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385호 수도회, 길을 묻다]

2022-11-30     최종원

프랑스혁명,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다. 프랑스는 이날을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고 국경일로 지킨다. 그리스도교와 국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면,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클뤼니 수도원 파괴이다. 베네딕트 회칙을 따르는 클뤼니 수도원은 10세기 중세 교회 개혁 운동의 전면에 나선 상징적인 곳이다.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이기도 했다. 한때 클뤼니 수도원장은 로마 교황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도 평가된다. 이 역사적인 수도원이 혁명의 와중에 파괴되었다. 장서를 자랑하는 수도원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가 불탔다. 대리석 건물 잔해는 도시 재건 사업을 하는 데 사용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틀의 납은 모두 녹여 나폴레옹전쟁 때 탄환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부유했던 이 수도원의 파괴는 근대 세계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극적 변화를 상징한다. 수도회의 본질을 상실한 채 과도한 부를 둘러싸고 수 세기 동안 진행된 내부 갈등, 국가와 교회와의 오랜 대립 등이 프랑스혁명 당시 수도원 파괴로 이어졌다. 혁명기에 불탄 수도원은 클뤼니 수도원만이 아니었다. 전국에 수백 곳의 교회와 수도원, 수녀원들이 불타거나 폐쇄되었다. 종교개혁기 수도원 재산 몰수나 수도원 해산 등은 모두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국가들에서 이뤄진 조치였다. 그런데 근대 혁명기에 이루어진 수도원 파괴는 가톨릭 국가 내에서 발생했다. 이제 이 문제는 종파 간 갈등이기보다, 탈종교화되는 시민사회 속에서 종교성의 해체를 도모한 사건이다.

종파적 이해를 떠나 프랑스혁명기 교회 상태에 우호적인 시각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정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성직자 특권 철폐나 수도원 폐쇄 조치의 정당성과 별개로 근대 세계가 추구한 탈종교의 가치가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을 남긴다. 근대 세계에서 수도원 파괴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지 더듬어본다.

해체로 가는 여정

종교개혁 이후에도 수도원은 존속했다. 교황에게 수도원은 유럽의 개별 국가에서 로마 교황청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였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군주들도 교황과의 관계나 다른 가톨릭 국가와의 관계 때문에 수도원을 억압하지 않았다. 유럽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확산되면서, 수도회는 가톨릭교회의 활력을 상징했다. 새로운 수도회들이 선교, 교육, 자선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수회는 이 새로운 질서 내에서 전방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중남미 선교와 아시아 선교를 통해 가톨릭을 확산했고, 유럽 내부의 경우,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에서 가장 앞선 기여를 했다. 가톨릭 국가 내에서 수도원이 받은 정치적, 경제적 혜택도 상당했다. 독일의 경우 가톨릭을 유지하는 바이에른주는 수도원이 보유한 토지가 전체 토지 중 20% 이상이었다고 한다.

적어도 가톨릭 국가 내에서 수도원은 신성불가침의 조직이었다. 그렇다고 수도원 개혁에 대한 세속 통치자들의 요구나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유럽에서 과도하게 영향력을 확장한 예수회에 대한 저항이 대표적이다. 포르투갈에서 비롯된 예수회 탄압을 시작으로,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 등에서 반 예수회 운동이 발생했다. 국가의 수도회에 대한 탄압이나 제재 조치는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정치적·경제적 이유가 훨씬 많았다. 1766년 프랑스의 루이 5세는 수도원 수를 제한하고, 수도 생활을 통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 도시에 수도원 건물을 한 채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작은 수도원은 해체시켰다. 수도원에 부가 과도하게 집중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1780년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가 주도한 수도원 개혁은 교육이나 자선사업에 관련된 수도원만 유지하고, 그렇지 않은 수도원은 해산하여 재산을 일반 교구와 학교로 이전시켰다.

이런 사례들은 18세기 국가와 수도회의 관계에서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수도원 토지 문제는 경제구조와 연결된다. 수도원이 가진 토지는 해산되었을 때 재분배된다. 바이에른주처럼 한 관할권 내에서 20%에 가까운 토지를 수도원이 보유한다면, 토지 몰수와 잇따른 국유화나 매각 등이 가져올 사회 경제적 변화는 상당하다. 이런 변화가 가능하려면, 수도원의 존재 이유나 역할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가 있어야 하며, 더불어 국가 구성원의 합의 역시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로, 존립 목적에 부합하는 수도원만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수도원에 기대하는 역할은 종교적인 분야를 넘어 기초부터 고등 수준에 이르는 교육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뒤집어 말하면, 그 역할을 일반 학교나 교구 학교에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면 수도원의 존재 의미는 더욱 축소된다.

