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하나님의 형상’
[383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치매1)를 앓았던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똑같은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일본어로. 일제강점기 학교에서 배웠다는 말을 매번 덧붙이셨다. 가사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소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줄지어 소풍 가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간혹 집안이나 자식에 대한 자랑거리를 한참 늘어놓는 등 철 지난 이야기도 세트메뉴처럼 따라붙었다. 늘 비슷한 레퍼토리. 어렸을 적부터 그런 할머니를 자주 보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이 보증을 잘못 서서 우리 가족은 아파트를 내놔야 했다. 결국 할머니·할아버지 댁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국민학교 교장에서 퇴임하신 할아버지가 수십 년 전 지은 1층짜리 주택이었다. 나는 여기서 대학 진학 때까지 지냈다. 마당에는 울타리용 회양목과 동백, 금목서, 단풍, 향나무·감나무 등이 심겼고, 이곳저곳 분재와 화분이 많았다. 곳곳에 멋스러운 수석들도 놓였다. 부엌과 연결된 뒤뜰로 들어가면 장독대가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작은 연못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 시선에서는 높디높았던 종려나무의 잎을 정리하고자 전지가위 들고 사다리에 오르던 할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다섯 시 기상, 저녁 아홉 시 취침을 놓치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셨는데, 요플레 드시던 시간까지도 정확했다. 오후가 되면 정기적으로 할머니와 화투를 치셨다. 당시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만 했었다.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려는 나름의 노력이었으리라. 4년 뒤 할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와병 끝에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의 병증은 급격해졌다.
몇 개월 후 아버지가 일을 관두고 전담하여 간병하게 되었지만, 빈 시간 동안 할머니 행동을 살피는 역할은 형과 내 몫이었다. 할머니가 유난히 반복했던 행동은 제사 준비였다. 우리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늘 제삿날 아니에요”라고 대꾸하며 할머니가 안방으로 돌아가게끔 유도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장손이었고, 집안에 일이 끊이지 않아 할머니는 젊은 시절 항시 부지런하셨던 분이었다고 들었다. 그랬던 당신께 찾아온 치매라니. 이 일 저 일 나서는 성미가 가시지 않아, 집 밖으로 나가 골절되고 실종되시는 등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살아계셨다. 말년엔 앞이 보이지 않아 거의 누워 지내셨다. 임종은 눈에 보이게 찾아왔다. 생애 마지막 순간은 찬송가와 함께였다. 그러나 내 뇌리에는, 장례식장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눈을 하고 있던 아버지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다. 돌아가시기 한두 해 전, 할머니께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체념해버렸다. 반복된 감정의 파도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마음속 많은 부분이 말라버렸다며, 자신의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다 하셨다. 날이 갈수록 간병인보다 감시자에 가까워졌다.
할머니를 다시 떠올렸던 때는 장례식을 치르고 몇 년 지나고서다. 어느 기독교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논쟁 때문이었다. 상대는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우울증이나 치매에 걸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논쟁할 가치도 없었지만, 살다 보면 딱히 원치 않는데도 어처구니없이 끌려 들어가는 상황이 생긴다. 머릿속 뇌관에 불이 붙었다.
‘인간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지금은 전두엽이나 해마 손상 등 뇌의 문제로 우울증, 치매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정신질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을 향한 교회 내 시선도 제법 달라졌음을 실감하곤 한다. 당시는 사회적 인식이 지금보다도 많이 떨어지는 시기였다. 논쟁은 결론을 맺지 못했고, 서로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릴 따름이었다. 나는 상대방의 꽉 막힌 태도에 신물이 났다.
