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독자의 말’, 〈악스트 Axt〉(no. 011) “이것이 내가 하려던 이야기다”
[385호 나의 최애들]
고딕 저택에 갇힌 따돌림당하는 여자
다음 마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걸 구상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감정들을, 내가 가장 잘하는 방식의 이야기로 엮었다. 외딴곳에 떨어진 고딕 저택에 갇힌 세 여자의 이야기를.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는 여자가 겪는 심리적 압박에 대해.
― 강화길, ‘biography-essay-독자의 말’, 〈악스트〉(no. 011), 은행나무, 67쪽.
주 5일 40시간 회사에 다니며 어떻게 매달 연재 글을 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 다니기도 바쁠 텐데, 대단하다고 성실하다고 칭찬을 건넨다. 물론 내가 대단하고 성실해서 지금까지 연재를 이어오고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은 내가 그 칭찬과 얼마나 상관없는 사람인지 잘 안다. 만약 내가 어떤 영역에 성실함을 보였다면, 그건 성실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영역에 꽂혔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지 않는 영역에 성실할 수 있는 방법을 난 모른다. 그러면 나는 왜 연재 글을 쓰는 일에 꽂혔을까?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걸림돌이 아니라, 원동력이라고? 의아한 분도 계시겠지만, 한국 사회는 그저 아침저녁으로 살아 숨 쉬기만 해도 하고 싶은 말을 한 가득 안겨주는 ‘다이내믹 코리아’로, 나같이 교육받은(그래, 난 무려 ‘석사’인 것이다.) 인팁(INTP) 여성이 한국한국한 조직에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찌 한 달에 한 번 연재 글을 쓰는 게 어려우랴. 매일 밤 ‘일간 박혜은’을 써도 모자랄 판. 정유정 작가나 장강명 작가가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10년 이상 회사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저토록 왕성한 작품 생산이 가능한 이유는, 결코 짧지 않은 회사 생활 덕분이 아닐까(나를 키운 건 8할이 팀장님…?). 그러므로 이 세상의 글 쓰는 작가들이여, 어떤 종류든 조직에 들어가라.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 오로지 그 조직의 소재지가 한국이면 된다. 당장 오늘 퇴근하는 순간, 영감이 물밀듯 밀려올지도 모른다.
어느 날 〈당신을 닮은 노래〉를 읽었다는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엄마 딸 이야기, 병 걸린 이야기 같은 거 쓰지 말라고. … 반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화가 났다. 겁을 먹어서? 아니, 나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분한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는 틀렸어’라는 말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겁먹는 것조차 못했던 거다. 대신 그날, 나는 생각이라는 걸 아주 많이 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고, 원인과 결과를 열심히 분석하며 살아온 여성답게 생각이라는 걸 계속했다.
― 같은 책, 68-69쪽.
소설가 강화길은 말했다. 석사나 인팁이 아니어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고, 원인과 결과를 열심히 분석하며 살아온 여성”은 생각이라는 걸 아주 많이 한다고. 과연 그러하다. 매일 밤 퇴근길에 난 정말 생각이라는 걸 많이 한다. 생각에 빠져 하차할 버스 정류장을 놓친 적도 있다. 오늘 내가 지적당한 그 일은 정말 내가 잘못한 일일까? (옆 동료는 그건 ‘가스라이팅’당한 것이라 말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은 자리에 없는 여성에 대해 ‘이 아줌마, 저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깎아내리지? (나 없는 자리에서도 ‘그 아줌마’ 이러면서 욕하는 거 아냐?) 취재하러 왔다는 저 사람이 기획 전시를 설명하는 나를 여러 번 터치한 듯한데 내가 예민했던 걸까? (같이 있었던 다른 여자 직원 또한 그렇게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이라는 걸 많이 하고 나면 글이 쓰고 싶어진다. 역시 다상량(多商量)은 글쓰기 비법이었나? 나를 지키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느라 생각이라는 걸 많이 한 내 글은 그래서, 사사롭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났다거나, 집안의 막내라거나, 3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거나, 체구가 작다거나 하는 여러 사사로운 조건들이 있겠으나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만큼 내 글의 핵심인 조건은 없다. 아니, 내 글의 전부다. 주로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고 그 생각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작가보다 독자에 가까운 나도 내 글의 사사로움에 위축될 때가 있다. 이렇게 막(!) 써도 되나? 내가 쓰고 싶은 주제로, 내가 쓰고 싶은 방식에 따라, 내 생각과 감정을 가감 없이 자유롭게 써도 되나? 이게 글이 되나? 자책에 빠질 때가 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더더욱. “요즘 출판계에 에세이 장르가 난무하는데, 이런 에세이들이 소설로 작품화될 수는 없었을까? 너무 쉽게 자기 말을 쓴단 말이야. 소설이야말로 책이지.” (혹시… 팀장님?)
