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1: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빌뱅이 언덕》 “얘기할 사람이 없단다”

[383호 나의 최애들]

2022-09-30     박혜은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한 건 서른을 막 넘겼을 때였다. 지난 호에도 썼듯, 정희진 선생님이 30대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장학금 서류를 받으러 갔을 때 “어머니가 대신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대학원 다니는 30대 여성은 끼면 안 되는 시공간에 침입한 외계인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려 2010년대에도.

어느 수업 시간에는 자리에 앉아 강의를 기다리는데, 세 사람 건너편에 있는 기자 출신 목사님이 굳이 그 먼 곳에서 말을 걸어왔다. “혜은 자매는 누구 돈으로 대학원에 다녀요?” 여기가 아무리 ‘기독교’를 베이스로 한 대학원이라 해도 학교에서 ‘자매’라 불리는 건 정말 소름 돋는 일이다. 게다가 바로 옆도 아니고 남들 다 듣는 데서 내 등록금의 출처를 묻는 무례함이란. 당황한 나는 부모님이 어쩌고저쩌고 대답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오로지 캠퍼스 사역만 한 네가 돈을 모아뒀을 리는 없고, 등록금이 한 학기에 몇백만 원 하는데 무슨 돈으로 대학원을 다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함의는 몇천 들여 석사를 따서 (서른 넘은 여성으로서 사회 진출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네가 그 학위를 어디에 쓸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부모님 돈이 아깝지 않냐”는 세 사람 건너 들려오는 대답에 그날 밤 분함에 치를 떨며 요가를 하며 마음을 다스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부모님이 능력이 넘쳐서, 캠퍼스 사역 더 제대로 하고 싶어 공부하겠다는 똑똑한 막내딸 대학원 공부 기꺼이 시켜주고 싶다는데 뭔 상관?” 실제로 등록금 중 절반 이상은 내가 조교 등 노동을 하며 충당했지만.

생각해보니 이미 대학원 면접 때도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받았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내 결혼 여부가 석사과정을 밟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던 나는 그게 대학원 시절 내내 공격받을 내 약점이라는 것을 그때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결혼하지 않고 서른 넘어 석사 공부하는 게 이토록 지탄받는 일일 줄이야. 박사까지 할 것 아니면 서른 넘은 여성의 석사 공부가 도대체 큰돈을 들여 할 일이란 말인가? ‘그들’의 질문이었다. 등록금 중 단 1원도 보태주지 않을 이들의 오지랖이 도를 넘는 시절이었다. 참고로, 이 모든 일은 2015년 직전에 일어난 일이다. 2015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은 꼭 밝혀두고 싶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30대 캠퍼스 여성 간사로 사는 게 죄도 아닌데 대학원 다니는 내내 사회경제적 위치와 나이로 공격받았다. 대개 “동안이다” “얼굴과 문장이 다르다” 등 외모로만 평가받은 경험 때문인지 울분 반, 질문 반으로 ‘소수자 윤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서에 담긴 약자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로 담아낸 텍스트를 연구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성서학을 바탕으로 ‘문학’을 연구하고 싶었는데, 그 문학이 한국의 맥락을 담은 것이어야만 내 삶에 달라붙은 글을 쓸 수 있을 듯했다.

그러던 타이밍에 우연히 권정생 작가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정확히 출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글을 읽고 권정생의 삶과 문학이 내가 찾던, 그러니까 한국적 맥락에 충실히 뿌리내린 성서적 삶과 문학의 길에 맞닿아 보였다. 그때부터 석사논문 주제를 정하기 위해 그의 전작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이철지 엮음, 종로서적, 1986)를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읽고, 그가 쓴 어린이책을 단편부터 장편까지 모두 소장해 읽고,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2008), 《빌뱅이 언덕》(창비, 2012)을 밑줄 그으며 읽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단에.

1971년 대구 〈매일신문〉에 가작 입선을 하여 시상식에 갈 때 무릎을 기운 바지를 입고 나섰더니, 아랫마을 김 집사님이 조금 나은 바지를 가지고 와서 굳이 입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빌려 준 바지를 입으려 하니, 추운데 그냥 껴입고 가라고 하셔서 껴입었다.

매일신문사를 찾아가 시상식장에 앉아 있으니 위아래 옷을 껴입고 있어 너무 거북스러웠던 것이 생각난다. 상금은 2만 원이었다. 시상식이 끝나 입상자들과 심사위원이 어디 다른 장소로 갈 모양인데, 동화 심사를 맡았던 김성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등을 밀며 어서 돌아가라고 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 《빌뱅이 언덕》, 18쪽.

