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외 “여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불일치한다”
[382호 나의 최애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처럼 읽기》
믿기 힘들겠지만, 대학 다닐 때 치마 입고 등교한 적은 딱 두 번이다. 졸업 사진을 찍던 날과 졸업식 날. 검정색 정장으로 같은 옷이었다. 그 정장 치마를 입고 (물론 위에 졸업 가운을 입었지만) 사자상에 올라가 찍힌 사진이 있다. 얼마 전 열린 싸이월드에서 찾아보니, 그 사진을 업로드한 게시물 제목은 ‘이게 뭔 짓이래…’였다. 올라가는 과정부터 사자상에 앉은 순간, 내려오는 과정까지 각각을 담은 사진이 하나로 편집돼있었다. 사진 속 사자상을 쳐다보다가 사자 이빨이 석상 재질과 다른 하얀색 폴리머 재질인 점이 눈에 띄었다. 사자상 이빨을 소장하면 사법시험에 합격한다는 오랜 속설 때문에 툭하면 이빨이 사라지던 그 사자는 수시로 임플란트를 했다. 수위 아저씨가 큰 비닐봉지에 이빨을 한가득 보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있다. (구글링을 해보니 2018년 이후로 이빨 도난이 없어 시설 주임님이 대학의 큰 발전을 느낀다는 인터뷰를 발견했다.)
휴학 기간을 포함해 대학 생활 5년 동안 치마 입은 날이 단 이틀에 불과했기에 그 하루의 기억이 이토록 강렬하다. 패션과 뷰티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치마를 입을 생각이 당초에 없었다. 우리 학교는 산을 깎아 만들어 ‘OO 마운틴’이라 불릴 정도로 경사가 심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고 사회대 옆 경사로에 빙판이 생기면 시즌 행사로 무조건 한 번, 재수 없으면 두 번 넘어져 길바닥에 앉아 아래로 내려왔다. 치마는커녕 대충 몇 개의 옷가지로 우중충하게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학교 자체가 온통 잿빛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대가 중심인 우리 학교는 당시 남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나같이 부끄러움 많은 내향인은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불편 그 자체였다. 강의실이고 학생 식당이고 동아리방이고 남성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았다. 남학우들의 외모 평가와 막말은 일상이었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누리는 캠퍼스 문화가 내겐 모조리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거슬렸다. 화사하게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렇지 않게 훑어보는 시선을 느꼈고, 강의실에 들어가면 공간의 3분의 2가 남학생으로 가득 차 있어 숨이 막혔다. 과방과 교양 수업이 많이 배치된 단과대 로비는 늘 담배 연기로 자욱해, 영화 제목처럼 ‘구름 속의 산책’을 하는 것 같다고 자조했다. 지금은 폐강된 지 한참 됐지만 당시 최고 인기 강의였던 ‘성의 이해’ 수업 시간에 교수의 웃기지도 않은 성 관련 농담에 책상까지 쳐가며 웃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공포감까지 느꼈다. ‘한마당’이라 불리던, 학교 입구에 설치된 농구대 옆을 지나가다 농구공에 머리를 맞아 머리가 띵해졌던 기억마저 아스라이 떠오른다. 대학 시절 내내 경사로와 농구대와 불쾌한 농담을 하는 선생과 담배 연기를 피해 다녀야 했다.
그런 와중에 ‘여학생 휴게실’이 생겼다. 몸과 마음 쉴 곳 없던 차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누구에게나 복음은 아니었다. 바로 동기 남학우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왜 남학생 휴게실은 없는데 여학생 휴게실만 생기는 거냐?”
‘생각’이라는 것을 1초도 하지 않은 본능적 물음이었다.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분노와 답답함을 적당히 섞어 답했다. “이 학교는 여학생 휴게실만 빼고 모두 남학생 휴게실이야. 너희들은 아무 데서나 담배 피고 벤치에 누워있잖아. (길거리와 강의실에서 음담패설도 거리낌 없이 하고.) 여학생들끼리만 편하게 쉴 공간이 필요해.” 딱히 논거도 없이 공허하게 이어지던 논쟁 끝에는 언제나 ‘사회대 원죄설’로 결론지어졌다. “에휴… 역시 사회대, 역시… 박혜은이랑은 얘기하면 안 돼.” 그 얘길 들으면 항상 속으로 생각했다. ‘뭔 소리? 그렇게 따지면 나도 너 같은 공대생이랑 얘기하기 싫거든. 맨날 다 설명해줘야 해. 아는 게 없어.’