마지막으로, 18세기 후반 수도원 개혁의 공통점은, 수도회의 경제적 기반을 견제하거나 존립 목적을 통제하는 등 양상은 달랐지만 더 이상 교황이 각 국가 내 수도회에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이 국가의 이익과 목적에 맞게 수도원을 통제하고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게 되었기에, 언제든 필요하다면 수도원 전면 해체도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었다. 18세기에 나타난 가톨릭 국가 내에서의 수도회 통제와 축소는 국가정책의 결과였다. 국가 단위로 일어난 수도원 개혁이 수도회에 영향을 미쳤지만, 아직까지는 수도회를 해체하려는 의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도회에 대한 극적인 태도 변화는 프랑스혁명에서 일어났다.

혁명과 수도회 폐쇄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등 일련의 전쟁에 참여하면서 국가 재정 파탄을 초래했다. 바닥난 국고를 메우기 위해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과세안을 제시했지만 그들의 저항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제삼신분이 과중하게 세금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혁명에 성공하여 프랑스의 봉건적 구체제가 무너지고 전면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교회에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교회는 특권을 잃었고 교회 재산은 국가로 귀속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모든 수도회가 해산되었다. 많은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자신의 수도 서약을 지키기 위해 해외로 도피했다. 프랑스에 남아 있는 이들은 시민 선서를 해야 했다. 수도원 해산은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특권 폐지와 함께 이뤄졌다.

우선 이 변화는 경제적 관점에서 따질 수 있다. 성직자들은 교회의 십일조를 포기하고, 국가에 귀속되는 데 동의했다. 1789년 8월 26일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성직자와 가톨릭교회의 우월적인 지위는 상실되었다. 1789년 11월 2일 의회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가로 귀속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1789년 당시 교회는 프랑스 전역에 약 6%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교회는 농업 생산량 가운데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징수할 수 있었고, 수입에 대한 과세도 면제받았다.

1790년 2월 13일 수도원에 대한 국가 개입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내 모든 수도원이 해산되고 법률로 수도 서약이 폐지되었다. 수도사들과 수녀들은 세속 신분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4월 14일에는 교회 재산의 국유화가 반포되었다. 수도원과 그 재산을 매각하여 국가 재정의 안정을 꾀했다. 혁명정부는 교회의 수입과 재산을 장악하고, 급진적 개입을 통해 교회와 국가 사이의 경계를 재설정했다. 그만큼 교회가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재정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국유화한 토지를 입찰해 민간에 매각했다.

7월 12일에는 성직자 공민헌장(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이 제정되었다. 이 헌장은 성직자 신분을 프랑스 국가 관료로 전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가 성직자 급여를 부담하고 전통적으로 종교가 수행해오던 구제 사업의 책임을 떠맡았다. 이때부터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 등 호적 업무가 교회로부터 국가로 이관되었다. 이 헌장에 서약하기를 거부하는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가 이뤄졌다. 4만 명 이상의 신부들이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혁명 전에도 프랑스 교회는 정부와 사회로부터, 특히 계몽주의 지식인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수도원이 해산되었다. 지식인들은 국가 이익과 인권의 관점에서 수도원 해산을 요구했다. 그들은 수도원 회랑 내에서 기도하며 세월을 보내는 수도사와 수녀의 삶이 국가의 생산성과 이익을 발생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삶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한 개인의 일생이 수도 서약으로 평생 제약당하는 것을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고 비판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가 관행을 없애려고 노력했는데도 어린 자녀를 수도원에 보내 가족의 부를 합법적으로 상속하는 일은 지속되었다. 수도 서약은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삶을 강제하는 인권유린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다.

