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에 대한 급진적 저항 ― 탁발수도회의 등장

[382호 수도회, 길을 묻다]

2022-08-31     최종원

흔히 유럽의 11-13세기는 ‘장기 12세기’라고 불린다. 이 시기 유럽은 십자군으로 타 문화권과 교류하게 되면서 무역과 도시가 발달했다. 도시로 자본이 몰렸고, 상업으로 부가 축적되었다. 교황이 주창하여 1095년부터 유럽의 수많은 군주가 참여한 십자군 원정은 이 시기 교회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정점은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였다. 칠성사와 화체설을 확정하는 등 성직자 중심주의를 완성한 것이다. 이제 교회와 성직 계층은 유럽 사회의 사회·정치·경제 질서에서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세와 내세의 모든 통치권을 주장할 뿐 아니라, 세속을 압도하는 부를 소유했다. 성직주의의 완성은 종교 체계의 완성 그 이상이다.

이제 또 다른 근원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교회는 과연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던 때의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가? 제도교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교회 본연의 길을 잃었다고 판단되었던 때에는 항상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등장하여 제도교회를 견인했다. 하지만 장기 12세기의 변화 속에서 교회가 마주한 도전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대응 역시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급진성을 띠었다. 반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나타났고, 교회의 대응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중 이단 운동이 생겼고, 제도교회 내부에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탁발수도회가 등장했다. 이들은 교회가 초대교회 사도들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과 삶의 방식을 택했다. 그 정서는 ‘사도적 청빈’(apostolic poverty)이라는 길고 첨예한 논쟁으로 대표된다.

사도적 청빈의 거대한 바람

사도적 청빈이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살아간 방식을 의미한다. 사도적 청빈의 배경은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전도 여행 보내는 정황에서 파악된다. 전도 여행에서 사도들은 두 명씩 짝지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설교했다. 그들은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를 실천했다. 그들이 전한 가르침이 마을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을 경우 그곳에 머물고, 적대적인 대응을 마주하면 떠났다. 사도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지하지 않고, 타인의 은총과 신뢰를 얻으며 살았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물리적인 무소유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일이었다. 청빈에는 돈과 재물과 같은 물리적인 소유물만이 아닌, 이 땅의 권력과 힘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포함된다. 유럽에서 교회 권력이 정점을 찍고 있던 장기 12세기에 이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사도적 청빈은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사도적 청빈을 주창한 대표적인 세력은 이단으로 낙인찍힌 발도파 운동이고, 제도권 내에 안착한 것이 탁발수도회이다.

발도파는 프랑스 리옹의 발도(Petrus Valdes, c.1140-1218)가 주도한 운동이다. 부유한 상인 출신인 그는 종교적 회심을 경험한 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청빈을 실천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실천했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단순·검소·금욕의 가치를 담은 그의 메시지는 당대 교회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리옹의 빈자들’이라고 불리는 추종 세력이 생겨났다. 이 운동은 사제가 아닌 속인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사도적 청빈을 요구하는 발도파의 설교가 퍼져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교회는 주교의 승인 없는 설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도파와 교회의 긴장이 팽팽해졌다. 교회는 발도파가 전한 가르침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제도교회로부터 관리를 받지 않을 때 나타날 파장을 염려했다. 그래서 주교 없이 설교하는 발도파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단으로 선포했다. 교리적 차원에서 발도파는 가톨릭교회와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속인의 설교권을 주장하며 제기하는 메시지들이 기존 성직 체계에 위협을 주기에 충분했다. 제도교회 지침보다 성서의 가르침을 더 중요한 가치로 앞세웠던 이들은 종교개혁가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발도파가 던진 사도적 청빈의 가르침은 발도파에 대한 교회의 탄핵으로 잦아들지 않았다. 급진적으로 보여서 실현 불가능할 것 같지만, 모든 세속의 소유와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저 공상적인 꿈은 아니었다. 사도적 청빈은 중세 말 교회를 읽어가는 키워드의 하나일 정도로 중세 말 사회·정치·경제적 변화 속에서 무거운 화두였다. 그리스도의 완전을 추구하는 교회의 길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발도파와 별개로 중세 유럽에는 전에 없는 완전한 청빈을 선택하여 탁발(구걸)을 실천하는 수도회가 등장했다.

