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위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382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10년 전쯤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황금가지)라는 책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그저 재미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하필 챙겨보던 미국 드라마가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워킹 데드〉였던 터라 쉬이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좀비가 출몰한 세상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서 시작된 생각은 아프지 않게 좀비가 되는 방법으로까지 이어졌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진 탓인지 동서양의 전설에 기반한 다른 호러물들과 달리 좀비물은 근래에 들어 등장했기에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까지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직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좀비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는 호러 장르 창작물 중에서도 상당히 현실적인 공포를 전달한다. 시체가 널브러진 거리, 폐허가 된 도시, 신체의 이곳저곳이 훼손된 채 산 사람을 물어뜯으려는 좀비들, 그리고 문명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좀비들을 없애야 하는 사람들.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파국적인 면모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한국으로 무대를 옮긴 좀비 영화와 드라마들까지 가세하면서 좀비물이 주는 공포의 현실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제 좀비의 위협은 아이티나 미국 같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전까지는 일부 마니아층만으로 형성되었던 좀비물 팬덤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들은 잔인하고 처절한 좀비 세계에 열광(?)한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지체된 죽음만이 썩어가는 육체에 남아,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하는 존재가 넘쳐나는 세계는 우리 현실의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절단된 사지와 유혈이 낭자한, 어찌 보면 기독교가 구도하는 세상과 정반대의 현실을 묘사하는 이 거울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보아야 할까?
좀비의 뿌리를 찾아서
좀비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좀비를 이해해야 하고, 좀비를 이해하기 위해선 부두교를 알아야 한다. 부두교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아이티라는 나라의 토속 종교로 알려졌지만, 사실 서아프리카 지역 원주민들의 종교이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정책으로 이들이 살던 땅에 가톨릭이 전파되고, 그것이 서아프리카 지역의 민족 신앙과 혼합되어 만들어진 종교가 부두교이다. 이후 이 지역 원주민들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히스파니올라섬에 노예로 끌려가고, 이 섬이 프랑스령과 스페인령으로 나뉘면서 프랑스에 귀속된 지역에 머물던 노예들이 아이티인의 선조가 된다.
프랑스령 농장에서 사탕수수와 커피를 재배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아이티인들은 1775년 미국독립전쟁,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세계로 퍼져나간 인권 존중과 노예제 폐지 등의 목소리에 힘입어 아이티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1804년 마침내 독립을 이루기까지 아이티인들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부두교라는 정신적인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두교 무당들이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 조종할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프랑스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결국 걸어다니는 시체인 좀비의 전설은 제국주의, 노예무역, 원주민들의 민족 종교, 독립 전쟁이라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아이티 독립 이후에도 부두교와 좀비에 대한 전설은 사람들 입을 통해 전해졌다. 게다가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정착한 미국의 부두교는 백인들의 오컬트 문화와 결합하면서 더욱 신비로운 종교가 되었고, 자연스레 좀비의 전설은 대중들 입맛에 맞게 부풀려졌다. 마침 저널리스트 윌리엄 시브룩이 자신의 체험담을 담은 책 《마법의 섬》에서 부두교 주술사인 보커들이 죽은 자들을 좀비로 만들어 노예처럼 부린다고 소개했고, 이것은 그동안 사람들 입으로만 전해지던 좀비 전설의 대중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소설은 1932년 〈화이트 좀비〉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며 좀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높였다.
좀비가 대중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아이티, 부두교, 식민지, 노예 등 역사적 맥락은 점차 표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좀비는 대부분 어느 날 갑자기 퍼진 바이러스로 인해 (일부는 인간의 생화학 무기 개발 과정 중의 실수나 부작용으로) 죽음이 유보된 채 식욕만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니게 된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좀비 묘사의 시작을 알린 것은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이 제작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후속으로 제작된 두 편의 영화였다. (이 세 편을 엮어 ‘시체 3부작’이라 부른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황금가지)에 등장하는 흡혈귀에서 영감을 받은 로메로 감독은 서구 요괴인 구울(묘지를 배회하며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을 적절히 섞어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줄 좀비를 만들어냈다.
