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X’라는 공식이 세워진다
[384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Y! 야근은 내가 먼저!
얼마 전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흥미로운 광고가 흘러나왔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10대 김유나 양은 X세대? 랩을 좋아하는 60대 조현구 할아버지는 MZ세대?” 등의 질문을 던지는 화자는 알파벳으로 세대를 구분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임을 강조했다. 지나치게 바른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만든 공익광고였다. 공사에서 만든 광고이니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생각하다가도 ‘겨우 음악 장르로 세대 구분을 이야기하겠다고?’ 하는 묘하게 뒤틀린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애써 마음을 달래가며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같은 광고의 영상 버전을 시청했다. 이윽고 깨달았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음악 장르만 이야기하던 라디오 버전과 달리 영상 버전은 세대별로 논쟁거리가 될 만한 주제들을 의연하게 넘기면 세대 갈등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 같았다. 문제는 세대를 대표하는 듯한(?) 인물들의 발언이었는데, 예를 들어 Y세대는 “야근, 필요하다면 내가 먼저!” Z세대는 “애들은 불평이 너무 많아!” 같은 식이었다. 야근을 없애자고 해도 모자랄 판에 솔선수범하여 야근을 대신하겠다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아이들이 불만이 많다는 청소년의 모습 역시 기성세대의 억압적 태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말로 그동안 한국 사회를 들썩거리게 만들던 세대론에 관련된 모든 논란을 덮으려는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0대 대선까지 극에 달했던 세대에 관한 논의와 논란은 선거 이후 마치 모종의 목적을 다한 듯,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세대론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주제로 흥분하는 것은 매우 촌스러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MZ(라는 요상한 세대 구분)를 아직까지 이야기하는 단체는 늘 그렇듯 한 박자 느린 종교 단체나 아직 준비한 상품을 채 팔지 못한 기업들, 이미 제작한 콘텐츠가 남은 방송국뿐이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담론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세대론이 남긴 상처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위의 공익광고 사례에서 보았듯 세대론으로 지나치게 또렷해진 세대 구분은 여전히 묘한 갈등 근거로 남아있다. 다만, 세대론이 사라지며 갈등을 이겨낼 방법에 관해서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면 어차피 한 박자 늦어버린 종교계에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준비하면 어떨까? (세대론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갈등과 반목, 상처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세대론이 무엇인지, 누가 가장 상처를 받았는지 복기할 필요를 느꼈다. 알아야 도울 수 있으니까.
그들이 만든 MZ
세대에 대한 논의 혹은 논란이 최근에 갑자기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MZ’라는 특이한 표현이 등장한 이후 사람들이 세대론에 이목을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MZ’라는 세대 구분은 영어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지표이다. 1980-1994년에 태어난 M(밀레니얼) 세대, 1995년 이후 태어난 Z세대를 하나로 엮은 개념이다. 그들이 경험한 시대적 환경의 간극이 상당함에도 한국에서는 이 둘을 하나로 묶어 특징을 언급한다. 〈MZ세대의 커뮤니케이션 고유 특성에 대한 각 세대별 반응 연구〉라는 논문에서 손정희·김찬석·이현선은 MZ세대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취합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MZ세대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디지털 기술에 능숙하다. 둘째, 자신의 기준에 맞춰 문제를 해결한다. 셋째, 공정이라는 주제에 민감하고 가치관이 뚜렷하다. 넷째, 다양한 일에 도전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테스트한다. 다섯째, 새로운 콘텐츠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 논문에 따르면, 다섯 가지 특징을 다른 세대 대조군과 비교한 결과, MZ세대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항은 첫 번째 특징인 “디지털 기술에 능숙하다” 정도였다. 또한 다섯 번째 특징인 “새로운 콘텐츠를 선호한다”는 M세대에만 유의미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세대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MZ세대를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차이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세대론은 무엇을 근거로 펼쳐진 것일까?
