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명령으로부터 벗어나 지도 없이 방황하는 것

[384호 커버스토리]

2022-10-30     김윤동

안 쉬는 게 아니라 못 쉬는 거다

약 4년째 쉬는 날이 없다. 이렇게 ‘연중무휴’의 삶을 가지게 된 데는 본디 한 가지 직업에 몰두하고 정주하기 어려운 성격이기도 하고, 실현하고 싶었던 ‘자아’가 여러 개(?)인 까닭도 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 경제적 여유를 찾기 위해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게 된 일이 시작이었다. 그러다 가만히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싫기도 했고,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 내면서까지 일해왔다. (물론, 나보다 열악한 여건에서 노동을 이어가며 강제적으로 쉬지 못하시는 분들 앞에서 나의 연중무휴는 자발적 선택에서 비롯된 억지 고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선택 또한 꽤 녹록지 않은 과정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2년 전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자영업자로 살아가게 된 후부터는 그야말로 휴일 없이 매일 업장을 열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게 아깝기도 했고, 초기에는 소위 ‘오픈빨’이 있어 돈을 버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업장을 쉰다고 하더라도 굳이 집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업장 말고도 내게는 해야 할 다른 일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눈을 뜨고 집이라는 공간에 한 시간 이상 머물러있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어색하다. 나의 이런 사정을 아는 가족과 주변인들은 이런 상황을 늘 안타까워하면서 업장에 쉬는 날도 정하고, 여행도 하며 나만의 시간도 가지라고 충고한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안 쉬는 게 아니라 못 쉬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원고를 처음 청탁받았을 때, 기획 주제가 ‘쉼’이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나처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중무휴의 삶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이 주제에 관해 쓸 수 있을까. 하나, 이참에 쉬지 못하는 내게도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쉬는 시간을 주자는 의미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미루지 말고 지금 휴식하라?

‘나는 정말 쉬지 않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쉬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편하게 잘 수 있는 집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두세 시간 자면서 끊임없이 책과 시험문제에 파묻혀있는 대입 수험생 또는 공무원 수험생들보다 잠도 훨씬 많이 잔다. 개인 자동차를 굴릴 여유가 있어, 출퇴근 또는 이동에만 빽빽한 사람숲 속에서 두세 시간을 보내야 하는 대중교통 이용자들보다는 잘 쉴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친한 친구들 몇몇은 피고용인으로 사는 본인들과 달리 열고 싶으면 열고, 닫고 싶으면 닫으면 되는 ‘사장’의 자유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휴식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일단 경제적인 여유를 얻는다면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특히, 현대인은 워라밸, 즉 돈을 벌어서 끝없이 축적해 나가기보다 그때그때 누릴 수 있는 여가와 향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회사와 더 가깝고 교육 환경이 좋고 쾌적하고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이동 수단을 갖추고, 노동을 조절할 수 있다면 휴식이 늘어날 것이다. 최근 큰 화제를 일으키며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처럼 내게도 700억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주어진다면, 휴식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 오인주가 말했던 대로, ‘영혼이 살 수 있는 집’을 가질 것이고, 분명 정규적인 노동을 하지 않아도 생활비를 만들기 위해 ‘N잡러’가 되어 밤낮없이 아등바등 돈을 벌어야 하는 강박은 없어질 것이다. 무지막지한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무한에 가깝게 늘어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동이나 경제적인 여유 등과 관련된 물리적인 쉼이라는 차원 외에, 우리 내면의 깊은 불안과 안식을 이야기하는 차원에서는 또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일부 영성가들이나 현대의 현자들은 물리적으로는 휴식이 주어진 삶이라 하더라도, 뿌리 깊이 내재된 현대인들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들을 제시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쉬지 못하는 조건이 전혀 아니며, 쉬지 말아야 한다는 심리적 강박에 싸여있으므로, 부여잡고 있는 욕망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할 것이다. 쉬지 못하는 상태를 개인의 심리 문제에서 찾자는 취지로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조건을 하나하나 뜯어봤을 때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통째로 볼 때는 고통일 테지만, ‘이미 받은 복을 하나하나 세어’보기만 한다면 내가 부러워해 마지않는 어떤 타인의 삶보다 우위에 있는 것들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있을 것이기에, 감사를 일상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안식을 취해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부러울 것 없던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례를 들먹이거나, 아프리카 대륙의 빈민들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삶에 안도할 근거를 찾으라 한다. 그저 내려놓고 머리를 비우고, 손에서 놔버리면 되는 쉬운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휴식의 조건과 불안의 늪

많은 사람들은 이런 휴식의 방법 또는 휴식의 여건을 주장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통해서 생각의 프레임이 곧 인간 행동의 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강조했듯이 “더 많은 경제적 여유를 가지라, 휴식을 하라, 일은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할수록 우리는 그 명령과 명령이 내포한 조건의 늪에 빠진다.

