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과 수도회 ―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381호 수도회, 길을 묻다]
그리스도교와 전쟁, 평화의 왕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도사들과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선 수도사들. 지독한 형용모순이다.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에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학교’(dominici schola servitii)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스콜라’(schola)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정예부대라는 의미였다. 중세 초 이민족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외곽에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지키는 용병들을 ‘스콜라’라 불렀다. 수도회 창시자 베네딕트는 수도회를 통해 수도사들을 정신적인 전쟁을 펼치는 정예 군사로 훈련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1) 그런데 만약 이 전쟁이 정신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닌, 물리적인 무력 충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유럽인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윤리적 딜레마였다. 중요한 순례지였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길이 막힌 상황을 무력으로라도 풀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무슬림 세력이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성지순례를 오는 그리스도인들을 막지는 않았다. 1071년 셀주크튀르크족이 예루살렘 지역을 통치하던 파티마왕조를 무너뜨리고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성지순례길이 막혔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교회가 생겨난 가장 거룩한 곳이었다. 서유럽인들의 성지순례는 종교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녔다. 우선은 고해사제가 부과한 벌을 이행하는 참회의 길이었다. 또 하나는 자발적인 종교적 헌신을 위해 걸어가는 순례길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으로 아예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몸의 부활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믿었기에 그곳에 묻히고자 했다.2) 셀주크튀르크가 막은 예루살렘 순례길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의 십자군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종교적이었다. 십자군의 행렬은 무기를 든 군대의 행렬이기보다는 순례하는 수도사들의 엄숙한 행진이었다. 그들은 성지를 회복하기 위한 열정으로 가족과 재산 등을 버리고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신적 인도함이 있는지는 결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하자, 당대인들은 십자군이 신적인 재가를 받은 여정이었다고 받아들였다.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적을 성취한 이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연대기 작가 샤르트르의 풀처는 십자군들이 다 돌아간 후, 예루살렘 상비군은 겨우 3백 명의 기사와 3백 명의 보병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십자군은 예루살렘까지 무장 순례를 가는 일시적인 종교적 헌신이었다. 서유럽에서 3,000km 떨어진 곳에 세운 라틴 왕국인 예루살렘왕국을 유지하는 일은 전혀 다른 숙제였다. 십자군이 승리하여 라틴 왕국을 세웠지만, 지리적으로 고립된 왕국까지 유럽의 순례객들이 오는 것은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다. 순례길에는 강도와 베두인족의 습격이 빈번했고, 인접한 사라센 왕국도 순례객들에게는 위협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사 수도회(militaris ordo)들이 등장했다. 독신·청빈·순명의 서약을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수도사들과 같지만, 필요시 무기를 들고 전투를 하는 군대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수도사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수도사들이 하는 정기적인 기도와 금식을 하지 않았고, 말이나 군사 무기 같은 장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애초 청빈의 이상과는 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용맹성을 갖춰 명성을 얻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군사 수도회인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을 들여다보자.