‘형제’가 된 수도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수도회는 세속의 삶을 뒤로하고 사막에 은둔하던 개인들이 형성한 공동체를 모태로 한다. 수도사를 의미하는 단어인 몽크(monk)의 어원은 ‘혼자’ ‘단독’이다. 이 단어가 내포하듯 수도사들은 현실 세계와 거리를 두고 단독자로서 더 고상한 종교적, 금욕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대중들에게 궁극적으로 지향할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했다. 그런데 사도적 청빈의 흐름 가운데 13세기에 등장한 수도회는 이전 수도회와는 구조와 방향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를 ‘탁발수도회’(Mendicant Order)라 불렀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몽크가 아닌 ‘프라이어’(friar, 형제)라고 했다. 기존 전통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난 것이었다.

전통적인 수도회는 독자적인 수도원 건물과 토지를 보유하고, 그 안에서 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거나 기부나 후원을 받아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수도원들은 중세 봉건 체제 속에서 영주의 지위를 가진 기득권 세력이었다. 탁발수도회는 이 틀을 벗어난 공동체였다. 수도회의 재산을 보유하지 않고, 오직 대중들의 자비에 의존하는 탁발을 삶의 수단으로 선택했다. 수도 공동체가 재산 소유를 포기한 일은 기존 수도회 문법의 파괴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도사 개인의 정체성을 세속과 떨어진 단독자가 아니라, 대중들과 호흡하고 함께 살아가는 형제로 규정한 일은 커다란 혁신이었다. 기존 수도회는 종교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폐쇄 공동체에 가까웠다. 탁발수도회는 그 틀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 신의 뜻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했다.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초기 교회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이상향이라 치부되던 사도적 청빈을 대중들의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것도 상업의 발달로 자본이 몰려들던 도시 한복판에서, 가톨릭교회와 성직 세계의 권위가 정점을 찍던 바로 그 지점에서 ‘부’와 ‘권력’ 모두를 포기하는 시류를 거스르는 움직임이었다. 이 운동은 대중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교회가 붙들고 나가야 할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13세기 초 사도적 청빈을 외치며 두 개의 대표적인 탁발수도회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가 등장한다. 두 수도회는 사도적 청빈의 두 핵심인 무소유와 설교를 각각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내세우면서 13세기 유럽 교회에 거센 변화를 불러왔다. 탁발수도회 운동은 도시의 대중운동이었다. 부와 권력이 밀집한 상업화된 도시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현실과 종교적 삶의 조화는 새로운 숙제였다. 탁발수도사들은 순회 설교라는 수단을 통해 도시 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을 추구했다. 그들의 순회 설교는 도시 부르주아 계급에게 성서를 기반으로 한 삶의 지침을 제공했다. 탁발수도사들은 기존의 재속(在俗) 성직자들 영역이던 사목 활동에 뛰어들었다. 청빈한 삶에서 우러나는 전문성 갖춘 설교가 대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을수록 교구 사제들은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실천했던 청빈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강조하니, 자연히 부와 권위를 움켜쥔 제도권 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반성직주의가 커져갔다.

프란체스코회와 청빈의 딜레마

프란체스코회 설립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181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출생했다. 젊은 시절에는 전쟁 중 겪은 부상으로 투병하면서 종교적인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1208년 성 마티아스 축일에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택해 전도 여행을 보내는 마태복음 10장에 관한 설교를 들으며 깊은 회심을 경험한다.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가르침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그 일을 함에 있어 성서의 가르침 그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사람들의 자선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세속의 소유를 포기하고 가난한 설교자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매개로 사람들과 초대교회의 상호 보살핌이라는 공동체 생활 방식을 실천했다.

