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늙어감에 얽힌 이야기들
[384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화장터. 수골실 철판 위에 흩어진 뼛가루들 사이, 철심 한 덩어리 널브러져 있었다. 여전히 뜨거워 보여서, 건드리면 델 것 같다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들었다가, 침묵은 불현듯 찾아왔다. 십수 년 동안 고관절 자리에 박혀있던 것이다. 뼈가 괴사할 정도로 알코올을 들이부은 시간이 철심과 함께 발굴되었다. 평소 아버지는 책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마른오징어 다리 하나로도 한 시간 넘게 자작하며 마셔댈 정도였으니, 강소주에 가까웠다. 쉰넷에 세상을 뜬 아버지에게 ‘늙어감’의 시작점이 있다면, 철심을 박아넣은 수술 날이 아니었을까.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쇠 집게로 철심을 빼낸 화장터 직원은 쓰레받기 형태로 된 삽을 쥐여주었다. 의례히 유족들이 돌아가며 뼛가루를 수습할 시간을 줬다. 아직 남아있는 열기 때문에 삽을 사용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 3:19, 공동번역) 골분은 봉안함에 담겼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뜻밖의 소식을 들은 것은 4월 9일 금요일 오후였다. 그 주간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와 짐을 풀고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대학교 2학년 1학기, 다음 주가 중간고사였다. 시험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가방을 싸려는데, 전화벨이 한 번 더 울렸다. 아버지는 위독하신 게 아니고 진작에 돌아가셨다고, 사망 시각은 어제로 추정된다고.
수원 사시는 큰고모와 금세 연락이 닿았다. 큰고모가 운전하는 차는 나를 태운 후 곧바로 고속도로를 탔다. 최소 서너 시간은 달려야 하는 길. 평소 같았으면 중간 휴게소에 들렀을 때 화장실을 다녀왔으리라. 다들 차에서 내리는 가운데, 재차 권유받았어도 내리지 않고 대기했다. 아버지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2주 전 통화가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술 취한 음성으로 ‘잘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어머니와 다투시던 도중 “아이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는 말을 듣고 전화를 걸었던 상황이었다.
타지로 나온 이후 아버지와는 오랫동안 연락 없이 지냈었다. 그 시절,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집에 내려갔으니 얼굴은 가끔 봤을지도 모르겠는데, 대화는 별로 나누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서웠다. 신앙을 가진 후로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이 큰 숙제였을 정도로, 아버지는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미를 내보이곤 하셨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뺨을 맞고 자랐다. 매일같이 자시던 그놈의 술도 문제였다. 취해있을 때는 별일 아니어도 손을 올렸으니 말이다. 치매가 있으신 할머니 곁을 7년 정도 지키며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전 컴퓨터 가게를 운영하며 프로그래머로 활동하시던 날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업 중이면 거의 줄담배를 피우고, 대기할 때는 책을 읽었으며, 영업이 끝나면 귀가하지 않고 술을 즐겼다.
다시 고속도로로 내려가는데, 얼마 안 가 슬그머니 요의(尿意)가 올라왔다. 소변 마려운 느낌이 돌연 뚜렷해졌고, 어쩔 수 없이 부탁드렸다. 다음 휴게소가 나오면 바로 세워주시라고. 소변기 앞 옥죄던 몸의 긴장을 풀자, 용변하는 일로 생과 사의 경계가 갈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아버지는 몸의 욕구를 더는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다가왔다. 그토록 요의가 선명한 존재감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시인 이성복은 〈생에 대한 각서〉를 “사람 한평생에 칠십 종이 넘는 벌레와 열 마리 이상의 거미를 삼킨다 한다”는 말로 연다. 산다는 것은 나도 몰래 뜻밖의 죽음들과 얽히는 일이다. 때론 생과 사가 한 끗 차이로 갈린다. 루마니아 태생 소설가 헤르타 뮐러가 쓴 《숨그네》(Atemschaukel, 문학동네)는 제목 한 단어로 생사의 교차점을 표현해낸다. ‘숨’(Atem)과 ‘그네’(Schaukel)를 합친 독일어 조어(措語) ‘숨그네’는, 그네 흔들리듯 인간의 가쁜 숨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처연하게 드러낸다.