생리공결제도가 이슈가 된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 그 동기 남학우.
“생리한다고 입증할 수 있냐.” “그걸 왜 입증해야 하는데?” “생리도 안 하면서 공결 남용하고 놀러 가면 어쩔 건데.” “너 생리 며칠 하는 줄은 알고 있냐? 쯧쯧.” “며칠 하는데?” “됐어. 그리고 생리라는 게, 딱 그 생리 기간에만 몸이 힘든 게 아니야. 그런 것도 모르지?” “너 사회대에서 2년 구르더니 말 좀 막 한다? 쯧쯧.” 서로 쯧쯧 무한루프.
설명해야 했고, 입증해야 했다. 여학우가 있든 말든 동아리방에 모여 다른 여대 누구 외모 평가를 하며 낄낄대는 대화를 들어야 했던 부조리를. 수시로 감상의 대상이 되고 인격에 모독이 가해지는 언행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남성 중심 문화의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휴식할 때 내내 시달려야 했던 어떤 종류의 감정 노동을. (자기들과 똑같이) 직설로 말하고 행동하는 나를 대놓고 불편해하는 남학우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이 일은 캠퍼스 사역을 했던 시간과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놀랍도록 한결같이 경험하고 있는 무한루프다. 대상화되는 여성의 직업과 연령대 버전만 달라지며. 감정 노동 종류와 방어 내용만 조금씩 변주되며.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냉장고 광고 카피를 보고, ‘여자라서 피곤해요’라고 혼자 읊조렸다. 한국 사회 자체를 여성의 시각으로 보는 일에 갈증이 깊어졌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내 싸이월드 게시판에는 이런 폴더가 있었다. ‘희진씨 쇳소리’. 정희진 선생님 칼럼을 찾아 한 자 한 자 필사한 게시판이었다. ‘쇳소리: 쨍쨍 울릴 정도로 야무지고 날카로운 말소리. 또는, 야무지고 다부진 기세’. 200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칼럼을 쓰기 시작한 당시 ‘여성학 강사’ 정희진 선생님의 ‘야무지고 날카로운 말소리’에서, 갈급한 내 경험과 생각, 감정은 길을 찾았다. 그 글을 한 자 한 자 따라 쓰면서 바짝 마른 마음의 목을 축였다.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이란 부제가 붙은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이 나왔을 때 그 글들을 온몸으로 이해하며 읽었다. 첫 장부터, 대공감 모먼트.
얼마 전 작은 도시에 강의를 갔다. 강의실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3살짜리 아들을 챙기고 계속 울어대는 1살짜리 딸아이를 업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다른 수강생들 눈치를 보며, 강의를 듣던 20살의 주부가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아이를 낳고 학교를 중퇴했다. 강의가 끝나고 상기된 표정의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저번 시간에 오신 선생님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에 대해 말한 것 같은데, 선생님(나)은 사회 자체를 여성의 시각으로 보는 것 같아요. 그게 저번 분과 다른 거 같아요.”
― 《페미니즘의 도전》, 2013 개정증보판, 41쪽.
대상화 혹은 타자화에 지쳐버린 내게 “사회 자체를 여성의 시각으로 보는” 정희진의 글은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영생의 샘물마냥 반짝거렸다. 자기 경험을 담은 일상 언어와 학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교차하며 엮어낸 그의 글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글의 모범이었다. 정치학의 주제로 ‘어머니 문제’에 대해 쓸 때, 나이 들어(?) 박사과정 입학 후 장학금 관련 서류를 받으러 갔다가 “어머니가 대신 오셨어요?”라고 묻던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받은 불쾌감을 구구절절 쓰는 박사님이라니.
그리고 또 나온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이쯤 되면 웬만한 저자는 다들 한 번쯤은 언급하는 성경 대표 구절인 걸로).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믿었던 운동가 서준식(6월호)과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걸 수긍했던 시인 김정란(8월호)을 지나 여성학자 정희진은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며 말을 건넸다.
