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치유를 둘러싼 맥락들

[380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2022-06-30     강동석

교회에 대한 첫 기억이 아닐까 싶다. 요즘도 어쩌다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서면, 대여섯 살 무렵 자주 맡았던 촉촉하고 산뜻한 새벽 공기 냄새가 느껴지곤 한다. 아스라한 기억 속 어머니는 반쯤 잠이 든 나를 업고서 교회로 향했다. 내 자리는 새벽기도회가 열리는 1층 소예배실 뒤쪽이었다. 늘 그렇듯 어머니 곁에 누워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감은 눈 위를 오가던 차가운 새벽의 기운, 귓가를 적시던 찬송과 기도 소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방석을 베고 깔깔한 이불보에 감싸여 새근거리던 날들은 아련하게 평온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와 연을 맺었지만, 교회학교에서 나는 까칠하고 수줍은 아이였다. 마지못해 출석했기에 더 그랬다. 주일 아침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교회에 가기 싫다고, 회초리가 날아들 때까지 자주 고집을 부렸다. 두 살 터울인 형이 중고등부로 올라가자 5학년이 된 나는 혼자 아동부에 다니고 싶지 않아서 긴 농성을 펼쳤고, 결국 반년 넘게 주일 아침 늦잠을 잘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기도 했다. 예배 마친 후 헌금하고 남은 돈으로 닭꼬치를 사서 형과 나눠 먹으며 귀가하거나 목욕탕 가던 일과 몇몇 추억을 제외하고는, 내 마음속에 교회를 위한 자리는 한동안 없었다.

신에 대해서는 오히려 불합리함을 느꼈다. 울분을 가슴에 품었다. 먼저는 내가 원치 않는데도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게 싫었다. 갈수록 하나님이 강압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열세 살 때의 근이영양증 진단(2022년 2월·375호)과 열여섯 살 때의 따돌림 경험(2022년 3월·376호)이 삶을 더욱 냉소하도록 만들었다. 신앙에 반감이 컸다.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가 특히 유난스러웠다. 어쭙잖은 철학 교양서를 끼고 다니면서 공과 시간에 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던졌다. 성경 난제들을 비롯해, 무신론자가 던질 법한 물음에 난처해하는 교회학교 교사의 표정과 그 모습을 두고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보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러한 시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질문을 준비하는 일이 따분해졌기 때문이다. 교회학교 교사도 나름대로 대응책을 마련하면서 종종 평행선을 달리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무의미한 논쟁이 이어지면 되레 분위기만 안 좋아졌다. 그럴 때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질문 하나 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나님이 있다면 보여주세요. 자기 존재도 드러내지 못하는 신을 어떻게 전지전능한 존재로 믿을 수 있나요?” 모든 교회 활동이 헛짓거리로 보였고, 신앙을 놓고서는 온갖 이유를 들이밀며 어머니와 대치했다.

고등학교 1학년으로 접어든 어느 날, 어머니는 작정한 듯 이야기를 꺼냈다. 일종의 ‘내기’였다. “교회에서 하는 10주짜리 프로그램이 있어. 네가 이걸 끝마치고도 하나님이 없고 못 믿겠다고 하면, 교회 다니라는 말은 네 앞에서 입에도 올리지 않을게.” 눈 딱 감고 열 번만 참으면,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없으리라 생각한 나는 자신만만하게 그러자고 했다.

그해 겨울, 나는 내기에서 졌다.

ⓒ이예은

첫 번째 기도 응답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당분간 얌전히 있기로 약속했기에 자리만 채우는 식으로 과정을 밟아갔다. 프로그램이 팔부 능선을 넘어가는 시점이었던가. 1박 2일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일환이었고, 남해의 한 수양관에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따라 저녁 예배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런 집회가 생소하지 않았고, 아침에 집을 나설 때도 별다르지 않았는데 말이다. 찬송가 반주는 은은하니 아름다웠고,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예배 도우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에게서 잔잔한 빛이 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나는 어쩐지 서글퍼졌다.

