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예배

[380호 사람과 상황] 《예배의 감각》 옮긴이 이광희 목사

2022-06-30     이광희
ⓒ복음과상황 정민호

“ ‘예, 아’ 녕하세요. 예배하는 구독자 여러분, 예배에 관한 아무 말입니다.” (‘예배에 관한 아무 말’은 채널명의 앞 글자를 따서 ‘예아’라고 부른다. 이를 이용한 오프닝 멘트. ― 편집자)

이는 ‘교회덕후’ 이광희 목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예배에 관한 아무 말’ 오프닝 멘트다. 예배를 향한 그의 관심과 활동은 누구보다 본격적이다.

현재 서울의 한 교회 부목사인 그는 코로나 시기 이 채널을 통해 예배와 교회력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내일의 예배》(브랜든선교연구소)와《예배의 감각》(비아)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본지에 ‘교회력, 계절의 독서’를 연재해 작년 8월호부터 올해 6월호까지 교회력에 맞춰 읽을 만한 서적을 소개한 필자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5월 30일 이광희 목사 자택에서 진행했다. 그의 신앙 여정, 그가 꿈꾸는 예배와 목회, 최근 출간된 《예배의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미국 유학을 위해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유로 유학을 포기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재작년 가을에 미국의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두 차례 연기하고 입학을 기다리며 미국에서 생활 기반을 닦았다. 교회도 그곳에서 다녔는데, 일주일에 한 번 갔다.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정말 낯선 경험이었다. 좋은 설교와 좋은 찬양이 있었지만, 내가 그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여태까지 해왔던 신앙생활이 너무 그리웠고, 무엇보다 다시 목회를 하고 싶어졌다.

석사와 박사까지 하면 넉넉잡아 10년 정도는 목회에 에너지를 쏟을 수 없겠더라. 10년 동안 손님이나 이방인처럼 교회를 다닐 수 있을지, 내 신앙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아내와 미국에 계시는 부모님,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한국으로 돌아와 사역을 이어가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가족들은 존중해주셨다.

- 현재 한국에서는 어떻게 목회하고 있나.

똑같다. 평범한 목회를 하고 있다. 예배 준비하고, 졸린 눈 비비면서 새벽기도회에 가고, 교인들 심방 가고, 행정 일도 하고, 가끔 능력 밖의 과한 요구도 받아서 처리한다.(웃음)

이 교회에 부임하면서 이때까지 해온 활동을 빠짐없이 다 이야기했다. 당시 진행 중이던 연재와 번역 작업, 유튜브 운영까지. 그간 썼던 글도 모두 보여드렸다. 이런 활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사역에 지장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계속하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그래서 교회로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에는 사역 외의 일을 몰아서 한다. 글도 쓰고, 유튜브 영상 녹화도 하고, 강연도 불러주면 나간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지금까지 어떤 예배 경험이 있는지, 어떤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듣고 싶다.

지금도 “신사도 운동부터 기독교 사회운동까지 닥치는 대로 발을 걸친 날라리 구도자”라고 나를 소개하곤 한다. 예배 경험이라면 신사도 운동부터 기독교 사회운동까지 다양한 그룹에서 어느 정도, 최소 스태프 이상으로 관여해봤다. 대학교 입학 전까지는 평범한 지역교회를 다녔기에 특별한 예배 경험은 없었다. 그러다 목사가 되겠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진보적인 분위기의 한신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선배들이 하는 말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 ‘하나님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느냐’ 등, 후배들을 깨우치고자 하는 충격 요법에 해당하는 말들과 마주하며 혼란을 겪었다.