비록 영화 자체는 B급 호러 수준의 조악한 퀄리티를 보여주었지만, 영화가 개봉되던 즈음 미국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로메로 감독 영화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 작품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미국은 내외부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외부로는 냉전 시대 주축이던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수많은 젊은이가 미국을 공개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랑스 68운동을 필두로 강대국 중심의 냉전 체제, 전쟁, 자본주의 등에 저항하는 혁명적 움직임을 시작했고, 미국은 이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미국 내부에서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피살 이후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강해지며, 사회혁명적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전까지 킹 목사 지도 아래 평화 시위를 유지했던 미국 내 유색인들은 폭력을 동원한 운동까지도 시도하려 했다. 안팎으로 혼탁한 상황에 놓인 미국 사회를 배경 삼아 좀비의 습격으로 인간 사회 전반이 무너지는 과정을 묘사한 로메로 감독의 좀비 영화는 혁명의 메시지를 좀비라는 메타포를 통해 전하는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물론 이것을 로메로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후 ‘시체 3부작’ 두 번째 작품이었던 〈시체들의 새벽〉(1978)은 좀비들을 피해 백화점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군상과 그들을 쫓는 좀비들의 대비를 통해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읽혔다. 생존자들은 백화점 내에서도 자신들 안위를 위해 다른 생존자들을 위협하고, 권력 구조를 만들려는 모습을 보이며, 인간 육체를 탐하는 좀비들 못지않게 동물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결국 이 작품은 인간의 이기심과 좀비들의 본능 중 어떤 것이 더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에 물든 당시 사회가 아포칼립스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이후 이 영화는 21세기 좀비물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새벽의 저주〉(2004)로 리메이크되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꼬집는 사회 비판적 좀비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로메로 감독의 ‘시체 3부작’으로 인해 좀비물의 대중적 상품성이 점차 높아지자 안타깝게도 좀비 영화와 드라마는 사회 전복적인 메시지보다는 설정 자체가 주는 공포감을 강조하여 관객들의 유희적 욕구를 채우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 감각기관의 일부만을 유지한 채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식욕을 채우던 좀비들은 빠르게 달리거나, 지능과 사회성을 갖추거나, 신체 일부가 괴물처럼 강화된 형태로 진화되어 이전과는 다른 공포감을 선사했다. 반면 이에 맞서는 인간들은 좀비의 확산으로 인해 파괴된 문명의 흔적들만을 이용해야 하는 설정 속에 놓이면서 작품 속 긴장감이 극대화되었다. 모든 호러물이 그러하듯 좀비물 역시 주요 인물들을 어떤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28일 후〉(2002), 〈나는 전설이다〉(2007), 〈월드 워Z〉(2013) 등 대중성을 염두에 둔 좀비물 속 좀비는 더 이상 문명 세계에 대한 저항이나 세계를 재설정하려는 움직임의 메타포가 아닌 인간 생존에 위협이 되는, 그래서 ‘해치워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자신의 무리에서 몰아내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를 강화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간 기준에서 벗어난 좀비라는 존재와 이에 맞서 문명을 지키려는 인간들의 갈등을 동일하게 풀어내는 대중적 좀비물들은 마침내 주체인 인간과 객체인 좀비라는 공식을 만들게 되었다.
