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공동체
[383호 수도회, 길을 묻다]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와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물질과 성적 욕구, 세속의 꿈을 내려놓았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여 세대를 잇는 일이 불가능한 독신 공동체라는 점에서 그들은 중성인이다. 그러니 굳이 여성들의 수도회만 따로 떼어 논의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성 수도회, 즉 수녀원은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세속의 가부장제 질서를 피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뤘다는 데서 독립성이 있다. 수녀원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선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중세에 탁월한 업적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 대다수가 수도원 출신이었다. 하지만 수녀원이라고 해서 남성 사제 중심 위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속의 삶을 등졌다는 동기는 같지만 그 공간에서조차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존재했다. 미사 등을 드리려면 반드시 남성 사제가 필요했다. 나아가 수녀원의 탄생은 악의 근원을 세상과 단절시켜야 한다는 여성 혐오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여성의 자발적 참여와 강제적 은둔이라는 두 극단의 모습이 존재하는 수녀원은 기성교회나 남성 수도회와는 다른 독특한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수도회는 남성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회 구성원 중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한 번에 그려내는 일은 공평하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수녀 공동체 태동기부터 중세 말까지의 흐름을 몇몇 인물 중심으로 개략적으로 짚어보자.
여성 수도 공동체의 탄생
그리스도의 짧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여성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헌신했다. 십이사도가 모두 남성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인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이들은 여성이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확산시켰던 여성들이 존재했다. 고대 후기와 중세에 걸쳐 교회가 성장하면서 자기 삶을 교회에 헌신하기로 선택한 여성들이 늘어났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교회에 헌신된 삶을 살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해졌고, 수녀원이 성립되었다. 다른 여성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참회와 헌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여러 질문이 제기됐다. 기꺼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포기하고 가족을 떠날 의지가 있는가? 금욕적인 삶을 살며 기도에 전념할 수 있는가? 성을 지닌 피조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여성들에게는 여기에 추가적인 질문이 부과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이 제기한 제도화된 여성 혐오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려는 여성들의 단순한 소망은 이들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는 남성 중심 교회의 바람과는 배치되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깊은 불신은 하와의 불순종 범죄로 이 땅에 악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믿음에 근거했다. 남성 중심 교회는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얕잡아봤다. 여성들을 열렬히 가르치고 교회의 비전에 그들을 포함시켰던 그리스도와 달리,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맡은 남성들은 여성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 했다. 열등하고 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여성들에게 완전한 가부장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은 여성이 교사 역할을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남성에 대한 권위를 갖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도 공동체에서도 남성 수도회보다 더 엄격하게 수녀원 담벼락 안으로 영원히 여성들을 가두는 봉쇄수도원 개념을 만들었다. 테르툴리아누스이나 히에로니무스와 같은 대표적인 교부 신학자들은 이러한 여성 혐오적 시각을 신학적으로 규범화했다.
라틴 그리스도교 형성에 기초를 놓은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225)의 저술에는 과도한 반여성주의 시각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모든 인류를 죄에 빠트린 여성을 향한 경멸과 불신은 여성들의 의복을 규제하고 베일을 씌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는 처녀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처음 개념화하여 통제하려 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하와의 원죄로 인해 모든 여성들을 저주받은 대상으로 보았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을 상실한 원인이 하와의 탐욕스러운 성적 욕구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섹슈얼리티는 악마가 이 땅에 저주를 가져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다. 그렇기에 남성 권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여성, 베일을 쓰지 않는 여성은 위험 요소였다. 그래서 여성을 그리스도와 혼인시켜 통제한다는 생각을 공식화했으며, 이렇게 봉헌된 처녀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렸다.
