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그램과 공정 담론

[383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2-09-30     김상덕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노래는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다. 틈틈이 노래를 했지만 배관공 일을 하면서 가수가 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가수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 방송국에서 주최한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거기서 1위에 올라 마침내 가수의 꿈을 이루게 된다. 〈슈퍼스타K〉 시즌 2에서 우승한 가수 허각의 이야기이다.

한국의 폴 포츠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폴 포츠는 영국 성악가로서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출연해 세간의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휴대전화 판매를 생업으로 했지만 성악가의 재능도 출중했다. 그를 향해 쏟아진 영국 사회의 관심은 뜨거웠다. 결국 폴 포츠는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최종 우승을 했고 그의 앨범 〈Once Chance〉(2007)는 세계적으로 500만 장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인생 역전의 스토리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것이지만 이를 둘러싼 의미에 대해서는 좀 더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역사를 살피고 이를 공정 담론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슈퍼스타K〉 시즌 2 본선진출자 11명. (사진: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 유튜브 갈무리)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도입한 사례는 Mnet의 〈슈퍼스타 K〉이다. 이 프로그램 슬로건은 바로 ‘기적을 노래하라’였다. 남녀노소 출신 배경 상관없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사실 〈슈퍼스타K〉는 미국에서 폭발적인 흥행을 이끌던 〈아메리칸 아이돌〉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아메리칸 갓 탤런트〉, 〈더 보이스〉 등이 상당한 인기를 끌면서 세계를 오디션 열풍으로 인도했다.

이런 인기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하여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다는 프로그램의 성격이 한몫했다. 출신 배경이 초라해 보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주목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출연자 개인 서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서사가 극적일수록 시청률도 함께 상승했다. 이런 면에서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1 우승자인 켈리 클락슨(Kelly Clarkson)은 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의도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텍사스 시골 출신 소녀,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인데도 굴하지 않는 열정과 재능, 성실하고 다부진 성격까지. 그녀의 개인적 이야기는 이 프로그램을 더욱 특별하게 해주었다. 한낱 “이름 없고 연줄 없는 시골 소녀”였던 그녀는 순식간에 모두가 동경하는 화려한 스타 켈리 클락슨이 되었다.1) 마치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는 기적(!)을 선물한 셈이다.

사실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지극히 ‘미국적인’ 문화 현상이다.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별이 될 수 있다!’ ‘당신도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으며 평가는 공정하게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지!’ 이런 서사는 개인의 권리와 공정한 기회가 보장된 사회가 곧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믿는 미국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정작 모든 개인에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지,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한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다루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지극히 미국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K-오디션 프로그램

한국도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역사가 있다. 한국 방송 역사상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한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2) 이보다 앞서 MBC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는 각각 1977년, 1979년에 시작된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3) 〈전국노래자랑〉은 공개 오디션 형식을 갖췄지만 경쟁보다 지역 축제 성격이 강하다. 반면, ‘가요제’들은 경쟁을 통해 숨겨진 실력자를 가리는 공개 오디션 성격에 더 부합한다. 당시 이런 가요제들은 그야말로 ‘스타 등용문’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유명 가수를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가요제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변화의 배경으로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다. 우선 국내 음악 산업이 대형 기획사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거대 자본을 기반으로 한 대형 기획사들은 이미 스타성을 가진 인재들을 선발하고, 훈련하고, 상품화하여 거의 완성된 형태의 음악들을 사람들에게 내놓았다. 이런 구조에서 아마추어 뮤지션을 선별하는 기존 ‘가요제’ 방식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기획사에 의해 정교하게 통제되고 제작된 상품이 음악의 다양하고 창조적인 매력까지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중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노래와 춤, 옷차림에다가, 심지어 말투까지 따라가는 음악에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이런 시기, 미국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 소식이 전해진다. 이 열풍은 이미 세계적 현상이었고 한국도 큰 흐름에 올라탄 셈이다. 방송 제작자 입장에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미 효과가 입증된 대박 상품이었기에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009년 〈슈퍼스타K〉를 시작으로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K팝스타〉 외에도 정말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오디션 프로그램 전성시대가 열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초창기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대단했다. 2010년 허각이 130만 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슈퍼스타K〉 시즌 2 최종 우승자가 된다. 이날 시청률은 19%까지 오르며 케이블 채널의 새로운 역사를 세우기도 했다.4) 하지만 부작용도 상당했다. 서바이벌 방식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제목만 다를 뿐 모두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거의 모든 채널에서 경쟁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분야도 점차 다양해져갔다. 음악·요리·패션·모델·뮤지컬·취업·개그, 심지어 예술 분야까지 나올 정도였다. 모든 방송 콘텐츠의 오디션화(?)라고 부를 만했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시청자들 사이에 피로감이 높아져갔다.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의 장점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창기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들 사연이 주목받은 적이 있긴 했다. 그들이 본선에 올라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서바이벌 특성상 나이가 너무 어려도, 많아도 경쟁력은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연령과 성별, 특징은 보이지 않는 진입 장벽과 같았다. 한 예로, 밴드 음악 부활을 꿈꾸며 기획된 〈슈퍼밴드〉 시즌 1에서 여자 출연자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제작진은 세계적인 보이/남성 밴드를 선별하기 위한 기획 의도가 깔려있다고 변명했지만, 결과는 불공평해 보이기 충분했다.

