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 안경과 거울 이야기

[381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2-07-29     김상덕

오리일까 토끼일까

오스트리아 태생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즐겨 사용해 유명해진 오리-토끼 그림이 있다. 한쪽에서 보면 오리 같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토끼 같기도 하다. 그림만으로는 양쪽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어떤 부위는 오리의 부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토끼의 귀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 그림이 오리인지 토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는 관객(audience)이 왜 오리 혹은 토끼로 보는지다. 그림을 오리 사진들 옆에 두어보자. 혹은 토끼 그림 사이에 놓아볼 수도 있겠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실험을 통해서 텍스트 자체보다 해석자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텍스트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미의 수용과 해석은 해석자에 따라, 특별히 해석자가 처한 상황이나 관심사 등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해석에 관여하는 다양한 요인 중에는 각자가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인 세계관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른바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노력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시대의 문화를 읽고 그 너머의 인식과 가치를 이해하고자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변혁적 삶을 추구하는 신자들의 가치관 같은 것이다.

세계관이라는 안경

한때 ‘기독교 세계관’은 마스터키(master key)처럼 보였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풀어내는 신비의 열쇠였고, 정답이었으며, 기독교 담론의 종착지였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1)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안경의 비유’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기독교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안경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향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요청한다(롬 12:2).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분별할 안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경을 벗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가진 안경이 과연 빠르게 변화하는, 복잡하게 얽히고 역동하는 다양한 문화 현상들을 해석하기에 충분히 유용한가라는 질문이 든다. 더구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렌즈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를 무기 삼아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도구로 전락시킨 것 같아 눈이 시리도록 아프다. 몇몇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Christian)이라는 개념을 편협하게 받아들이곤 하는데, 주로 ‘성경적’(biblical) 관점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런데 성경적이라는 관점은 성서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리처드 헤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자주의 혹은 성경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성서에 기록된 대로 믿고 따라야 함을 가장 우선적인 권위에 놓는다. 하지만 성서란 여러 세대를 거쳐 다양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에서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모든 해답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헤이스는 텍스트의 메시지에 기반하면서도 오늘 현대 독자들에게 의미를 찾는 데 상당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세계관은 성서의 내러티브를 ‘창조-타락-구속-(회복)’이라는 상징적 체계로 요약하면서 오늘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분석(죄로 인한 타락)과 구원의 필요를 제시했다. 인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길 다짐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영역에서 각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거듭난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통하여 이 땅 가운데 실현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기독교 세계관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배운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라 ‘창조-타락-구속’ 형식의 얼개였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외웠지만, 정작 문제는 풀어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세계관이라는 안경으로 해석하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복잡미묘한 일들로 가득하다. 종교가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여러 다양한 전문 영역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원래 의도와 달리 영적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쉽고 성급한 대답을 원하는 집단의 먹잇감이 된 것만 같다.

기독교 세계관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 텍스트(의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해석의 영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에서 개인 해석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해석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던 종교나 엘리트 그룹에는 달가운 소식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은 다양할수록 풍성해진다. 같은 텍스트라 해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리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흑인 해방신학자 제임스 콘은 백인들이 십자가를 영광스러운 상징으로 보는 것과 달리 자신과 같은 미국의 흑인들은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조상과 가족을 목매달았던 나무(lynching tree)를 떠올린다고 했다. 이런 해석은 십자가라는 텍스트보다 그것을 해석하는 미국 흑인 신학자와 그가 살아온 여정에 빚을 지는 일이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을 하나의 정답으로 여기는 우를 범할 필요가 없다. 다양한 해석과 성찰이 더 나은 기독교적 적용과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대중문화를 해석하는 대화와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열린 대화와 소통은 그 자체로 교회의 윤리적 실천 형태이다. 대중문화에서 제기하는 다양한 주제와 고민을 이해하고 건설적인 비판과 수용이 이뤄진다면 우리는 대중문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고 만들어갈 수 있다.

어떤 안경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쓴 안경이 누군가에게는 기독교 세계관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안경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경은 우리의 시력을 보완해주기도 하지만, 간혹 색안경은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도 한다. 그동안 이 안경을 대중문화가 기독교적인지 아니면 반기독교적인지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해왔다면 이제는 안경을 내려놓고 거울을 들여다볼 때이다.