스스로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한 권정생은, 동화작가로 등단하던 그 순간조차 무릎을 기운 바지를 입은 채 ‘그들만의 세계’에서 배제되었던 장면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1937년 도쿄 빈민촌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가족과 함께 조국에 돌아왔다. 여러 사정으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그는 객지를 전전하며 10대를 보낸다. 20대에는 그리워하던 가족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곧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동생만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권정생에게 집에서 나가기를 권유한다. 전신 결핵을 앓던 그는 집안의 짐이었다. 가족들에게조차 배제된 그는 그렇게 다시 객지를 전전한다. 집을 나온 권정생은 “철저한 거지”가 되기로 결심하고, 3개월 동안 유랑하다가 몸이 불덩이가 될 정도로 아프게 되자 결국 집을 찾아 들어간다.

권정생은 3개월의 유랑 기간을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 기간”으로 여겼다. 그 기간 길에서 헤맨 경험과 그곳에서 10대와 20대에 만난 가난하며 소외된 이들은, 이후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배경이 되고 등장인물로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그는 길에서 예수님과 깊게 사귀게 된다.

들판에 앉아서 읽은 성경을 생생하게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머리로 읽는 성경은 자칫하면 환상에 그치고 말지만 실제로 체험하면서 읽으면 성경의 주인공과 대화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죽음과의 싸움에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났고, 아모스를, 엘리야를, 애굽에 팔려 간 요셉을, 그리고 세례 요한을, 사도 바울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깝게 나의 주 예수님을 사귈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 같은 책, 43쪽.

길에서 몸으로 체험한 성경은 이후 권정생이 쓴 주요 작품들의 밑바탕이 된다.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동화에 예수님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후에는 차차 직접적인 기독교 색채가 옅어진다. 점차 이야기 전체의 세계관 자체로 평화의 하나님 나라 비전을 그려낸다고나 할까. 그것도 우리 민담과 전설 속 존재들과 엮어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로. 마치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켄타우로스와 미노타우로스, 파우누스가 자유자재로 나오는 것처럼, 권정생의 작품에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한 늑대 할머니(《밥데기 죽데기》, 바오로딸, 1999)나 도깨비(《팔푼돌이네 삼형제》, 현암사, 2007)가 등장한다. 권정생은 한국적 맥락의 환상성으로 성서적 세계관을 다채롭게 펼쳐내 우리의 상상력을 돋운다. 그의 장편 동화들은 우리에게 다른 빛깔의 영적 감수성을 피어나게 하는 소중한 기독교적 자산이다. 권정생을 알면 알수록,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성경이 어떻게 배제된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지 벅찬 마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오직 그의 글을 읽은 자들만의 기쁨.

권정생 작가. ⓒ복음과상황 정민호

“얘기할 사람이 없단다”

작품을 읽어나가던 그해 여름, 시간을 내어 안동으로 일종의 ‘논문 준비 여행’을 떠났다. 일직교회 예배당 문간방에서 지내며 추위와 비를 피해 들어온 쥐와 개구리를 벗 삼아 지내던 외로운 종지기를 만나기 위해. 세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주는 동화가 아니라 어둡고 냄새나는 시궁창의 삶도 반짝일 수 있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 권정생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30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찾아 들어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는 조용했다. 인적이 드문 길가 정류장에 내려, 일직교회를 찾아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었다. 이내 도착한 일직교회에는 권정생 작가가 치던 나무 종탑과 그가 지내던 문간방은 없어졌지만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라는 문구를 새긴 작은 나무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팻말 옆자리에 있던 문간방에서 홀로 지내던 권정생의 친구들은 생쥐와 참새와 개구리였다. 그런 자기 모습을 블랙유머로 형상화한 작품이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분도출판사, 1985)다. 책 속에 등장하는 종지기 아저씨는 생쥐와 참새와 개구리와 걸진 농담을 주고받으며 온갖 대화를 나눈다. 자기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티격태격 말장난을 일삼으며 세상의 중심부를 공격하기도 하고, 기복신앙을 믿는 교회와 독재자를 비판하는가 하면, 평화 없는 세상을 걱정하기도 한다. 대화를 들여다보면, 1980년대 한복판을 지나는 작가 권정생의 작품관, 신앙관, 역사관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가 사람이 아닌, 생쥐와 참새와 개구리를 친구 삼으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도토리 마을에 있는 도토리 예배당은 함석 지붕의 조그만 시골 예배당입니다. 그 예배당 문간방에 아저씨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더부살이로 살고 있는 아저씨는 예배당 종을 치는 종지기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수많은 아들딸들이 끌려가 목숨을 잃은 슬픈 나라, 6·25 전쟁 때는 아버지와 아들이, 형과 아우가 서로 적이 되어 총칼을 휘두르며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든 바보 같은 나라, 아직도 그 나라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 살고 있는 어른들은 늦가을 들판에 남아 있는 허수아비처럼 여기저기 서 있었습니다.