저쪽에서 어떤 논증을 펼쳤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울증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를 비롯한 여러 구절을 인용했고, 치매에 대해서는 신앙생활에 관한 기억을 잊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저주하는 환자 같은 경우 어떻게 볼 것인지 내게 반문했다. 나는 로뎀나무 그늘 아래에서 죽기를 간구했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왕상 19장)와 19세기 ‘설교의 황제’ 찰스 스펄전(1834-1892)2)을 우울증을 겪은 그리스도인의 대표 사례로 내세웠다. 치매 문제는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걸릴 수 있는 질병임을 짚었고, 영아와 지적장애인의 구원에 관한 신학자들 견해를 비교하여 살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애인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대해 논하려는 글에서 이렇듯 ‘치매’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든 것은, 독립성과 경제적 생산력, 지성과 기억, 자기 통제력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상실케 하는 대표적인 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3) 한국의 경우 ‘치매인은 장애인인가’를 둘러싼 논쟁 자체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전문가들은 6개월 이상 장애가 고착되었음을 입증하여 장애인 판정을 받는 뇌병변 환자와 비교해보면 치매의 장애 진단 근거는 의학적으로 충분하다고 본다.4) 시간이 갈수록 비장애인들 또한 치매를 다른 질병들보다 상대적으로 가깝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는 나라이기에, 치매는 한국교회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되었다.5) 이 시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듯 ‘인간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데서 오는 위로일 테다.
신경학자 베로니카 오킨은 《오래된 기억들의 방》(RHK)에서 인간을 “자신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구조물”(180쪽)로 규정한다. 특히 감각 정보를 통해 받아들인 경험의 조합으로 형성되는 ‘서사 프레임’을 인간됨의 한 요소로 지목하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다움의 상실’은 치매에 꼭 들어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기억 손실 이후 시간 감각을 잃고 자전적 기억이 파괴되는 순서로 진행되는(156쪽), 치매의 가장 대표적인 원인 질환 알츠하이머병의 예후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시간 감각의 상실은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로완 윌리엄스가 《인간이 된다는 것》(복있는사람)에서 지적하듯, 종교 공동체에서의 ‘의미 축적’과 관련이 깊은 시간의 경과는 “우리가 성장하고 전진할 뿐만 아니라, 건설적으로 되돌아가 우리 자신에게 재공급해주는 ―말 그대로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매개체”(109쪽)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간 제의”는 ‘망각의 마른 땅에서 마시는 냉수 한잔’과 같은 은혜를 제공해준다. 임상심리학자 벤자민 마스트가 쓴 《내 기억 속의 하나님의 은혜》(그리심)에 따르면, 뇌의 기억 체계 중 ‘서술적 기억’ ‘절차적 기억’ ‘정서적 기억’이 있는데, 알츠하이머병은 사건·대화·정보의 저장과 관련한 ‘서술적 기억’에 가장 먼저 영향을 준다. 이때 오래된 기억보다 최근의 기억이 빨리 소실된다. 자전거 타기 등 신체 활동과 관련한 ‘절차적 기억’, 장소·냄새·소리 등 무의식적으로 기억된 감정을 불러오는 ‘정서적 기억’은 해마의 손상 가운데서도 여전한 복원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신앙생활하면서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했던 상징물이나 예배 의식에서의 행동 패턴 같은 것이 안정을 찾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기억하는 능력은, 이 병의 홍수가 그 사람을 덮치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은혜의 섬’으로 남아 있다.”(65쪽)
자의식과 감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뇌과학자 온조 아야코는 《뇌과학자의 엄마, 치매에 걸리다》(지호)에서 치매에 걸린 엄마의 ‘엄마다움’을 ‘정서적 기억’(감정기억)을 통해 발견해낸다. 부제로 나와있듯이 “기억을 잃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 걸까?” 하는 물음이 그에게는 내내 절실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도 엄마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됐다’고 우울해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기분이다. …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는 감정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 정보를 올바르게 전해주면 이전과 같은 감정적 반응을 한다. 그럴 때 나는 확실하게 ‘엄마는 이곳에 있다’고 느낀다.”(201쪽)
할머니가 치매였기에, 나 또한 치매 환자에 대한 ‘인간중심적 돌봄’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보면 마음이 일렁인다. 내가 보기에 말과 행동이 엉뚱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든 상황을 인지시키는 데 집중하고 맞서기보다, 할머니의 반응에, 즉 할머니가 인식하는 ‘현재’에 그때그때 더 귀를 기울이고 성심성의껏 응답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할머니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있으시길 마냥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늘 반복적으로 보아온 할머니 모습은 그 자체로 당신께서 살아오신 인생의 조각들을 담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고, 참으로 불행하게 느껴졌던 아버지와 할머니의 처절한 날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입장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나갈 수 없다. 다만,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1층짜리 주택에서의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보듯이, 조용히 시절을 돌아보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이를 만들며…”
결국 할머니에 대한 위와 같은 아쉬움을 곱씹는 것은, 치매이든 다른 정신질환이든 여러 한계 가운데서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 의미 있게 채워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겠다. 이는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권’과 ‘존엄성’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7, 이하 새번역)라는 말씀에 바탕을 둔다. 이는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존재로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이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기에, 인간을 함부로 해할 순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6)
