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마르다
[380호 커버스토리]
음향팀장의 늦은 고백
우리 찬양팀 보컬이었던 소윤이는 음치였다. 목소리는 어찌나 우렁찬지, 메인 스피커에서 소윤이 마이크 볼륨을 줄이는 일은 음향팀장이던 나에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이 미션은 소윤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꽤 난도가 있었다. 소윤이가 자기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며 모니터 볼륨을 키워달라고 요청할 때면 난감했지만, 목소리가 잘 들리도록 더 큰 소리로 찬양하게 될까 싶어 볼륨을 얼른 조금 올려주고는 했다. 그리고 한창 은혜받아 정신없는 틈을 노려 다시 줄였다. 그렇게 찬양 시간 내내 헤드폰을 끼고 보컬 소윤이, 락커의 영이 충만했던 일렉기타, 연습 부족으로 곡 순서를 자꾸 틀리는 세컨건반 등 여러 소리를 처리했다. 나는 원래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소리를 듣다가 다른 소리를 놓치게 될까 봐, 혹은 몰입했다가 순서를 잊게 될까 봐 어느 순간부터 찬양을 멈추었다. 소리는 시끄러웠지만 조금 고독하다고 생각했다.
엘사 담임목사님과 겨울왕국
나도 무슨 음악 프로듀서라도 되는 듯이 찬양팀 동료들 노래나 연주 실력을 판단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늦은 변명을 해보자면 내가 이렇게 됐던 것은 당시 교회의 경향 때문이었다. 우리 교회는 화끈하게 냉정한 교회였다. 미지근한 온도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건물 외관만 보더라도 교회보다는 압구정로데오역 근처 백화점 같았고, 지하 5층까지 있는 주차장은 바닥을 자주 칠해서 언제나 반짝거렸다. 우리나라가 가장 뜨거웠던 2002년, 근처 광장에서 함께 거리 응원을 하던 시민들이 행여나 화장실을 이용하러 들어올까 봐 그 시기 교회 문은 꽁꽁 잠겨있었다. 덕분에 화장실은 늘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울타리가 높은 이 차가운 겨울왕국을 짓고, 왕국이 녹지 않도록 성실하게 관리하던 왕은 바로 담임목사님이었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려면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로 올라가야 한다. 나른하게 졸릴 만큼 조용한 어른 예배 도중 예배당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기 엄마는 당황한 채 아기를 안고 얼른 그곳을 빠져나갔다. 당시 설교하던 ‘엘사’ 목사님은 그 아기 엄마 뒷모습에 대고 앞으로 다른 사람들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아기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 영아부도 있고 자모실도 있으니 그 공간들을 이용하라는 말과 함께. 웃음기 하나 없는 목사님 얼굴을 보며, 소리 나지 않도록 숨을 최대한 작게 쉬려고 노력했던 어린 내 마음을 기억한다.
‘엘사’ 목사님이 혼자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목사님이 예배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시간이었다. ‘찬양인도자’라는 직함은 이 겨울왕국의 언어로 바꾸면 ‘타임키퍼’일 정도로 찬양이 시작되는 시간, 곡마다 끝나는 시간, 다 같이 기도하는 시간, 대표기도 시간 등을 오차 없이 맞춰내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래야 겨울왕국 2호점의 이원 중계에도 차질이 없었다. 목사님은 어느 주일 설교 도중 예배당에 늦게 들어오는 성도들에게 앞으로는 시간에 꼭 맞춰 오라고 했다. 다른 성도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몇 주 뒤, 예배 시작 이후에는 출입문을 막아놓기 시작했다. 물론 예배당 밖에서 모니터로 예배해도 됐지만, 소리도 잘 안 들리고 자리도 불편해서 나는 10분이라도 예배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아예 본예배를 건너뛰고 청년부 모임 시간에 맞춰 가기도 했다.
윗물이 차가우니 아랫물도 차가웠다. 청년부 담당 목사님은 우리 찬양팀 소속 자매들에게 형제들 예배에 방해되니 살이 비치는 검은 스타킹을 신지 말라고 했다. 한 장로님은 주일 본예배 음향 박스에 여자가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다며 여자는 토요일 리허설 때만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에서도 한 번 안 잘려본 나는 주일 본예배 음향보조에서 잘리게 됐다. 목사 사모가 꿈이었던 우리 찬양팀 리더는 늦잠 자서 화장을 못 했다는 여자 보컬에게 그래도 화장 안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건 조금 실례가 아니냐며 얼른 화장하고 오라고 했다. 이쯤 되면 아랫물이 차가운 건지 탁한 건지 분간이 안 되지만, 아무튼 이 겨울왕국의 예배를 준비하는 대다수가 ‘일반’ 성도들의 예배를 방해하지 않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은 틀림없다.