MZ세대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전, 한국 사회에서 2030세대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 즈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2030 유권자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40대와 비슷하게 압도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조직에 대한 반대 의견이 20대를 중심으로 퍼졌다는 사실은 기성세대들로 하여금 청년 세대의 진보성에 물음표를 갖게 하였다. 이후 2018년 예멘 난민 수용에 대한 20대의 입장도 포용보다는 보류 쪽으로 기울었고, 이에 한국 사회는 청년 세대가 19대 대선에서 보여주었던 정치적 진보성과는 달리 사회적 이슈에 반진보적 관점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사회 이슈를 바라보는 방식은 2020년 6월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2021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그들은 2020년 총선까지 민주당을 지지하던 노선을 이탈하여 여당에 참패를 안겨줬다. 게다가 20대 남녀 지지율 격차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벌어지자, 20대 남성들의 보수당 지지 경향은 곧 ‘이대남 현상’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는 2022년 대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2030세대에 대한 분석과 해석 모두 기성세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청년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정의하는 담론을 내세운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기실 20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정치적·사회적) 해석은 이미 2000년대부터 하나둘 등장했다. 이전에 비해 안정된 사회 분위기, 소비 능력의 증가와 포스트모던 문화의 수혜를 입은 그 시대 청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기성세대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2003년 홍세화 칼럼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은 소비와 향락 문화에 젖은 대학생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학문적 깊이도 없으며, 오직 취업과 성공만을 목표로 한다는 기성세대의 날카로운(?) 지적이 담긴 글이었다. 이후 2007년 출간된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레디앙)는 일면 당시의 20대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며 그들이 소비와 향락에 젖어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님을 변호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논지는 결국 지나친 경쟁 구조를 뒤집어엎기 위해선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정치적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청년 세대에 지우는 모순된 결론인 셈이다. 청년들이 저자들의 논지를 따라 사회를 뒤집어엎을 기미가 없자, 저자 중 한 명이 책을 절판하겠다고 선언한 사실은 기성세대들의 관심이 철저히 그들 중심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한편, 2010년 즈음부터 기성세대들의 청년 담론은 그 시기에 출간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등 청년들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 계발서 형태로 바뀌었다. ‘자기 계발’이라는 논리에 담긴 기성세대들의 노하우는 마치 20대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염려하고, 그들이 이를 극복할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책 속 내용은 작금의 청년들처럼 살아본 적 없는 그들이 자신들의 성공 노하우만을 전수하려는 ‘라떼 설교’의 초기 모델일 뿐이었다. “아프면 환자”라는 어느 코미디언의 조롱은 이러한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된 청년 세대의 저항으로 볼 수 있다. 결국 MZ세대라는 표현만이 덧붙여진 청년 세대 담론은 그들의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 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감상평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MZ세대여, 트렌드를 사세요!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청년 세대 담론의 또 다른 축은 20대들의 소비문화를 촉진하려는 기성세대의 상업적인 관심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 들어 우후죽순으로 출간되는 트렌드 관련 서적들은 이러한 현상의 반증이다. 이듬해에 영향력이 있을 법한 키워드들을 예측하여, 이를 연말 보고서를 통해 발표함으로 ‘트렌드’를 ‘분석’한다는 이들의 의도가 사뭇 흥미롭다. ‘예측’을 ‘분석’으로 소개하는 그들의 자신감이 부럽기까지 하다. 물론 빅데이터 연구처럼 연구 대상의 활동 자료를 통합하여 이듬해의 트렌드를 예측한다는 점에서 이는 과거의 정보를 분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 어느 시점에서 나타날 현상을 분석을 통해 보고한다는 그들의 논지는 여전히 ‘실현 가능성’이라는 변수를 내포하고 있다. 이들이 발표한 트렌드 중 상당수는 그저 단기간 알려졌다가 사라지는 ‘버즈워드’(buzzword)로 남았다. 그럼에도 연구 결과를 마치 ‘현상’이 될 것처럼 발표하는 기관과 이들의 결과물을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무엇인가에 홀려있는 느낌이다.
이것이 그저 불편한 느낌에서 멈추지 않는 까닭은 이런 종류의 보고서를 발표하는 기관들 대부분이 ‘소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단체여서다. 그들이 예측하는 ‘트렌드’는 필연적으로 소비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대부분 청년 세대이다.) 소비와 연관이 있는 트렌드는 기업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다. 언제인가부터 트렌드 분석 보고서와 기업의 상품 기획은 서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 앞서 언급한 트렌드의 실체화, 즉 ‘현상’은 늘 소비 패턴으로 나타났다. 트렌드는 갈수록 기업의 언어로 점철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낸 예가 ‘뉴트로’이다. 이는 문화도 아니고 현상도 아닌 그저 기업들의 상품 기획에 불과했다. 하지만 트렌드를 연구하는 기관들은 이를 청년 세대의 트렌드인 것처럼 소개했다. ‘뉴트로’라는 표현 자체도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만든 신조어인데, “과거를 모르는 세대가 옛 것에서 신선함을 찾아 즐기는 문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뉴트로 문화를 즐기는 청년 세대는 일부에 불과하다. 앞서 이야기한 MZ세대의 특징 연구에 빗대어보자면 뉴트로 상품을 구매하는 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콘텐츠를 선호하는” M세대이다. 이들은 아날로그 문화를 어느 정도 경험한 세대이기에 “과거를 모르는”이라는 전제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뉴트로의 본래 의미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2019년 트렌드로 발표된 것이 2022년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현상은 이미 기획·제작된 뉴트로 상품들의 출시 계획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겠다.
