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383호 묵상 스케치 - 개혁신앙의 뿌리]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오랜 세월 망명자로 살았다. 녹스는 1547년부터 프랑스 갤리선 노예로 있다가 1549년에 풀려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에드워드 6세 치하 잉글랜드의 버릭어폰트위드, 뉴캐슬어폰타인 같은 도시에서 목회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조차 로마 가톨릭 군주 메리 튜더가 여왕 자리에 오르자 녹스는 또다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554년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피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배 형식과 예전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56년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다.
녹스는 1559년까지 제네바에서 칼뱅의 동역자로 교회 개혁 운동에 헌신했다. 3년 남짓한 제네바 체류는 이후 녹스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녹스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피난 온 영어권 난민들과 함께, 제네바 생 피에르 교회당 옆 ‘칼뱅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런 까닭에 이 강당을 ‘녹스 채플’로 부르기도 한다. 스코틀랜드의 정치·종교적 상황이 호전되면서, 녹스는 프랑스 로마 가톨릭 군대에 사로잡혀 갤리선 노예가 된 지 12년 만인 1559년에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림1〕은 녹스 종교개혁의 심장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이다. 녹스는 1559년부터 1572년 죽기까지 이곳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특히 프랑스로 시집갔던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남편을 잃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1561년부터 녹스와 여왕 메리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녹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도 조금의 망설임이나 물러섬 없이 개혁의 나팔을 불었다. 귀족들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녹스가 그려진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를 잘 보여준다. 녹스는 1559년부터 1566년까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를 다섯 권의 책에 기록했다. 기록한 책에는 그가 어떻게 스코틀랜드를 변화시켰는지도 상세하게 적혀있다.
〔그림2〕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의 주차장 23번이다. 여기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녹스의 무덤이다. 가끔은 차량이 주차되어 무덤을 볼 수 없을 때도 있다.필자가 학생들과 이곳을 방문하면 모두 한결같이 스코틀랜드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자의 무덤이 어쩌면 이렇게 초라할 수 있느냐며 놀란다. 바로 이곳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모토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칼뱅과 녹스 같은 개혁자들은 자신을 기념하는 무엇이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고, 그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드러나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구태인 성인 숭배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후예들이 만든 기념탑이나 조각상이 우리에겐 의미 있을지 몰라도 개혁자들 뜻에는 배치될 수 있다.
1572년 11월 임종을 앞둔 녹스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취한 일이 없고, 인간을 만족시키고자 애쓴 적도 없고, 나 개인이나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고 복음을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삯꾼 목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만 정직하게 전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했던 참된 목자로서 녹스의 일생을 대변해주는 유언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스코틀랜드 섭정 모턴 백작은 “여기 일생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있다”고 말했다. 참으로 녹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기쁘게 하고자 했던 복음의 나팔수였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는 바울의 고백이 새삼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림 이근복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
글 박경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석사학위(Th.M.)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종교개혁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