이를 우리의 사례로 적용해보면,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아프리카 대륙의 빈곤을 보며 감사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불안하게 되어있다. 나도 혹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많이 생긴다 해도 마찬가지다. 다시 그 경제적인 여유를 유지하고 존속하고 더 팽창시키기 위해 들여야 하는 에너지는 이전보다 커졌으면 커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내가 이미 받은 휴식의 조건들을 생각할수록 그것으로 인해 또다시 불안의 조건들이 생성된다는 의미다. 어떤 조건 때문에 안심할 수 있고, 어떤 경제적인 여유로 물리적인 휴식을 할 수 있다면, 그 말은 동시에 그 조건 때문에 불안해지고, 휴식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어떤 조건으로 인한 안심은, 그 조건이 주도권을 장악해 버렸기에 내 삶이 거기에 매여있다는 것을 우리 무의식이 재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명령을 모으지 않는다면 죽기 때문에 쉴 수 없다

이런 피곤한 순환의 굴레에 빠져있는 이유는 인간의 조건이 인간 내면에 있는 것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성원권과도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학 연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조건은 집단과 연결되어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는 극심하게 우리가 속한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데, 문명사회 이전의 세계보다 눈에 보이는 계급과 그에 따른 통제와 억압이 훨씬 줄어들었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삶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전보다 더 큰 ‘인류’라는 단위 안으로 소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처럼 내가 사는 부락이나, 마을 안 규율만 지켜서 되는 게 아니고 세계 인류라는 단위 안에서 우리의 많은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거대한 경제, 정치적 블록으로 연결되어버린 세계에서는 영국의 EU 탈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베네수엘라-레바논의 국가부도 임박 사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총리 탄생 등의 사건들이 단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 세계 구석구석의 사람들 삶에 모두 영향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우리는 옆집 개똥이네 숟가락 개수를 아는 것을 넘어 천문학적인 양의 정보를 모아야 한다는 강박에 둘러싸여있다. 내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올린 사진과 영상, 텍스트는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들도 다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으며, 구글을 포함한 포털사이트 안에서는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가 흘러다닌다. 그중에는 심지어 상충되는 정보들이 있어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메타-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또 우리는 정보를 모은다.

지금 우리는 많은 정보를 모으는 전쟁 중에 있다. 더 많은 지식을 쌓고 지식을 착취하여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도록 요구받고, 심지어 노인들도 키오스크를 배우지 않으면 상품을 구매할 수 없다. 정보를 모으는 일을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유행에 맞는 옷들을 사 입어야 하고, 유행하는 게임을 모르면 사회 안 성원권은 박탈당한다. 마치, 어떤 신조어가 등장하거나 유행하는 ‘챌린지’가 있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듯이 말이다.

즉, 정보를 모은다는 말은 다른 말로 ‘명령’을 모은다는 말과 같다. 구체적으로 누군가의 부하 되기를 자처하는 일이며,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 석학’ ‘세계의 지성인 누군가’라는 권위에 기대기만 하면 자신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게 되고, SNS상에서 더 많은 팔로워를 갖고, 더 많은 구독과 좋아요를 받은 사람이 이 시대 모든 명령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명령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고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도 아니고, 경제적인 여유만을 통해서도 성취할 수 없다. 골방에 앉아 세상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진정시켜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많은 명령들 속에서 벗어나는 게 궁극적인 쉼이고 안식이다. 오히려 그것은 지도 없이 방황하는 일에 가깝다. 지속적으로 많은 명령들을 수집하고 수행하고 복종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정보를 차단하는 것도 아니며, 정보의 수용과 거부를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가 곧 휴식이다.

그에 관한 어렴풋한 아이디어를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에세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 일부를 인용하며 나누고자 한다.

오오, 여러분, 세계 정책의 대도회에 사는 가련한 이여! 여러분, 젊고 재능이 넘쳐 명예심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모든 사건에 ―항상 뭔가가 일어나므로― 한마디 하는 것을 의무라고 알고 있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먼지를 일으켜 떠들어대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된다고 믿고 있다! 여러분은 늘 귀를 기울이며 늘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으므로 진정한 생산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설사 여러분이 아무리 큰일을 간절히 바란다고 해도 회임(懷妊)의 깊은 과묵은 결코 여러분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시대의 사건이 여러분을 겉겨처럼 따라간다. 여러분은 사건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김윤동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