악마의 편집도 도마에 올랐다. 〈슈퍼스타K〉 제작진은 일부 참가자의 인터뷰나 심사평 등을 교묘하게 편집해 프로그램을 선의의 경쟁이 아닌 선악 갈등 구도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다른 예로 〈프로듀스 101〉은 아예 제작진이 원하는 참가자가 유리하도록 투표 결과를 조작한 정황이 밝혀져 법적 처벌을 받기도 했다. 공정한 경쟁을 내세운 오디션 프로그램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행위였다. 힙합신은 메이저 음악 시장과 달리 개인 역량이 더 중요한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쇼미더머니〉의 경우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서바이벌 오디션이란 방식을 이용해 자신들과 친분 있는 크루 멤버나 지인들을 띄우고, 또는 흥행곡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지적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의 거품은 생각보다 빨리 사그라들었다. 공정성이나 투명성보다 시청률과 상업성이 더 중요한 방송 환경에서 감추려 했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셈이다.

애초에 ‘서바이벌’ 오디션 방식은 자극적인 경쟁을 열정과 꿈이란 단어로 미화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사회가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사회임을 보여주면서, 이런 생존의 정글에서 경쟁이란 당연한 것이며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결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교육한다. 오히려 오디션 프로그램 문법은 경쟁과 평가만 공정하다면 결과인 승패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승자독식, 즉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갖고 그 외에는 모두 패자가 되는 결과가 주어진대도 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말하는 공정 담론이란 애초에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디션 프로그램 바깥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

최근 〈오징어게임〉이 미국 에미상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국 안방 시청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시상식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로 제작된 작품에 이 정도로 트로피를 줬다는 소식은 역사에 남을 만하다. 넷플릭스라는 미국 자본과 OTT 환경으로의 변화도 주요했고, 한국 영화 및 영화인들의 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에미상 수상식에 담긴 의미로 〈오징어게임〉의 메시지가 지극히도 미국적이라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 애초에 자본주의와 불평등,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게임 같은 세상이 시작된 곳도 미국이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이 재현하는 게임의 공간은 어떤 곳인가? 영화적 재미를 위해 과장되고 극적인 면이 있을지언정, 게임이라는 이름 아래 생존을 위한 참가자들 간의 무한경쟁이 이뤄지는 장소이며, 그 안에서는 남녀노소 사회적 배경 상관없이 모두가 같은 기회를 갖는다. 오직 단 한 명의 승자만이 존재하고 이 기적 같은 인생 역전을 위해 무한경쟁이 격려된다. 반면, 그 바깥에서는 그들의 생사를 건 싸움을 그저 유희 대상으로 관람하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존재한다. 게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경쟁만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456번 참가자는 유일한 생존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 기회를 획득하지만 이를 거부한다. 시야가 바뀌어 투쟁할 대상이 바깥에 있음을 인지한 그는 발걸음을 돌린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공정에 대한 담론은 허상에 가깝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논의는 〈오징어게임〉으로 상징되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예를 들어, 마이클 샌델은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공정한 경쟁 제도인 시험과 입시 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5) 시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졌다고 해서 곧 평등한 사회인 것은 아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저마다의 사회적 배경이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각자 출발선이 다르고, 사회적 격차는 개인 노력의 한계를 훨씬 능가한다. 시험 결과가 순전히 개인 능력에 달렸다고 믿게 만드는 건 일종의 사회악이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폐해는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서 얻은 성공이 개인의 ‘능력’으로 획득한 당연한 권리가 되는 동시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빈곤과 어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힘들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공정한 경쟁의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불평등은 구조화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한 경쟁은 말장난과 같다. 이 구조 안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은 반복되고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 없이 개인 능력에만 의존하는 사회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소수의 예외적인 기적(환상)을 좇아 살면서, 나와 다수가 불행한 원인을 무능함 탓으로 돌리게 한다. 이런 공정 담론은 불완전하며 사회적 불평등의 심각성마저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진화 중