그때 한 친구가 신사도 운동 공동체의 집회에 초대해줬다. 나는 신사도 운동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진보신학에 대한 반발이 워낙 컸을 때라서 종교적이고 은사적 신앙으로 확 넘어갈 수 있었다. 그곳은 안수를 통해 성령과 은사, 능력을 전이시킬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였다. 인도자가 안수기도하면 사람들이 쓰러졌는데, 나는 뒤에서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받아주는 역할을 했다. 내면에서 내가 배우는 신학과 당시 접하던 신앙이 계속 충돌했지만, 그곳에서 손을 뗀 이유는 그런 고민과 상관없었다. 신사도 운동 공동체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 것이다. 은사와 역할에 따른 아주 강력한 권력구조로 운영되었다. 그 일로 종교적 열심과 상관없이 그곳에서 손을 떼었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 진보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한 건가.

오늘날 아픔이 있는 현장으로 가게 된 것도 역시 사회운동, 사회참여를 향한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현장 기도회에 자주 가던 친구가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그냥 ‘전도사니까 기도해달라고 하면 어디든 가야지’ 하는 생각에 따라갔다. 그냥 와서 힘든 사람들 위로하는 기도를 해주면 좋겠다기에 목회자로서 기도하러 간 것이었다. 그때 그곳에 강제집행을 시도하는 철거 용역들이 들이닥쳤다. 기도하러 갔다가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걸 봤다. 신사도 운동 집회에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걸 보다가 그때 처음으로 일터, 삶터에서 용역에 의해 끌려 나오는 사람들을 본 것이다. 그동안 공부했던 신학이 이제야 현장과 만나는 느낌이었다. 내 안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던 것들이 합류되면서 이런 현장에서 계속 예배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옥바라지선교센터라는 에큐메니컬 기독 사회운동 단체가 시작할 때 함께했다. 지금도 그때 내가 만든 예배 형식 일부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 당시 기도회 현장에는 예배 형식이 따로 없었나.

사도신경, 찬양, 대표기도, 설교로 이어지는 간소화된 집회 형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곳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으로 바뀔 수 있는 장소다. 철거 용역이 언제 사람들을 끌어낼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건들지 못하게 예배 형식을 무겁게 만들었다. 영적이고 종교적인, 엄숙하고 숭고한 모습이 드러나도록 구성했다. 누가 봐도 예배하는 사람들로 보이게 해서 쉽게 방해하거나 해칠 수 없도록 말이다. 예배 순서를 짤 때는 다른 순서를 짧게 해도 성찬은 무조건 하자고 했다. 물론 보여지는 것만 고려해서 예배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그 예배 형식이 소란한 상황에서 우리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주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불안하고 두려운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탁월한 상징을 품고 있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다양한 예배 형식을 경험한 셈인데, 저마다 집중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을 듯하다. 형식을 짤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둬야 할까.

원론적으로 말하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체에 맞춰 하면 된다. 신사도 운동 공동체가 예배하는 형식을 거리 현장 기도회에서 시도할 수도 있다. 예배하는 주체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성공회 성도들은 교회에서도 성공회처럼 예배할 것이고, 거리 현장 기도회에서도 성공회처럼 예배하지 않을까.

- 예배 형식에 따라 다양한 현상이 생겨나지 않나. 신사도 운동은 은사주의에 몰입하는 경향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성이 있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특정 예배 형식과 분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현실에서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는 형식이 내용을 형성한다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내용이 형식을 수정하기도 한다. 상호 순환이 이뤄지는 것 같다. 어떤 형식이 무조건 옳다는 말은 아니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어서 특화하는 부분이 있으면 둔감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내가 신사도 운동 그룹에 있을 때 봤던 어두운 면 역시 그 집회의 형식에서 비롯되었다. 특정한 누군가의 권위, 카리스마가 무척 크게 작동했고, 그것이 예배 형식과 분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좋은 예가 있다.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는 형식이 엄격하지 않다. 대체로 전통, 관습을 버리는 형태로 진행된다. 형식 없음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더 크게 열어놓는다. 그 직접적인 만남은 매우 강한 원동력으로 작동하여 하나님께 더욱 헌신할 수 있도록 한다. 형식 없음도 하나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사진: '예배에 관한 아무 말' 유튜브 갈무리

-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다양한 고민을 다룬 팟캐스트 ‘모두의 아멘’을 진행하며 예배에 관한 질문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꽤 많이 받았다. 예배에 관한 사소한 물음들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찬송가 끝에 ‘아멘’이 붙는 곡이 있고 안 붙는 곡이 있는데 무슨 차이냐고 묻는 분이 있었다. 이전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런 질문에 답을 준비하고 방송하면서 예배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더 커졌다. 그렇게 사소한 것부터 관심을 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예배 경험이 더 풍성해진다.

