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2: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공존은 성스럽다”

[384호 나의 최애들]

2022-10-30     박혜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일은 평생의 숙제다. 어쩌면 이 연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때마다 길을 내주는 작가를 만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작가들을 등불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몇 년 전부터는 내가 누군가의 한 걸음을 위해 등불까지는 아니고 휴대폰 손전등 정도 비춰주는 작은 일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발 담그고 있는 청년 회복 공동체에서 은둔 경험이 있는 청년들과 한 달에 두 번 함께 읽고 쓰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청년들은 모임에서 어떻게 가족 혹은 한국 사회와 불화하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사회와 만날 접점을 만들어낼지 진지하게 궁구하며 토론했다.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제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이 공동체에 들어와 힘껏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사회와의 접점을 찾는 그들의 모습은 곧 내 모습이기도 했다. 이번 하반기에는 박동수 작가의 《철학책 독서 모임》(민음사)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책으로는 겨우 두 번 모였을 뿐이지만, 이내 우리의 질문은 깊어졌다. 첫 챕터부터 “지상에서 함께 살 이들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주디스 버틀러의 뼈 때리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해하기 힘든 타자들과 불가피하게 공존해야 하는 숙명 속에서 어떻게 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저 불편한 타인과 부대낄지 질문에 질문을 거듭했다.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이들과의 공존

어쩌면 가장 쉬운 답은 만남 자체를 삭제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폭력을 휘둘렀고, 또 폭력적으로 대할지도 모를 ‘한국’ 사회로 왜 또 굳이 들어가야 하지? ‘한국 사회화’ ―짐짓 가면 쓰고 미소 짓고 적당히 스몰토크하며 웬만한 부당함은 눈감을 줄 아는 유연성을 가지고 둥글둥글 살기를 강요하는 그 사회화― 가 끝내 몸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를 밀어내기만 하는 듯한 현실에 왜 온몸으로 참여해야 하지? 우리들의 질문이었다.

약자를 배제하고 수단화하는 사람이라도 내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호의를 표하며 잘 지낼 정도로 무감각하게 ‘오로지 생존’하는 사람을 보는 괴로움, 입만 열면 여혐을 바탕색 삼아 온갖 여자 동료를 깎아내리는 윗사람을 견뎌야 하는 고통,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는 내 자리를 찾지 못하는 유치한 습성을 지닌 권력자를 보며 내가 그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나 또한 매일 저녁 퇴근길에 하는 생각들이란 이렇게 사소하고 지질한 것들뿐이다. 과연 내가 이런 사람들과 ‘공존’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까? 그냥 피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물고 뜯고 깎아내리고 배제하고 뒤에서 욕하는 방식으로 생존하는 세계에 환멸이 든다. 나도 그 세계에 일조할 때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지상에서 함께 살 이들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

이 처절한 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공존’을 고민하며 함께 사는 방식을 궁구하는 일은 언제나 약자의 몫인 것 같아 억울했다. 타자와 함께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어 질문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것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도록 짜인 구조 속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려면 얼마만큼의 권력이 필요할까? 그러려고 권력이 필요한 건가? 그런 사람은 아득바득 책 읽고 울면서 글을 쓸 필요가 없겠지? 그래도 애타게 타자를 마음에 붙잡고 읽고 쓰고 토론하며 총천연색 생각과 감정으로 살 수 있다는 게 약자의 특권이겠지? 일단은 그렇게 믿어본다.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매일을 정직하게 살아낼 자신이 없다. 그 자신, 누구보다 외롭고 서러운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보다 ‘함께 살기’를 고민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 오늘을 또 버텨볼 수밖에.

서러운 사람에게 들려주는 서러운 이야기

보도블록에 안착하지 못하는 은행 열매들이 길거리에 나뒹굴고 낙엽이 수북이 쌓여 한 해의 마지막이 가깝다는 시그널이 내려앉는 계절이면 생각나는 책이 있다. 권정생 작가의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산하, 1994).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어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하느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세상에 내려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농촌 윤서방네 수박밭에 떨어진 하느님과 예수는 도시에 올라와 철거촌 마을에 자리를 잡는다.

도시로 올라온 청년 예수는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하고, 청소부로 취직해 한동안 철거촌에 자리 잡는가 하면, 철거촌에서 쫓겨난 이후로는 실향민 과천댁과 리어카를 끌고 나가 거리의 과일장수가 되기도 한다. 성실히 노동해 늙은(?) 아버지 하느님과 철거촌에서 만나, 가족이 된 고아 소녀 공주를 먹여 살린다. 어머니로 모시기로 한 실향민 과천댁까지 함께 살며 유사 가족이 된 네 명은 서로 의지하며 고단한 서울살이를 해나간다. 아들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하느님은 과천댁 할머니를 따라 점쟁이를 찾아가보기도 하고,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보기도 하며 세상살이를 경험한다. 점쟁이로부터 삼백만 원짜리 살풀이굿을 해야 할 팔자라는 진단을 받거나, 교회에서 온통 죄를 지적받아 기가 죽는 장면에서는 이 어벙한 하느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들 지경이다. 예수님은 한 번 세상에서 살아봤다고 만렙 생활력으로 척박한 도시 생활을 씩씩하게 일구어나가는데 하느님은 생활력이 영 시원찮다.

