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381호 무브먼트 투게더]

2022-07-29     박제민

본지는 ‘무브먼트 투게더’ 꼭지를 통해, 2022년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한 입장과 앞으로의 과제를 살피고 있다. 이 글은 ‘이제는 ‘민주당 복음주의’를 떠나보내야 할 때’(구교형, 4월호)‘우리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강을 건너자’(박현철, 5월호), 정신 건강을 위한 정치’(윤환철, 6월호), 대선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신하영, 7월호)에 이어지는 글이다. ― 편집자

최악의 선거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으로서, 지난 대통령 선거는 아주 당황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그 두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재명과 윤석열이 영 별로였기 때문이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재명은 유능하다는 식으로 알려졌지만 때때로 그가 단박에 밀어붙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현직 더불어민주당 보좌진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 사이에서도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선거 슬로건을 두고 ‘무섭다’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또 별로 도덕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때맞춰 대장동 개발 관련 비리 의혹이나 아내의 법인카드 사용 논란이 터져 나왔다.

윤석열은 수사 실력을 빼고는 여러 분야에 걸쳐 상당히 무능해 보여서 정치 또는 통치행위에 부적합해 보였다. 경제에 관해 물었는데 “하나의 강(江, river)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대통령 출마 명분으로 삼았던 공정과 상식도 그의 아내와 장모에게 제기된 의혹으로 심각하게 훼손됐다. 특히 아내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했다는 일들은 조국(전 법무부장관)의 아내가 저지른 죄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굳이 찾자면 공소시효가 있고 없고 정도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명과 윤석열은 대통령 후보가 됐다. 보다 도덕적으로 보이고, 유능해 보이고, 최소한 양질의 토론이 가능해 보이는 후보들이 있었지만 떨어졌다. 그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이낙연이나 유승민(홍준표도 괜찮아 보였다. 윤석열에 비하면.)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그 둘이서 심상정, 안철수 등과 토론하는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재명과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정치는 시민에게 이재명과 윤석열 둘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테니 선택하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을 뽑는데,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시민은 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둘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을까? 소신에 따라 다른 후보를 뽑을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소신일 뿐, 민주공화국의 작동에 영향을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 선거는 최악으로 흘러갔다. 가장 큰 이유는 윤석열의 선거 캠페인이 상당히 구렸기 때문이다. 우왕좌왕 저 스스로 지지율을 깎아 먹은 일들은 치지도 않는다. 고차원적이고 교차적이어야 할 공약과 정책을 일곱 글자 또는 1분 미만의 ‘쇼츠’로 내보내면서 그것이 마치 무슨 고도의 선거 전략인 것처럼 굴지를 않나, 그 내용마저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에서라면 용납되기 힘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윤석열의 선거 캠페인이 전반적으로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선거기간 끄트머리에 이재명의 선거 캠페인이 상당히 괜찮아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런 행태가 심해질수록 윤석열의 지지는 단단해졌고, 이에 대항해서 윤석열을 꺾으려면 이재명을 뽑아야 한다는 의견도 강해졌다. 이재명과 윤석열을 빼고 그나마 의미 있는 지지율을 갖고 있던 것은 심상정과 안철수 정도인데, 심상정은 일시나마 선거운동을 중단해야 했고, 안철수는 막판에 윤석열과 단일화를 해버렸다.

그렇게 또 정치는 주권자인 시민에게 감히 강요했다. 윤석열인지 이재명인지 선택하라고. 난감하고 답답한 상황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팬덤 정치’와 ‘양당 과점 정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팬덤 정치, 양당 과점 정치

이재명과 윤석열은 어떻게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원동력은 강력한 ‘팬덤’(fandom)이다. 팬덤이란 특정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현상을 말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과 윤석열에게는 각각 ‘이길 수 있는 후보’ ‘상대방을 가장 고통스럽게 할 후보’라는 이미지가 새겨졌다. 곧 그들을 둘러싸고 각 당 지지자의 강력한 팬덤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이재명과 이낙연이 경합할 것이라고 봤지만 이재명의 압승으로 끝났고, 윤석열은 신입 당원이고 정치 초년생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당원들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당대표까지 지냈던 홍준표를 따돌릴 수 있었다.

