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수도원 폐쇄, 예수회의 등장

[384호 수도회, 길을 묻다]

2022-10-30     최종원

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라는 하나의 그리스도교 공화국을 유지하던 유럽이 분열되는 사건이었다. 교황제나 화체설의 부정과 같은 신학적 차이 이외에도, 사제 결혼 허용이나 가톨릭교회에서 금지하던 이혼이 제도화되는 등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큰 변화들이 생겨났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도주의 삶에 대한 부정과 수도원 해산이다. 독일과 잉글랜드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가치를 담보하는 공간으로서 지위를 영구히 상실했다. 중세 말 수도원의 과도한 부 축적과 수도원이 낳은 부정적인 기능에 대한 공격은 그리스도교 역사 내내 이어진 수도회의 명맥을 끊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수도회는 종교개혁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수도회에 대한 평가와 수도원의 존재 유무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별 짓는 또 하나의 명확한 지표가 되었다.

좀 더 큰 틀에서, 종교개혁이 촉발한 수도회 폐지는 두 가지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수도회가 지향하는 정신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여정에 가톨릭이 제기하는 선행과 공로주의, 금욕주의 등의 가치가 들어갈 틈은 없으며, 구원이 오직 신의 전적인 은총에 맡겨졌다는 신학은, 더 우월한 종교적 가치와 그렇지 못한 속된 가치라는 이분법을 거부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수도회 정신에 대한 논리적 비판과 거부로 이어졌다. 또 다른 하나는, 이론적인 반대와는 별개로 수도원 해산을 경제적 측면에서 파악하는 관점이다. 수도원 해산은 당대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재산을 국가라는 세속기관이 몰수한다는 의미이다. 종교개혁으로 국가 군주가 통치 지역의 종교를 결정하게 되면서 취한 우선 조치가 수도원 폐쇄였다. 명목상으로는 수도원이 안고 있는 폐해가 넘쳐났기 때문이지만, 그리스도교의 한 기둥을 이루던 수도원을 해산하여 국가가 효과적으로 종교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그리스도교를 열어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으로 제국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의 장래에 위기의식을 느낀 많은 이들이 세속을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소극적으로, 도피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경고이기도 했다. 수도회가 사라진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국가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견제하고 종교 본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쓸 세력이 소멸했다. 수도주의 부정과 수도원 해산은 전통과 보편을 담보하는 제도교회와 별도로 시대정신과 역동을 매개하여 그리스도교의 활력을 지켜왔던 한 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6세기 이래 분열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수도회 정신과 제도를 어떻게 재구성했을까? 분명한 점은, 종교개혁기 수도원의 타락과 별개로 수도회 정신이 1천5백 년간 추구해왔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수도원 해산을 통해 국가 중심의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더불어 닫힌 수도원 담벼락을 넘어 일상 가운데 수도회 정신을 구현해야 할 과제가 생겼다. 또, 가톨릭 지역은 중세 내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어진 교회 개혁 전통을 따라가야 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회가 그 몫을 맡았다. 기존의 수도회나 탁발수도회와는 또 다른 성격의 수도회 조직인 예수회는 16세기 이후 근대 가톨릭교회 개혁과 변화를 견인하는 핵심 동력이었다.

루터와 수도회주의

수도회주의는 종교개혁 와중의 핵심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나 마르틴 루터는 모두 수도회 출신이지만, 수도회와 결별했다. 루터는 1505년부터 1524년까지 수도사로 살았다. 이 시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수도회와 종교개혁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가치 회복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을 공유한다. 가톨릭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비판 및 대안 제시를 종교개혁이라고 본다면, 루터의 사상을 형성한 수도원적 뿌리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떠나는 일은 고뇌 속에 서서히 진행된 과정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삶 속에서 수도원에 머물렀던 시기의 의미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수도회주의가 미친 영향을 여러 차례 회고했다. 루터는 규율에 맞게 살아가는 예측 가능한 수도원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서의 삶보다 훨씬 쉬울 수 있다는 의외의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수도원 생활은 종교적 열정이나 헌신과 무관하게, 복잡한 세상의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피난처였다. 하지만 루터처럼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에게 수도회는 구원받을 만한 요건을 채워 빠져나갈 희망을 찾기가 도무지 어려운 감옥이었다. 그는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다른 열정으로 매우 엄격한 삶을 살았다. 그는 수도회 규칙을 지키는 일이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이라면, 감히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동료들이 그 증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제기하는 엄격한 율법적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체험했다. 율법의 옛 방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의 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가치를 더욱 확고히 했다. 루터에게 수도회주의는 율법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와 믿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수도회주의 정신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루터가 갖게 된 확고한 신념이었다.