대중문화가 지닌 속성은 대중의 열망이 웃자라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바이벌 방식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피로감을 느낀 대중을 위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과도한 경쟁 구도에 주목하기보다 참가 및 도전 과정 자체를 응원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면서 그동안 비인기 장르에 속했던 음악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대형 자본에 의해 제작되고 유통되는 음악 시장 속에서 무명의 인디 뮤지션이나 중년의 정통 헤비메탈 로커가 주목을 받게 되기도 한다. 오디션이 끝나고 나면 잊히기 마련이었던 프로그램의 특성을 개선해, 오디션 이후 방송 출연 및 공연 기회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최종 우승자 한 명에게만 특전을 제공하기보다 더 나은 방식은 없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심사평도 확 달라졌다. 강압적이고 직설적인 평가 대신 개성을 존중하고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심사평이 늘고 있다. 간혹 심사평으로 의도치 않은 치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모호하고 무책임한 환상을 심어주기보다 조금은 차분한 어조로 가수의 삶에 대해 조언하는 멘토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시청자들도 성숙해졌다. 강력한 팬덤이 아니라 함께 즐기고 응원하는 분위기이다. 오히려 방송국 제작진을 감시하거나 의외의 인물이 주목을 받도록 하는 게임 체인저가 되기도 한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자극적인 요소들이 초반부터 편집에 드러났다. 하지만 출연자들은 승패도 중요하지만 경쟁 자체를 즐기는 소위 ‘멋진 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런 광경에 시청자들도 열광했다.6) 오디션 프로그램의 10여 년 역사 가운데 출연자, 제작자, 시청자 모두 성숙하고 있는 셈이다.

사진: 지니뮤직 영상 갈무리

공정 담론과 능력주의를 넘어서

이런 변화의 흐름은 한국 사회 속 공정 담론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높은 인기는 우리 사회가 좀 더 투명하고 공정하길 바라는 마음의 투영이었고, 지나친 경쟁과 승자독식 구조보다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존중받는 성숙한 사회를 원하는 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는 오디션 프로그램만큼도 공정하지 못한 사회였는지 모른다. 아직도 인맥이나 연줄 같은 사회적 배경이 개인의 실력보다 중요한 사회에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과도한 ‘스펙’ 경쟁이 만들어낸 뒤틀린 공정 담론 속에 사회적 약자를 향한 도덕적 감수성을 지적하기란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우리 사회는 최소한의 공정함도 간절한가 보다. 제2·제3의 허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한 듯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음악 산업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오디션 프로그램’만의 공정함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디션 프로그램 바깥은 여전히 거대 자본에 기반한 대형 기획사와 음반 제작사에 훨씬 유리하도록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디션 무대는 끝났다. 우승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이 처한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아만 보인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일까? 기회의 평등만으론 불충분하다. 오디션이 끝난 이후도 중요하다. 우승자와 참가자 모두가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라면 어떨까?

마태복음 20:1-16에는 포도원 주인의 이상한 품삯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그 주인은 하루 벌어 생계를 꾸려가는 일꾼을 찾아 어떻게든 하루치 급여를 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8시간을 근무하든, 4시간을 근무하든 급여는 똑같다. 심지어 퇴근 1시간 전에 와서 일을 했는데도 똑같이 하루치 품삯을 준다. 그건 불공정한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안다. 그 주인이 그곳 노동자들에게 하루치 품삯이 절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 특성을 말한다. 구원이란 우리의 능력(merit) 때문이 아니라 은혜(grace)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과 적용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한 분량대로 공정한 대가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루치 품삯’이 없어서 배를 곯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의로운 사회는 거기까지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한다. 김혜령은 성서의 가르침이 공정, 즉 기여도(merit)에 따른 분배의 정의를 폐기하지 않으며 더 깊은 질문으로 초대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사랑을 배제한 정의, 나눔을 고려하지 않는 나누기가 유일한 분배 방식이 될 때, 아무리 노력해도 기여할 능력이나 기회를 얻지 못한 구성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는다. 즉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 담론이 자칫 “기여한 자들끼리 권리를 따지는 폐쇄성으로 정체”되는 데 대해 우려한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정의란 ‘몫 없는 이들의 몫’까지도 상상할 수 있는 “더 높은 수준의 정의”임을 강조하고 있다.7)