용감한 전사들, 성전 기사단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이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예루살렘 순례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수십 년 뒤에 시작된 기사 수도회다. 1165년에서 1184년 사이에 대주교 티레의 윌리엄(William of Tyre)이 쓴 《예루살렘왕국 역사》에는 12세기에 등장한 이 수도회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1118년 일부 기사와 귀족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 청빈·순결·순명의 서약을 했다. 위그 드 파앵(Hughes de Payens)와 제프리 드 생토메르(Geoffrey de Saint-Omer)를 비롯한 9명으로 출발했다. 왕과 총대주교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이 성전사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의복, 주거지를 제공했다. 초기에 정착지가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는 솔로몬 신전이라고 부르던 악사 모스크(Aqsa mosque)의 작은 땅을 주어 거주하도록 했다. 수도회 설립 후 9년째 되는 해에 프랑스 트루아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 호노리오 2세는 이 수도회를 공인하고, 수도 규칙을 내리고 흰색에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수도사복을 입도록 허가했다. 붉은 십자가는 순교의 상징으로, 성전 기사단이 그리스도의 기사였음을 나타낸다. 성전 기사단은 교황 이외의 누구에게도 복종할 의무가 없는, 교황 직속 기관이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곧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
최초 설립 목적대로 성전 기사단은 용감한 전사로서 비무장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이 기사 수도회가 역사 속에서 기억되는 것은 정작 다른 이유 때문이다. 성전 기사단은 유럽 역사에서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적으로 수도회는 성인 남성만 가입했지만, 군사 목적을 가졌다는 특성상 참여 범위가 확대되었다. 결혼한 남성도 준회원으로 가입이 가능했고, 심지어 비위를 저질러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기사도 수도회 가입이 허용되었다. 여성들로 구성된 공동체도 생겨났고, 귀족 출신들의 경우, 수도 서약을 하지 않고 준회원으로 한시적으로 기사회에 참여하며 일정 기간 활동한 후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남녀 준회원 모두 수도회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3) 수녀회를 포함하여 중세의 다른 수도회에서 벌어졌던 일과 유사한, 합법을 가장한 귀족들의 재산 상속 수단이 되었다. 교회는 재산세나 상속세와 같은 관습적인 세금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성전 기사단은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성지 예루살렘이 보호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후원을 이끌어내는 데 용이했다. 성전 기사단은 유럽 지지자들에게 군사적·재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정기적인 후원 요청 서신을 작성했다. 그들은 이 서신에서 후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자신들이 성지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보고하여, 지속적으로 후원을 받았다.
성전 기사단의 확산과 몰락
성전 기사단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갔다. 후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각종 이권 사업을 기획하여 확장해나갔다. 순례자들을 위한 성지순례에 필요한 여정을 만들어내고, 예루살렘왕국에 정착할 유럽인들을 위하여 땅을 매입해주고, 송금을 대리하고 필요시 대출해주는 등 근대 은행이 수행하는 업무를 전형적으로 수행했다. 회복한 예루살렘은 유럽인들에게 투자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광고되었다. 성전 기사단은 버려진 토지나 척박한 삼림을 개간하고, 건조한 땅에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고, 투자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그뿐 아니라, 이 새 정착지에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세우는 등 정착촌 주민들을 위한 종합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나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은행가들보다 더 견고한 조직을 형성했다. 사업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었으니, 유대인이나 무슬림 등 종교에 상관없이 협력 관계를 맺었다. 성전 기사단의 조직 자체가 다국적 지부를 두었기 때문에 자금 분산이 용이했고, 일부 고객들이 파산하거나 채무불이행을 하더라도 성전 기사단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견고한 인력 및 재력을 바탕으로 성전 기사단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다국적 조직이 되었다.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 재산을 소유하고, 기사회의 인력과 재정을 바탕으로 하여 외교관, 금융 자문 등의 역할을 하며 각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문어발식 확장에 비판이 없을 수 없었다. 많은 수도사들과 재속 성직자들은 성전 기사단이 수도회의 본분은 잊은 채, 전리품을 취하는 데만 탐욕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세속 군주들은 성전 기사단이 세속적인 사업을 벌이며 교황에게만 복종하고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불편했다. 성전 기사단은 자신들의 설립 목적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는 정당성을 주장할 만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영향력 있는 인물의 지지였다. 12세기 유럽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시토 수도회의 설립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십자군 정신의 후원자였던 베르나르는 성전 기사단의 사명을 정신적으로 매우 가치 있게 여기고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성전 기사단 설립자 위그 드 파앵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성전 기사단의 소명은 정당하며,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특히 기사 수도회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유산인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싸우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지지를 보냈다. 시토 수도회를 설립하여 교회 개혁을 이끌었던 베르나르의 지지 선언은 군사 수도회에 가해진 논란을 효과적으로 잠재웠다.