1789년 10월 28일 파리에 사는 두 명의 수도사와 한 명의 수녀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수도 서약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하는 제보가 제헌의회에 전해졌다. 이 제보로 프랑스 사회에서 종교적 서약과 인권 논란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다음 날, 의회는 자유의 이름으로 종교 서약을 즉시 폐지했다. 의회는 종교 서약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므로 영구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도회의 존재가 자연권에 기반을 둔 사회와 반대된다고 보았다. 수도사나 수녀의 존재는 인권과 사회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고, 종교의 건전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침묵과 기도, 신비로 대표되는, 1천 7백 년 이상 이어온 수도원 정신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었다. 수도원 폐지와 파괴는 혁명의 와중에 벌어진 하나의 사건, 그 이상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이 내세운 이상과 수도원의 가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수도사의 삶은 자유의지가 꺾이고, 강요된 고립의 삶으로 간주되었다. 신 앞에 더 우월한 삶이라고 여겨지던 수도사의 삶은 인간이 모두 평등한 존재임을 부정하는 구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폐쇄 공동체 속에 살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한 생산성 높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이성, 혁명의 종교

혁명이 진행되면서 종교가 공화국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프랑스 사회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비기독교화 운동이 일어났다. 사제직을 포기하라는 권고를 받았고, 결혼을 권유받거나 강요당했다. 거부할 경우, 체포되거나 추방당했다. 1793년 10월에는 예배가 금지되었다. 교회의 종을 떼어내 전쟁 군수품을 만들었다. 교회와 묘지에서 십자가상이 제거되었고, 종교를 주제로 한 예술품들이 압수되거나 파괴되었다. 프랑스 가톨릭이 남긴 문화유산과 예술품이 불타고, 교회는 이제 창고·공장·마구간으로 개조되었다. 성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공장소에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고, 공식적 예배일인 일요일을 없앴다.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수준은 다양했지만 이것이 전하는 바는 명확했다. 가톨릭은 더 이상 공화국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메시지이다.

프랑스혁명이 목적한 근대화를 향한 거친 걸음은 기존의 교회 전통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 혁명의 폭도들은 수도원, 성당, 교구 교회, 성이나 궁전에 난입하여 수세기 동안 보관되었던 필사본 등을 끌어내 불태웠다. 구체제를 향한 저항에서 근대성이 생겨났지만, 이것이 전통의 손실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가는 컸다. 혁명의 폭도들은 토지 소유와 임대권을 명시하는 소유권 계약, 헌장 등 중세 이후 잘 정비되어온 문서들을 불태웠다. 족보·책자·호적 등 귀족임을 입증할 법적 증거물들을 없애고, 프랑스 정치·사회·경제·역사의 풍부한 자료들을 파괴했다.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4백만 권 이상의 책이 수도원에서 불탔고, 그중 2만 5천 권은 중세 필사본과 같은 귀중한 자료들이었다.1)

가톨릭의 자리에 이제 새로운 종교가 들어왔다. 1792년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혁명정부는 혁명의 희생자들을 성자로 기념하고, 삼색기를 성스러운 상징으로 숭배하는 등 혁명의 종교화를 진행했다. 그 목표로 다양한 의식과 축제가 생겨났다. 이제 전통적 신 대신에 이성의 여신이 자리를 차지했다. 교회는 ‘이성의 신전’으로 바뀌었다. 공화국 통치자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존재의 제전(the Cult of the Supreme Being)이라는 새로운 국교를 제안했다. 이성을 신적인 자리에 놓음으로 프랑스인들 사이에 여전한 종교적 믿음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숭배를 이어가고자 했다. 종교가 공화국의 도덕을 지탱해줄 중요한 수단으로 여전히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여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795년 2월 21일 교회와 국가의 공식 분리 선언이 있었다. 교회는 다시 문을 열고, 사제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공화국 법을 존중하기로 약속하는 조건으로 종교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9년 11월 9일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이후에 완전히 끝났다. 나폴레옹은 그 자신이 종교적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의 질서 회복을 위해 종교의 역할을 인정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1801년 7월 16일 교황과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로 회복됨을 선언했다. 다만 교회는 사회 속에서 특권적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교회는 이제 국가의 통제하에 있었다. 국가가 사제들을 고용하여 급여를 책임졌다. 당연히 모든 사제들은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직접 주교를 임명하면서 교황과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나폴레옹은 1804년 열린 자신의 대관식에 교황의 참석을 종용하고, 성 나폴레옹 축일을 도입하는 등 교회를 사적 통치를 위해 활용했다. 1808년 나폴레옹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교황과의 관계는 틀어졌다. 교황이 나폴레옹을 파문하자, 나폴레옹은 교황을 체포하여 프랑스에 볼모로 잡아두었다. 나폴레옹이 가톨릭교회를 되살렸으나, 이제 교회는 철저하게 국가 종교가 되었다. 나폴레옹 치세에서 수도원은 다시 한번 시련을 겪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프랑스혁명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그리스도교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2) 천 년 이상 정치적 영향력과 자치를 행사하던 교회가 혁명 과정에서 세속 국가에 의해 개혁되고, 폐지되고,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 사건은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에 종교가 경험하는 새로운 일상이었다. 이제 교회는 국가 통제하에 들어가고, 전통적 종교성은 이성과 합리의 시대, 인권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로 평가절하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유럽 전역에 세속화의 길을 열었다. 프랑스혁명은 그리스도교가 유럽 역사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후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수도원의 가치에 가해진 도전도 거셌다. 청빈, 순결, 순명이 대표하는 수도회의 가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가치에 압도되었다. 종신 수도 서약은 시대에 뒤처진 인권유린의 길로 매도되었다. 혁명이 몰아낸 것은 구체제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2천 년 가까이 쌓아온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전통도 혁명 앞에서 무너졌다. 한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상은 구체제 상징인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의 부적응의 모습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무너뜨린 현상이 얼마만큼 전향적인 결과를 냈는지는 또 다른 질문거리다. 프랑스혁명은 근대를 만든 사건이다. 신 없이 쌓아 올린 근대가 추구한 가치, 근대성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지 따져본다면, 마냥 근대성에 대한 상찬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길을 잃어버린 근대

