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성직자는 교회에 봉사하는 직책이지만, 세속 군주가 임명권을 행사하는 국가직이기도 했다. 성직자가 국가권력 구조의 핵심에 자리하는 이 구조가 교회와 세속의 차별성을 지워버렸다. 대부분 서유럽 국가의 교회는 알프스산맥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이탈리아반도의 교황청 입김보다, 지근거리에 있는 세속 군주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 교황들이 제대로 힘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법이 규정한 종교적 의무 수행도 느슨해졌다. 그로 인해 사제의 혼인과 성직매매라는 두 가지 문제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 현실을 개혁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신생 수도원을 중심으로 11세기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 클뤼니 수도회가 대표적이다. 수도원 설립 운동을 통해 아래로부터 위로 전개되는 개혁을 주도한 이 수도회는 중세의 가장 큰 결실을 가져온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운동에 동력을 공급하기도 했다.
클뤼니 수도회는 909년 아키텐 공작 기욤(875-918)이 자기 재산을 헌납하여 프랑스 클뤼니에서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설립자 기욤은 교회가 세속과 밀접하게 연결된 현실에 문제의식이 보였다. 교회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베네딕트 수도회 회칙을 엄격하게 고수하도록 했다. 또한 클뤼니 수도회는 오직 교황에게만 복종하고, 그 외 세속 군주 영향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 클뤼니 수도회는 한 명의 대수도원장(abbot)이 모든 개별 수도원을 관할하는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전체적으로 엄격한 계율을 부과하여 종교적 삶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함으로써 발 빠르게 서유럽 전체에 확산되었다.1)
클뤼니 수도회의 성공적인 정착과 확산은 교황권 강화에도 기여했다. 교황권의 암흑기를 극복하고 교황권과 세속권 사이에서 본격적인 긴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세속 군주들이 관행적으로 해오던 성직 서임을 반대하면서 촉발된 서임권 논쟁은 교회를 주도하던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독립 선언이었다. 교회가 세속의 힘에서 완전하게 독립하려면 그에 걸맞은 정신적 수준과 위상을 보여주어야 했다.
클뤼니 수도회가 주도한 수도 운동의 부활과 도덕적 개혁은 교회 개혁을 이끌었다. 수도회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교황이 선출되면서 11세기 개혁 운동을 전방위적으로 이끌었다. 대표적 인물이 독일 출신 교황인 레오 9세(재위 1049-1054)이다. 그는 수도회 출신은 아니었지만 클뤼니 수도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한 인물로, 교황직에 오르면서는 교회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재위 직후 개최한 라테란공의회에서 교구 사제들의 독신을 엄격하게 요구했으며, 성직매매 관행을 뿌리 뽑고자 시도했다. 이 회의에서 성직매매 혐의를 받는 주교들을 즉시 폐위했다. 성직매매 관행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인식에 합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제 독신 요구는 성격이 다소 다른 문제였다. 비잔틴교회는 물론이고, 서방 가톨릭 국가 중에서도 사제의 혼인이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곳이 있었다. 사제 독신 요구는 청빈, 순종과 더불어 독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수도회 정신의 부활과 잇닿아있다. 수도사의 삶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면, 사제 역시도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수도사적 삶을 사제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여러 반대와 저항에 부딪혔다. 심지어 종교개혁 과정에서 사제의 혼인 허용 여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별 짓는 요소이기도 했다.
교황 레오 9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명으로 선출되었지만, 황제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보였다. 교황 대관식을 위해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도사 옷을 입고 로마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자신을 인정해줄 때만 교황의 관을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추기경단을 실질적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교황권 독립 운동은 교황을 황제 같은 세속 군주가 지명하지 않고, 추기경단이 뽑도록 하는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다.