거칠 것 없던 성전 기사단의 위세는 1307년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1307년 10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신성모독과 성적 타락 혐의로 프랑스 내의 성전 기사단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십자군 재원을 마련하느라 성전 기사단에 엄청난 규모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이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전 기사단을 해산하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넣었다. 필리프 4세의 정치적 압박에 못 이긴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결국 성전 기사단 해산을 명령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교황청의 주요 자금원이 되었던 성전 기사단을 해체한 것은 교회에 제기되는 근원적인 압박과도 맞물려있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 등 신생 탁발 수도회는 ‘사도적 청빈’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가장 오래된 군사 수도회, 구호 기사단
공식 명칭이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 형제회’(Ordo Fratrum Hospitalis Sancti Ioannis Hierosolymitani)인 구호 기사단은 성전 기사단과 더불어 대표적인 군사 수도회이다. 14세기에 해산된 성전 기사단과 달리 이 구호 기사단은 몰타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구호 기사단은 11세기 중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사 수도회로, 로마가톨릭교회가 군사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구호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이 발생하기 수십 년 전부터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돕기 위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십자군 이후인 1113년 교황 파스칼 2세는 이 수도회를 공식 군사 수도회로 공인하고 베네딕트회 수도사였던 제라르 드 마르티그(Gerard de Martigues)를 단장으로 임명했다. 예루살렘 국왕은 구호 기사단에 면세 혜택을 부여하고, 기사단장을 자체 내에서 선출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었다. 제라르는 예루살렘왕국 내에 수도회 운영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여 수도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후계자인 레이몽 뒤 퓨이(Raymond du Puy)는 구호 기사단의 진료소를 크게 확장했다.
예루살렘은 참회나 순례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유럽인들로 넘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었다는 성지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예루살렘을 재건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11세기 초 파티마왕조 칼리프에 의해 파괴된 성묘 교회 복원이 재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성지 복원은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 재건 프로젝트는 라틴 교회 순례자들의 후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라 재건되었고, 1149년에 마침내 복원이 완료되었다. 구호 기사단은 이 프로젝트가 실현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 명칭에서 보이듯 구호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병원으로서 환자를 구호하는 데 있었다. 성지순례는 건장한 남성이나 젊은이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든 사람, 여성, 가난한 이들도 함께했다. 장거리 내륙 여행이나 바다를 통한 여정은 건강한 사람도 심신에 무리가 갈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육신이 피폐해져 병으로 고통받는 순례자들을 보는 일 매우 흔했다. 예루살렘에서 적절한 치료와 요양을 하지 못하면, 떠나온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구호 기사단은 이렇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집중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구호에서 시작한 이 기사단은 점차 군사적 역할도 추가적으로 수행했다. 설립된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구호 기사단은 교황으로부터 얻은 특권과 면세 혜택, 과도한 재력과 영향력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구호 기사단은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과 군사적 역할을 잘 조합하여 수 세기 동안 끊임없이 탈바꿈하며 존재를 이어갔다.
성전 기사단과 달리 18세기 말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구호 기사단은 군사적 역할이 점차 감소되어 자선 및 종교 기능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1291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키프로스를 거쳐 1309년에 로도스섬으로 이주했다. 오스만제국의 침입을 받아 로도스섬에서 쫓겨나 1530년에는 몰타로 이주했다.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공격을 받아 몰타에서 쫓겨나 결국 로마로 이주했다. 현재 구호 기사단은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주권국가를 구성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생존을 위협받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수차례 겪으며, 무려 900년간 이어져 왔다.