내가 써온 글들을 읽으면, 마치 “고딕 저택”에 갇혀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는 여자가 겪는 심리적 압박”을 여러 모양으로 쓴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난 지금도 “고딕 저택”에 갇힌 미친 여자처럼 답답함을 느끼며 글을 쓰고 있다. 답답함과 울분은 나에게 영감을 주어 글을 쓰도록 등 떠미는 최고의 친구들이다. 사실 이런 방식과 주제가 아니고서는 별로 쓰고 싶은 글이 없다. 내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느낀 울분과 투쟁적인 질문이야말로, 모든 글의 베이스다. 그런 내가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느꼈던 반가움이란.
나는 여성 화자가 아니고서는, 심리에 밀착해 서술하는 일인칭이 아니고서는 소설을 진행하기가 힘들었고, 미묘하고 뒤틀렸으며 매우 개인적인 감정 외에는 사실 쓰고 싶은 것도 없었다.
― 같은 책, 65쪽.
동시대 여성 작가와 대화하기
수많은 글을 읽어왔고, 그 글들을 망각하며 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글이 있다. 연재 초기에 밝혔듯, 책보다는 잡지에 실린 글에 마음을 빼앗기는 나는 강화길 작가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 자전 에세이로 내 최애의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소개하고 싶은 그의 장편소설들과 다수의 뛰어난 단편들이 있지만, 강화길이 나의 최애가 된 이유의 모든 것이 자전 에세이에 압축되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잘 쓰고, 그런 감정을 잘 다룬다는 것도 알았지만, 내가 그것들을 잘 안다는 사실이 싫었다. 부끄러움, 수치심, 질투와 증오, 분노,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 그러니까, 매우 여성적인 감정이라고 분류되는 것들이 말이다.
― 같은 책, 67-68쪽.
이토록 직접적이고 가감 없이 자기 고백을 하는 여성 소설가라니. 〈악스트〉라는, 최근 몇 년간 최애하는 문학잡지에서 강화길 작가의 글을 읽은 후, 난 곧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일인칭 여성 화자로 말하는 일이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화길의 소설들은 이 직설적인 에세이처럼 일말의 치장이 없다. 일인칭 여성 화자 목소리로, 여성이 느끼는 “부끄러움, 수치심, 질투와 증오, 분노, 불안과 공포 같은 감정”을 끝끝내 독자에게 알려주고야 만다. 남성들에게는 온통 안개에 쌓인 사회적 감정의 세계를 읽어내고 경험하는 여성들만의 시선으로. 도대체 왜 그 상황이 공포고, 그 순간이 슬픔인지 낯설게 마주해야만 하는 고딕 스릴러의 문법으로. 이 에세이는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친절한 각주였다.
더 많은 여성 자료가 구축되어야 한다
나는 젠더적 관점의 해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자료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무언가를 바꿀 것이라고도 믿는다. …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란, 아마 사회적 약자로 태어난 한 인간이 평생 차별과 분노와 고통에 맞서 자신의 능력과 자의식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기록일 것이다. 나는 그 삶을 존경한다.
― 같은 책, 70쪽.