레오 9세가 꿈꾼 교회는 정신적·도덕적으로 수도사의 고결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세속의 영향력에서 독립하는 공동체였다.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에 기대어 출발했던 레오 9세의 개혁은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선임된 힐데브란트 재임 때 정점에 도달한다. 레오 9세에게 발탁되어 20년 이상 교황청의 여러 직책을 맡았던 그는 교회 권위 신장을 위한 개혁 운동을 쉼 없이 이끌어갔다. 그가 천착했던 문제는 성직매매 금지, 사제 혼인 금지와 더불어 세속 통치자가 성직자를 서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이었다. 그 시도는 13세기 교황권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교황 지배의 중세라는, 비록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매우 익숙한 레토릭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10세기 교황권 암흑기를 넘어설 동력을 제공한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클뤼니 수도회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데는 대수도원장 아래에 각각의 수도원장(prior)을 두는 중앙집권적 통제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체제는 개별 수도원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베네딕트 회칙과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클뤼니 수도회가 베네딕트 회칙과 벗어났다는 비판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수도회가 성공적이라는 것은 곧 수많은 부유한 기부자들이 토지와 재산을 헌납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후원을 받아 건립된 클뤼니 수도원은 훗날 성베드로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교회였다. 웅대한 교회 건물에 걸맞게 클뤼니 수도회는 장엄하고 화려한 예배 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아름다운 예술품과 건축물, 정교한 예배 의식을 통해 베네딕트 회칙에 담긴 경배하는 삶을 이룩하고자 했다. 교회 건물과 내부 장식은 더없이 화려해졌지만, 성 베네딕트가 추구했던 단순한 삶, 노동하는 삶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 공동체는 느슨해졌고, 건축물과 제단이 더 높아질수록 클뤼니 수도회의 평판은 떨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임을 자랑했던 클뤼니 수도원은 1790년 프랑스혁명으로 무너졌다. 그 자체로 종교적 기품을 보여주는 웅장한 수도원 건물은 실은 수도회가 추구했던 가치의 유효기간이 지난 뒤에도 그 정신을 돌로 만든 공간에 담아두리라는 어긋난 욕망을 상징한다. 유럽 곳곳에 건축된 대형 수도원들은 이제 클뤼니 수도회가 개혁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수도회가 남긴 역사의 역설이다.
시토 수도회: 엄격한 수도 생활로 돌아가자
서유럽에서 11세기와 12세기는 십자군으로 대표되는 확장의 시기이자 종교적 열정이 타오르던 때였다. 그 시대가 마주한 종교적 열정은 유럽에 다양한 수도회가 창설되는 일로 이어졌다. 그런 중에 유럽의 사회 및 교회 개혁의 목표를 가지고 등장한 대표적인 수도회가 시토 수도회였다. 시토 수도회는 몰렘 수도원(Molesme Abbey) 원장이었던 로베르가 1098년 프랑스 디종 남부의 시토(Cîteaux)로 옮겨가 건립했다. 그들은 베네딕트 회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수도원을 꿈꾸었다. 시토 수도회는 그 이전 수도회 개혁 운동으로 대표되는 클뤼니 수도회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개혁을 시도했다. 베네딕트회가 추구했던 간소하고, 청빈한 삶의 회복이 교회 회복의 핵심이라고 파악했다. 그 정신을 따라 시토 수도회는 화려한 건물을 추구하지 않았고 제단도 소박하게 장식했다. 클뤼니 수도회가 예배를 수도회의 특징적인 중심으로 놓았던 반면, 시토 수도회는 베네딕트 회칙이 추구하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에 더 치중했다.