예배가 끝에 다다르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 나는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진심을 담은, 인생 첫 번째 기도였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예배를 보니, 당신을 간절하게 찾는 이들이 이토록이나 많은데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척 슬플 것 같습니다. 만약 살아계신다면, 제게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리하면 믿겠습니다.” 그때 목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들이 세찬 물살처럼 터져 나왔다. 입안의 것들을 게워내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기도 응답이었을까. 그것은 당시 나로서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던 종교적 체험으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문제 삼는다고 여겨지는 ‘방언’1) 같았다.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얼떨떨했다. 주변에서 놀라는 눈치였으나, 다른 활동들이 있어서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일들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야 정합적인 세상이었다. 그러한 머릿속 인식이 일거에 폐기되었다. 눈을 가리던 비늘이 벗겨지듯, 벼락 맞은 듯 인식의 전환을 맞아들였다. 이제 내 눈앞의 세상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도저히 구성될 수 없는 곳이었다. ‘신 없는 세상’을 떠올린 적 있었던가 싶어질 정도였으니, 참으로 이상스러운 변화였다.

그날 밤, 숙소 테라스 같은 곳에서 홀로 밤하늘의 맨살과 마주했다. 완연한 어둠 같았던 밤은 깜깜하지 않았다. 그것은 푸른 잿빛이었다. 그때 밤하늘에 박혀 자기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별들이 그 자체로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경이로웠다. 나는 괴로운 현재를 보내고 있었다. 병의 진행으로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고, 따돌림으로 인한 신경쇠약이 나아졌음에도 도덕적 강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랬던 내게, 저 별빛들은 ‘내가 너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었다’라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이 광경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가만히 가슴에 담았다. 동시에 구주이신 예수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시야가 트였다. 흑백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어가는 듯했다. 빛이 소멸하는 시간이 아닌, 빛이 선명해지는 시간으로서 밤과 처음 만났다. 나는 생각했다. ‘인생의 답을 찾았구나.’ 하지만 예수가 가리키는 길이 예상한 바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몰랐다.

교회의 중심으로

이때부터 교회와 신앙은 내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련회 마지막 순서에 전날의 경험을 나누었다. 적개심을 드러내던 소년의 변화가 인상적이었던지 이후로도 간증할 기회들이 주어졌다. 순식간에 백몇십 명이 다니는 교회의 중심으로 녹아들었다. 나는 거의 모든 예배에 참석했다. 그해 성탄절 행사에서는 직접 각색한 대본으로 연출한 어설픈 성극을 교회의 무대에 올렸다. 중고등부 주보를 만들게 되었고, 찬양팀에 들어갔다. 주일 오후에는 병원 환자들을 위한 예배에 봉사활동을 나갔다. 수요예배와 금요예배의 구멍 난 자리를 메꾸었고, 수련회나 기타 행사를 준비할 때도 빠지지 않았다.

성경 읽기, 기도, 봉사 등 그 무엇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성경 일독을 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기에, 나는 최대한 빨리 그것을 성취해야 했다. 교회에서 제안하는 통독 프로그램을 따라가면서 별도로 성경 전체를 여러 차례 읽었으며, 짬이 날 때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길을 지날 때 사람들이 보이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의 인생을 놓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내 휴대전화에 저장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두 시간 기도하는 일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기도제목이 넘쳐났다. 토요일마다 중고등부 남자 후배들을 집으로 데려와 밤늦게까지 기도 모임을 진행했다. 다음 날 아침, 이들과 손잡고 예배하러 가는 일이 익숙한 주일 아침 풍경이 되었다.

따돌림 경험으로 관계 맺기에 위축돼있던 내가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곳도 교회였다. 고1 겨울의 극적 체험 이후 초기에는 사람들과 만날 때 로봇처럼 뻣뻣하고 어색하게 인사하곤 했다. 교회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면서 서투른 모습들이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찬양팀을 하면서 음치에서도 탈출했다. 이후 여러 번 은사주의적 경향을 심화할 법한 체험을 하게 되면서, 내가 하나의 계시처럼 받아들였던 말씀은 예레미야 33장 3절이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균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 난제들을 비롯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교회학교 교사에게 던졌던 질문들은 모두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당장에 창세기의 ‘선악과’부터가 문제였다. 중고등부 교사나 목사의 설명으로는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다. 답변이 일차원적으로 느껴졌다. 교회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신앙 서적을 사서 읽는 것이 궁금증을 해결하는 길이 되었다. 문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지도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찾아 읽었다. 딱히 무엇을 사야 할지 몰라서 당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간 신앙 서적을 주로 구입했다.

