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먼지를 뒤집어쓰지만 한 폭의 비단을 엮는다
[385호 내 인생의 한 구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 4:7)
어느 날 당신과 내가 /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나눔의 거대한 물결 속 트럭을 몰며
얼마 전 아름다운가게가 서울 페럼타워에서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2002년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 앞 작은 길거리 알뜰시장으로 시작한 아름다운가게는 그해 10월 안국 1호점 오픈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164개 매장을 열었다. 현재 서울 31개 매장을 포함해 전국 110개 매장을 가진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국내외 이웃들과 단체에 나눔한 금액이 618억여 원에 이른다.
옷과 신발, 가방, 컵, 축구공, 동화책, 헤어드라이어 등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품을 기부받아, 전국 매장을 통해 판매하고, 남긴 수익으로 나눔활동이 이어진다. 이 사이클 안에 한 명 한 명의 자발적인 나눔과 참여가 있다. 기부하는 기부천사, 매주 4시간 이상 자원봉사를 감당하는 활동천사, 재사용품을 사용하는 구매천사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사랑이 담긴 나눔과 참여가 아름다운 변화의 시작이 된다.
고 박원순 설립자가 2002년 유수의 기업들을 찾아가 사업 필요성을 설명했을 때, 하나같이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고 한국 사회에서 재사용은 시기상조라는 반응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후변화’와 ‘물품의 재사용’ ‘자원의 순환’ ‘기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다. 지금은 ‘재사용문화’ ‘나눔 문화’ ‘기부 문화’ ‘자원봉사 참여’ ‘업사이클링’ ‘공유경제’ 등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구세군 희망나누미 착한가게’ ‘굿윌 스토어’ ‘기아대책기구 행복한나눔’ ‘당근마켓’ ‘번개장터’ ‘중고나라’ 등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재사용 가게들이 확산되고 있으며, 생활 전반에 걸쳐 물품의 재사용, 기부와 참여, 직접 거래 등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시·군·구를 비롯해 동주민센터에 이르기까지 나눔장터, 벼룩시장, 바자회, 플리마켓 등의 이름으로 행사를 하지 않는 곳이 없고, 학교와 어린이집, 공공기관, 기업체 할 것 없이 물품의 재사용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아름다운가게가 그토록 바라고 꿈꿔왔던 ‘나눔과 순환을 통해 모두가 다 잘 사는 아름다운세상 만들기’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한 셈이다.
아름다운가게는 이 사회의 무분별한 생산과 낭비를 줄이고 자원 수명을 늘려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환경적 가치를 창출하고 우리 사회의 생태적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취약 계층 기초 생활 지원’ ‘홀몸 어르신 지원’ ‘보호 종료 아동 지원’ ‘국내외 사회적 혁신가 발굴 및 지원’ ‘지역사회 공익단체 지원’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 건립’ ‘해외 나눔가게 지원’ 등의 이름으로 사업을 완성해가고 있다.
이 사업에 일원으로 함께한 지가 벌써 12년이 되고 있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매일매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기증받아온 물품을 정리해 물류센터에 입고하는 일, 기증된 도서를 선별하는 일, 1톤 트럭을 몰아 봉천동·방학동·압구정동·동부이촌동 등 기증자 집을 방문해 기증 물품을 받아오는 일, 기업체, 공공기관에 방문해 담당자들을 만나 설명하고 임직원 기증 물품을 픽업하는 일, 2.5톤 탑차를 몰아 서울 전 지역 31개 매장에 물품을 공급하는 일 등이다.
커다란 사업 한 모퉁이, 나는 이곳에서 트럭 운전사이고 컨베이어벨트 앞에 선 노동자이고, 사회사업을 함께하는 간사다. 순간순간 내가 하는 일들이 너무 사소하게 느껴질 때도 없지 않다.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댈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작은 역할 하나하나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기부, 한 사람의 자원봉사, 한 사람의 구매 등 사랑의 나눔이 모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가게다. 그 뿌듯함에 취해 나는 이 현장에 계속 머물고 있다.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한 몫몫
신학교 다닐 때 난 강의실보다 운동장과 동아리방에 많이 가있었다. 축구 아니면 동아리 활동이 내 학부 생활의 전부였다. 슬로건 한 문장에 이끌려 한 동아리에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였다. 지금도 그 순간 느꼈던 감동이 가시지 않는다. 동아리 선배들이 만들었는지, 어디 책에 나온 구절을 따왔는지, 누구의 명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문장이 내 심장 어딘가에 새겨져 있기라도 한 듯 늘 생생하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나도 한몫하고 싶다.