오늘 한국 사회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피상적으로는 공정에 대한 열망을 대리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개인의 성공과 능력주의를 향한 무의식적 지지와 은밀히 닿아있다. 나의 욕망을 위해서는 공정을 외치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선 권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중성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이 진화하듯, 더 좋은 사회를 위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명의 우승자만을 위해 무한경쟁을 조장하고 탈락자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무책임한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향한 변화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민민의 한마디

저는 평화주의자입니다. 경쟁을 싫어하죠. 승부욕 많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실력 없는 분야에서도 이기려 드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고는 바뀌기 시작했죠. 진상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이젠 경쟁이 불편합니다. 선의의 경쟁이란 말을 믿지 않아요. 승자와 패자 중 누구를 기준으로 ‘선의’의 경쟁이란 걸까요?

오디션 프로그램이 내세우는 가치가 바로 선의의 경쟁이죠. 정작 방송은 온갖 자극적인 내용으로 짜깁기하고 지나친 경쟁 구도를 연출하여 불필요한 긴장감을 높이는 데만 집중하면서 말이죠.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하는 스타들도 결국 공정한 승부의 결과라기보다는 방송용 탁월성과 유연성이 높은 이들 아닌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그들을 방송용으로 만드는게 목표면서 어쩜 저리 뻔뻔한지.

생귄님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진화하고 있다고 하셨지만, 제 눈에는 그조차도 식어가는 인기에 대한 기획자들의 마지막 발악으로 보이네요. 그동안 경쟁에 환호하고, 경쟁을 요구하고, 경쟁을 당연시하는 계급과 평가자들 시선을 내면화하여 그 기준에 맞춰지는 것이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라 여기는 계급만 생산하다 보니, 한계에 다다랐겠죠. 지원자들도 시청자들도 나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니 치유와 위로를 내세워가며 하나라도 더 경쟁체제에 밀어 넣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쨌든 편성된 시간과 투자한 비용이 있으니까요. 오죽하면 아바타라도 들고나와서 오디션을 보려 하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진화는 지원자가 0명 나오는 것입니다. 시청자가 0명이어도 좋겠군요. 불필요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면 타인의 경쟁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심보도 좀 사라지지 않을까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지원자 0, 시청률 0을 종용하긴 힘들겠지만, 희망이란 때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데 있으니까요.

(기적처럼 아바타 오디션 프로그램은 0점대 시청률이 나왔군요. 시민의 저항이 시작된 걸까요?)

■ 주

1) 이지연, ‘켈리 클락슨’ IZM (Library/Artist) 참조.
2) 최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이자 최고령 최장수 진행자 ‘송해’(1927-2022)를 배출한 프로그램이다. 최근 코미디언 김신영 씨가 새로운 MC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3) 1990년대 이후로는 소위 스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악동클럽〉이나 〈박진영의 영재 육성〉 프로그램이 오디션과 리얼리티 방식을 결합한 형태로 등장하였다.
4) “‘슈퍼스타K2’ 최종회 시청률 19% ‘케이블의 새 역사’”, 〈매일경제〉(2010. 10. 23.)
5) 마이클 샌델, 황규진 옮김,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 27-38쪽.
6) 최예슬, “무대 뒤 조력자가 주인공으로…MZ세대 ‘카타르시스’”, 〈국민일보〉(2021. 11. 2.) 기사 참조.
7) 김혜령, 《기독시민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59-60쪽.


김상덕(생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평화를 위한 언론사진의 역할에 대한 공공신학적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의 문제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교회의 공적 역할과 다양한 창조적 실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커피를 좋아하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한다. 미술 작가인 아내(민정See)와 평범한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학교 강의와 글쓰기, 방송 및 유튜버 등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