필립 얀시, 리 스트로벨 유의 복음주의권 작가들이 남긴 저술을 읽으며 당시로서는 유의미한 도움을 얻기도 했지만, 베스트셀러 대부분은 ‘성령운동’의 영향이 묻어나는 책들이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 전후 행사의 여파로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염원하던 말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고,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서 분석하듯이 뒤틀린 ‘성령운동’이 한창이었다. 나는 ‘방언’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기에, 김우현의 《하늘의 언어》(규장)를 비롯해 방언 및 성령 은사에 대한 논의를 담은 서적을 관심 있게 읽었다. 조용기와 떠오르는 치유사역자였던 손기철의 책과 더불어 피터 와그너, 베니 힌 등 불건전한 ‘신사도 운동’ 계열 저자의 책도 열독했으니, 머잖아 질병의 ‘완전한 치유’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 사람’을 만나다

당시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나는 율법주의자였다. 온종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았다. 주일 저녁에야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하면 방전되어 신발만 벗은 채 현관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기 일쑤였다. 고2가 끝나가던 시기, 그날도 어김없이 현관에 엎어져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나를 흔들었다. ‘예언 사역’2)을 하는 분이 집회 인도차 근처 지역교회에 들렀다는 이야기였다. 반강제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도중에 이상한 설명을 들어서 나는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 그를 ‘하나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기도를 받으라고 해서 억지로 방에 들어갔더니, 막 노년으로 접어드는, 몸집이 작고 온화한 여성 한 분이 앉아있었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온몸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그러자 그는 가장 먼저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혼자 간직하고 있던 비밀스러운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는 나의 질병과 신앙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었으며, 깊은 곳에 담아둔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을 알아보는 말들을 쏟아냈다. 기도받는 그 자리에서 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가 하나님이 ‘병 고침의 은사’를 가진 남편 목사를 통해 내 병을 고치시리라 약속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첫 만남은 끝이 났다.

그 ‘사모’는 경상남도 어느 지역에서 남편 목사와 함께 목회하며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만남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겼다. 소위 말하는 ‘예언 사역’과 ‘치유 집회’를 이끌던 목회자 부부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4-5년 동안 이어졌고, 내 쪽에서 연락을 끊으면서 관계가 끝이 났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나의 ‘멘토’였다.

어렸던 내게 근이영양증은 ‘고쳐야 할’ 대상이었지 ‘함께 살아갈’ 동지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치유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소명, 즉 장애를 허락하신 이유라고 생각했다. 나는 믿음을 갖고 몇 달에 한 번씩, 때로는 몇 주 간격으로 꾸준히 기도원을 방문했다. 교회 후배들을 그쪽으로 이끌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치유되었다는 선포를 듣고 몸 상태를 테스트하고자 후배와 등산 갔던 적이 있다. 나름 잘 올라갔는데, 위약 효과 같은 어떤 심리적 작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치유를 받았다고 믿고 지냈다. 병의 진행이 멈췄다고 생각했고, 점차 몸이 나아지리라 기대했다.