히에로니무스(347-420)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여성 혐오적 시각을 공유했다. 자신의 저술과 주변에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교인 미망인들과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서신을 통해 금욕 생활을 배우고 실천하는 순결의 의무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히에로니무스 자신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맺고 유산을 노려 비행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주교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남편을 여읜 파울라와 그녀의 딸 유스토키움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스캔들 때문이다.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 번역은 파울라의 재정적인 후원과 더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유스토키움에게 받은 도움으로 가능했다. 이 세 사람은 384년 성지순례를 떠났고, 베들레헴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파울라는 히에로니무스를 위한 수도원과 자신을 위한 수녀원 건설에 들어갈 자금을 지원했다. 이들은 영적으로만 맺어진 순결한 관계가 아닐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파울라가 죽은 후 유스토키움이 세속의 삶으로 돌아갈까 봐 우려한 히에로니무스는 결혼과 모성의 공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특권과 신성함을 일깨워주는 ‘동정녀의 서약’이라는 긴 편지를 보냈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는 여성들 사이에서 수도 생활을 향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하고 아를의 성 요한 수녀원을 설립했다. 이 수녀원은 수녀들을 위한 회칙을 최초로 만들었다. 여성들은 일생 회랑 안에 거주하며, 경제적 자급자족과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는 삶을 추구했다. 수녀들은 세속을 등지고 죽는 날까지 영원히 봉쇄수녀원에 고립된 채 살아가야 했다. 512년 봉헌된 성 요한 수녀원은 수도 서약을 한 수녀들이 죽을 때까지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한 최초의 봉쇄수도원이었다. 이곳은 교부 전통에서 비롯된 가부장적 통제를 고수했지만, 카이사리우스는 수녀들이 문해력을 갖추어 스스로 성경을 읽는 등 지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구적으로 고립되는 가혹한 현실에도, 신분적·경제적 평등을 강조하고 문해력을 갖춘 지식 공동체를 추구한 결과, 중세 수도원 생활의 기초를 놓았다.
명예남성 혹은 여성성의 대표
그리스도교가 성립하고 첫 천 년을 보낸 후 12세기에 이르러 교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다. 이 시기 성직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핵심 중 하나는 성직자 혼인 금지였다. 개혁가들은 여성에 대한 도덕적·육체적 혐오를 전제로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다. 사제와 혼인한 여성은 매춘부라는 낙인이 찍혔다. 12세기는 수도원 생활에서 여성에게 전환점이었다. 이 사회적 변화의 시기에 여성 금욕주의가 극적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수녀원에 들어가는 여성이 계속 늘어나면서 도드라진 업적을 남긴 수녀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여성에게 더욱 가혹한 종교 환경에서 목소리를 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표현 방식에서는 큰 대조를 보인다. 중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1098-1179)와 아시시의 클라라(1194-1253)는 당대 가부장제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현한 인물과, 그 질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목소리를 낸 인물로서 각각 대표성을 지닐 만하다.
힐데가르트는 예언자, 선지자, 의사, 시인, 작곡자 등으로 다방면에서 성과를 낸 수녀였다. 부모가 열 번째 자녀인 그녀를 하나님께 바치면서 여덟 살 때부터 수녀원에서 삶을 시작했다. 복음서 해설, 베네딕트 회칙에 대한 논문, 의학서, 성인전 등을 저술했고, 대규모 음악 작품인 〈오르도 비르투툼〉(Ordo Virtutum)을 작곡했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신적 환상과 묵시를 기록하기 시작한 힐데가르트는 교회 당국으로부터 검토와 승인을 받아 저술을 유통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수녀가 아니었다. 남성 위계의 교회에서 설교하고,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권위가 있었다. 당시 표준적인 여성의 역할을 넘어섰다. 여성의 종교적 신념과 권위를 인정하는 정교한 여성신학을 발전시켰다.