‘모두의 아멘’으로 예배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눴을 때 내 주변 또래 교역자들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해줬다. 그때 동료 교역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껴 유튜브 ‘예배에 관한 아무 말’을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 대답을 듣다 보니, 어떤 예배를 좋은 예배로 여기는지 궁금하다. 예배할 때 관심을 두는 지점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다시피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신사도 운동 그룹에 있었을 때 예배에서 경험했던 많은 것들을 부인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을 듯하다.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와의 만남이 있었다는 것, 초월적 존재와 연결된 경험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해도 신적 체험 자체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자신을 뛰어넘고 넘어서게 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예배는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진정한 나를 만나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진정한 세상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뛰어넘게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 이야기에 나를 합류시킬 수 있도록 이끄는 예배가 이상적인 예배 아닐까.

형식을 고민할 때면 확실히 전례적 형식이 지닌 유리한 면은 있다. 다양한 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이미 존재하는 전례가 있어서 수정, 보완, 재해석 등 시도해볼 수 있는 것도 그만큼 많다. 절대시해서는 안 되고, 비판하거나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 점이 확실히 좋아 보이기는 한다.

- 현장 목회자 눈으로 볼 때 예배를 구성할 때 쉽게 놓치는 사람이나 요소로는 어떤 게 있나.

질문에 답이 있다. ‘사람’을 많이 놓친다. 보통 앞에서 보이는, 예배를 이끌어가는 것들에 주목하다 보니 강단 뒤, 강단 아래, 강단을 마주하는 사람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방송실 직원, 꽃꽂이하시는 분, 반주자 등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있다. 발견하지 못하는 수고가 많다.

그리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점은 예배 안에도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부에 대해 비판적인 설교를 하고 싶더라도 수십억대 자산가가 회중 가운데 앉아있다면 조심스러워지지 않겠나.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설교 원고에 담겨있다면,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이 있을 때 그대로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조심하면서도, 회중 가운데 그보다 더 많이 존재할 이혼 가정 및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고려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상가족’에 기반한 설교를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지 않는다.

누구 한 사람 때문에 특정 사안에 비판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면서도, 다수의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설교는 어렵지 않게 한다. 다수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을 배려하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지워버리는 설교를 하는 배경에도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예배를 디자인할 때 보이지 않는 힘의 불균형을 놓칠 경우가 많다. 이를 계속 놓치면 힘을 가진 사람들만 만족하는 예배가 될 것이다. 예배를 기획할 때는 다양한 사람, 특히 약자를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뿐 아니라, 예배드리는 회중도 소비자 같은 태도로 예배에 임하게 될 때가 있다. 마치 서비스를 받는 입장처럼. 헌금한다고 해서 어떤 우위를 점하게 된다면 그 역시 예배라는 상황 속 힘의 불균형이 아닐까.

- 목회 현장에서 예배와 관련해 새롭게 시도하는 것들이 있나.

특별히 다르게 시도하는 건 없다. 여태까지 예배에 관해 많이 말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안다. 나의 바람은 내가 예배를 좋아하는 만큼 교우들도 예배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다. 예배를 좋아하는 마음을 교우들과 함께 키워가고 싶다.

예배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수고들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우리의 예배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의 수고와 애정이 담겨있음을 드러내고 함께 격려하고 싶다. 애정과 수고가 부족하다면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수고하자고 독려도 하고 싶다.