… 도토리 예배당의 종지기 아저씨도 그 바보 허수아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저씨는 너무 잘못한 것이 많아서 그런지 수수깡처럼 언제나 힘이 없었습니다.

… 그러나 아저씨는 수수꽃다리가 피는 5월을 사랑했습니다. 감나무 있는 마을에 가을이 오면 자꾸만 푸른 하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구라는 땅 위에 평화와 자유가 오지 않아 아저씨는 역시 허수아비가 되어 해해해해 웃으며 바람 부는 대로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그런 아저씨에게 왜 쩨쩨하게 밤낮 생쥐하고 토끼하고 참새하고 개구리하고만 얘기하느냐 묻는다면,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얘기할 사람이 없단다.”

―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1985), ‘머리말’ 중에서

동화작가로 등단했음에도 여전히 그는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출생지가 남의 나라(일본)였던 저는 여지껏 고향조차 없는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아홉 살 때 찾아온 고국 땅이, 왜 그토록 정이 들지 않았는지요? … 소외당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고국은 나에게 전쟁과 굶주림, 병마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위에 몸서리 처지는 외로움을 … 그러나 메말라진 흙 속에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어, 여지껏 목말라 허덕였습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님에게 보낸 1973년 편지에서 권정생은 이렇게 토로했다. 그는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생쥐와 대화하고 개구리와 동지가 되었다. 얘기할 사람이 없는 외톨이였기에, 이런 기도 또한 드릴 수 있었다.

하느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밤에는 소나기가 쏟아져 우리 방에 동지들이 여나믄 마리나 들어왔었습니다. 동지라면 잘 모르실 테고 정말은 개구리올시다. 개구리를 동지라 불러도 하느님은 노하지 않으실는지요? 하지만 하느님, 저는 지금 동지들이 아쉽습니다. 동지가 많아야만 통일도 속히 이루어지고, 온 세계는 한 형제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지자면 우리는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개구리는 물론 파리도, 모기도, 미꾸라지도, 메추라기도, 산돼지도, 노루도, 강아지도, 원숭이도,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저의 기도를 속히 이루어 주십시오….

― 같은 책, 25쪽.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인간을 넘어 동물인 개구리도, 모기도, 미꾸라지도, 강아지도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한다고 이미 30여 년 전에 말한 한없이 급진적인 사상가, 권정생. 권정생을 읽으며 나는 배제된 삶이 선사하는 안목을 꿈꾸게 됐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비전은 오로지 배제된 자들이 머무는 곳, 변두리에서 일어난다는 걸 그의 동화와 산문, 시 모두에서 낱낱이 발견했으므로. 이쯤 되면 대학원생의 가장자리를 맡고 있는 내 위치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를 넘어 자부심(!)이 생길 만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창작 활동을 하던 생가를 향하는 길 또한 인적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저 아담한 돌담이 이어지고 풀들이 피어있는 풍경만이 고요히 여행객을 맞아주었다. ‘아마도 저 소박한 담벼락 아래 흰둥이가 똥을 누고 갔겠지. 그리고 여기서 민들레와 강아지똥이 만났겠지’ 생각하며 도착한 생가는 작고 낡은 흙집이었다. 자연 속 동물과 식물 모두를 친구 삼을 수 있도록 탁 트인 이 소박한 집에 앉아 오래 머물렀다.

안동을 다녀온 그 주간의 주일예배에서 논문 주제를 확실히 결정했다. 예배는 언제나 내 안에 새로운 기획이 피어나는 시공간이었고, 그 안에서 나만 쓸 수 있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씨앗이 이미 내 안에 뿌려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게 하나님 뜻인가?

두 가지 질문

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일례에 불과하다) 무례하게 말을 거는 학우들 혹은 사려 없이 내 겉모습과 사회경제적 위치만 보고 판단하는 교수들과도 공존해야 했다. ‘그들’이 쉽게 판단하듯, 난 어떤 허세로 무용한 학위를 따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저 변방의 배제된 외톨이 권정생이 유머를 잃지 않고 꿋꿋이 그 낮고 보잘것없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공존의 길을 찾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의 숙제다. 이해받지 못하고 늘 나를 입증해야 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평화의 마음을 잃지 않고 공존을 모색할 수 있을까. 내가 붙잡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한편, 나 또한 더 낮은 곳에 있는, 작고 약하며 입이 없는 존재들을 지우지 않고 어떻게 그들과 공존할 것인지는 또 다른 질문이었다. 권정생처럼 배제되어 있으면서도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며 어린이와 생쥐, 민들레꽃, 풀 한 포기까지 마음 쓰던 이의 애끓는 질문은 작품이 되었고, 내 질문의 실마리는 그의 많은 작품 중 특별히 이 두 작품에서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