혼탁한 종교성의 정점
그리스도교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수도회의 역사 속에서 군사 수도회의 출현은 여러모로 극적이며 이질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군사 수도회는 가톨릭교회 수도회로 소속 수도사는 회칙에 따른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지만, 일부는 무기를 소지하고 전투를 할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 자기 비움이라는 최상의 종교적 실천과 무기를 들고 무력을 사용하는, 이 충돌되는 가치는 당대에 치열한 논란을 불러왔다. 이런 논란에 일정 부분 종지부를 찍고, 군사 수도회가 존재를 인정받은 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이 크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종교 생활에서 활동적이며 관상적인 삶의 두 가지 부분을 쓰면서 군사 수도회에 대해 언급했다. 비록 방어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무력을 사용하는 수도회가 일반적인 수도회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지에 대해 평가했다.4)
군사 수도회를 향해 가해지는 비판은 수도사와 같은 종교인은 전쟁을 해서는 안 되며, 전쟁은 본질적으로 부당하다는 데 있었다. 수도사는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여 신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런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무력 사용이 용인된다면, 그간 수도사들이 지녔던 구별되는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군사 수도회에 주어진 특권에 대한 기성 성직자들의 반발도 포함되었다. 재속 사제들은 수도 생활은 종교적 수행을 위한 것이며, 군사적 목적을 가졌다면 진정한 수도회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군사 수도회가 여러 수도사의 의무에서도 면제되며, 동시에 성직자들이 가진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이 거셌다.
이런 비판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군사 수도회의 역할과 지위를 옹호했다. 그는 무장한 수도사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들로 보았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완전성과 행복을 보호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여느 집단과는 차별성이 있었다. 군사 수도회는 지상의 목적을 위해서 무기를 들지 않고, 신의 뜻을 받들고 순종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다. 세속 군주의 요청이 아니라 교회의 요청에 따라 무기를 들었기에 그 목적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처럼 논란이 있었음에도, 성전 기사단이나 구호 기사단이 당대에 인정받고 활성화되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교 유럽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12세기 군사 수도회는 유럽과 외부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광범위한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기에 더더욱 그 존재와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존재했던 무력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수도사들은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역사 가운데 가공되어 전설과 판타지를 만들어왔다. 특히 극적인 해산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성전 기사단은 라틴 그리스도교의 문학 세계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계몽주의가 끝나고 낭만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중세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유럽의 제국주의적 확장이 본격화되던 시기 성전 기사단은 그리스도교를 이교도로부터 보호하는 상징처럼 자리잡았다. 스코틀랜드의 문호 월터 스콧(1771-1832)의 소설 《아이반호》(Ivanhoe, 1819)를 비롯하여,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2003)나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 등 중세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 성전 기사단은 그만큼 역사적 사실과 신화를 조합하여 픽션을 만들기 좋은 대상이다. 왜 그럴까? 평화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현실의 역사에서 그 어떤 종교보다 전쟁과 폭력에 노출되었던 종교가 그리스도교이다. 그런 모순을 일종의 합법적 무력, 신적 재가를 받은 무력으로 정당화해주는 곳이 군사 수도회다. 제국의 침탈을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사명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와 같은 맥락이다. 당대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런 유의 사고가 그리스도교와 여전히 연결되는 일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역사상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신화화되고 가공되어 소비된 수도회가 군사 수도회들이다. 낭만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종교적 폭력이 신화, 모험과 영웅담으로 미화되어왔다.
군사 수도회와 연결된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수도회가 국가나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보편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 국가주의가 부추기는 폭력을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국가주의, 패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종교는 진정한 복음일 수 없다.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 같은 수도사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또 하나는 군사 수도회가 다국적 기업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제기된 교회와 부에 관한 문제이다. 군사 수도회는 12세기 도시와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발 빠르게 자본의 흐름을 포착했다. 이미 교회 권력이 부와 권력의 정점을 찍고 있던 시기에 그 흐름에 반대하며 등장한 탁발 수도회는 군사 수도회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대체로 수도회가 그 시대 종교성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군사 수도회의 등장과 확산은 십자군으로 대표되는 혼탁한 시대상의 정점이었다.
1) C. H. Lawrence, 《Medieval Monasticism: Forms of Religious Life in We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London: Routledge, 2000), 29쪽.
2) Jonathan Riley-Smith, 《The Knights Hospitaller in the Levant, c.1070–1309》(Palgrave Macmillan UK, 2012), 5쪽.
3) Helen J. Nicholson, 《The Knights Templar, A New History》(The History Press, 2001), 3-4쪽.
4) Riley-Smith, 《The Knights Hospitaller in the Levant, c.1070-1309》, 2-3쪽.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