철거촌에서 쫓겨날 때는 “하느님도 철거반원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오른쪽 이마에 혹이 나고 예수님은 어깨를” 맞고, 노점상 단속 때는 방망이를 들고 온 단속반과 싸우다가 예수님이 구치소에 끌려가는 등 1990년대 변두리 도시민들이 겪는 고초를 온몸으로 겪는다. 과천댁 할머니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해 눈물 흘릴 때, 달동네에서 어린 봉식이가 집에 홀로 있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숨을 거둘 때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찾는 모습을 보며 미안해진 하느님은 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게 그저 괴롭다. 아들에게 이제 그만 하늘로 올라가자고 투정 부리기도 했지만, 통일이 될 때까지는 여기에 머물기로 하고 이야기는 끝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소식에 눈물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하느님과 하루하루 육체노동을 하며 생활의 최전선에서 일상을 꾸려가는 변두리 노동자 예수님 이야기를 읽는데 왜 환멸과 회피의 마음이 사그라들까. 이 이야기에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윤리 지침 따위는 없는데….

사람 살아가기가 점점 힘이 듭니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해도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만 할 수 있지,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결국 세상엔 평화는 없는 것일까요?

원수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쓸데없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물질은 힘센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누며 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나는 새도, 들에 피어나는 조그만 꽃 한 송이도, 하느님은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엔 다툼이 없고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들판의 꽃과 새와 짐승들도 함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고 추워도 이렇게 서로 도우며 아끼는 세상이 된다면 궁궐 같은 큰집도, 맛있는 음식도, 화려한 옷도 모두 쓸데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세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오두막에서 보리밥을 먹으며 기운 옷을 입고 땀 흘려 일하며 살아도 식구끼리 정답고 이웃끼리 웃으면서 살면 그것이 천국 아니겠습니까?

―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글쓴이의 말’ 중에서

글쓴이의 말을 읽어보니 내 마음에 전달되어온 이야기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눈물 많고 연민 가득한 하느님과 하루하루 성실히 노동하며 살아갈 청년 예수가 지금도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의 리얼리티가 힘의 근원이었다. 이 이야기에 공존의 ‘원리’ 같은 건 없지만, 하느님과 예수님도 이렇게 땀 흘리고 기운 옷 입고 세상에 참여하며 고아와 과부를 맞아들여 살고 있으니, 너도 그 무력한 평화의 방식으로 환멸의 세계에 참여해 살아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이 작은 어린이책을 올해도 읽다 보니, 고달픈 삶 중에서도 자기 자리에서 이웃과의 공존을 일궈내는 이들을 성스러운 존재로 격상시키는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권의 도덕 교과서를 보는 것보다, 푸른 하늘과 별과 그리고 나무와 숲과 들꽃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아니다. 한 포기의 나무와 꽃과 풀도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억척같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빛깔로 세상을 밝혀 주고 있다.

공존은 성스럽다. 이웃 사랑은 남의 것을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되로 주고 말로 빼앗아 가는 자선사업은 가장 미워해야 할 폭력 행위이다. …내가 쓰는 동화는 그냥 ‘이야기’라 했으면 싶다. 서러운 사람에겐 남이 들려주는 서러운 이야기를 들으면 한결 위안이 된다. 그것은 조그만 희망으로까지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빌뱅이 언덕》(창비, 2012), 17-18쪽.

권정생 선생님은 정확히 알고 계셨다. 힘은 없지만 질문하고 애쓰며 어떻게든 현실에 발 딛고 살아나가려는 서러운 사람에겐 남이 들려주는 서러운 이야기만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라는 조언이 아니라 ‘이야기’만이 희망으로 이끌어주는 구체적인 도움이라는 것을.

그들은 정말 대척점에 있는 이들인가

그런데 내게 ‘공존’ 방식을 고민하게 하는 이들은 정말 내 대척점에 있을까? 그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고 정의에 눈감는 소시민일 뿐일까?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나는 전쟁터이기만 할까?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대척점으로 규정해버린 사람들과 나는 다른 사람일까? 권정생의 또 다른 이야기가 내게 일으킨 질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똘배나무 집 개구쟁이 돌이가 한입 먹고 그 새큼텁텁한 맛에 시궁창에 내던져버린 똘배의 달나라 여행기다. 똘배가 아기별을 따라 달나라를 보고 돌아와 자기가 버려진 시궁창을 새롭게 보는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창비, 1990).