이 말인즉슨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란 거대한 두 정당에서는 비도덕적이거나 무능해도 강력한 팬덤만 가지고 있다면 단숨에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 문화를 두고 민주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정당 체제가 과연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까?

팬덤 정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인은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 한국 정치를 과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몇몇 기업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과점’이라고 한다. (다 차지하는 것은 ‘독점’이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과점 시장은 이동통신 또는 복합 상영관(멀티플렉스)이다. 세 곳 정도의 회사가 전체 시장을 100%에 가깝게 차지한다. 한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이름이 무수히 바뀌었을지언정 보수 계열 정당(지금은 국민의힘)과 민주당 계열 정당(지금은 더불어민주당)이 한국 정치를 과점하고 있다.

양당 과점 정치는 왜 생겼을까? 정부 수립 이래로 오랜 기간 권위적인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의 분출이 억압당한 채 오로지 독재 대 반독재 구도 속에서 양당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사회 풍속 때문이기도 하고, 그 결과로써 양당에게만 유리하게 짜인 선거제도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1111’ 선거제도

한국의 선거제도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1111’ 선거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1)의 선거구에서, 딱 한 번(1)만 투표해서, 무조건 한 표(1)라도 많이 얻은, 딱 한 사람(1)만 뽑는 것이다. 제도적으로는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 없는 단순다수제가 결합한 선거제도라고 하겠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는 소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 없는 단순다수제는 양당제를 강화하고, 중대선거구제 및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는 다당제를 강화한다고 했는데, 이는 ‘뒤베르제의 법칙’이란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도 ‘1111’ 선거제도로 치러진다. 그 결과, 제도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확립된 1987년 이후 선거 결과를 보면,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보수 계열 정당과 민주당 계열 정당이 번갈아가며 대통령을 배출했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민주자유당 김영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한나라당 이명박, 새누리당 박근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국민의힘 윤석열이 그들이다. 퐁당퐁당도 아니고, ‘퐁퐁당당퐁퐁당퐁’으로 정권은 바뀌었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국회의원 선거도 ‘1111’ 선거제도로 치러진다. 아래 〈표1〉을 보자. 가장 최근에 치러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이었던 더불어시민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은 33.35%였지만, 최종 의석수는 180석으로 전체의 60%나 됐다.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이었던 미래한국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은 33.84%였지만 최종의석수는 103석으로 34.33%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정당 득표율보다 의석수 비율이 대폭 늘었고, 미래통합당도 정당 득표율보다 의석수 비율이 소폭 늘었다.

반면에 정의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은 9.67%였지만 최종 의석수는 6석으로 2%였다. 국민의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은 6.79%였지만 최종 의석수는 3석으로 1%였다. 열린민주당이 얻은 정당 득표율은 5.42%였지만 최종 의석수 3석으로 1%였다. 소수정당의 경우 정당 득표율에 비해 최종 의석수와 비율에서 손해를 봤다.

<표1>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거대 양당 과점률. ⓒ박제민

팬덤 정치와 양당 과점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결국 시민과 동떨어진 민주주의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시민이 감당한다. 피해의 정도는 약한 시민일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동떨어진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이념과 사상을 뜻하기도 하지만, 시민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은 왕·귀족·재벌이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후자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민주정’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제안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주권자인 시민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민의 범주가 넓어져서 그 수가 아주 많아졌고, 공동체의 범위가 넓어져서 통치가 미쳐야 할 공간이 많이 늘어났으며, 무엇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시민이 직접 정치에 나설 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은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으로써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아 ‘일정 기간’ 권력을 맡긴다. 대표는 시민을 대신해 ‘일정 기간’ 정치를 한다. 그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시민은 다시 선거를 통해 대표의 정치에 책임을 묻는다. 이것을 대의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참여, 대표, 책임이 선순환할 때 그 민주주의는 강하고 잘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시민은 참여는 하되 대표되지 않고, 정치인은 대표는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시민이 선거하는 날 하루만 주권자라는 푸념이 있을 정도일까. 이런 기간이 길어지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내용 면에서 볼 때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는 바로 시민과 대표의 삶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시민과 대표의 삶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재보는 일이다. 정치학에서는 이것을 ‘유사성’(resemblance) 또는 ‘근접성’(closeness)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정말 안 닮았다. ‘민의의 전당’이라고 불리는, 실제로 그래야 할 국회의 실제 구성을 보고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다.