프란체스코회는 사도적 청빈에서 ‘가난’을 핵심으로 하는 ‘작은형제회’(OFM, Order of Friar Minor)로, 수도사복 색상을 따라 ‘그레이 프라이어’(Grey Friar)라고 한다. 프란체스코는 수도사 개인만이 아니라, 수도회에서도 재산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수도회라는 조직 자체를 만들 의도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이 높을수록 더 많은 영향력을 얻게 되고 조직이 형성되는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조직화의 핵심은 교황의 수도회 설립 허가였다. 교황의 허가를 얻지 못하면 발도파의 길을 가는 것은 불가피했다. 1210년 프란체스코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만나 수도회의 활동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이 수도회가 교회에 요구되는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수행하기는 하지만, 교회가 덥석 인정하기는 몹시 부담스러운 사도적 청빈이라는 가치 앞에서 교황은 ‘구두’ 승인이라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교회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표현했다. 어쨌든 이렇게 새로운 수도회 설립이 진행됐다. 1223년 교황이 수도회칙을 승인하면서 교황청 인가 정식 수도회가 되었다. 유사한 이상을 추구했지만 날개가 꺾인 발도파와 달리 프란체스코회는 유럽 전역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사도적 청빈은 대중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으나 태생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다. 청빈의 실천 방식 논란과 그것이 남긴 결과는 이 운동의 이상만큼이나 냉혹하다. 우선 사도적 청빈의 실천 논쟁을 들여다보자. 프란체스코회 회칙은 명시적으로 수도회 재산 소유를 금지했다. 그러나 수도회가 조직화된다는 것은 수도회 건물과 운영, 사목 활동에 정기적으로 재정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청빈을 실천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활동에도 재정을 담당하던 가룟 유다가 있지 않았던가! 높은 이상을 추구하던 프란체스코회는 심지어 설립자인 프란체스코 생전에 이미 청빈에 대한 해석 문제로 분열했다. 현실적인 운영을 위해 회칙을 탄력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프란체스코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급진파 사이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콘벤투알’(conventuali)로 불리는 온건파와 영성파(spiritualiti)로 불리는 급진파로 수도회는 분열되었다. 교황청은 프란체스코회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수도회가 가진 재산을 공식 인정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완전한 무소유를 실천했다고 주장하는 일은 이단적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영성파 프란체스코회는 교회의 탄압을 피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둘째로, 수도원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평범한 대중과 소통하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의 방식을 재현하는 이상은 역설적이게도 이 운동이 지닌 지극한 엘리트주의를 보여준다. 프란체스코 자신이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살면서 당대 점증하는 부의 불균형에 대한 죄의식을 경험했다. 그가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인 청빈의 자리에 스스로를 놓음으로써 내면을 괴롭히는 부채의식을 줄였다. 더욱이 그 삶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자리이기도 했다. 그가 경험하고 실천했던 종교적 가치는 그와 유사한 자리에 있던 중산계급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보였다. 이 운동 초기 참가자들은 부유한 계급 출신이 다수였다. 그들이 청빈의 삶을 추구할수록 사회에서 프란체스코회의 영향력은 커져갔다. 이 수도회 출신에서 주교와 대주교, 추기경이 나오고, 교황까지 배출되었다. 무소유의 삶, 청빈의 실천이 더 큰 권력으로 돌아온 셈이다. 사도적 청빈의 궁극은 물리적인 부나 재물을 넘어 이 땅의 권력과 힘에 대한 포기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하나의 포기가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설교와 학문의 전문성을 발전시킨 도미니크회

비슷한 시기에 탁발수도회로 시작한 공통점은 있지만, 도미니크회는 실천에서 프란체스코회와 여러 차이를 보인다. 프란체스코회가 청빈이라는 사도적 삶의 실천을 강조한 반면, 도미니크회는 사도적 삶의 또 다른 핵심인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강조했다. 설립자인 구스만 도미니크(Dominic de Guzmán, 1170-1221)는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아 서품을 받은 사제였다. 이 수도회는 프란체스코회처럼 급진적으로 청빈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강화해나간 정체성은 설교와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탁발수도회였다. 사도들의 ‘설교’ 사역을 중심 모티프로 설립되었기에 ‘설교자 수도회’(OP, Order of Preachers)가 공식 명칭이다. 백색 수도복 위에 검은 망토를 걸쳐 ‘블랙 프라이어’(Black Friar)라고도 불린다. 설교와 사목 활동을 수행한다는 점은 재속 성직자들 역할과 중복된다. 다만 도미니크회가 카타리파라 불리는 이단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크회를 승인하는 장면을 담은 이 그림은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위 키미디어 코먼스)

툴루즈에서 수도 공동체를 시작하여 설교자들을 훈련하기 시작한 도미니크회는 1216년 교황청의 공식 허가를 받았다.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던 카타리파 이단 운동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은 십자군이라는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도미니크회는 제대로 된 설교와 가르침이 있다면, 대중들이 카타리파에 동요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내부적으로 가톨릭 대중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외부적으로 카타리파와의 설교와 논쟁을 통해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설립 목표였다. 설교자 수도회란 이런 이중의 사명을 실천하는 활동을 정확하게 담아낸 표현이었다. 카타리파 근거지인 랑그도크를 찾아가 설교와 논쟁으로 설득을 이어갔다. 카타리파를 잠재우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둔 도미니크회는 계속해서 중세 말 점증하는 이단 운동에 대응하는 데 특화된 모습을 보였다.