기존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목소리가 전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대안)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일(단일)한 것으로 군림해 왔던 서구 남성 기존의 목소리는 급속히 상대화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서구 남성 중심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같은 책, 53쪽.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여성주의.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여성주의. 차이를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목소리를 배제당하는 일이 일상이었던 내게 여성주의 언어는 곧 구원의 언어였다.
“도서관에 엎드려 운 적이 많았고”
《페미니즘의 도전》과 그의 석사논문을 수정·보완한 책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하나의문화, 2001)를 찾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아내 폭력’의 이유와 내용, 폭력을 지속·재생산하는 구조가 참담했고, 이 폭력은 내가 당하거나 목격한 폭력의 다른 형태였음을 깨달았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일단 놀랄 것 같다. 그러나 그 충격이 폭력당하는 여성들을 타자화한 결과가 아니길 바란다.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면 “아내 폭력”은 바로 내가 당하고 있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 여성의 경험을 여성의 시각에서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가 자주 겪은 일이면서도 그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억압 상태를 지속시킨다. … 오랫동안 여성 폭력 문제를 상담하고 현장에서 수년간 일해 온 친구의 평은 나를 맥빠지게 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묘사된 여성의 현실이 실제 사례보다 비교적 “경미”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도 읽기가 너무 힘들어 한 쪽을 넘길 때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물론 나도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다. 논문을 쓸 때도 도서관에 엎드려 운 적이 많았고, 나도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기 힘들었다.
―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7쪽.
또다시 여성의 경험을 여성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여성주의란 내가 일상에서 자주 겪는 일이 어떻게 이 폭력의 구조와 겹치는지 해석하고 교훈을 얻는 일이라는 것을 정희진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난 (이런)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어’라는 안도가 아니라 내 일상이 어떤 맥락과 구조 속에서 점점이 구성되고 있는지 똑바로 쳐다보라는 그의 다부진 ‘목소리’.
위에 인용한 부분 중에서도 내가 밑줄 그은 구절은 “논문을 쓸 때도 도서관에 엎드려 운 적이 많았고”였다. 이 구절만큼 내게 큰 영향을 끼친 문장이 또 있을까. 글을, 그것도 논문을 쓰다가 엎드려 울었다고 적은 작가/연구자는 이때 처음 보았다. 연구 대상자조차 타자화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고, ‘글을 쓰다가 엎드려 울 만큼 진심인 무엇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거구나’ 하며 이 구절을 내면화했다. 이 내면화는 나중에 내가 석사논문 주제를 정할 때 작용했던 것 같다. 논문을 쓸 때만큼, 연구 주제를 탐색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으니. 지면에 서평이란 걸 쓸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써온 글을 생각해보니, 내가 서평가로서 보인 태도와 관점은 이 구절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22년 7월에 나온 신간 두 권까지, 내 삶의 해석 기준을 마련해주고 끝없이 날 각성시키는 저자, 그리고 내 관점과 삶의 태도 무엇보다 글의 방향을 잡아주는 현재진행형의 내 최애 저자는 정희진이다. 이 글을 쓰며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를 다시 읽었는데, 다음 문장은 내가 책을 고르고 평가하는 주요 전제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접하는 책들은 대개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이 쓴 책이다. 사회는 모두 이들 ‘주류’ 시각 안에 포섭되어 있다.
― 《정희진처럼 읽기》, 21쪽.
정희진의 이 분석을 전제 삼아 내 관점과 해석을 쌓아 올렸다. 여성의 시각에서 세상과 책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분류하는 작업. 이것이 여태 내가 써온 서평의 정체다. 내 뒤에 정희진이 있다는 고백은 난 혼자 외로이 쓰지 않고, 든든한 참고 문헌을 가진 근본 있는 작가라는 확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내가 책을 읽고 써왔던 글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당파성과 응용력으로 쌓아 올릴, 앞으로의 내 읽기와 쓰기는 정희진 선생님의 뒤를 따르며 이어질 것이다.
책 읽기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다. 당파성과 응용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데 필요한 태도는 왜 이 책을 읽는가에 대한 사회적 필요와 자기 탐구라는 정의감과 그 정의감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창의력이라고 생각한다. 창의력은 독서의 결과가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 같은 책, 39쪽.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