거울: 문화의 관점으로 기독교를 보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기독교를 세상 문화와 둘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오랜 시간을 통해 형성되어온 기독교와 문화의 세월을 단편적으로 축소하는 일이다. 첫 번째 글(2022년 5월·378호)에서 민민님이 언급했듯 기독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결과이며 문화의 일부이다. 문화는 수많은 개인과 집단, 사회 및 국가의 활동을 집약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인 개개인은 기독교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지만, 문화로서 기독교는 기독교를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수행한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속에서 문화연구 관점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글(2022년 6월·379호)에서 나는 “대중문화는 훌륭하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거울로서 대중문화의 역할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한 사회의 다수(최근에는 파편화된 집단들)가 보고 느끼고 공유하는 의식을 형성하고 또 재구성한다. 특별히 대중문화는 가장 많은 사람이 일상의 삶에서 쉽고 편하게 접한다는 특징 때문에 일반적인(혹은 일상적인) 언어와 이해를 담아내는 훌륭한 그릇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중문화의 제작 및 유통, 그것을 담아내는 재현 방식, 그에 따른 소비 패턴이나 반응 등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가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동의하거나 공유하는 문제의식과 이야기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대중문화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사람의 생각이나 관심의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는 기독교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세속 미디어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세속 미디어에는 내용이나 의도가 비기독교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인 콘텐츠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악의적인 의도로 기독교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고 있다거나 그런 기사나 방송은 복음 전도 사역을 막는다는 생각도 존재한다. 이런 오해의 상당 부분은 정작 한국교회가 일반 시민의 눈에 부족해 보이고 존경받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줬던 것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주류 미디어 환경 자체가 교인의 기대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도대체 기독교 문화란 무엇일까?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적인 문화, 기독교와 문화, 문화 속의 기독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소위 ‘기독교 문화’라고 할 때에는 보통 기독교적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대중문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공간이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기독교와 대중문화가 만나는 다양한 접점을 찾아내고 그곳으로부터 다양한 문화의 역동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박진규는 기독교 미디어, 기독교 소재의 미디어,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미디어 등 기독교와 미디어가 만나는 접점을 일곱 가지로 구분한다.2) 이런 접근은 기독교와 문화의 해석 또한 그 구분과 장르에 따라 달라질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며, 또한 문화연구 관점에서 사용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독교가 시민사회에서 배워야 할 공공의 언어를 습득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또한 대중문화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을 통해 우리 스스로 돌이키고 시대적 요구에 긴밀하게 부응하고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데 용이하다.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 종교 기관이 만든 미디어와 세속 기관이 만든 미디어로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예수〉(1979)는 기독교 기관이 제작한 대표적인 영화다. 대학생선교회(CCC) 창립자 빌 브라이트는 영화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한다. 이후 워너 브라더스 배급사를 통해 미국 내 영화관에서 상영하기 시작했고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어 배급되었다. 영화는 누가복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당대 성서학자들에게 감수를 받았다. 동시에 영화는 미국인 관점에서 예수를 조명하고 재현한다. 따라서 당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무의식 혹은 비의도적인 시선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 콘텐츠는 선교적 목적으로 제작되므로 내용이나 대상이 기독교 집단을 향한다. 기독교 집단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그 경계가 분명하게 만들어진다. 시청자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기독교를 소개하는 방식의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다수의 대중문화는 선교적 목적이 아닌 다양한 제작 배경 속에서 생산·유통·소비되기 때문에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기독교 상징과 내러티브를 이용한 미디어를 예로 들 수 있다.

교회나 기독교 인물을 다룬 세속 미디어의 경우 주로 저널리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세속 미디어는 기독교의 교리적 특수성보다는 기독교가 시민사회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당대의 공적인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주로 살핀다. 세속 미디어가 일부 교회나 사이비 집단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세속 미디어가 기독교 인물을 소개하는 시사 다큐멘터리 장르도 종종 접하곤 하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인이어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개인이 보여준 정의롭고 희생적인 사랑 실천 등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은 공공의 장에서 기독교가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또 다른 예로 기독교나 종교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작품들을 거론할 수 있다. 근대 이성은 초자연적 현상을 추구하거나 믿는 것에 반감을 갖곤 했는데, 동시에 인류는 언제나 초월적 존재나 자연적인 현상에 관해 관심을 둔다. 이런 현상은 최근 영미권 드라마에서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대중 미디어가 늘어나는 배경에 대해 시각적 재현 기술의 발전을 꼽을 수도 있지만 대중들이 그런 주제의 문화 상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초자연적 소재의 미디어 상품에 관심을 둔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기독교 vs. 세속 문화’로 구분하거나 ‘기독교적’인 문화인지 아닌지를 고르고 판별하는 데 주로 에너지를 쓰고 이를 위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강조해왔다면, 그동안 대중문화를 통해 세상과 그 안의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갈망을 이해할 기회를 너무 쉽게 놓친 것이다. 또한 대중문화라는 매체의 특성 속에서 마치 거울 속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을 돌아보고 성찰할 기회 역시 잃은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기독교의 관점으로’ 대중문화를 보려고 했다면, 이제는 ‘문화의 관점으로’ 기독교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문화연구 관점에서 진지한 신학·신앙적 대화를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안경과 거울 모두 필요하다