루터는 수도서원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더 우월한 형태라고 보지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수준의 거룩함을 요구받기 때문에 수도회주의가 우월한 삶의 형태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수도회주의는 수도사와 비수도사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교적 삶의 한 형태였다. 루터는 수도회주의가 지닌 근본적 결점을 현실도피라고 지적했다. 인간은 본래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에 살면서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라고 규정했다. 세속을 떠난 우월한 삶과 세상 안의 열등한 삶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수도회주의가 조장하는 사악한 생각이라고 보았다. 수도사이건 아니건 종교적 신분은 신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수도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점차 확고해져서, 수도원 폐지와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의 복귀, 수도원 예배의 폐지를 프로테스탄트의 지표로 내세웠다. 수도원주의를 향한 루터의 공격은 큰 영향을 미쳐 수많은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수도원을 떠났다.

종교개혁이 프로테스탄트에 수도회주의 종말을 가져왔지만, 그렇게 단선적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다.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결별했지만, 루터는 수도원의 삶의 필요와 가치를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다. 가톨릭 수도회주의가 소멸하면서 프로테스탄트에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제 교회 내 엘리트들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수도사처럼 소명받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일상의 현실에서 자유를 포기하고 수도사와 같은 엄격한 삶을 살아내는 일은, 수도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 가치를 구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1)

그렇다면 루터가 수도원을 폐지했다고 보아야 할까, 수도원을 일상으로 확대했다고 보아야 할까? 루터의 직업소명론을 수도회와 연결해보면, 그는 수도회가 추구하는 정신을 모든 세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삼았다. 자신이 20년 동안 지냈던 수도원이 추구하는 근본정신을 루터는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우월한 신적 부르심이라는 수도사의 소명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로 확대하는 일이었다. 수도원이 추구하던 기도하고 노동하는 일(ora et labora)의 가치가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일상의 소명(vocation)으로 이어져서 일이 곧 기도가 되었다. 기도와 노동이 신적인 일(opus dei)이라는 수도원의 가치를 담벼락 너머 세속의 일상으로 연장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2)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추구하는 새로운 수도회 정신은 현실의 직업을 신적 소명으로 삼게 하여 절제하며 살도록 돕는 구원을 향한 또 다른 여정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한편에서 종교개혁은 수도원주의를 일상으로 확대했다. 수도회의 이상은 특정 집단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수도회 정신은 일상 속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급진성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삶 가운데 자발적인 급진을 실천해야 한다. 일상의 수도사로서 일상적으로 종교성을 실천해야 한다. 모두가 수도사나 사제라는 만인제사장은 전통적인 교회 권위를 벗어나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삶 속에서 녹여내라는 무거운 주문이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

마르틴 루터의 수도회 비판과 수도원 해산은 수도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그의 분명한 인식에 기반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반면, 잉글랜드에서 이루어진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은 잉글랜드 종교개혁만큼이나 위로부터 이루어진 정치적 결정이었다. 수도원 해산은 가톨릭과 결별하고 스스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세속 군주가 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의 첫걸음이었다. 헨리 8세 당시 잉글랜드에는 8백 개가 넘는 수도원이 존재했다. 그중 일부는 막대한 부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륙에서 제기된 불만과 마찬가지로 개혁가들이 보기에 수도원들은 너무 부유하고, 수도사들의 생활 방식은 결코 모범적이지 않았다. 수도원은 성물 숭배나 성지순례 등을 자극하여 지역 공동체로부터 상당한 수익을 챙기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수도원 해산은 왕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톨릭과의 결별을 끌어낸 헨리 8세의 ‘오른팔’ 토머스 크롬웰이 주도했다. 정치인이었던 그는 수도원에 대한 시찰권을 행사하여 부적절하고 방만하게 운영되던 수도원들 실태를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를 근거로 수도원 해산령이 내려졌다.