K-좀비의 사회학
한편, 이러한 서구식 좀비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던 한국의 좀비 마니아들은 21세기 들어 스스로 좀비 이야기를 구상하고 이를 영화나 드라마, 웹툰 등으로 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K-좀비’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세계적인 찬사를 받은 한국의 좀비 작품들은 앞서 서술한 서구식 좀비 세계관 ―좀비를 인류 위협의 객체이자 타자로 정의하는― 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차별점을 두어 세계의 좀비물 팬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세계로부터 관심을 받은 한국 좀비물 첫 작품은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2016)이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좀비들의 몸짓이었다. 이미 서구 작품들에서 나왔던 빨리 달리는 설정에 이어, 몸 이곳저곳을 뒤트는 그로테스크한 몸짓이 더해진 기이한 좀비가 처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크로바틱 좀비’라는 별칭까지 생겨나며 세계 시장에 우리의 좀비(?)를 알리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이 영화가 좀비물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점은 바로 주인공들이 좁은 열차 안에서 좀비들과 싸우며 생존해야 한다는 공간적 설정을 취했다는 데 있다. 이전에 나왔던 좀비물들은 공간에 제약을 두지 않았기에 생존자들은 좀비를 피해 어디로든 도망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행〉은 지극히 협소한 공간에 인간들을 집어넣음으로써 생존을 위한 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좀비의 위협에서 오는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이와 비슷하게 극한 상황으로 인간들을 몰아넣어 긴장감을 높인 또 하나의 한국 좀비물은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된 〈킹덤〉(2019)이었다. 〈부산행〉처럼 공간의 제약을 설정하는 대신, 〈킹덤〉은 시대 배경을 근대 이전으로 돌려놓았다. 등장인물들이 칼, 활과 화살, 농기구, 횃불이나 몽둥이 같은 재래식무기만 사용할 수 있다는 설정은 〈부산행〉 못지않은 긴장감과 공포감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한국 좀비물은 기존 좀비물에 독특한 표현이나 설정을 가미해 몰입도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앞서 설명한 호러 영화의 평가 기준, 즉 주요 인물들을 어떻게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어 생생한 공포를 전할 것인가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점이 부각된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 특성 못지않게 K-좀비물이 뛰어났던 부분은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에 차별점을 두었다는 데 있다. 기실 〈부산행〉만 해도 몸을 기이하게 뒤틀며 인간을 해치는 좀비는 인간의 대척점에 있는 객체, 인류 문명의 외부에 속하는 타자로 묘사되었다는 데서 서구 좀비물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부산행〉 이후로 공개된 한국 영화나 드라마 속의 좀비는 표면적으로는 인간과 생존경쟁을 벌이는 타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공포와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소재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부산행〉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서울역〉(2016)은 사회에서 존재를 부정당한 노숙자나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거리로 나온 미성년자들 그리고 이들을 이용하는 악인들과 이 상황을 외면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물론 좀비를 피하거나 좀비와 대치하는 장면들이 나오지만 결국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좀비가 아닌, 좀비보다 무서운 인간임을 영화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좀비는 그저 약한 인간을 잡아먹는 강한 인간들이 군림하는 사회의 폭력성과 부조리함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일 뿐이다. 인간과 대척하는 객체가 아닌 갈등의 표현 방식, 즉 비체1)로서 좀비를 드러내는 한국식 좀비 해석은 〈킹덤〉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2022) 같은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킹덤〉은 얼핏 보면 시대상이 바뀐 좀비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사회의 역병 내러티브, 즉 ‘나라님이 잘못하면 역병이 돈다’를 골자로 하여 당시 사회 지도층의 탐욕과 부패, 무능함을 그린 작품이다. 오직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역병을 창궐하게 만든 양반들과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살아있는 시체들에게 물려 죽어가는 민초들을 대비하여 반상의 사회구조가 가진 폭력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도 좀비는 세력가들의 무책임한 욕망의 결과이자 그것이 사회 전체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체적 존재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한국 사회의 영원한 생채기로 남을 세월호 사건을 고스란히 학교로 옮겨와 어른들로 대표되는 사회의 무능과 무책임을 꼬집는다. 좀비 바이러스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상식으로 인해 창궐하고, 가장 먼저 바이러스가 퍼지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신들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려 하지도 않고, 학생들을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시는 어른들한테 아무 부탁 안 할 거예요”라는 대사는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화면 밖으로 던지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 학교는〉의 좀비 역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몬 어른들의 욕망, 무책임, 무능함이 야기한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비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 좀비물은 단순히 인간과 좀비의 대결, 문명과 혼돈의 갈등 구조를 우리와 타자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보여주는 것을 떠나 거대한 사회악과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약자들을 그려낸다. 좀비는 거대한 사회악이 휘두르는 칼날의 형상이다. 따라서 본질적인 갈등을 끝내려면 칼날을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칼날을 휘두르는 존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서구 좀비물과 다른 한국 좀비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좀비를 객체가 아닌 비체로 활용한 것은 좀비물이 단순히 오락용 호러 영화로 전락한 장르가 아니라 여전히 로메로 감독 작품들처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좀비