매주 금요일이면 광주 학동에 위치한 재활원에 가서 예배를 주관해 진행하고, 목욕·식사·산책을 돕고, 봄가을이면 나들이, 여름엔 캠프를 함께 진행하는 동아리였다. 군대 기간 때문에 복학이 늦어진 시기를 포함하면 거의 5년 가까이 동아리에 붙어있었다. 멤버들이 좋기도 했지만, 조건도 이유도 없이 마음과 시간을 들여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고받고, 매순간 나눈 것 이상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했고, 이런 활동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나눔과 참여’에 관심을 갖게 된 게 이때부터였다. 시민단체 활동가이자 사회복지사의 삶을 이어오게 된 것도 동아리 활동 영향이 클 것이다.
2002년 개봉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Pay It Forward)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영화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열한 살 트레버(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릴레이 도움 주기’라는 아이디어와 실천으로 범죄와 무관심, 온갖 상처로 가득한 LA 어느 도시를 바꿔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부터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 그것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 교사 유진 시모넷(케빈 스페이시)은 수업 첫 시간에 ‘이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생각해보고, 1년 동안 실천할 것’이라는 과제를 낸다. 다른 친구들은 유치하고 황당한 내용으로 발표하는데, 트레버는 시모넷 선생님도 주목하게 만든 ‘도움 주기’라는 방법을 생각해 발표한다.
세 명이 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을 돕죠. 대신 아주 큰 도움을 줘야 해요. 이들 스스로 할 수 없는 걸 제가 대신 해주죠. 이들도 다른 세 명에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홉 명이 되죠. 전 세 명을 또 돕고… 그러면 스물일곱 명이죠….
트레버는 집과 학교를 오가던 중 눈에 들어온 노숙자를, 엄마가 없는 집으로 데리고 와 욕실을 내어주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까지 제공한다. 노숙자 제리는 트레버의 도움에 감동하고, 차고에 오래 처박혀있던 차를 고쳐준다.
알코올의존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밤낮으로 두 개의 일을 해 홀로 트레버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는 엄마와 상처를 가진 사회 교사 시모넷을 연결해주기도 한다. 엄마는 트레버의 도움으로 의절한 외할머니를 찾아가 화해를 하게 되고, 엄마와 화해한 트레버의 외할머니는 다시 흑인 청년을 도와주게 된다. 도움을 받은 흑인 청년은 병원에서 총으로 간호사를 위협하면서까지 응급 상황에 놓인 변호사 딸이 먼저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시작된 도움 주기는 빠르게 퍼져나간다. 투박하고 거칠게 전개되지만 결국 이 프로젝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이없는 교통사고를 당한 기자 챈들러가 극적인 도움을 받고 그 내막을 추적해 트레버에게 닿는다. 트레버는 인터뷰에서 “자전거를 고치는 일보다 중요하죠. 사람을 고치는 일이니까요”라고 수줍어하며 말한다. TV로 방송되기 전 주인공 트레버는 목숨을 잃는다. 괴롭힘을 당하던 약골 친구 아담을 돕다가 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트레버의 집에 LA 전역에서 촛불을 든 추모 행렬이 이어진다.
나눔과 실천의 현장으로 이끄는 말씀
나는 아직까지 사람이 가진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 기대고 싶다. 순진하고 유토피아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실제로 영화 개봉 이후 관련 단체도 만들어지고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내가 머물고 있는 아름다운가게 사업도 영화 속 ‘도움 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날 자꾸만 나눔과 실천의 현장으로 이끄는 말씀, ‘내 인생의 한 구절’은 바로 이 말씀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사랑하지 않는 자는 유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는 명제가 인생의 선택지마다 나를 이끈다.
나의 작고 사소한 나눔과 참여가 보태져 세상이 어제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아져 가기를, 아름다워져 가기를 소망한다. 앞에 소개한 정희성 시인의 시구처럼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날과 씨로 만나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하나의 커다란 꿈을 엮어갈 수 있기를, 하늘의 비단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류화선
신학, 사회복지학, 평생교육학을 공부했다. 고수교회, 무등육아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안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를 거쳐 아름다운가게까지 20년 넘게 사회복지사로,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