빠져나오기까지

기도원은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이름을 걸고 정기 말씀 집회를 진행하곤 했다. 기복신앙이나 율법주의 신앙의 잘못된 행태를 분석하고, 영국과 미국의 성결운동 일환인 케직 사경회에서 전했을 법한 내용을 설파했다. ‘옛 자아’를 십자가로 넘기고, 내가 철저하게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게 해야 한다는 식의 메시지가 핵심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필기했고, 손수 타이핑하여 자료를 정리했다. 나는 자료를 따라 토마스 아 켐피스, 프랑수아 페늘롱, 잔느 귀용, 앤드류 머레이, 제시 펜 루이스 등의 저술을 탐독하면서 관상(觀想), 그리고 자기 부인을 넘어선 자기 소멸을 통한 ‘완전주의적 성화’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사실 이 저술가들 작품은 맥락을 알고 읽으면, 얼마든지 선용할 수 있는 양서들이다. 문자주의적으로 집착하듯 파헤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죄를 짓지 않는 단계까지 마법처럼 뛰어오를 수 있는 ‘제2의 축복’3) 같은 유의 성화 체험이 가능하리라고 믿게 되었다. 집회에서는 끊임없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여기고’, 내 안에 예수가 산다고 ‘여기면’ 그런 영역으로 도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들이 선포되었다. 나는 ‘완전한 치유’와 더불어 한없이 그것만을 추구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신학 배경이 본래 개혁주의였기에, 청교도 계열 저술가들 저서도 추천받으면서 토마스 굿윈, 스테판 차녹,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아더 핑크 등의 책 또한 열심히 읽었다. 나는 앞서 탐독한 책들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하면서 결벽증적으로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몰아가는 청교도 계열 책들 가운데 표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책들에 심취하는 것이 문젯거리로 작용했다. 각각의 맥락 차이에 대한 고려 없이 파고들다 보니, 읽을수록 부조화를 느꼈다. 한쪽은 ‘자아’를 지우면 끝도 없이 올라가는 ‘신령한 체험’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했고, 다른 한쪽은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은 죄의식의 수렁 속으로 몰아넣어 나를 ‘허무주의적 영성’으로 이끌었다. 이 난맥상은 도통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해결의 실마리를 준 것도 책이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신앙감정론》(부흥과개혁사)이었다. ‘참된 신앙 감정’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하면서, 온갖 생각과 체험과 행위를 원점에서부터 돌아보게 했다. 나의 모든 신앙 경험을 하나하나 되짚어보고, 모순점들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나는 모든 경험을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진실을 인정했다. 당연하게도, 이 기도원과 교류하면 할수록 내 신앙생활은 점차 의존적으로 변해갔었다. 이미 하나님 뜻을 분별한다는 ‘예언 사역자’가 신앙의 중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일상 중에 고민거리가 생겨도 그것과 오래 씨름하지 않게 되었다. 기도원에 가서 물어보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이다. 일상의 모든 판단 기준을 맡겨놓고 있었던 날들이다.

그러다 확실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예언’까지 듣게 되었다.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급작스럽게 기도원을 방문한 때였다.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가족 중 한 명이 문제적 단체에 빠지게 되었으며, 치유되었다던 몸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도를 받았더니, 가족 문제를 놓고는 ‘왜 예전에 의심 가는 일이 있었는데도 묻지 않았느냐’는 타박이 이어졌고, 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질병이 찾아왔다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최종적으로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오는 데 결정타를 날린 사건들이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북한 개입설과 땅굴 음모론이 아무렇지 않게 이 교회의 목사 입에서 나왔고, ‘합성’으로 밝혀진 지 오래인 ‘네피림 유골’ 사진을 진품으로 믿어 세미나까지 열었으니 말이다.

잭 레비슨의 《성령과 신앙》(성서유니온)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비롭게 보이는’ 종교 현상을 대하는 초대교회의 균형 잡힌 태도를 소개한다. 고대 텍스트를 면밀히 분석하여 초대교회가 신비 체험, ‘황홀경’에 열린 자세를 취했지만 충분한 숙고 및 검증 과정을 거쳐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덕’과 ‘지성’의 이름으로, 공동체 내 황홀경적 현상에 관한 치열한 논쟁과 치밀한 분석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신약에서는 이방인에게 선교의 문을 열기로 결정하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회의’가 대표적 장면 중 하나이다(15:28 “성령과 우리는 …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이 닥치리라는 ‘성령의 메시지’를 반복하여 받고 주변에서 만류하는데도 의연히 그 길을 가는 사도행전 21장의 바울도 함께 생각해볼 사례이지 않나 싶다.