신 없는 근대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수도원의 가치, 종교의 가치를 배제한 근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자본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 그로 인한 식민지 지배와 제국주의 확산, 제국 팽창이 충돌하여 빚은 처참한 결과인 두 차례 세계대전 등 신 없이 추구했던 인간의 미래는 암울했다. 일찍이 네덜란드 중세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의 힘을 주창한 바 있다. 그는 놀이의 자발성, 상상력, 순수성, 비일상성이 건전한 창조성을 낳는 힘이라고 했다. 놀이는 일견 그 자체로 아무런 생산성이 없어 보이지만 하위징아는 놀이 정신을 상실한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놀이 정신이 문명을 생성하는 창조력의 바탕이 된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문화가 놀이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노동과 생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놀이를 무가치하게 보는 관점이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만들기보다 기계화된 세계의 부품으로 간주되도록 한다. 진정한 인류의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현대 사람들은 신성한 놀이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판단력 쇠퇴, 비판 의욕 저하, 과학기술의 악용, 이 모두가 문화를 혼란 속에 빠뜨리며 필연적으로는 윤리의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수도회 정신과 하위징아의 놀이 문화를 직선적으로 연결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놀이 문화가 생산성의 요구를 거부하고 주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인 기도와 침묵의 삶을 살아가는 가치와 부합하는 지점이 있다. 빗대어 보면, 근대 혁명이 파괴한 것은 수도원 건물이 아니었다. 그 속에 스며있던 수도회의 정신이 영구히 무너졌다.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기도에 헌신하고, 회랑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멈춰진 삶을 사는 그들의 모습은 효율과 효용을 추구하는 근대의 인간이 보기에는 무가치하게 보인다.

더불어 근대가 추구하는 자유, 평등, 박애도 한계는 뚜렷하다. 근대가 추구한 인간 자유는 절제되지 않는 탐욕을 부추겼다. 그들이 추구한 평등은 모든 사람들의 평등이 아닌 유럽 중산층 부르주아의 평등이었다. ‘앞선 유럽’과 ‘야만적인 타자’라는 불평등한 관계에서 비롯된 제국주의 침탈을 박애라는 명목으로 옹호하고 있었다. 혁명과 수도원 파괴를 논하면서 다음 세기 제국주의 혐의까지 소환하는 일은 지나친 듯하지만, 근대 유럽이 수도회를 잃어버리면서 절제 없는 욕망 추구를 무한 긍정했다는 현실은 비껴갈 수 없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서 보이는 추악한 인간성의 비극은 종교적 사건이었다. 이성과 과학, 진보라는 이름의 종교가 추구한 결말이다. 성찰과 기도의 삶을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며 수도원을 파괴한 근대가 제거해버린 것은 신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의 성찰이었다. 거침없을 것 같던 근대가 혁명과 전쟁의 피비린내를 경험하게 되자, 인간은 다시 수도회에 길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 주

1) Eltjo Buringh, 《Medieval Manuscript Production in the Latin West: Explorations with a Global Database》(Leiden: Brill, 2011), 208-209쪽.
2) Nicholas Atkin & Frank Tallett, 《Priests, Prelates and People: A History of European Catholicism since 1750》(London, New York: I.B.Tauris, 2003), 3쪽.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