죽음을 목격했던 순간들
아버지는 가까운 친구에게서 발견되었다. 심근경색. 응급조치가 제때 이뤄져 병원에 갔으면 살았을 것이다. 돌아가시고 하루 지난 날 오후, 동창회를 앞두고 연락이 닿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여긴 아버지 친구가 담벼락을 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발견은 더 늦어졌으리라. 이 시기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지냈다. 부산으로, 오산으로, 김해로. 형과 나는 대학을 다녔고, 어머니는 미용실 하던 이모의 제안을 받아 좌훈카페를 꾸렸다. 아버지는 삼천포 집에 남았다.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뒤, 집 주변을 걷다 평상에 모인 동네 할머니들의 웅얼거림이 귀에 닿았다. 부러 들으라고 한 소리일까. 저 집 남자는, 자식들과 마누라에게 버림받아 죽었다고.
아버지의 죽음은 예견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를 간병하던 순간에도 스스로 할머니보다 먼저 죽게 될 거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으니까.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난 뒤, 아버지는 지인 소개로 모교였던 고등학교의 경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7년 공백을 메워 컴퓨터 쪽 일을 다시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다. 아버지는 일터에서도 몰래 조금조금 술을 마셨다. 심근경색으로 교내에서 쓰러져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과는 당연히 해고였다. 의사는 간경변증을 강력히 경고하며 수차례 말렸으나, 아버지는 평생의 벗이었던 술을 떨쳐내지 못했다. 가족들이나 주변에서는 짧은 푸념만 있고 체념할 따름이었다.
‘병원장례식장’에 도착하여, 마침내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LED 백라이트 안내판에 적힌 흰 바탕 검은 글씨였다. 읽힘을 넘어, 몸에 박히며 부서지는 글자들. ‘강주영’, 201호. 이후 빈소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세세한 기억은 없다. 조문객이 오지 않으면 얼얼한 느낌으로 벽에 기대었고, 잠은 부족하여 나날이 지쳐갔다. 평소 쉴 새 없이 찾아드는 상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타인’이었고, 내가 보는 ‘나’도 낯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제각각, 간헐적으로 떠올랐던 것도 같다. 할머니의 죽음 말고 다른 죽음들은 들이닥치듯 찾아온 불시의 습격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 따라가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처음 본 시점은 열세 살, 할아버지 입관예배 때였다. 마지막 문턱에서 목격한 할아버지 얼굴이 왜 그리도 퉁퉁 부었던지.
시신을 처음 본 충격 때문인지, 목격 이후 살아생전 갸름했던 할아버지 얼굴을 영영 잊어버렸다. 기묘했다. 사진을 봐도 생경했다. 다른 시간의 기억을 떠올려도 여태 관에 누운 그 얼굴만 생각난다. 아마 반년 전까지만 해도 정정해 보이던 할아버지가 입원하고, 끝내 연명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신 탓도 크겠다. 호흡하는 쪽이 많이 안 좋으셨던 것 같다. 기관절개술로 목에 튜브를 삽관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수발했다. 우리 형제가 충격받을 것을 염려했던지, 어머니는 병문안할 때 형과 나를 몇 번 안 데려가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통과 불편 속에 말씀을 못 하셔서 미니 화이트보드에 짤막한 글을 적으며 소통하시던 장면, 이송이 결정되면서 느닷없이 안방에 묵직한 산소통이 놓이던 장면은 잊지 못할 존재감으로 내 안에 남았다. 연명 치료는 뼈아픈 후회를 남겼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향하던 앰뷸런스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묘소에서
‘성도 강주영의 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봉안함은 선산에 묻혔고,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할아버지·할머니, 조상들 곁이었다. 선산은 높지 않았다. 무덤들 있는 곳까지 걸어서 30분도 안 걸렸는데, 다리가 불편한 나와 형은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산길이었다. 나는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짚으며 올랐다. 형은 주변에서 부축을 받았다. 몸이 불편한 우리 형제가 아버지 영정사진을 들고 이 길을 오를 수는 없었다. 영정사진은 장손이었던 중학생 정도 나이의 사촌동생에게 맡겨졌다. 앞으로 내 병이 더 진행된다면 이때가 묘소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되리라고 직감했다. 오후 2시경, 장지에 이르자 큰아버지네 교회 목사와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교인으로 있던 나의 모교회는 발인예배와 하관예배를 집례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나와 형은 어머니를 따라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쭉 다녔고, 아버지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계속 다닌 교회였다. 아버지 장례는 3일장 기준으로 금요일부터 시작돼서 일요일 발인이었다. 교회 측은, 원칙상 주일에는 장례예식을 집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이 원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았다. 교인이 금요일에 별세했을 경우, 대부분 2일장 혹은 4일장으로 대체하여 대개는 월요일 새벽에 끝마치는 일정이었다.