시궁창에 떨어진 존재의 결말은 앞서 떨어진 땡감처럼 퉁퉁 곪았다가 죽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울다 지쳐 잠든 똘배에게 아기별이 찾아온다. 이렇게 더러운 시궁창에 왜 찾아왔느냐고 묻는 똘배에게 별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이런 시궁창도 가장 귀한 영혼이 스며 있는 세상의 한 귀퉁이란다.” 아기별님 관점 무엇? 놀란 가슴 부여잡고 아기별 따라 하늘나라 여행을 떠나는 똘배. 어디선지 향긋한 치자꽃 냄새 같기도 하고 석류꽃 냄새 같기도 하며 모과 냄새 같기도 한 향기가 날아와 이게 무슨 향기인지 물어보니 달나라 계수나무 냄새라고 한다. 그 냄새를 따라가 보니 초록 잎새가 우거진 골짜기가 눈앞에 펼쳐지고, 엄마 토끼, 누나 토끼, 아빠 토끼, 오빠 토끼가 목화를 따고 나락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술래잡기하고 뛰어노는 아기 토끼들과 두꺼비집을 짓는 꼬마 토끼들도 보인다. 동화 속 계수나무 옥토끼 이야기 그대로 펼쳐진 달나라 풍경을 보며, 과학교육 잘 받은 어린이처럼 물어보는 똘배. “아폴로 지구인들이 왔다 간 곳은 어디야?” 그러자 아기별님이 똘배에게 한쪽 눈을 가려보라고 한다.

똘배는 한쪽 눈을 손바닥으로 꼭 눌러 덮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똘배는 깜짝 놀랐습니다. 계수나무 향기도, 목화밭도, 초가집 마을도, 아기 토끼들도, 금세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쓸쓸한 사막이 나타났습니다. 무시무시한 웅덩이와 돌멩이 산이 보였습니다. … 지구인들의 신발 자국이 모래 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꽂아 놓고 간 깃발이 후줄근히 처진 채 힘없이 서 있었습니다. …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이상했습니다. 너무도 고요하고 쓸쓸했습니다.

―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56-57쪽.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읽은 그때, 내가 오랜 시간 한쪽 눈을 가리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집어서 읽으라”는 어린이들 노랫소리를 듣고 로마서를 펼쳐 들어 깨달은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내가 구독하는 팟캐스트가 주장하는 논리와 내가 팔로우한 친구들의 담론 속에서 한쪽 눈을 가리고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판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나? 둘로 나눠진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손잡지 못하고 쓸쓸해졌던 건 아닐까?

두 눈으로 본 달나라와 한 눈으로 본 달나라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묻는 똘배처럼 난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똘배와 내게 아기별이 건네는 또 다른 명언. “어느 것이 진짜인지 네 마음대로 정하렴. 이젠 날이 밝아 오니까 어서 내려가자.” 아기별님 지혜 무엇? 두 눈으로 본 세상이 진짜인지 한 눈으로 본 세상이 진짜인지는 내가 정할 일이다. 날이 밝았으니, 내려가야지. 진짜 현실로.

무지했던 사람들은 달나라엔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운 사람은 달나라엔 공기가 없고 물도 없는 벌거숭이 사막이라는 걸 밝혀내었다. 똑똑한 사람은 사물을 곧이곧대로 보고 있지만 마음은 얼마나 황폐한가. 달나라에 계수나무가 있고 옥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미개하고 어리석었지만 마음속은 훨씬 아름다웠다.

― 《빌뱅이 언덕》, 69쪽.

많이 배웠고,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는 나는, 서로 다른 정치·경제적 입장을 가지고 적대하며 물고 뜯고 배제하는 현실의 황폐함만 바라봤다. 그 관점은 정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실은, 내가 그저 소시민이라고 치부하고 나와 다르다고 규정해버리며 타자화한 이들을 한 눈으로밖에 보지 못한 데 있을지도 몰랐다. 사물을 곧이곧대로 볼 만큼 똑똑했을지는 몰라도, 마음은 온통 황폐해져 계수나무와 옥토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세계 속에서 편협한 시야와 취향으로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며 늘 싸울 준비만 하고 있었던 환멸가. 생존주의자와 여혐주의자의 한 면만을 확대해석해 대화와 타협이 어려운 존재로 치부한 채, 세상을 지옥 같은 시궁창으로만 여겼던 귀머거리.

달나라를 보고 시궁창으로 돌아온 똘배에게 장구벌레들이 다가와 선녀님 분냄새가 난다고, 아니 진짜는 하늘 냄새가 난다고 수선을 떤다. 이미 두 눈으로 하늘나라를 보고 돌아온 똘배는 자기 옆에서 수선을 떠는 장구벌레들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건네며 푸른 하늘을 쳐다본다. “시궁창은 참 좋은 냄새로 가득 찼어.” 똘배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마음을 정한 거다.

시궁창 같은 현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굳이 불편한 사람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애쓰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모두 그렇게 사니까. 그런데 옆집에 살고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전능함을 내려놓고 매일 노동하며 과천댁 할머니와 고아 소녀 공주와 오순도순 ‘오늘’을 산다. 두 눈으로 달나라를 보고 온 똘배가 시궁창에서 “봉선화 꽃물을 들인 누나의 손톱 냄새”와 “할아버지 환갑 잔칫상 냄새”를 맡으며 다른 세계를 본다. 공존은 실은 두 눈으로 보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몰라, 똘배가 속삭인다. 그러하니,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내일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러 나가봐야겠다.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