힐데가르트는 12세기 대두된,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힐데가르트가 권위를 행사할 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권위의 원천에 대한 물음에 여성이라는 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약한 그릇을 통해 말하는 일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낮췄다. 교회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면서 힐데가르트는 우월한 남성과 나약한 여성이라는 종속적인 신분을 수용했다. 스스로 여성성을 강조하지 않으면서 여성에게 드리워진 의심을 극복하고 권위와 명성을 얻었다. 그 시대 ‘명예남성’으로서 자기 재능을 통해 교회를 되돌릴 개혁 의제를 제시하며 당대 주요 성직자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주어진 능력으로 수도원 공동체를 운영하고 성장시키고 그 너머로 목소리를 확산시켰지만, 철저하게 남성 위계가 수용할 수 있는 용어로 자신을 표현했다. 여성성에 대해서도 양면적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여성인 자신에게 신적 예언이 임한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여성으로서의 나약함과 한계를 반복적으로 인정하고 남성 중심 권위에 복종했다. 수도원 생활에서 수녀들을 목회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으나, 성사를 분배하는 일은 힐데가르트가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모든 수녀회에는 수녀의 정신적 필요를 돕고 고해성사를 듣고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이 있었다. 이 사제들이 여성 수도원에서 수녀들의 종교 생활을 뒷받침했다. 수녀회는 남성과 별개인 독립적인 공간이었으나 사제의 가부장적 위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13세기에도 종교적 소명에 관심 있는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교회 개혁 요구도 지속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개혁 운동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가 주창한 사도적 청빈 운동이었다. 이에 참여한 이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을 벗 삼아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아시시의 클라라도 프란체스코의 열렬한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세속의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회랑이라는 공간 안에서 전통적인 관념을 유지한 채 종교적 헌신을 실천한 힐데가르트와 달리, 클라라는 수녀회 회랑을 넘어 극단적인 형태의 종교성을 실천했다. 여느 남성 탁발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하고 음식과 숙박을 구걸하는 검소한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소망은 위험한 여성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교회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쳤다. 수도 생활을 하는 여성은 수도원 회랑 안에 고립된 채 살아야 한다는 카이사리우스 시대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클라라와 추종자들은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이나 물질을 받을 수 없었고, 공동체가 베푸는 자선에 의존해 살아갔다.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고자 선택한 극단적 금욕주의 식생활은 교회 당국의 적대감을 부추겼다.
비정통이나 이단이라는 의심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승인을 받아야 했다. 1218년 클라라의 수녀회는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승인을 받아 정규 공동체로 조직되었다. 힐데가르트는 베네딕트회 규칙을 여성에 맞게 수정한 회칙을 따랐다. 반면, 클라라는 자발적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초점을 맞춘 독자적인 수도 회칙을 마련했다. 이는 여성이 작성한 최초의 여성 수도회 회칙이었다. 힐데가르트와 마찬가지로 클라라 역시 남성 위계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일생을 싸웠다. 힐데가르트는 신비주의자이자 예언가로서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와 세속 권위에 영향을 미쳤다. 스스로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낮추며, 전통주의의 틀을 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클라라가 취한 방식은 더욱 도전적이었고 강력했다. 물론 귀족적인 배경이 남성 권위에 맞설 최소한의 기댈 언덕이 되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자신이 요구하는 바가 타협할 수 없는 기준선이라고 판단했을 때 물러서지 않았다. 교회 계서(階序)가 구획해놓은 회랑을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청빈한 여성이라는 자의식으로 살아간 그녀의 삶은 한 세기 전 힐데가르트가 택한 방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클라라는 사후 2년 만에 성녀로 시성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몸부림이 과소평가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억압과 새로운 돌파
힐데가르트와 클라라가 대표하는,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점은 남성 가부장제 교회의 위기와 한계가 존재했다는 현실을 방증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교회는 종교를 향한 여성의 분출을 가두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1298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반포한 교서 페리쿨로소(Periculoso)는 모든 지역 수녀원 수녀들을 영원히 수녀원에 격리하도록 명령했다. 13세기 교회 개혁을 향한 여성의 목소리가 분출되자 수녀회의 자율권을 침해했다. 이렇듯 엄격한 고립을 요구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늘 그렇듯 첫 번째 제기되는 혐의는 남성을 영적으로 오염시키고 구원을 위협하는 여성의 부정적인 힘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에서 확산되는 여성들의 종교 활동 때문이다. 베긴회라고 알려진 이 여성 공동체는 수도 서약을 하고 수도원 회랑 안으로 들어가 생활하지 않고,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고자 노력하는 평신도 공동체였다. 베긴회는 가난과 병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생활을 돕는 공동체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소유 재산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갖고 있는 베긴회의 활동에 대해 제도교회는 우려했다. 하지만 유럽 전역으로 퍼져 여러 지역사회의 후원을 받아 유지되던 베긴회를 억제하기란 간단치 않았다. 여성들의 독자적인 영향력 확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제도교회 내 여성들을 통제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그 점에서 수녀원에 있는 여성들은 엄격한 새 규칙을 적용하기에 가장 쉬운 대상이었다.
이제 교서 페리쿨로소는 회랑 밖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여성의 삶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평생 완전히 고립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직면한 여성들은 삶에 변화를 주었다. 교서 페리쿨로소가 부과되고 이후 수년 동안 수도회 여성의 신앙 관행이 변화됐다. 여성 신비주의가 증가한 것이다. 엄격한 봉쇄 생활과 함께 관상 생활이 더욱 강조되었고, 14세기와 15세기에는 여성 환시가들이 영향력을 가진 하나의 집단으로 떠올랐다.