입관예배는 모교회 담임목사가 집례했다. 이후에 순서를 논의하며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멀리서 온 친척들을 하루 더 붙잡아둘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부교역자라도 와서 진행할 수 없겠냐고 물었지만,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교회가 장례에 관여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 할아버지·할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친척들 사이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할아버지·할머니 장례예식 때부터 쌓여온 불만까지 토로했다. 교회가 예식에 지각하여 발생한 문제라든지, 장례예식을 논할 때 보인 태도라든지. 결국 발인예배는 친척들하고만 드렸다. 하관예배는 다른 지역에 있는 큰아버지네 교회에 부탁하여, 그곳 부목사가 집례하는 형식으로 타결되었다.
한국교회의 장례예식에 대하여
한국 개신교는 전통문화로 내려오는 장례 방식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 그중 입관·발인·하관 등 시신 처리 과정에 맞추어 제사 대신 예배를 중심에 두고 장례예식을 구성한다.1) 문제는 한국 특유의 전통적 의례와 개신교 의례가 서로 다른 구조로 기능을 수행하여 부조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전통적 의례는 임시적이나마 공동체성을 발휘하며 조문객을 맞고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보존·애도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장례예식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부활을 확증하는 교리 선포에 큰 비중을 둔다.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산 자를 위로하고 치유하기보다,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철저한 단절이 일어나는 경향이 짙다. (가톨릭의 ‘연옥’ 교리에 대한 지나친 경계 및 반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전통문화와의 충돌 또한 장례예식 시 부활의 소망을 전하는 데 치중하도록 영향을 줬다.) 김형락은 “이 단절은 유족들과 조문객들이 고인과 마지막을 보내면서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권리를 빼앗아 버린다”(130쪽)고 지적한다. 그는 장례예식 도중에 충분한 애도 과정을 담은 상징의례로서 성찬예전을 거행하는 일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교회 또한 장례예식을 진행할 때 ‘천국’ ‘부활’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유족들을 위로했다. 할아버지 장례예식 도중 담임목사는 병원 에피소드에 집중하여 말씀을 전했다. 본래 할아버지는 신앙이 없었는데, 입원 당시 교회에서 심방한 적이 있었다. 말인즉슨 그 상황에서 담임목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겠느냐고 묻자, 목소리로는 대답하지 못할뿐더러 몸도 불편한 할아버지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표시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말끝마다 교인들의 ‘아멘’ 소리가 붙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교인들은 “아버지는 천국에 가셨을 테니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말만 여러 번 건넸다. 나 또한, 자존심 강해 납득되지 않는 일은 안 하던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주일예배 중 주기도문과 찬송을 따라 하시게 되었음을 기억하며, 아버지는 구원받으셨을 테니 괜찮다는 식으로 죽음의 현실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묘한 이질감을 애써 지워버리려 했다. 그 이질감이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생이 ‘천국’ ‘부활’ ‘구원’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수렴되어 납작해지는 광경을 목격한 데서 기인했을 테다. 장례예식이 단지 지옥에 갈 뻔한 영혼이 건져냄을 받았음을 증명하고자 어떤 알리바이를 만드는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김영봉의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IVP)는 고별 설교가 하나의 ‘맞춤한’ 메시지로, “고인의 생애에 대한 신앙적 해석”이자 “한 사람의 일생을 구속하는 일”임을 강조한다. 고별 설교를 위해서는 고인에 관한 그마마한 사전 연구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해 말하는 일은 그의 인생과 그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까지도 기억하고 나누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늙어감’이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철심은 흰 천에 감싸여져 봉안함과 같이 장지에 묻혔다. 철심 하나가 삶의 많은 부분을 담아내고 있었다. 철심은 사는 날 동안 아버지가 함께해온 ‘장애’ 또한 상기시켰다. 아버지는 고관절에 철심을 넣는 수술 후 지체장애인으로 등록되었다. 나와 형이 근이영양증으로 지체장애 등급을 받은 시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년 전이었다. 그에 관해 이야기 나눈 적은 서로 간에 없었다. 때때로 생활적 보살핌이 필요한 부분을 암묵적으로 배려했을 뿐. 장애를 대하는 한 방식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철심을 보며, 아버지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앞으로 이어질 나의 삶과 장애를 헤아려보았다.
