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자리
[384호 공간 & 공감]
해가 짧아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절기의 신비로움을 몸소 경험한다. 약 1천 3백 세대가 사는 우리 동네의 아침 풍경은 시간대별로 달라진다. 아직 희붐한 아침은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바쁜 발소리로 시작된다. 더러는 양복에 구두 차림이지만 대개는 점퍼에 운동화처럼 활동하기 좋은 복장이다. 아마도 자영업에 종사하는 분들일 것 같다. 아침을 여는 이들이 어둠을 가르고 떠나면, 그다음으로 30·40세대의 분주한 움직임이 동네를 채운다. 이곳은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15분, 마을버스를 타면 세 정거장인 애매한 거리와 위치 때문에 임대차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역세권이 아닌 까닭에 출근 시간 골목 어귀에서는 어지럽게 시간 계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버스 5분 남았는데 기다렸다가 타고 갈까?’ ‘마침 신호가 바뀌었으니 운동할 겸 그냥 걸어가자. 어차피 거기서 거기다’ ‘너무 피곤하니까 택시 타고 갈까?’ 등 갈등하는 몸짓도 보이고, 무념무상의 상태로 어제처럼 몸이 가는 대로 가는 단호한 움직임도 보인다. 이 시간대는 갖춰 입은 사람들의 시간이다. 청소년들도 이 시간에야 볼 수 있다. 왠지 모르게 주위를 어색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등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중학생들은 아직 호기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심드렁한 표정의 고등학생보다는 활기가 서려있다. 양복과 교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초여름 새싹처럼 피어오르는 어린이들의 소리가 가득하다. 초등학생들과 유치원생들이 대개는 할머니, 엄마의 손을 잡고, 가끔은 할아버지와 아빠와 함께 등장한다.
아이들은 뛴다. 아무 일이 없어도,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차가 오거나 말거나 일단 뛰고 본다. 이미 밥 먹이느라, 옷 입히느라 아이들과 한바탕 실랑이하느라 지쳐버린 보호자들은 아이들을 걱정 어린 눈으로 뒤따른다. 그러다 정말 위험한 찰나를 맞닥뜨리게 되면 그때는 즉각 불호령이 떨어지는데 옆에서 듣는 나도 심장이 떨린다. 등원, 등교를 시키고 난 뒤 짧은 자유를 맞이한 학부모들은 삼삼오오 커피숍에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뒤늦게 일터로 나간다. 서로 다른 이유로 분주했던 이들이 모두 동네를 떠난 뒤 아침 풍경을 장식하는 마지막 사람들은 노인들이다.
노인들은 아침의 열기가 차분히 가라앉는 10시 즈음부터 동네로 나와 외부 활동을 시작한다. 물론 늦잠을 잤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한강공원 산책과 공공기구를 이용한 운동을 마친 후, 아침밥을 간단히 차려 먹고, 뉴스와 건강 프로그램, 드라마까지 섭렵한 후 집 밖으로 나온다. 노인들의 외부 활동은 단순하다. 마트에 가서 새로 들어온 고구마와 배추 등 물가 시세와 할인 행사 소식을 파악하고, 부동산에서 일간지를 종류별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후 텔레비전에서 나온 이런저런 건강 정보를 공유한다. 그러다가 조금 무료해지면 채소 가게에 들르거나 요구르트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눈다. 그리고 동네 어귀에 놓인 벤치에 앉아 바람과 햇빛을 쐬면서 밤사이 벌어졌을지 모를 새로운 일, 별다른 소식을 서로 수집한다. 그러다가 다시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마트, 부동산, 채소 가게와 요구르트 카트 등 동네 상점들을 돌고 다시 벤치로. 이렇게 비슷한 동선을 몇 번 반복하다가 해가 지는 오후 5시 무렵 댁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 시청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다음 날도 비슷한 하루가 반복된다.
물론 우리 동네에도 노인정, 경로당, 무더위쉼터 등등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있다. 그러나 무슨 사정인지 노인정에는 가는 분들만 가신다. 듣기로는 노인정에는 기업과 복지관 등 여러 곳에서 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한 여러 물품과 자원이 들어오는데, 그 자원을 배분하는 일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다고 한다.