나는 윗물 온도에 맞춰져 있던 충실한 아랫물이었을 뿐이었다. ‘일반’ 성도들이라고 이런 분위기에 동화되지 않았을 리 없는 탓에, 나는 무대에 선 보컬이 음 이탈 나거나 실수했을 때 수상스럽게 수군대던 여러 ‘일반’ 성도들도 몇 차례 목격했다. 이런 교회에서 소윤이 마이크 볼륨을 줄이는 일은 다른 사람들 예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내가 조율하는 소리가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실력 증진을 위해 본예배 음향보조까지 자처했다. 그렇게 잘릴 줄은 몰랐지만.
휘연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음향 콘솔 앞에서 헤드폰을 끼고 고독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그 옛날 함께 찬양팀에 있던 휘연이 생각이 났다. 뮤지컬학과에 재학 중이던 휘연이는 춤에 가까운 동작을 하며 찬양했는데, 그게 참 즐거워 보였다. 우리 찬양팀 콘티에는 독창해야 하는 솔로 파트가 거의 매주 있었는데도 찬양팀 리더 오빠는 한 번도 휘연이에게 솔로를 맡기지 않았다. 리더급 언니 오빠들은 휘연이가 늘 솔로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찬양하는 마음이 아니라 무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솔로를 못 하던 휘연이는 어느 날 드디어 기회를 얻었고, 토요일 찬양팀 연습 도중 솔로 부분을 부르면서 그동안의 한을 풀 듯 아주 멋진 기교를 부렸다. 그 순간 그 애의 들뜬 표정을 보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연습이 끝날 때쯤 리더 오빠는 휘연이에게 줬던 솔로 파트를 철회하고 나에게 줬다. 조금 얼떨떨했지만, 나는 휘연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솔로가 부담되는 척 한껏 겸손을 떨며 최대한 담백하게 부르려고 노력했다. 휘연이는 그날 이후로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고 뜬금없이 휘연이가 생각났다. 그건 아마도 음향을 조절하며 재미없는 예배 시간을 보내던 내 모습이 휘연이의 들떠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는 데 뿌듯함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 교회에서 예배를 섬기려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지. 재밌고 즐거운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길 줄도 알아야지. 힘들고 고된 일일수록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거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까지 달리셨잖아.’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교회 일들을 하며 나는 점점 타성에 젖어갔고, 결국 모든 일이 재미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재미없을수록 더 좋은 봉사니까, 내 공이 드러나지 않을수록 나는 더 거룩한 예배자니까, 좋은 일이겠지.’ 그때는 이런 자기 위로가 나를 교회에서 계속 봉사하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었던 마르다-마리아 이야기에 관한 설교는 곧장 나의 희미한 자기 위안을 얄밉게 비웃었다.
마리아에서 마르다로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눅 10:38-42, 이하 새번역)
모태신앙 출신으로 교회를 20년 넘게 다니면서 여러 차례 들었던 이야기. 그날따라 설교가 귀에 잘 들어왔다. 내가 이 교회 다닌 경력이 얼만데. 설교가 시작될 때 말씀을 봉독하면서부터 이 설교가 어떻게 흘러가리라는 것은 진작 예상할 수 있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일에만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메시지였다. 마르다는 틀렸고, 마리아가 맞았다. 억울했다. 언제는 섬기라며. 열심히 봉사하라며! 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 수많은 마리아들을 위해 내 온 주말을 활활 태워 일했는데. 누군가는 해야 했을 일을 떠안고 성실하게 했을 뿐인데. 그거 힘들다고 한마디했기로서니 나를, 아니, 마르다를 그렇게 꼽을 주시다니. 이날의 설교는 교회 일과 예배를 양 겨드랑이에가득 끼고 외줄 위에서 균형을 맞추려 아등바등하던 나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설교에서는 마리아가 마음에 기쁜 대로 행했기 때문에 불평하던 마르다보다 옳았다고 했다. 아니, 나라고 해서 예배하며 마음이 온전히 기뻤던 적이 왜 없었을까. 입시와 가정 때문에 힘들었던 고등학교 3학년, 나는 학원은 빠져도 교회는 안 빠졌고 입시 준비랍시고 철야기도를 하던 ‘신앙걸’이었다. 어디에서도 위로받기 쉽지 않았던 그 시절, 나는 한 선교단체에서 지부 모임 기도회 반주자로 열심히 활동했다. 그 기도회는 다른 악기 없이 간사님의 인도와 내 건반으로만 진행됐다. 하루는 반주하면서도 지금 반주가 너무 잘되고 있구나 싶었다. 간사님의 인도 도중 잔잔히 깔아놨던 BGM은 내가 생각해도 예술이었다. 도전하는 멘트를 할 때는 낮은음을 많이 써서 웅장한 느낌을 주다가 킬링 포인트에서는 한 번에 소리를 쫙 빼며 여백의 미를 두었고, 통성기도가 시작될 때는 점점 고조되는 느낌으로 건반을 치다가 다음 곡으로 넘어갈 때는 또 담백한 트랜지션으로 강약 조절을 해냈다. 그날 내 반주는 세상 사람들이 들었다면 신들렸다고(?) 표현했을 법했고, 당시 나의 언어로는 성령님이 임재하셨다고 생각했다. 모임이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 한 구성원은 내가 반주할 때마다 은혜를 받는다고 했다. 인도하던 간사님도 흐뭇한 표정으로 공감을 표현해주었다. 고등학교 내내 실용음악 입시를 준비하다가 피아노를 잘 못 쳐 고3이 되면서 그 진로를 포기했던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인간적인 기쁨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서는 부족했던 나의 피아노 실력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는 참 좋다는 예수님의 위로처럼 들렸다.