- ‘신학을 예배를 통해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바 있다. 신학을 어떻게 예배에 접목할 수 있을까.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간단하게 얘기해보면 노래를 더 많이 개발하면 어떨까. 신앙을 갖는다는 말은 신앙의 언어를 체득하고, 그 언어대로 사고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신앙의 문법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 돌아보면 찬양에서 많이 배운 듯하다. 찬양을 따라 부르면서 언어들을 습득해왔다. 기도할 때도 찬양 가사에 나올 법한 말로 했고, 가사를 묵상하며 신앙과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상상했던 것 같다.

해외를 보면 교단별로 찬송가가 따로 있다. 찬송가에 교단의 신학이 반영되고, 교단의 걸출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드린 기도가 노래로 옮겨지는 사례도 많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는 찬송가가 통합되어있고, 많이 부르는 복음성가도 비슷하다. 같은 찬송가를 쓰는 일은, 교단과 상관없이 같은 고백을 한다는 점에서 장점일 수 있으나 교단의 특수성을 개발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교단이나 공동체별로 자신들만의 고유성을 담는 노래가 더 개발되면 좋겠다. 그러면 교회와 교단의 정체성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예배와 신앙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교회에서 공동체만의 노래를 만들거나, 공동체가 자주 부르는 찬양집이나 악보집을 묶어도 좋겠다.

- 최근 번역한 책 이야기도 해보자. 제목이 《예배의 감각》인데.

우리가 예배 안에서 경험하거나 혹은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다루는 책이다. 그 경험과 감각들(경외, 기쁨, 진리, 희망)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 저자인 돈 샐리어스는 어떤 사람인가.

현재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예배 거장 중 한 명이다. 에모리 대학에서 예배학을 가르치고, 대학 채플에서 오랫동안 반주를 맡았던 오르간 반주자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이미 저자로 소개가 되었다. 영성학자로도 유명해서 은성 출판사에서 영성과 관련한 책(《영혼의 순례》, 《예배와 영성》)을 냈다.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예배와 예식 모범》이 출간되었다. 음악가이다 보니까 노래와 관련한 책도 있다. 대장간(《신학으로서의 음악, 음악으로서의 신학》)에서 번역 출간했다.

영성·음악·예배라는 교집합 가운데서 저술 활동을 해왔는데, 《예배의 감각》에 이 교집합이 다 녹아있다. 예배를 통해 그런 교집합이 묻어나는 영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말한다. 이를 위해 노래들과 시편, 전례들은 어떤 도움을 주는지도 다룬다.

이광희 목사가 옮긴 책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어떤 점에 유의하며 읽으면 좋을까.

특정 예배 형식을 쉽게 편드는 책이 아니다. 어떤 형식에 국한하지 않고 예배가 지녀야 할 근원적 경험과 감각을 이야기한다. 전례적 형식을 갖춘 예배를 통해서든 비전례적 예배를 통해서든 예배의 근원적 경험과 감각에 접근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이쪽이든 저쪽이든 자기 예배 스타일을 고집하고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자기 변증이나 진영 논리에서 한 발 떨어져 읽길 바란다.

- 같이 읽었으면 싶은 책이 있나.

비아 출판사에서 낸 예배에 관한 책들 중 하나다. 이때까지 출판사가 해온 고민과 연결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비아의 다른 책들, 윌리엄 윌리몬이 쓴 세례에 관한 책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과 성찬에 관한 책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윌리엄 윌리몬과 돈 샐리어스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감리교 목회자이자 몇 안 남은 개신교 예배 거장이라는 사실이다. 감리교를 이끄는 예배 지도자들로, 서로 친하다고 하더라. 윌리몬의 두 책도 특정 형식을 편들지 않는다. 세례나 성찬이 지닌 근원적 의미,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생각해서 잊고 있던 본질적 의미를 되새겨주는 책이기에 결이 맞을 듯하다.

진행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