좀비의 사회적 해석을 확장한 점도 매우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한국 좀비물의 특징은 좀비를 비체에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서사이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 좀비 영화나 드라마들처럼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한국식 좀비 서사를 발전시켜온 장르가 있었으니 바로 웹툰이다.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유일하게 작가주의가 남아있다고 평가받는 웹툰 시장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체로서 좀비를 등장시키는 작품들이 이어졌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나 〈사람의 조각〉같이 주인공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로 등장하는 작품이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와 〈좀비가 되어 버린 나의 딸〉처럼 주인공에게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되어버린 상황을 그린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좀비를 주체적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인류의 문명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이성과 윤리의 기능이 마비된 세상에서 인간의 의미란 무엇인지, 인간과 좀비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가장 깊이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로 회귀하는 좀비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좀비가 되는 존재들, 그리고 좀비가 되어버린 가족을 여전히 소중히 돌보고 지키는 사람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과 행동을 갖추고 있다. 그들에게 좀비화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끝까지 인간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자, 편견 없이 줄 수 있는 사랑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물론 주체로서 좀비를 다룬 작품이 한국에서만 제작된 것은 아니다. 2018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카고〉는 좀비로 인해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갓난 딸을 지키는 아버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갓난 딸을 구하려다 좀비가 된 아내에게 물려 자신도 곧 좀비가 되리라 예상한 아버지는 아이를 안전지대로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아이를 해치지 못하게 두 팔을 묶고, 한눈을 팔지 않도록 내장을 눈앞에 매달고,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하얀 풍선을 매단 채 그는 점차 좀비가 되어가는 자신의 정신을 붙들어가며 아이를 옮긴다. 자신이 좀비가 될 상황에서도 아이를 지키려는 아버지의 의지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숭고함을 잃지 않는다. 한국에서 제작된 웹툰들과 마찬가지로 주체로서 좀비를 묘사한 이 영화는 인간성이 상실된 시대에 인간적인 면모에 목숨을 거는 좀비들을 보여주면서 인간 됨이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이처럼 좀비 서사는 인간의 특성을 잃어버린 타자인 좀비를 넘어 인간 군상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소품 즉 비체로서 좀비와,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 좀비라고 규정하며 좀비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 주체로서 좀비로 발전하며, 이 사회 단면들을 지적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이는 좀비 영화나 드라마가 단순히 긴장과 공포의 간접경험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오락용 호러 영화만은 아님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좀비물은 동시대를 해석하는 방식의 하위문화적 표현이다. 좀비물이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잔인하고 무서운 좀비물을 도대체 왜 봐?’가 아니라 ‘도대체 세상이 어느 정도이기에 좀비물이 이 정도로 잔인하고 무서운가?’이다. 이미 이 세상에는 주체, 객체, 비체로서 좀비가 가득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좀비가 가득한 세상 속 교회
2011년 9월 미국 뉴욕시 월스트리트에 한 무리의 좀비가 나타났다. 이들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자본주의, 소비주의 등으로 인해 야기된 경제 불안과 고용 축소, 부의 불균등 분배 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좀비 분장을 한 채 거리를 걸으며 미국 경제의 상징인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 주체로서 좀비가 나타난 셈이다. 무엇이 그들을 좀비로 만들었는가? 바로 그들이 비판하는 사회구조이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가진 탐욕과 이기심이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좀비가 된 사람들은 불행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좀비로 규정한다. 인간답지 못한 세상에서 인간답지 않은 모습이야말로 인간답다는 메시지를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저항한다.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배워온 사회구조와 그 구조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카르텔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려 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구조에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규칙과 규정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어 이 사회를 획일화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축소하려는 무리로부터 세상을 되찾으려 한다.