청년부에 올라와 찬양팀에서 보컬을 맡던 수많은 주일 중 어느 하루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날은 유독 찬양이 은혜로웠다. 수백 명이 보고 있는 무대에 서있었지만 내 앞에는 예수님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생각하지 않아도 기도가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언뜻 하나님 얼굴을 본 것도 같다. 하늘을 향해 번쩍 든 오른팔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너무 감격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은혜와 감동의 찬양이 끝나고 한껏 벅찬 마음으로 무대를 내려왔을 때, 당시 찬양팀 리더였던 언니가 나에게 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계 카메라에 이상하게 잡히니 표정을 조금만 덜 과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여, 그 찬양 시간 내내 직통으로 만나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귀띔해주시지 아니하셨나이까!
또 하루는 무대에서 정말 흥이 났다. 그때 우리 찬양팀의 십팔번은 〈좋으신 하나님〉이었다. 가뜩이나 신나는 찬양이었던 데다가 멤버들끼리의 합은 또 어찌나 좋았는지 소프라노·알토·테너 파트 화음이 딱딱 맞아떨어졌고, 이 곡을 자주 연습한 덕분에 악기들도 완벽한 소리를 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이스라엘 휴튼이나 힐송이 부럽지 않았다. 찬양이 너무 신났던 우리 보컬들은 리허설 도중 방방 뛰고 춤을 췄다. 리허설이 끝나자 리더는 보컬들을 소집해 노래가 아니라 찬양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말로 우리를 자중시켰다. 나랑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제일 신이 났던 나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다. 이 일은 새롭게 보컬 파트 팀장이 세워지기 몇 주 전에 일어났는데, 당연히 경력도 많고 실력도 있었던 내가 될 줄 알았던 팀장 자리는 가장 얌전하고 ‘참한’ 친구로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날, 내가 휘연이가 됐구나, 생각했다. 음향기기를 조금 다룰 줄 알았던 나는 음향 파트 팀장을 맡게 됐다.
내가 기쁨으로 예배에 집중하던 시절, 교회에서는 나에게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기뻐하는 일을 빼앗아 남에게 주고, 내가 싫어할 만한 일들을 시험처럼 줬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필요한 일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직간접적으로 나를 구슬렸다. 나는 내가 힘든 만큼, 진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마르다-마리아 설교를 들은 그날, 교회에서 일을 덜하는 ‘일반’ 성도들 얼굴에 안도감 같은 게 보였다. ‘나는 분주한 일들보다는 말씀을 좇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수천 명의 성도 사이에서 나는 외로웠다.