동네에 무인 편의점 생긴 지 2년이 넘었지만, 노인들은 이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용하는지 물어볼 방법이 없고, 또 잘못해서 기계를 고장 낼까 봐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기계일 뿐인데…. 집 앞 무인 편의점에서도 파는 제품을 도보 15분 걸리는 대형 상점까지 가서 사는 노인들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근 1년 사이 대형 상점의 셀프계산대 비중이 크게 늘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계산원이 직접 계산해주다가 어느샌가 셀프계산대가 실험적으로 들어오더니 이제는 기계가 계산원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프랜차이즈뿐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들도 입장 대기 명단에 순서를 등록하거나 주문이나 결제하는 과정을 사람 대신 키오스크가 맡고 있다. 또 ‘현금 없는 버스’도 등장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이용객 다수가, 심지어 현지에 살고 있지 않은 여행객마저도 교통카드를 이용하는 현실이다 보니 버스 안에 요금통과 거스름돈을 지급하는 시스템이 점점 필요가 없어져 현금으로는 운임을 지급할 수 없는 버스가 나타난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인간은 신속히 적응한다. 무자본 창업으로 성공한 유튜버이면서 작가인 자청은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책 《역행자》에서 인간은 수렵 및 채집하던 시절의 본능이 유전자에 아직 남아있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 속성은 현대사회에서 걸림돌이므로 성공하려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요즘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과거에 머무르거나 변화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지금 여기, 노인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자주 가는 후암동 카페에 앉아 여느 때처럼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창문 밖 건너편 미용실 화단에 상자를 깔고 앉아있는 노인 두 사람을 봤다. 카페 속의 나와 거리의 노인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커피값 3천 원은 비싸다는 가치판단으로 발생하는 가치관 차이일까, 아니면 답답한 실내보다는 뻥 뚫린 시원한 야외를 선호하는 취향 차이일까. 가끔 카페나 식당에 오면서 “우리가 이런 데(젊은 사람들만 많은데) 들어가도 되나?” 겸연쩍고 민망해하며 들어왔다가 결국 나가버리는 노인들을 본다. 어쩌면 노인들은 자신을 비켜줘야 하는 존재로 축소시켜 놓았기 때문에 설 곳과 앉을 자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삶의 굴곡마다 켜켜이 쌓인 지혜나 인생 모퉁이를 돌 때 깎이며 생긴 아픈 깨달음보다, 성공하기 위한 핵심 방법을 빠르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해낸 콘텐츠를 더 사랑하는 시대의 요구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노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마침 동네 한쪽에 바람이 잘 통하는 작은 공터가 있어 아파트 주민들의 협의를 거쳐 3인용 벤치 두 개가 놓였다. 나무판 3개가 연결된 단순하고 흔한 구조의 벤치인데, 이마저도 없을 때 노인들은 동네 빌라 화단 둔덕에 상자를 깔고 앉았다. 벤치 하나에 여러 명의 노인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어릴 적 동네 골목 어귀마다 놓여있던 평상이 떠오르곤 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복권 당첨으로 갑자기 부유해진 정환이네 집 앞에도 평상이 놓여있었다. 그곳은 동네 사람들이 콩나물도 다듬고, 맥주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일상을 공유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정환이네가 복권 1등에 당첨되고도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은 것도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동네마다 놓인 평상의 쓸모는 다양했다. 요즘같이 김장을 준비하는 철이 되면 누구네 것이랄 것도 없이 다 함께 서로의 고추를 말리고, 말린 고추의 먼지를 닦고, 마늘을 깠다. 주 6일 하루 10시간 노동이 당연했던 시절, 일하면서 묻은 설움과 한을 집에 들어가기 전 털어내기 위해 잠시 앉았던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 부업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인형 눈 붙이기, 인형 배 속에 뽁뽁이 집어넣기 등 단순생산라인을 가동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평시에는 노인들이 평상에 앉아 쉬기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면서, 삶은 고구마 같은 간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고 서로의 아이들을 함께 봐주는 공동육아 터이기도 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동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는 자리였다.
좁은 골목이 사라지면서였을까. 골목과 거리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의 이동이 편리하도록 개선되면서 평상도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평상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요즘 벤치는 등받이도 없고, 의자가 높아 성인 여성인 내가 앉아도 발끝이 겨우 닿는다. 어떤 의자는 앉는 곳이 칸막이로 구분되어있다. 노숙인들이 누워 잠을 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칸마다 구분 철을 해놓았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일까. ‘잠시’ 궁둥이를 붙였다가 가는 일 외엔 벤치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화단에 심긴 화초를 보며 추억에 잠길 수도, 비타민디를 흡수하는 데 좋다는 햇볕을 마음껏 쬐기에도 적합해보이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원래 벤치의 쓰임이 잠시 앉는 것이며, 애초에 오래 정주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낸 세금을 사용해 국정 업무를 목적으로 더 좋은 공간을 만들겠다는 말처럼, 시민들도 도시와 동네에서 더 나은 자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아직도 정부와 국회 관료들을 ‘나라님’이라고 생각하고 높은 분으로 여기는 노인들을 위한 자리라면 더더욱 목소리를 내고 싶은 마음이다. 1년에 한 번 어버이날 즈음하여 ‘행사’로 모시는 일시적 자리 말고, 누구나 언제든 천천히 편안하게 걸어도 변하지 않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이 상상은 세계에서 가장 급격하게 고령화되는 대한민국에서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상상이 아닐까.
하루 24시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지 가끔 생각한다.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내 시간을 아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눈을 밝혀 찾는 시대인데,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노인들은 시간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빨리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고, 특히 치매 걸리지 않고, 아이들 고생시키지 않으면서 자는 것처럼 편안하고 죽고 싶은 게 소망인 사람들. 이들에게 변화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전복시키지 않고 물들이면서 찾아올 수는 없는 걸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한 장 차이라면 과거 속에 변화가 있고 또 변화 속에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