울리히 벡은 해방적 에너지를 통해 파국적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좀비 영화, 드라마, 그리고 현실 사회에 등장한 좀비는 모두 좀처럼 현실화할 수 없었던 해방적 에너지를 실체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순응한 인간들에 의해 실현될 수 없었기에 좀비라는 비인간적 존재가 되어 등장했다. 결국 해방적 에너지는 좀비라는 모습으로 자신의 실체를 가린 후에야 현실 사회에서도 파국을 넘어선 해방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왕에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감히 이렇게도 이야기해본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좀비물들과 현실에 나타난 좀비들이 표현한 파국적 행방이 예수의 가르침과 일면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그가 가르쳤던 전복적인 현실, 즉 천국을 기억한다면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인정할 것이다. 약 2천 년 전 예수는 당시 사회상을 비추고,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것을 명령했다. 좀비 서사는 이미 우리가 사는 사회를 비추고,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더 나은 세상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던 안경과 오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공명하고 있는데, 이를 하찮은 대중문화와 거룩한 예수의 가르침을 비등하게 여기는 신성모독으로만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는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좀비는 대중문화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좀비가 교회 안팎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추방당했고, 무엇을 갈구하고 있으며, 무엇에 저항하는가? 그들이 이야기하는 파국은 무엇이며, 그들이 원하는 행방은 무엇인가? 과연, 교회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생귄의 한마디
좀비 마니아는 아닙니다. 유혈이 낭자하고, 그로테스크한 영상은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저처럼 시각적인 이유로 좀비물을 멀리하는 관객들도 제법 있을 거예요. 초창기 좀비는 ‘B급 장르’처럼 소수 마니아층을 겨냥한 문화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좀비물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심지어 〈월드 워Z〉, 〈워킹 데드〉와 같이 대중적으로도 흥행한 사례를 보면서 이것을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하나의 ‘좀비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흥행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 관심사는 좀비물이 보여주는 종말론적 세계관입니다.
좀비의 등장은 정상적 사회의 멸망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죠. 이에 따라 등장한 비정상적인 존재(인간이 아닌, 비체라고 표현한)를 향한 다양한 시선들이 존재하더군요. 한때 계몽주의적 사상의 세례를 받았던 근대적 지성이 인류의 종말을 낙관적으로 봤던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좀비의 사회학’은 인류 공동체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 보여요. 인류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조리함과 불평등을 넘어 좀비가 날뛰는 ‘파국적 종말’이 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해요.
한국 좀비물에서 좀비의 등장을 사회문제로 연결한다는 점은 정말 흥미롭네요! 어쩌면 한국 사회는 아직도 더 좋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혹은 당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기독교적 신앙도 유사할지 모르겠습니다. 파국적 종말을 당연하게 수용한다면 인류에게 남은 것은 지독한 이기주의와 염세주의뿐일 거예요. 파국의 상황을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은 오직 신앙의 언어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저 마른 뼈들이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룬다는 상상은 오늘 ‘K-좀비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1) 비체(卑體, abject)는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는, 존재 자체가 아예 지워진 존재’라는 의미로 쓰인다. (편집자 주)
1. 기독교와 (대중)문화: 오랜 이야기의 시작
2. 문화는 훌륭하다
3. 한국교회가 훌륭한 대중문화를 사용하는 법
4. 문화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 안경과 거울 이야기
5. 교회를 위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