쉰넷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두고 ‘늙어감’을 논하는 것이 ‘100세 시대’로 불리곤 하는 오늘날 관점에서 코웃음 나올 일일지도 모르겠다. ‘노인’은 65세 이상을 지칭하지 않는가. 191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철학자 장 아메리는 1968년 《늙어감에 대하여》(돌베개)를 썼다. 그는 10년 후 4판 서문에서 “고작 쉰다섯 살의 이 ‘젊은’ 인간 J.A.가 늙어감이, 나이를 먹는다는 일이 뭔지 대체 알기는 하겠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지난 10년 동안 경험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말했던 것을 강조했으면 강조했지 축소하고픈 생각이 없다. … 몸의 늙어감, 문화적 늙어감, 음울한 표정의 사내가 다가오는 게 매일 더욱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일 등등.”(10쪽)
사실 늙어감이란, 일상 중 실감하지 못하고 잊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발견되는 것이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로르 아들레르는 《노년 끌어안기》(마음산책)에서 ‘나이 감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감각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날 때, 혹은 까닭 모를 피로가 덮쳐올 때, 혹은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무심코 본, 진열창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구부정할 때 덮쳐올 수 있다.”(32쪽) 기실 자신의 늙어감보다 타인의 늙어감을 먼저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타인의 늙어감을 체감할 때 자신의 늙어감 또한 깨닫게 되는 듯하다.
늙어감은 도도히 흘러가는 시간의 존재를 지각하는 순간이다. 노화와 장애는 비슷한 측면이 있다.2) 존재감이 드러나는 방식에서 특히 그렇다. 어떤 이가 일순 노화를 체감하듯이, 내가 가진 진행성 질환이 불러오는 장애 또한 문득 심해졌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노화를 더 일찍 경험하는 셈인가. 친숙한 장소나 사물이 낯설게 변하는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몸은 세상을 바꿔놓는다. 어느 날, 늘상 오가던 길이 높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등학생 때까지 즐겨 타던 자전거는, 대학생 때 교회에 늦어서 탔다가 다치면서 그만두었다. 이제 슬리퍼를 신으면 발을 무조건 끌게 된다. 넘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인사할 때 고개도 많이 숙이지 못한다. 예전엔 간단했던 동작을 하기가 어려워지면, 절로 쓴웃음이 배어 나온다. 밀고 들어오는 질병의 존재감 앞에서 전선을 무를 수밖에. 이 불청객 앞에선 저항할 수가 없다. 나의 영토는 갈수록 줄어든다.