인문주의·르네상스와 더불어 중세 말 신비주의는 종교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과도한 이성과 논리로 인해 사변성이 확대되면서 가해진 스콜라학을 향한 비판은 당시 성직 중심 세계관이 겪는 위기의 한 단면이었다. 신비주의가 드러내는 신은 논리적 분석 대상이 아닌, 사랑과 덕이라는 가장 본원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존재였다. 남성 성직 계층은 수녀들을 회랑 안으로 영구히 가두었지만, 이들은 은둔하며 남성 성직 세계가 보지 못하는 신의 속성과 본질을 읽어냈다. 중세 말 두드러진 신비주의자들을 수녀회에서 배출했다.
노리치의 줄리언(1342-1416)은 개인적인 신비체험과 더불어 메시지를 통해 새로운 영성을 표현한 중세 말 대표적인 신비주의 여성이다. 그녀는 하나님께 세 가지 선물을 간청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목도하고 그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생 동안 질병을 통해 약할 때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못 박힌 상처를 자기 몸에 갖는 것이다. 30세가 되던 1373년 5월 8일 줄리언은 큰 병을 앓았다. 그날 열여섯 차례 계시를 받았다. 자신이 받은 계시를 이후 15년간 묵상하면서 책을 저술했다. 세상과 떨어져 노리치 교회에 붙은 방에 은거하며 방문객들을 맞아 상담했다. 그녀가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묘사한 《Revelations of Divine Love》(거룩한 사랑의 계시)는 여성이 저술한 최초의 영어 저술이다. 그녀가 받은 계시는 신적 사랑과 관련되었다. 줄리언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떤 종류의 진노를 찾아볼 수 없는 “다 잘될 것이고, 다 잘될 것이고,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고 다독이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전한다. 유럽의 흑사병과 백년전쟁, 왕위 계승으로 인한 내부 갈등 등 정치·경제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중세를 지탱해왔던 남성·성직 중심 세계관의 한계가 명확했다. 이 속에서 신적 자비에 뿌리내린 줄리언의 신학은 피상적 낙관을 말하지 않았다. 신의 모성성을 드러내며, 외적인 의례가 아닌 신앙의 내적인 면을 강조했다.
신비주의는 스콜라학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종교성에 대한 여성의 대안이었다. 파리 대학 총장을 지낸 신학자 장 제르송(1363-1429)은 신비주의가 주장하는 계시가 거짓이라는 의혹을 품고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참된 계시와 거짓 계시를 분별하려는 시도는 거의 대부분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향했다. 그 결과 성직자의 여성 통제가 강화되었고,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남긴 예언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몫은 오롯하게 교회가 갖게 되었다. 성직자가 재판관이 되는 교회의 인정 절차를 통과하지 못하면 이단이 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여성의 종교성을 약화했을 뿐 아니라, 여성 혐오를 강화했다. 그 비극적인 결과물은 1487년 출간된 문서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인 야콥 슈프랭거와 하인리히 크라머가 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를 심판하는 망치)이라는 악명 높은 마녀사냥 교범이었다. 여성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남성의 불안은 이제 이들의 경험을 마법술과 동일시했다.
모순과 역설의 공간, 수녀원
간단하게 훑어본 정도지만, 수녀원이라는 공간은 그리 간단치 않다. 세상에 퍼트릴 악을 방지하기 위해 여성을 고립시키고 억압한 공간이면서도, 남성 위계의 세계에서 오롯하게 여성의 종교성을 실천하며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수녀원이 존재했기에 남성 성직 위계가 읽어내지 못하는 지점을 읽어내, 오히려 남성들을 향해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화되면서 다시 봉쇄된 공간 안으로 수녀들을 제한했을 때 신비주의가 발전했던 역사는 수녀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응축된 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기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도원 폐쇄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또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평생 수녀원 회랑 속에 갇힌 여성들에게는 해방의 소식이었으나, 다른 한편 성직주의 가부장제에서 현모양처를 추구하는 가정 중심 가부장제로의 전환과 다름없었다. 그나마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숨 쉬고 활동할 공간이 소멸된 셈이다. 수녀원이야말로 모순과 역설의 공간이다. 성직주의와 가부장제가 억압할수록 대안의 종교성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