사람의 목숨은 거룩하며, 심지어 토라의 두루마리들보다 더욱 거룩하다. 그 거룩함은 사람이 성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공적(merit)을 통해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는 왕 중의 왕을 닮은 이에 대한 마땅한 공경심으로 대해야만 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한국기독교연구소, 226쪽)
창세기가 쓰이던 당시 고대 근동의 주변국들에서 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는 ‘왕’들밖에 없었다. 즉,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창 1:26) 역할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주장은 이 같은 사상을 비판 및 전복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형상’(첼렘)은 ‘우상’으로도 번역 가능한 단어로, 신을 형상화하는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명령(출 20:3-6)과 관련된다(민경구, 《다시 읽는 창세기》, 이레서원, 2장 참조). 이는 더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 응당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연결되어있는 셈이다.
김홍덕은 《장애신학》(대장간)에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답이 없기에, 인간의 몸이나 지성 등에 반영되는 특정 이미지로 생각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손상을 입은 존재’로 장애인을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견해를 검토한다. 결론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적 차원으로 이해하든 관계적 차원으로 이해하든, 정신장애인이나 하나님을 인지하기 어려운 지적장애인을 배제하는 난점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특정한 형태로 정의하기보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의 언약 차원으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펼친다. 하나님께서 먼저 불러내셔서 맺은 언약을 인간은 깨뜨릴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갱신하면서까지 인간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신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언약의 관계’에 ‘하나님의 형상’ 이해의 뿌리를 두자는 말이다(54-57쪽).
장애신학에서 인간론을 다룰 때 주요하게 언급하는 본문은 출애굽기 4:11이다. 이 구절은, 장애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고자 모세를 보내려 할 때, 그를 설득하시는 과정에서 나온 말씀이다. 모세가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4:10)라고 거절하자,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4:11) 김홍덕은 여기서 “본문이 그저 하나님이 장애인을 창조하셨다고 서술했을 뿐 장애에 대한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았다”(64쪽)는 데 강조점을 둔다. 장애가 비정상이라거나 불행하다는 식의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출애굽기 4:10을 들어서 모세를 ‘언어장애인’으로 규정하는 장애신학자도 있다. 모세가 말을 더듬었다거나, 이집트 출신이라 히브리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출애굽을 위한 명령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할 핑곗거리를 찾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한다(《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본문 해설). 김정훈은 “모세가 물리적으로 말하는 데 장애가 있었을지, 아니면 과장된 은유(hypernolic metapher)일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본다.7) 다만,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언어적 장애’를 치유하시지 않으셨고, 대신 아론이라는 사람을 붙여주셨다(《장애신학 2》, 대장간, 31-32쪽). 이 흐름은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을 드러내며 인간이 상호의존적 존재임을 일깨운다.
‘장애인 보호 법령’인 레위기 19:148)을 보면, 장애인의 주변 환경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드러난다. 이 구절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을 저주하거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함으로써,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의지를 적극 표명하고 있다. 김근주는 이렇게 설명한다.
말씀의 결론은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다. 이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여도 그 당사자가 들을 수 없다는 점이나 앞 못 보는 이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아 그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친히 그들의 보호자가 되심을 선언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을 위한 레위기》, IVP, 459쪽)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단일하고 진실한’ 법칙은 없다”
장애인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엄한 인간’이라는 함의를 담은 위의 선언과 달리, 인간들은 어떻게든 존재를 ‘정상/비정상’으로 구분하려 한다. 인종이 되었든 이성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사회·문화에 바탕을 두는 특정한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줄을 세우기도 했었다. 문화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가 쓴 《정상은 없다》를 보면, 근대 이후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을 특정해보려 했던 ‘백인 남성들에 의한’ 시도들이 언급된다(8장). ‘정상성’(normality)은 1849년 처음 정해진 영어 어휘로, 곧 통계적 평균을 의미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정상성=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정상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졌다. 저자는 ‘정상’ 개념 대중화에 영향을 준 굵직한 사건을 소개하는데, 그중 두 가지를 언급하려 한다.