‘건강’을 우상숭배하는 사회
늙어감은 이 땅에서 시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사색하게 한다.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늙어감에 대하여》, 54쪽) 장 아메리는 그렇게 시간이 새긴 노화로 인해 노인이 된 인간은 오로지 ‘몸’으로 남는다고 말하며, 노쇠로 “심하게 물질화한 몸은 극단의 물질화에 내몰리고 만다”(80쪽)는 사실을 정확히 직시한다. 어떤 노쇠함은 일정 부분 이상, 시간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른 책임이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삶의 물질적 차원을 논하는 《완전한 풍요》(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전도서 3:1-8을 논하며 시블리 타우너의 “시간의 모든 짝들은 도덕적인 선택을 요구한다”는 말을 가져온다(88쪽). 월터 브루그만은 말한다. “성숙한 물질성은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한계가 있음을 알고, 모든 시간을 주시는 분께 올바른 반응으로 매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101쪽)
장애인의 늙어감은 그 무게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노인복지나 장애 관련 연구에서 ‘장애를 가진 노인’은 ‘고령화된 장애인’(aging with disability)과 ‘노화에 따른 장애인’(disability with aging)으로 구분된다. 이때 장애와 노화로 겪는 문제는 ‘이중적’ 위험 요소로 다뤄진다. 연구자들은 ‘고령화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15-20년 이른 시기에 신체·심리·기능 차원에서 ‘조기 노화’를 겪고, 20-25년 빠르게 의학적·기능적 문제가 발생하며, ‘2차적 건강 문제’ 또한 2-3배 높다고 보고 있다.3) 몸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어려움은 존재하나 ‘장애’를 노화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노화에 따른 장애인’과 달리, 고령화된 장애인은 ‘장애 정체성’을 비교적 분명히 갖고 있어서 차별 경험에 따른 강한 권리의식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사회복지·의료 자원을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끌어올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하지만, 사회적 고립이나 2차 장애를 비롯하여 노화로 겪는 어려움이 더해져 더 큰 좌절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4)
늙어감을 다루는 서적들을 보면, 노화를 ‘질병’(불치병)에 빗대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21세기 ‘안티에이징’(anti-aging)에 관한 연구 및 논의가 계속되면서, 이는 비유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노화를 ‘질병’으로 보고 극복할 방법을 찾는 과학자들이 생겨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질병분류》 제11판에 ‘늙어서 쇠약해지는 현상’에 새로운 질병코드(MG2A)를 부여하기도 했다.5) 노화와 유전 분야를 연구하는 하버드대 의학 박사 데이비드 A. 싱클레어가 쓴 《노화의 종말》(부키)은 노화의 지연과 치료를 낙관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그는 “우리가 늙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생물학적 법칙 같은 것은 없다”(37쪽)고 말하며, ‘장수 유전자’에 주목하여 모두가 질병과 장애 없이 살아가는 장밋빛 미래를 열심히 설명한다. 더 나아가, ‘의학적 영생’을 통한 ‘죽음의 종말’까지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로완 윌리엄스가 지적하듯, “유한성에 대한 저항은 최악의 권력 병리학으로 우리를 데려”(《인간이 된다는 것》, 복있는사람, 111쪽)갈 따름이다. 몰트만은 말했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모든 건강에 대한 정의는 환상적인 것이다.”(《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대한기독교서회, 405쪽) 몰트만에 따르면, ‘상태로서의 건강’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회는 ‘건강의 제의’(Gesundheitskult)를 따라 건강에 대한 이상(理想)을 우상숭배한다. 이는 ‘사람됨을 건강함과 동일시’하여 병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며, 장애인과 노인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복지 상태를 기획하도록 이끈다. 이는 ‘변방의 죽음, 바깥으로 내몰린 죽음’(《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몰트만은 오히려 사람 전체에 해당하는 네 가지 차원, 즉 ‘자기관계’ ‘사회적 관계’ ‘생활사’ ‘초월의 영역과의 관계’에서 병증을 나타내는 이들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 본 단락의 내용은 김형락(2018)의 논문 〈의례적 기능과 목회적 돌봄의 관점으로 보는 기독교 장례예식의 구성〉(《신학과 실천 No. 61》)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2) 패트릭 데블리저 외, 《장애를 다시 생각한다》(그린비), 10장 ‘노화와 장애의 공통 의제’(매들린 아이리스) 참조.
3) 양희택·신원우, 〈장애를 가진 노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 《노인복지연구 No. 52》(2011), 256-264쪽.
4) 김진희, 〈고령장애인에게 장애발생 시기가 의미를 가지는가?〉, 《장애와 고용 Vol. 32 No. 2》(2022), 196-200쪽.
5) 정우현, 《생명을 묻다》(이른비), 394쪽. 13장 ‘생명은 결국 죽는가?’를 보면, 노화를 질병으로 보는 이들의 견해를 개략적으로 정리하며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