뉴트로와 같은 트렌드는 결국 청년들을 소비자로 치부하는 담론만을 형성한다. 이는 기성세대의 경제적 욕망이 투영된 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셸 푸코의 집단기억이론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뉴트로 트렌드는 기성세대들에 의해 선별된 것들을 기억하게 하여 청년들의 소비 욕구만을 자극하는 문화이다. 그들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기획된 상품들을 소비하게끔 하는 흐름은 자신의 기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MZ세대의 소비 패턴이나 성향과는 무관하다. 일부 MZ세대에 속한 이들이 뉴트로 상품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호와 취향에 근거한 소비이지 청년 세대의 트렌드라 부를 수는 없다. 기욤 에르네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비기능적 트렌드, 즉 개인 취향에 근거한 소비 패턴을 상업적으로 활용한 트렌드라고 해석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청년 담론과도, 청년들의 현실과도 무관한 상품 전략일 뿐이며, 따라서 이에 반영된 기성세대의 관심은 청년들의 현실과는 관련이 없는 다른 담론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청년 담론은 대부분 기성세대의 사회적 관심이나 상업적 욕망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청년 세대들에 자신들 경험에 근거한 훈계를 늘어놓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그들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기획한 상품의 소비자로 그들을 활용하는 데 있다. 이러한 목적에 근거한 청년 담론은 청년들의 실제 삶과 연관이 없다. 만들어진 청년 담론은 기성세대의 의도에 따라 청년들 삶을 단순화하고 일반화한다. 앞서 살펴본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M세대와 Z세대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수이며,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넘어 성의 없는 해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굴레를 벗어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는 그들의 특징과는 별개의 담론에 의해 정의되고 묘사된다. 이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은 절대로 오늘날 청년 세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기성세대는 대부분 모더니즘적 사고방식, 즉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하나의 진리를 찾아가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옳은 것 이외의 모든 생각이나 행위는 전부 불안정하고 불편한 것들이다. 반면, 오늘날 청년들은 지극히 포스트모던적이다. 그들의 사고와 행위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며, 다양하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적인 삶을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정리하다 보면 이는 묘사나 서술보다는 프레임 씌우기나 분류와 같은 논지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청년 담론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점도 이러한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결국 청년 세대 담론은 이해가 아닌 다른 목적을 전제로 하며 실제로 청년 세대를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한 프레임으로 작용한다. 전상진은 《세대 게임》(문학과지성사)에서 세대론은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사회의 문제를 세대 문제로 치환한 일종의 프레임이며, 그 안의 당사자들은 서로를 탓하며 승패를 위해 다투기에 바쁜 나머지 구조적 문제와 같은 근본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세대론 프레임 안에서 문제의 해결은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닌 특정 세대에 책임을 묻고 그들에게 벌을 가하거나 그들의 단점을 지적하여 그것을 답습하지 못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실제로 오늘날 세대 담론은 다양한 프레임을 만들어내며 청년 세대를 재단하고 분류했다. ‘이대남’ ‘이대녀’ 같은 신조어들을 만들어내며 그들을 ‘갈라치기’하였고, 그 프레임 안에서 청년들은 서로 반목해왔다. 이는 세대론 프레임의 결과임에도, 기성세대는 언론을 동원하여 그것이 청년들이 만들어내는 문제임을 지적했고, 많은 이들은 이러한 반목의 근본 원인인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지 못한 채 청년들을 탓하고 비난했다. 물론, 이를 악용한 극단적인 갈등론자들은 청년 세대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례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세대론으로 일반화되기에는 과잉 대표된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세대론 프레임에 가려진 청년들의 진짜 갈등은 무엇일까? 임명묵은 《K-를 생각한다》(사이드웨이)에서 청년들이 보이는 공정에 대한 민감한 반응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내 몫을 확보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진단한다. 공정을 요구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라는 주장이라기보다는 내가 불리하지 않다는 안정감을 취하고 싶다는 요구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회 현안에 대한 이들의 입장이 지속적으로 바뀌는 이유, 특정 집단과 갈등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는 타인을 폄훼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스스로를 평가절상하는 자기 보호의 감정적 반응이다. 청년 세대들의 혐오와 차별은 보수화나 가치관의 차이에 근거한 갈등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문제인 셈이다.
결국 혐오와 차별, 갈등과 배제로 양분화되는 청년 세대의 현실에 대한 책임은 세대론 프레임,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는 기득권자 기성세대들에게 있다. 하지만 프레임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의 문제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타인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고 있는 청년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혐오와 차별과 같은 폭력의 줄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다. 이는 이것을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기성세대들의 책임이자 역할이다. 청년들의 마음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결국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 누구는 겪지 않았나?’ 같은 생각이 먼저 든다면, (아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부모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은영 박사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청년들이 겪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영화 〈버닝〉에서 전종서 배우는 귤을 먹는 마임을 잘하는 법을 이같이 설명한다. “여기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거야. 먹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만 있으면 돼. 그러면 입에 침이 고이고 진짜 맛있는 귤을 먹을 수 있어.” 청년들에게는 귤이 없다. 작금의 MZ세대를 통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표 중 하나는 그들이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도, 주거공간도 약속된 바 없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결혼·출산·인간관계, 심지어 꿈과 희망까지도 포기하는 N포 세대라는 표현이 유행한 때가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제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상황이 나아진 것이 아니다. 그저 기성세대들이, 언론이 그 표현조차 쓰고 버렸을 뿐이다. 과연 기성세대들은 N포 세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귤을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는가?