먼저 1942년 21-25세 백인 남녀 1만 5천 명의 신체 평균치로 남자와 여자의 입상(立像)이 만들어져 미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적이 있었다. 유난히 손이 크고 사지가 긴 ‘불균형한 인간’이 만들어졌다. 평균적 미국인을 상징하는 석고상으로, 이름은 ‘노머’와 ‘노먼’이었다. 1961년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젊은 남성’을 정의하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시카고 대학에 정신의학과를 설립한 저자의 할아버지와 정신분석가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함께 쓴 글이었다. 시카고 조지 윌리엄스 대학에 다니는 남학생들을 상대로 설문과 심리검사를 진행하여 진단했을 때 어떤 정신질환에도 해당되지 않는 남성 수십 명의 데이터를 확보해 인터뷰를 진행한 것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강박적인 성격과 경직성, 집중되고 제한된 관심, 안락을 유지하려고 활동을 이용하는 것, 창조력·공상·자기 성찰의 결여가 안정성과 정신건강을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인가? (215쪽)
데이비드 앤더슨은 《신학적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밀알서원)에서 ‘정상/비정상’과 ‘자연스러움/부자연스러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만연하여 장애인에게 다가서기를 꺼리는 비장애인의 의식적·무의식적 차별 문제를 짚는다(40쪽). 논의를 이어가며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을 가져온다. “우리 존재 모두의 정상적인 상태가 우리 모두가 다르다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상을 요구하는 것은 횡포일 수 있다.”(41쪽, 재인용)
덧붙이자면, 정신질환은 때때로 예술성·창조성과 엮이어서 논의되기도 한다. 조현병 연구의 대가 E. 풀러 토리가 쓴 《조현병의 모든 것》(심심)을 보면, 조현병·조울증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13장). 책이 밝히는바 여러 연구에 따르면, 창조적인 사람이 조현병에 취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둘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논하기 어려운 까닭이 있다. 조현병은 질병 특성상 ‘비범한 사고 과정’의 통제를 통한 창조성 발휘가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직계친족은 더 취약할 수 있다는 연구가 존재한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고모·아들·딸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아들이, 빅토르 위고와 버트런드 러셀과 제임스 조이스는 딸이 모두 조현병에 걸렸다. 조울증은 조금 다르다. 조울증의 특징 중 하나인 “높은 활력과 신속한 사고 과정”(544쪽)이 창조성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헨델, 베토벤, 바이런, 메리 셸리, 포, 발자크, 헤밍웨이 등이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표현을 들어보았을지 모르겠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무언가에 집착’ ‘높낮이가 없는 말투’ ‘소음에 민감함’ ‘사회적 부족’ ‘어색한 포즈’ ‘눈을 맞추기 어려움’ ‘틱 증상’ 등의 특징에 따라 진단이 내려진다. 똑같이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을지라도, 사람들마다 해당되는 가짓수가 다르고 증상의 정도 또한 다르다. 과거에는 저 증상 중 몇 가지만 갖고 있으면 자폐 진단을 받을 수 없었고, 이해받기도 힘들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사회생활에 힘든 측면이 많았다. 진단 기준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이에 낙인과 차별을 줄이고자 소아정신과 의사 로나 윙은 ‘자폐 스펙트럼’ 개념을 만들었고, 협소한 진단 기준을 조정할 수 있었다.9) 발달장애인 아동을 오랫동안 진료해온 의사 혼다 히데오는 《자폐 스펙트럼》(마고북스)에서 ‘자폐 스펙트럼’과 ‘자페 스펙트럼 장애’를 구분하면서 자폐 스펙트럼인은 잠재적으로 전체 인구의 10%, 전형적 자폐는 0.3%로 추정한다(96쪽).