1536년에서 1540년 사이에 내려진 두 번의 해산 조치로 8백 곳 이상의 수도원이 폐쇄되었다. 이 조치의 목적은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부를 국유화하고, 국가와 교회 사이의 권력 구조를 흔들어 교회의 정치적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데 있었다. 이에 폭력적으로 저항한 수도사들은 반역자로 취급되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국가 주도로 급격하게 진행된 이 해산 조치에서 수도원의 저항은 미약했다. 일부 수도원은 교회로 전환되기도 하고, 해산으로 몰수한 재원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생 칼리지를 설립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수도원 해산의 가장 상징적인 결과는 잉글랜드에서 교황이나 교회가 아닌, 국왕이 분명한 국가 통제권을 쥐고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수도사들의 부패와 도덕적 해이에 대한 정당한 조치였다고 감안하더라도, 그 결과는 사뭇 부정적이다. 수도원 해산은 국가주의 종교의 강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대항할 수 없는 대조 공동체가 영원히 상실됐다. 중세 교회 개혁은 수도원이 주도하여 이뤘지만, 그런 방식의 개혁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충실한 국가의 부속기관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청교도, 침례파, 장로회파, 퀘이커 등 비국교도가 제도화된 국가 종교에 긴장을 유발하는 수도회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국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다양한 종파들의 형성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고, 급기야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수도원 폐지와 잉글랜드 내전을 직접 연결하는 일은 억지의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국교 제도를 받아들이고 수도회를 없앤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국가주의를 넘는 대안 가치를 표현할 제도적 장치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수도회주의 폐지가 프로테스탄트 지역에 가져온 불리함은 무시할 수 없다. 수도회주의 폐지는 필연적으로 국가주의 종교의 강화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수도회 해산은 본질상 국제적인 기관인 수도회를 매개로 그간 이루어지던 그리스도교 간 국제 교류 통로의 상실이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유럽 내 보편 종교라는 지위를 상실했다.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로 인해 상실한 이 현실의 틈을 국제적인 성격을 강화하면서 적절하게 메웠다. 가톨릭교회는 중남미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변해버린 유럽 내 국가들에 ‘가톨릭’ 선교를 시작했다. 오늘날 독일과 영국에 존재하는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기 이후 일어났던 가톨릭 선교의 결과물이다. 그 배후에는 국가와 국가주의의 경계를 넘어 가톨릭의 가치를 확산한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존재한다. 바로 예수회(Societas Iesu)이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성 이냐시오 로욜라〉

전위를 차지한 예수회

프로테스탄트가 수도회를 폐지하고 수도회 정신을 일반적으로 확대했다고 평가한다면, 가톨릭교회는 수도회 정신을 근대 세계에 맞게 재편하여 잃어버린 영향력의 복원을 추구했다. 그 전위부대인 예수회는 교황청을 포함한 어떤 그리스도교 기관보다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회는 근대의 형성, 신대륙 발견과 침탈, 근대 선교, 프랑스혁명과 같은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세계 한복판에 있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 스페인의 군인 출신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가 설립한 가톨릭 수도회이다. 근대 세계에서 유럽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로 이어진 가톨릭 선교, 교육 및 자선사업의 대명사가 된 예수회는 다양한 역할만큼이나 역사적 평가도 분분하다. 예수회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가톨릭교회의 상실한 영향력을 회복한 가톨릭 종교개혁의 주체이자, 가톨릭교회를 근대 세계에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수도회라는 점에는 다툼의 여지가 없다.