예수의 시선

박영돈은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서 오늘날 만연한 ‘치유 사역’의 근본 문제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보다 이미 실현된 종말에 과도하게 치우치는 오류”라고 지적한다(120쪽). ‘아직’(not yet)을 제쳐놓고 ‘이미’(already)에만 집착하는 형국을 비판한 셈인데, 이어서 “이같이 ‘이미’ 실현된 종말에 과도하게 치중하는 치유 신학은 고난과 연약함을 거부하고 아직도 기다려야 할 미래의 축복을 성급하게 청구한다”고 본다(124쪽). 나 또한 기도원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스스로 타자화하면서 ‘미래’의 시간으로 밀어내고 있던 ‘현재’의 내 ‘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나부터가 먼저 소외시키고 있었던 내 몸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근현대 한국의 장애와 질병을 둘러싼 ‘치유 폭력’을 다루는 장애학적 문화비평서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후마니타스)은 ‘접힌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장애인의 현재 몸을 지우고 은폐함으로써 제시되는 ‘치유 드라마’의 폭력성을 일깨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이 훈련을 통해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 재활을 통해 이전의 ‘적절한’ 몸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생각, 장애와 만성적 질병은 영적·가족적·의료적 개입을 통해 반드시 치유되어야 한다는 생각 등은 모두 장애인을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분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유예시킴으로써 현재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기도 하다.”(360쪽)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치유 사역에서 장애인들의 ‘현재’를 향한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로완 윌리엄스의 《복음을 읽다》(비아)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 위에 메시아적 권위를 세우게 될까 봐’ 조심하면서도 ‘깊은 연민에 마음이 동요하여’ 혹은 ‘편견 어린 시선에 분노하여’ 눈앞의 장애인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치유하시는 마가복음 속 예수를 그린다. 마가복음은 ‘미래로 도피할 길을 만들어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에 주목하여 반응하는 신앙을 지향하는 듯하다(《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비아). 김종우는 ‘함께 아파함을 통한 전인적 연대’라는 관점으로 ‘예수의 기적적 치유’를 읽어내는 논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적인 것이다. ‘사랑했었다’는 것과 ‘사랑할 것이다’라는 말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

김홍덕의 《장애신학》(대장간)에서 잘 지적하듯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치유’는 현대적 정의와 다르다. 예수께서는 ‘육체적·영적·사회적 회복과 구원’을 통전적으로 보았기에 ‘전인격적 치유’를 행했다. “현대 장애이론을 빌리자면 치료가 의학적 모델이라면 치유는 사회적 모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치료는 ‘정상’을 목표로 하지만 치유는 ‘회복’을 향하여 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치료와 치유를 겸한 전인사역이며 하나님나라라고 하는 사회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회복사역이다.”(333쪽)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유명 부흥사의 ‘치유 집회’가 열리면 나를 데려가곤 했다. 기도원을 다니던 시절, 나 또한 다른 곳에서 진행하는 여러 ‘치유 집회’를 찾아가봤다. ‘치유’를 부르짖게 하고 간증을 시키는 그 현장에서 장애인 접근성을 고려한 조치들을 해놓는다거나 고침 받지 못한 그들의 ‘현재’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못 봤던 것 같다. 그곳까지 가는 데 들인 장애인들 혹은 그 가족들의 개인적 수고는 당연시되고 ‘믿음의 크기’와 같은 명목으로 등치되었다. ‘지금 이 순간’의 ‘총체적 구원’을 이야기한 예수의 시선을 염두에 둔다면, 여러모로 대조적인 풍경이 아닌가.

■ 주

1) ‘방언’에 관한 의견은 교파 및 신학자별로 다양하다. 성경을 배경 삼아 내 경우와 유사한 체험(“회심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에 기반하여 방언을 논증하는 내용이 크레이그 키너의 《현대를 위한 성령론》(새물결플러스) 318-322쪽에 나온다. 나는 사도행전 2장(‘외국어’)과 고린도전서 12-14장(‘인식 불가능한 언어’)의 방언을 다른 종류라고 보는데, 이에 관한 해석은 박영돈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IVP) 4장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를 참고하라. 가톨릭·불교·이슬람 등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도 참고삼아 언급해둔다. C.S.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홍성사)에 실린 1944년 성령강림절 강연 원고 ‘변환’에서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체험’이라는 명명 아래 ‘방언’을 둘러싼 난점을 논한다. ‘신경의 어떤 작용’으로 보지만, 위로부터 변환된 ‘거룩한 현상’일 가능성도 있음을 짚는다.
2) 나는 이 같은 ‘예언 사역’을 두둔할 생각이 없다.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의 다음 의견을 참고하라. “바울 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고전 14:1).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고전 14:29).”(36쪽) 막스 터너의 《성령과 은사》(새물결플러스) 18장 ‘오늘날의 예언’을 보면, 이 문제에 관한 매우 상세한 논점을 살필 수 있다.
3) 박영돈,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SFC) 12장 ‘제2의 축복’에서 이에 관한 논점을 일별할 수 있다.
4) 김종우, 〈고통에서의 전인적 연대를 위한 신학의 기여 가능성 : 예수의 ‘함께 아파함’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신학논단 Vol. 104》(2021), 158쪽.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