정신건강가족미션 소장이자 목사인 폴 김은 25년간 정신질환자 가족들을 돌보았던 경험에 기반하여 “이 영혼의 싸움터에서의 또 다른 발견은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이 알게 모르게 정신적 장애를 겪으면서 정신질환의 거대한 스펙트럼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 마름모, 20쪽)이라는 말을 전하기도 한다. 한국 성인의 정신질환 평생 유병률은 27.8%(보건복지부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이르는데, 이는 국민의 4명 중 1명이 평생 1번 이상 정신건강에 관한 문제를 호소한다는 말로,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정상과 비정상은 낮과 밤의 관계와도 같다. 그 두 가지 상태는 누가 보아도 정반대이지만, 그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단일하고 진실한’ 법칙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임시적이나마 ‘유용하고 현실적인’ 경계선이 필요한 것이다. (정우현, 《생명을 묻다》, 이른비, 209-210쪽)
1)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에 따르면, 치매(Dementia)는 뇌 손상으로 인지기능에 복합적인 장애가 발생하여 이전만큼 일상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다. 심장병·암·뇌졸중에 이은 4대 주요 사인(死因)이다. 원인 질환은 80-90가지에 이르나, 알츠하이머병이 전체 원인 중 50-80%를 차지한다. 한자어로 어리석을 ‘치’(癡), 미련할 ‘매’(呆)를 쓰는데, 〈여성경제신문〉 7월 20일 자 보도(치매 병명 개정, 정권 바뀌니 복지부서 ‘전원 반대’)에 따르면, 한자문화권인 일본·홍콩·대만은 사회 인식과 부정적 뉘앙스를 개선하고자 각각 인지증(認知症)·실지증(失智症)·뇌퇴화증(腦退化症)으로 명칭을 개정했다. 한국 또한 ‘인지장애증’(2011·2017년) ‘인지저하증’(2017·2021년) ‘인지흐림증’(2021년) 등으로 고치는 법안이 발의된 바 있으나 계류 중이다.
2) 김영봉은 다이애나 그루버의 《영혼의 밤을 지날 때》(바람이불어오는곳) 한국어판 서문에서 마음의 질병을 ‘믿음의 결여/부재’ 또는 ‘귀신 들림’으로 곧잘 인식하는 신앙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꼬집는다. 이 책은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추정되는 신앙 위인 7명(마르틴 루터, 한나 앨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윌리엄 쿠퍼, 찰스 스펄전, 마더 테레사,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삶과 내면을 다룬다. 책에 따르면, 한 음악당에 모인 1만여 명 앞에서 설교하던 스물두 살의 스펄전은 거짓 화재 경보로 인파가 급히 빠져나가면서 발생한 참사(7명 사망, 28명 중상 등)를 목도하고 쓰러진다. 이 비극은 그의 삶에 배경으로 깔린다. 이후 아내와 겪은 만성질환 또한 스펄전의 기질을 건드렸고, 그는 평생 동안 우울증과 씨름했다.
3) 김영희, 〈치매를 통해 본 인간의 영성이해와 돌봄 : 목회 상담적 접근〉, 《성경과신학 Vol. 56》(2010), 138쪽.
4) 조우진, “치매, 장애로 인정해야 합니다”, 〈후생신보〉(2019.11.27.).
5) 한국은 2021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중앙치매센터)이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16.5%(통계청), 고령 인구 증가 속도는 OECD 37개국 중 1위(4.4%, 한국경제연구원)이다. 교회의 현 상황은 교인이 약 235만 명(2021년)으로 추정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총회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60대 이상 예장통합 교인은 2018년 기준 전체(약 255만 명)의 25.4%에 해당하며, 농어촌교회를 기준(2021년)으로는 89%로 추산된다.
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창 9:6)
7) 김정훈, 〈구약성경의 장애인 관련 용어의 분류와 그 의미 분석〉, 《한국기독교신학논총 No. 112》(2019), 28쪽.
8)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레 19:14)
9)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내용은, 〈과학동아〉 441호(2022년 9월) 76-79쪽에 실린 강병철의 글(‘신경다양성’이라는 따뜻한 시선) 중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