젠더적 관점의 해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자료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믿는 강화길의 5년 전 이 목소리는 누구보다 자신의 작품 활동으로 충실히 이행되었다. 그리고 내 최애 강화길에게서뿐 아니라, 최근에 난 여러 여성 서사를 만났다. “우리 세대의 박완서가 될 수 있을 작가”(문학평론가 신샛별)인 강화길을 보유한 한국 문학뿐 아니라, 최근 드라마들과 몇몇 책들에서 내 최애가 이행한 실천을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감독과 작가와 주요 배역이 모두 여성이었으며, 복수도 정의 구현도 사기 치는 것도 폭력 쓰는 일도 회장 역할도, 그러니까 모든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여성이었던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한국 사회는 여성의 자리 앞에 ‘여’를 붙여 ‘여배우’ ‘여선생’ ‘여직원’이란 호칭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곳이지만, 남성 청취자가 ‘남토로’(여성들은 그냥 ‘톡토로’로 불립니다)로 불리는 놀라운 세계를 창조한 김하나·황선우 작가의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40대 비혼 여성의 일상과 사유가 얼마나 흥미로운 콘텐츠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회고록은 60대 이상 남성만 쓰는 것이다? 노노. 시대를 치열하게 건너온 페미니스트 여성 비평가가 회고록을 쓰면, 나를 걸려 넘어지게 했던 돌들조차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리베카 솔닛의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창비, 2022), 40대에는 회고하면 안 되나? 1990년대 10대였고, 2000년대에 20대였던 저자가 한국 사회에서 열정적으로 아이돌을 덕질하고 난 후의 일상을 회고하며 본격 한국 대중문화 비평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최지은 작가의 《이런 얘기 하지 말까?》(콜라주, 2021) 등.
현재 방영 중인 tvN 드라마 〈슈룹〉 또한 눈여겨볼 만한 여성 서사 드라마로 최근 내 최애 콘텐츠다.(참고로 여기서는 본격 드라마 수다를 나눌 수 없으니,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에 대한 젠더적 관점이 궁금하시면, 뉴스레터 오즈뷰(Oh’s view)를 구독해도 좋겠다). 그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음모를 꾸미거나,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허공을 노려보는 중전이 아니라 뛰어다니며, 주도적으로 전략을 짜고, 왕을 일깨우고, 자기 사람을 지키는 똑똑하고 적극적인 중전을 보는 즐거움이란. 눈썹을 치켜올리며 상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주체적 중전을 연기하는 배우 김혜수 자체가 여성 예술가 자료 구축의 소중한 예다.
일인칭 목소리 보태기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에세이의 범람을 걱정하는 누군가와 다르게, 또 다른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바로 그 치우침이 네 글이 반짝이는 지점이야”(지금은 퇴사한 나의 친애하는 옛 동료의 말) “누구보다도 책을 쓰셔야 하는 분입니다” “더 많이 써주세요”(함께 팟캐스트를 만드는 동료들의 말). 젠더적 관점의 해석을 요청하는 이들도 있다는 신호로 알아차렸다. 그런 독자가 있으므로, 여성 화자로서 내 일인칭 목소리를 더 내보고도 싶어진다.
그래서 소설가 강화길 목소리를 따라 읽고,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내가 쓴 글을 읽듯 따라 읽는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밀고 나가는 동시대 여성 작가의 존재를 확인하며, 함께 더 많은 자료를 구축해 나가기로 한다. 그가 “평생 차별과 분노와 고통에 맞서 자신의 능력과 자의식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여성 작가들을 존경했듯, 나 또한 강화길 작가를 존경한다. 부디 작가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에 대해, “그 풍성하고 깊은 목소리에 대해” 평생 써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엄마 딸 이야기, 엄마의 엄마와 할머니의 할머니 그리고 이모들 그리고 병 걸린 이야기 같은 것을. 그러면 나도 계속 따돌림당한다고 느끼는 여성의 수치심과 증오와 분노와 공포의 감정을 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쓸 거야. 평생 엄마 딸 이야기를 쓸 거야. 엄마의 엄마와 할머니의 할머니 그리고 이모들에 대해서.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에 대해서. 그 풍성하고 깊은 목소리에 대해. 처음이었다. 그래, 읽기 싫으면 읽지 마.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생각한 건. 이것이 내가 하려던 이야기다.
― 같은 책, 71쪽.
※모든 인용문의 볼드체는 필자의 강조입니다.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