혹자는 어려운 상황은 늘 있어왔다며 청년들의 약한 마음을 탓한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가진 의미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을 왜 모를까?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MZ세대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데 능숙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무엇을 하겠는가? 세상을 만난다. 자신의 취향과 선호를 발견한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가 성공하는 이유, 모바일 게임이 흥행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은 자신의 물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세계에 넓게 퍼져있다. 그만큼 취향이 다양해지고 수준이 높아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진 상황에서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실재의 괴리, 원하는 것과 현실의 대비는 상당한 정신적·육체적 불안을 낳는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실존의 문제라 부른다. 그들의 고민은 단순히 은행 잔고나 좋은 직장을 넘어선다. 그들이 ‘행복’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단순히 말초적인 흥미만을 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있다.
MZ=X
MZ세대가 의미하는바, 그들의 특징이라 불렸던 것들,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세대론 프레임과 그 안에 존재하는 기득권 기성세대의 욕망. 세대 담론에 의해 가려진 청년들의 진짜 현실까지 살펴보니, ‘MZ=X’라는 공식이 세워진다. 청년 세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살펴보아진 적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미지수’이다. 미지수이기에 기성세대들의 당연한 논리로 정의될 수 없다. 마음에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한 청년들은 때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고, 그것이 누군가를 반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표본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 있는가? 감정의 널이 뛰기에 청춘 아닌가?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누군가의 프레임이나 언론의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요동치는 감정은 그들을 미지수로 남겨놓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미지수인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자신들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귤이 없어 두렵고 불안하다면, 세상에 많은 다른 과일들을 탐하라고. 리베카 솔닛이 이야기했듯, 희망·자신감·정의와 같은 비물질적인 가치의 무한한 양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줄 이러한 가치들은 결코 부족함이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많이 가져간다 해도, 충분히 많이 남아있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강이요 목마른 이가 없는 샘이다. 이러한 가치들로 행복을 누릴 때에 세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라는 말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그저, 아직 미지수이기에 결코 기성세대들의 논리에 맞춘 M이나 Z로 정의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영원히 미지수로 남기를. 기성세대들이 결코 생각하지 못한 논리로 세상을 감시하고 세상에 저항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생귄의 한마디
민민님, 뉴트로 현상에 대한 흥미롭고 다소 격앙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주제에 관심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습니다만, 여기선 몇 가지만 언급해볼게요. 소위 세대론이 다양한 개인들을 ‘세대’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고 정형화(stereotype)한다는 지적은 적극 공감합니다. 가족, 친구끼리도 서로 다른데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묶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같은 맥락에서 ‘뉴트로’ 현상을 MZ세대의 전반적 특징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즉 MZ세대가 뉴트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돌출되는 현상들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 돌출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겠지요.
민민님은 뉴트로 현상을 MZ세대를 타깃한 마케팅 결과로 분석했습니다. ‘뉴트로’ 용어부터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트렌드 연구소에서 만들었으며, 현상의 주요 특징도 문화 상품 소비로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논의 기저에는 문화를 사고 파는 소비주의가 자리합니다. MZ세대가 좋아해서 뉴트로 현상이 생겨났는지, 만들어진 뉴트로 상품을 그들이 선택했는지 선후 관계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민민님은 그들을 향해 “속지 마! 이건 너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야!” 외치는 듯합니다.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왜 그들은 뉴트로 상품을 소비하는가?’ 철저히 기획된 마케팅의 산물이고, 그들이 모든 MZ세대를 대표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왜 이 시기 ‘뉴트로’ 상품을 선택했을까요? 긴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뉴트로 현상을 통해 배울 점이 있다고 봅니다. 소비하고 향유하는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그냥 새롭고 재밌어서 좋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뉴트로를 통해 자신들 세대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련함 같은 정서를 느끼는 듯합니다. 쉽게 복제되고 대체되는 인스턴트 사회에 지쳐 오리지널한 아날로그 감성에 끌리는 개인들의 존재가 오늘날 역사적 맥락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MZ세대 특징은 아니라도, 이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목소리임은 분명하겠지요.
거대한 소비사회 구조 속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소비도 하나의 문화이며 소비가 곧 나와 사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는 듯해요. 우리 시대의 향유는 소비자본주의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더 나은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소비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