정통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이키려는 이상이 항상 긍정의 결과만을 낳지는 않았다. 도미니크회는 중세 말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이끈 수도회로 악명을 쌓아갔다. 이단 논쟁이 제기되면, 정통교회 가르침을 수용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의 갈림길로 내몰았다. 도미니크회에 붙은 또 다른 별명은 도미니 카니스(Domini canis)이다. ‘신의 사냥개’라는 의미를 지닌 이 별명은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사냥개처럼 집요하게 공격하여 처벌하려 한 도미니크회의 악명을 상징한다.

이단 대처를 위해 설립되었기에 피할 수 없는 태생적인 부작용과 별개로, 도미니크회는 설교법, 웅변술, 교수법으로 중세 말 대학과 학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탁발수도회이지만 재산 소유에 대해서 탄력적인 입장을 지녔던 도미니크회는 교황청 승인을 받자마자 유럽 주요 도시에 형성된 대학에 도미니크회 학교를 세웠다. 1229년에 파리 대학에 첫 도미니크회 학교(Dominican studium)를 설립한 후, 1245년에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프랑스의 몽펠리에 대학, 잉글랜드의 옥스퍼드 대학 등의 학교를 세웠다.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파리 대학에서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강의했다. 중세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도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다. 도미니크회가 대학에 자리 잡은 후 프란체스코회가 진출하여 서로 학문적인 경쟁을 펼치며 대학 발전에 기여했다. 탁발수도회의 대학 진출이 재속 성직자 출신 학자들과의 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초기 대학의 설립과 발전 과정에서 탁발수도회는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사도적 청빈의 핵심

대중 이단 운동이나 탁발수도회 운동은 부와 권력의 정점에 선 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세속의 부와 권력을 모두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실천했던 원시 교회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급진적이고 극단적이었지만, 그만큼 선명했기에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교권의 극성기에 사도적 청빈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등장한 탁발수도회는 견고하게 구조화된 성직주의에 불만을 가진 대중들이 추구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가톨릭교회는 존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도 계승’을 내세웠다. 탁발수도회가 제기한 사도적 청빈은 진정한 사도 계승이 무엇인지, 사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세속의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사도 계승의 정당성을 담보할 사도적 삶은 아니었다. 사도적 청빈과 탁발수도회의 문제 제기는 세속 사회에서 교회의 권력과 정치력 행사, 교회가 쌓아 올린 사회적 입지와 재산을 재고하도록 했다.

사도적 청빈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자취를 따라 현세에서 토지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삶이다. 이것이 가진 상징성은 봉건제 상위 영주의 지위 속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던 교회에 던진 직격탄이다. 급진적인 만큼 현실화되기 불가능해 보이는 주장이다. 교회가 안게 된, 보다 현실적인 고민은 이러한 시대 요구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있었다. 사도적 청빈 논쟁은 교황청 아비뇽유수기(1309-1377)에 벌어진 가장 치열한 논쟁 중 하나였다. 교황청의 아비뇽유수는 정점에 섰던 교회가 세속 권력의 통제하에 들어간 상징적 사건이었다. 세속 군주들의 영향력이 거세지면서, 교황청은 신성불가침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제 교회가 보여주었던 부패한 모습과 축적한 재산은 사회문제로 비화되어 거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도적 청빈은 교회가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할 길처럼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에서 보듯 사도적 청빈의 핵심은 재산 소유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이 땅의 일, 세속의 일에 대한 권리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 등 탁발수도회는 교회가 재산을 포함한 세속의 권력 등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을 살길로 제시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며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아비뇽유수기의 교회는 잃어버린 사도교회의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했다. 교회에 주어진 부와 권력을 향유하지 않고 이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탁발수도회는 주장했다. 이 땅에서 교회가 가진 힘을 포기하는 일, 그것이 사도적 청빈의 핵심이다. 때로 주장 자체가 극단적으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중세 말 내내 사도적 청빈 논쟁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그만큼 교회가 지향할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는 방증이다.

우리네 교회는 교회가 가진 부와 권력에 대해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재고를 할 수 있을까? 무한경쟁의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가치가 거대한 힘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교회는 이를 거스르는 가치를 얘기할 수 있을까?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