첫째, 성비를 보자. 제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여성은 57명, 남성은 243명으로 성비는 19대 81에 달한다. 2015년 기준으로 통계청에 등록된 성비가 51대 49인 것에 비하면 국회의원의 성비는 엄청난 ‘남초 구조’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남성들의 민주주의’인가.

둘째, 나이를 보자. 아래 〈표2〉는 2020년 기준으로 유권자 나이 비율과 제21대 국회의원 나이 비율의 차이를 보여준다. 국회의 구성이 나이 비율과 조금도 틀림없이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50-60대 국회의원은 유권자의 나이 비율에 비해 과도하게 많고, 이에 비해 다른 연령대 국회의원은 그 수가 적다. 심지어 10대는 아예 없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50-60대의 민주주의’인가.

<표2> 2020년 인구의 연령 기준, 시민과 대표의 불균형. ⓒ박제민

셋째, 재산을 보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분석에 따르면, 제21대 국회의원들이 후보 등록 때 신고한 자산은 평균 21.8억 원이었는데, 국민 평균 자산 4.3억 원의 5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자산의 경우 국회의원의 91%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고 29%는 다주택자로 나타났는데 이는 국민 70%가 부동산이 없고, 전체 가구의 40%가 무주택자인 점과는 큰 차이가 있다.1)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부자들의 민주주의’인가.

넷째, 학력을 보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분석에 따르면 제21대 국회의원 당선인 가운데 학부 졸업 학교 기준으로 고려대학교·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가나다순) 등 3개 대학 출신은 전체 당선인 300명 중 112명으로 약 37.3%에 해당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2) 전체 국회의원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가 단지 이 세 곳 출신이라는 사실이 과연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SKY의 민주주의’인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SKY 대학을 나온, 돈 있고, 나이 있는, 50-60대 남성의 민주주의다.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는가. 먹고 살기 빠듯하고, 대학을 안 다녔거나 다녔더라도 SKY 대학이 아닌, 젊거나 나이 든, 특별히 여성을 위한 민주주의는 언제 어디서 오는가.

더 많은 민주주의

“Wir wollen mehr Demokratie wagen.”(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고자 한다.) ― 빌리 브란트

1969년 서독 총리로 취임한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모토로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것은 복지·의료·주거·교육·노동·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중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부조제도가 확립됐고 의료보험제도가 확대됐다. 세입자 권리가 강화되고 주거 관련 지원도 대폭 늘었다. 회사에서는 노사협의 과정이 확대되었고 실업급여와 퇴직자연금 등이 강화됐다.

교육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해 학교를 늘렸으며 경쟁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대학의 운영에 학생과 직원도 교수와 동등한 비율로 참여하도록 했고 그 결과 교직원이 총장으로 선출되어 학교를 이끄는 일도 있었다.

선거권을 행사하는 시민의 나이를 21세에서 18세로 낮추면서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당연히 보장했다. 독일 청소년들은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훈련받으면서 정당의 리더로 성장한다. 청소년 연방의원이 나올 수 있는 구조이면서 동시에 정치 문외한이 총리나 대통령이 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어린이도 사회문제가 있을 때 시위를 조직해 참여한다. 폐지에 크레파스로 구호를 적어 나온 어린이 시위대의 등장이 일상이고, 교사와 교육청은 어린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것들 모두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했던 독일 사회가 1970년대 이래로 일궈온 민주주의다. 민주화됐다는 1987년 이래로 대한민국은 뭐 했나. 2022년에 최악의 대통령 선거를 보내며 ‘팬덤 정치’ ‘양당 과점 정치’로 인해 동떨어지다 못해 최악의 민주주의를 겪고 사는 대한민국의 주권자 평범한 시민에게도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 주 

1) 경제정의실천연합, “21대 국회의원 부동산재산 분석결과” 보도자료(2020. 6. 4.).
2)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대한 논평(2020. 4. 27.).


박제민
정치를 하고 정치학을 공부한다. 오랜 기간 몸담았던 복음주의 진영에 애증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