안경도 필요하고 거울도 필요하다. 그러나 안경을 내려놓고 거울을 집어 들자고 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세상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문화전쟁 프레임으로 기독교와 세상을 구분하고 적대적이거나 두려움을 보이는 태도로는 대중문화의 유익을 제대로 향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2022년 6월·379호). 이처럼 대중문화를 난도질하거나 배척하여 반문화 운동을 해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기독교 문화로 세상과 대결한다는 말은 이상적으로는 추구해야 할 방향이 될 수 있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대중문화 속성상 개인의 탁월함보다는 자본의 힘이 훨씬 우세한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독교 문화의 창작을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중문화를 보면서 기독교적 관점으로 미디어를 바르게 소비하는 비결을 묻는 이가 적지 않다. 혹자는 오늘날 대중문화에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가능하면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이 및 청소년은 아직 정보의 진위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영상물 등급제가 존재한다. 그 필요성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만일 성인이라면 어떨까? 연령별 등급제를 찬성한다는 것은 성인이라면 각자 알아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대중문화를 향한 염려는 성인과 아동, 청소년과 같은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모두를 미성년처럼 여기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기보다, 되레 대중문화에 물들어 신앙을 잃어버릴까 걱정부터 하곤 한다.

그래도 믿어야 한다. 주체적이고 깊이 있는 사고와 해석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과잉보호를 멈추고 단단한 음식도 먹고 현실에 몸을 맞닿으며 살아야 한다. 걱정과 염려로 경계를 긋고 통제하고 배척하기보다 대중문화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말이다. 그동안 기독교 관점에서 문화를 읽었다면, 이제는 문화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읽어보면 어떨까? 대중문화 읽기는 교회 밖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개의 언어를 알아야 개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듯이, 대중문화의 언어를 알아야 제대로 소비할 수 있다. 문화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읽는다면 세상에 비친 기독교(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문화적 언어는 기독교와 대중문화 간 소통(전도)의 언어이자 실천의 장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비상식적이고 꽉 막힌 집단이 아니라 상식적 대화가 가능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공공의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동시에 사회를 향한 비판도 같이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은 기독교와 세상을 잇는 공공의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앞으로의 연재가 작은 시도가 되길 바란다.

민민의 한마디

우리는 분명 동물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리와 토끼라니.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철학탐구》에 적혀있던 문장이 생각납니다. “아이는 그림의 동물에게 말을 걸고, 인형을 다루듯이 할 수 있다.” 어른들이 어떤 그림을 놓고 오리네, 토끼네 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말을 걸고 다가가려 한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대상과 해석의 관계를 파악하기보다 대상과 관계를 맺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중요해진 시점은 ‘패러다임’ 개념이 유행한 이후였습니다. 한동안 패러다임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그 세상의 가치를 나름대로 해석하려 했지요. 하지만 이후 ‘스토리텔링’ 개념이 소개되면서 ‘세계관’의 위상도 한풀 꺾인 듯합니다. 좋게 보자면, 교리적 혹은 명제적 해석의 근거인 세계관의 한계를 인지하고 이 세상에 사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납득할 만한 언어로 풀어내려 한 게 아닐까요. 세상을 해석하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기독교인들의 태도 전환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젠 기독교인들의 이야기가 교회 밖에서도 잘 이해될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경 쓰고 거울 봤으면 바르게 단장할 일만 남은 것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번 연재는 그 과정을 돕는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단장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볼까요?

■ 주

1)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어떤 범주에서 살피는가에 따라 논의 주제나 정도가 달라질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주로 대중문화라는 범주와 한계 속에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2) 박진규, 〈“미디어, 종교, 그리고 문화” : 미디어와 종교의 교차점 연구를 위한 새로운 접근방법〉, 《한국언론학보 vol. 53》(2009), 309-329쪽 참조. 박진규는 종교와 미디어의 접점을 ‘종교 미디어’ ‘종교를 다루는 저널리즘’ ‘종교인의 삶을 다루는 콘텐츠’ ‘종교적 상징을 활용’ ‘초월적 존재에 대한 관심’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 ‘판타지’ 등 일곱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김상덕(생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언론사진의 역할에 대한 공공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의 문제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회의 공적 역할과 다양한 창조적 실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커피를 좋아하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미술 작가인 아내(민정See)와 평범한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학교 강의와 글쓰기, 방송 및 유튜버 등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