예수회 설립자 로욜라는 1522년 전투 중 입은 부상을 치료하던 중 깊은 종교적인 체험을 했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리고자 결단했다.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 순례를 통해 이교도 선교를 하려는 열망을 가졌다. 예수회가 다른 중세 수도회와 비교하여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선교’인 점은 로욜라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스스로 준비하기 위해 그 후 11년간 스페인과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공부했다. 1534년 자신을 따르는 여섯 명의 청년과 첫 수도회 서원을 하고 영성 수련을 시작했다. 이 모임은 1539년 예수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이듬해인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포함하여 순종을 주요한 가치로 삼았다. 또한 수도 생활에서 전통적인 틀을 벗어난 몇 가지 혁신을 도입했다. 예수회는 은둔하거나 정주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공격적인 방식의 선교가 핵심이었다. 그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수도회의 전례, 규칙적인 속죄나 단식, 다른 수도회와 구별되는 별도의 수도복 착용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유연성은 예수회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선교와 교육 사업을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교육과 선교는 예수회 활동의 두드러진 두 축이었다. 교육 활동에 특화된 예수회 수도사들은 유럽의 귀족 및 왕실 자녀들에게 엘리트 교육을 제공하여 프로테스탄트 지역에 가톨릭의 연결성을 이어갔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잉글랜드의 경우에도, 메리 여왕을 비롯하여 잉글랜드 내전 이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등이 가톨릭교도였거나 가톨릭 옹호자로 기록된다. 그렇게 지속된 영향력의 배후에는 예수회의 공세적인 활동이 있었다. 예수회는 대항해시대 전개를 통해 스페인이 점령한 멕시코와 페루 등에 선교사를 보내 남미 선교를 시작했다.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 설립 동지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아시아 선교를 위해 파송되었다. 로욜라가 사망한 해인 1556년에 유럽, 아시아, 남미 등지에 천 명이 넘는 예수회 수도사들이 활동했다.

신생 수도회인 예수회는 빠르게 성장하여 프로테스탄트 확산을 막고 가톨릭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상당한 지역이 프로테스탄트가 되었지만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 유럽 지형도는 여전히 가톨릭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예수회의 기여를 빼놓고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예수회는 활동과 기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시빗거리의 중심에 섰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예수회를 향한 평가는 엇갈린다. 1758년 2만 3천 명에 달하는 예수회 수도사들이 세계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1773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예수회 해산 명령을 내렸다. 유럽 전역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지 가톨릭교회 및 세속 권력과 충돌하는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1814년에 교황 비오 7세는 예수회를 재인준했다. 그래서인지 그 긴 역사에도, 2013년에서야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 나왔다. 그가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 교황 프란치스코이다.

수도회주의에 대한 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수도원이 없는 교회들이었다. 수도원주의와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상호 배타적으로 간주할 이유는 분명하다. 수도회가 교황에게 인준을 받고, 그에게만 충성하는 직속 기관이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지역에 수도회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루터는 한때 수도원과 수녀원을 저주받은 영혼들이 모인 지옥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루터 자신과 여러 개혁가들이 수도사 출신이었다. 수도회가 추구하던 본원의 가치는 간직했을 터였다. 비록 교황에 대한 충성은 버렸을지라도, 수도회가 추구하던 가난, 순결, 순명이라는 핵심 가치를 모두 버릴 수는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물려준 정신적 유산 속에서 되새길 수도원주의의 가치와 전통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한 재고와 가톨릭교회 부패에 맞선 루터의 비전은 수도사 생활에서 형성된 이상과 통찰력에 빚지고 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강조하는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세상 속에서 결혼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확대했다. 수도 서약을 하는 수도사의 소명이 아닌 직업적 소명 안에서, 그 부름대로 금욕과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초를 놓았다. 이 가치는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수도회주의 없이는 종교개혁이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수도사 직제를 폐지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다른 층위에서는 불리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국가 종교로 제한되면서 가톨릭교회가 담고 있던 보편성과 국제성의 성격을 상실했다. 그 비어있는 공간을 예수회가 등장하여 선점했다. 예수회로 대표되는 가톨릭의 수도회주의는 당대에 만연하던 성직자와 수도사의 부패를 척결하고 사제의 엄격한 독신을 정착시키고, 가난과 복종의 삶을 선명하게 강조했다. 예수회는 그에 덧붙여 선교와 교육이라는 날개를 달고 기존의 수도회 정신을 강화했다. 유럽 프로테스탄트 지역에 가톨릭 선교라는 낯선 개념이 등장했다. 그렇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중남미와 동아시아 지역으로 가톨릭은 확장되었다. 종교개혁으로 중세를 넘어 근대를 열어가는 전환의 시기, 예수회의 등장과 역할은 수도회가 세속과 무관한 기관이 아니라, 전위에 서서 가장 명확하게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곳임을 다시 한번 웅변한다.

■ 주

1) Heinz, Bluhm, 〈Martin Luther and the Idea of Monasticism〉, 《Concordia Theological Monthly 34, no. 10》(1963), 597쪽.
2) Dorothea Wendebourg, 〈Luther on Monasticism〉, 《Lutheran Quarterly 19 (2)》(2005), 136쪽.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