마리아는 재미없었다
얼마 안 가 나는 겨울왕국에서 나왔다. 원래 헤어짐을 참 힘들어하는 사람인데도,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회를 떠나면서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이 교회 안에서 마르다였던 내가 마리아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환경이 필요했다. 몇 주 후, 친구가 다니던 교회에서 오랜만에 새 신자가 된 나는 교회에 미리 가서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아도 됐다. 일주일 중 주일 하루만 나가면 됐다. 낯선 기분이었다. 설교 시간에는 설교만 들으면 됐고, 기도회를 할 때는 눈을 감고 기도에 집중하면 됐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창고 같은 음향실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고, 청년부 모임 도중 누구 하나 소외되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는 일도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교회에 하루쯤 안 나간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교회 운영진의 결정을 가지고 일반 성도들 눈치를 보며 임원들과 싸우는 것도 이제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몇 주 정도 마리아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게 내 마지막 교회 생활이었다. 마르다에서 마리아가 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 비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이 글을 끝내면 더 극적이겠지만, 솔직히 말해 그렇지는 않았다. 20여 년 동안 내 모든 숨의 이유였던 것을 내려놓는 데는 앞서 언급했던 것들보다 지긋지긋하게도 많은 결정적 사건이 필요했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들을 지나 지금의 ‘나’가 됐다. 하지만 마리아로 살았던 그 몇 주 동안 교회라는 공동체에 흥미를 잃게 됐던 것은 사실이다. 막상 일하지 않고 예배에만 집중하는 것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예수님 발아래서 조용히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재미없었다. 누군가 잘 세팅해놓은 자리에 참석하기보다는 직접 예수님을 초대하고,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예수님을 위해, 손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힘쓰고, 힘든 일이 있으면 당당하게 예수님과 독대도 하는 마르다가 훨씬 내 스타일이었다.
마르다, 엄마
교회를 떠난 딸 때문에 기도제목이 늘어난 우리 엄마는 일반 교인에서 시작해 집사와 권사를 거쳐 작년부터는 신학대학원에 다니며 한 중형교회 전도사로 맹활약 중이다. 엄마는 수십 년 동안 교회 내에서 정말 많은 사역과 봉사를 해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교회에서 혼자 하기에는 벅차 보이는 일들을 도맡아 하는 엄마가 걱정돼 잔소리처럼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해?” 이미 뒤따라올 답에 대한 잔소리를 장전하고 퉁명스럽게 던진 딸의 질문에 프로 예배 준비자 우리 엄마는 예배 준비와 예배드림은 분리된 마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순간 핀잔하려는 마음이 쏙 들어가고 멀리 떠나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보컬로, 반주자로, 음향으로, 셀 리더로, 초등부 선생님으로, 온갖 교회 행사 봉사자로 활동했던 시간.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분주한 예배 준비가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들어왔던 하나님 말씀을 직접 행동으로 옮겼던 나의 예배드림 그 자체였다. 새로 다녔던 교회에서는 그런 예배드림이 없었기 때문에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마르다의 봉사 또한 행동하고 실천하는 예배였다. 마르다도 처음부터 불평하는 마음을 품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예배가 그랬던 것처럼, 마르다의 예배도 세상의 시선, 당시 문화적인 관습들, 먼저 된 자의 책임감 같은 것들 때문에 점점 재미없어졌을 테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눅 10:41-42)
말씀을 다시 들여다보니 예수님도 마르다의 봉사 자체를 꾸짖으셨던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기쁨으로 시작한 행위에 점점 휘둘리게 되는 마르다를 걱정하신 게 아니었을까? ‘손님맞이를 잘해야 해, 음식이 제때 나와야 해,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실 때 손님들이 최대한 편하게 계실 수 있어야 해, 해내야만 해.’ 이런 즐겁지 못한 마음들을 너무 무겁게 갖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가 아니었을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마음이 많이 분주하구나. 청중들 시선에, 리더의 권고에, 목사님 지적에 염려가 많구나. 그런 것들이 네가 택한 좋은 몫을 빼앗아가게 두지 말아. 유진아, 유진아, 알겠지?” 마르다가 어떠한 말대꾸 없이, 후에 예수님을 계속 따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 말씀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내 생각이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교회를 떠난 지 6년. 이제야 조금이나마 그때의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어지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우리 아빠가 마리아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아빠는 학창 시절 교회에서 회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꾸준히 교회에 다니다가 결혼하고 나서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아빠는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엄마에게 맨날 소리를 질렀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교회와 성도들을 저주하고 엄마를 무시했던 우리 아빠는 집안이 홀딱 망하고 또 망하고 난 요즈음에야 드디어 교회를 성실히 나가게 됐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우리 아빠의 예배 준비는 주일 아침 양치하고 머리 감고 그나마 조금 덜 해진 옷을 골라 입는 것이 전부다. 아빠가 교회 갈 준비를 하는 주일 아침, 이미 새벽부터 교회에 출근한 엄마는 열심히 설교하고 교회를 가꾸고 운전을 한다. 우리 엄마의 예배 준비, 예배드림이 있어서, 딸랑딸랑 교회 가는 우리 아빠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임을 안다. 부디 우리 엄마의 예배는 방해받지 않기를. 가끔 힘이 들어도 예수님과 화끈하게 대화로 잘 풀어내기를. 마르다처럼.
이유진
‘기독교학과 나왔는데 왜 교회 안 다니냐’라는 질문 좀 그만 듣고 싶어서 전공은 최대한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직업은 없고 정해진 진로도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