시토 수도회는 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고,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무지를 세속 후원자들로부터 기증받아 공동체를 일구었다. 이것은 대단한 효과를 가져왔다. 귀족 등 세속 통치자들은 그리 큰 재정적 투자 없이도 수도원 건립이라는, 종교적인 보상이 분명한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시토 수도회 입장에서 보더라도 베네딕트 계율대로 수도사들이 직접 노동을 통해 수도원을 설립하고, 땅을 개간하여 농토를 만드는 일에는 추락했던 수도회 정신을 회복하는 상징성이 있었다. 그들은 오랜 기간 타협하지 않는 높은 수준의 규율을 유지함으로써 타 수도회에 비해 높은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당시 대부분의 수도회에서 이뤄진 자녀 입회(child oblation) 관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리 분별할 수 없는 나이에 부모의 뜻에 따라 수도원으로 보내지게 되면 수도 생활의 자발성과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16세 이상만 입회할 수 있었고, 일정한 수습 기간을 거친 후에 정식으로 수도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했다.2)
시토 수도회는 개별 수도원이 독립적인 지위를 지녔다. 수도원장은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선출했으며, 재정 및 자산들도 개별 수도원이 관리하는 구조였다. 이 점이 클뤼니 수도회의 중앙집권화된 체제와 크게 차이가 났다. 12세기 들어서면서 시작된 시토 수도회는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에 500개나 되는 수도원을 건립했다. 단기간에 보여준 엄청난 확장은 초기 투자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이뤄졌기에 가능했다. 황무지에 수도원을 설립하는 일은 여러 면에서 노동 집약적이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형성하면서 개간 및 농업기술 등을 발전시켜 나갔다. 소와 말 등 가축 사육의 기술이 진일보해 농업에서 가축 사용이 확대되었다. 또한 생산한 농산물 및 가축을 판매하는 체계를 만들어 서유럽의 상업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규모 농사와 개간 사업은 예배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육체노동을 강조하는 시토 수도회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초기부터 평수도사(lay brother) 제도를 운영했다. 이들은 교육받지 않은 일반 남성들로, 수도원 개간 사업, 농사 및 생산물 거래 등과 같은 일을 맡도록 한정되었다. 일반 수도사들이 받는 교육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수도사들과 별도로 기거하며 구별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에 사제가 될 수 없었다. 일반 수도사들이 입는 백색 수도복 대신에 갈색 옷을 입었다. 시토 수도회가 유럽 문명 형성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평수도사들의 헌신에 힘입은 바 크다.3)
시토 수도회가 중세 그리스도교에 끼친 영향은 또 다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 신비주의 영성과 성모 마리아 공경의 전통이 시토 수도회를 통해 발전했다. 시토 수도회의 모든 수도원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수도원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조각, 회화 등에 성모 마리아 이미지를 새겼다.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가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게 된 상황은 시토 수도회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은 다양한 성인 및 성유물 숭배 등을 이끌었다. 성물이 발견되거나 성모의 기적이 발현된 곳에는 순례자들이 몰려들었고, 시토 수도회는 이 순례객들을 수용하여 수도원의 수익을 창출했다. 더불어 시토 수도회에서는 여러 명성 있는 신비주의 저술가들을 배출했다. 시토 수도회를 대표하는 인물은 설립자가 아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1153)이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 설교가,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그가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시토 수도회에서 마리아 공경 전통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제2차 십자군 원정 참여를 독려하는 순회 설교를 하기도 했다.
중세 수도회를 통한 개혁 운동은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당대 그리스도교가 지향해야 하는 정신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일정 기간 유행을 이끌었다. 그에 따라 수도회 조직이나 무게중심이 바뀌었다. 예컨대, 클뤼니 수도회는 다른 것보다 예배와 기도의 가치에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엄숙하고, 화려하고, 긴 예배 형식이 도입되는 등 예배 형식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지향은 수도회가 소박하고 청빈한 삶과는 거리가 먼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시토 수도회의 등장과 확산은, 클뤼니 수도회의 종교성에 대한 대안적 성격이 컸다. 좀 더 소박하고, 내밀하고 개인적인 종교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시토 수도회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베네딕트 회칙의 핵심을 가장 절묘하게 구현한 중세의 수도회라고 할 수 있다. 시토 수도회는 클뤼니 수도회가 기도와 예배에 지나치게 치우쳐 노동의 가치를 소홀하게 한 것을 비판했고,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육체노동을 강조했다. 또한 클뤼니 수도회의 화려한 예배 형식과 교회 장식에 대한 반감으로 소박하고 단순한 예배 의식을 고수했다. 엄격하게 베네딕트 회칙을 따른 결과 많은 후원자를 얻게 되고, 거액의 기부를 받으면서 수도회는 부유해졌다. 수도회 내부의 농업 생산물과 후원을 통한 수익이 커지면서 점차 가난의 가치를 강조하는 베네딕트 회칙은 느슨하게 적용되었다. 대부분의 수도회가 걸었던 길처럼 시토 수도회 역시 청빈의 가치를 내세우고 시작했으나 부유해지면서 길을 잃고 수도원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이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소유와 재산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움직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 수도원 수도사들은 무소유를 실천했지만, 수도원은 재산과 토지를 보유했다. 시토 수도회의 전성기가 끝난 다음 세기에는, 급기야 완전한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탁발(구걸)하는 수도회가 생겨났다. 재산에 대한 급진적인 태도는 가톨릭교회가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다. 수도회와 이단의 경계선이 점차 모호해졌다.
시대정신을 담아낸 수도회 운동
중세 유럽에서 수도회는 당대 사회와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력을 지니고 있었다. 클뤼니 수도회는 세속 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시도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교회가 지니는 세속과의 차별성이었다. 사제의 독신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성직매매 등을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중세 수도회를 통한 교회 개혁 운동으로 다양한 수도사 사제단이 조직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재속 생활을 하면서 사목 활동을 하는 재속 성직자(secular clergy)와 정해진 회칙에 따라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는 계율 수도사(regular order)로 크게 나뉜다. 계율 수도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한 삶을 살던 재속 성직자들이 수도회의 영향으로 수도회 규율에 부합하여 살아가는 준수도사적 삶을 실천했다. 사제와 수도사에 대한 도덕 개혁은 군사력을 가진 통치 권력과의 전투에서 무형의 정신적 권력을 지닌 교회가 밀리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 거대한 변혁은 자기 비움과 절제라는 수도회의 삶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 결과 교회는 암흑기를 뚫고 중세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자리하게 되는 다음 세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종교가 지닌 고유한 힘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는 일에서 오지 않고 버림과 비움에서 나온다. 그것이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이다. 수도회는 제도화된 교회가 간과하는 이 진실을 끊임없이 깨우치게 했다. 내세우는 이상이 높은 만큼 수도회는 설립 정신을 잃고 쇠퇴하기도 쉬웠다. 그렇게 생성하고 소멸되어간 수도회로 인해 중세 가톨릭이 천 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도회는 오롯하게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종교가 혼탁했을 때 자정을 위해 아래로부터 생겨나 불꽃처럼 시대정신을 이끌다가, 독한 연기를 뿜으며 사그라졌다. 끝 모습은 유사했다. 개혁 주체가 똑같이 개혁 대상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에도 한 개인이나 조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복되는 패턴이다. 여기에서 던져야 할 물음은, 그들이 ‘왜 끝자락에 타락했는가’가 아닌 ‘시대정신을 담아낼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생성되고 있는가’이다. 수도원주의는 급진적 그리스도교이다. 급진성에 지속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지나치다.
1) Constance B. Bouchard, ‘Merovingian, Carolingian and Cluniac Monasticism: Reform and Renewal in Burgundy’, 《The 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41, no. 3》(July 1990), 369-372쪽.
2) Greg Peters, ‘Offering Sons to God in the Monastery: Child Oblation, Monastic Benevolence, and the Cistercian Order in the Middle Ages’, 《Cistercian Studies Quarterly 38, no. 3》(2003), 285-295쪽 참조.
3) Brian Noell, ‘Expectation and Unrest among Cistercian Lay Brothers in the Twelfth and Thirteenth Centuries’, 《Journal of Medieval History 32, no. 3》(January 1, 2006), 253-274쪽 참조.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