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입은 전능하신 하나님
[385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가끔 몸을 갖고 사는 일이 부쩍 버겁다. 옷을 벗어 내팽개치듯 몸뚱이도 벗어던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싶다. 몸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삶 자체가 때론 번잡스럽고 귀찮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통증이나 제약이 있을 때 몸은 더욱 선명하게 의식된다. 몸을 가진 인간인 이상, 감기나 몸살이 찾아와서, 혹은 편두통 때문에, 아니면 복통·설사·변비 등으로 하루 일상을 통째로 내줘야 하는 날을 언제고 맞닥뜨리게 된다. 빈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이때 몸의 습관이나 생활 환경으로 인한 고생도 있지만, 잔병과의 만남이 잦은 체질 또한 존재한다.
장애학은 비장애와 건강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상태일 수 있다는 진실 하나를 일깨운다. 가만 생각해보자. 정직하게 한 사람의 일생을 돌아볼 때 의심 없이 확고한 건강 상태로 몸을 유지하는 시기는 의외로 길지 않다. 비장애인에게 주어진 삶도 질병과 부상 등에 따른 조절과 관리의 연속이고, 비장애에서 장애로 이행되는 게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장애인 중 10-15%만이 신체적 손상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한국은 2017년 기준 88.1%가 후천적 장애인)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장애학자 토빈 시버스는 말했다. “장애 입은 신체는 종종 타자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사실, 건강한 몸이 타자의 진정한 이미지이다.”(《장애이론》, 학지사, 111쪽)
나는 장애를 갖고 있지만 어렸을 적부터 잔병으로 앓아누운 기억이 손에 꼽는다. 학창 시절만 돌아봐도, 유행병 같은 것에 걸린 적이 없다. 몸살·두통·감기로 아파도 별 고생 없이 금방 낫는 편이었다. 굳이 힘든 부분을 꼽자면, 환절기에 얼마쯤씩 반응하는 알레르기 비염 정도일까. 그래서 아프면 약부터 찾는 사람을 꽤 긴 시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생활하며 느꼈던 몸의 버거움은 골골거림이나 잔병치레와는 거리가 멀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고려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장애’와 전혀 상관없는 영역까지도 멋대로 ‘건강하지 않다’ ‘할 수 없다’ 단정 짓는 측면이 존재한다. 몸의 문제는 더 입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 ‘근이영양증’과 ‘지체장애 4급’이라는 정보가 기입된 이력서를 들고 취업 면접을 봤을 때의 일이다. 나는 업무 수행 자체가 가능한 상태인지 묻는 질문부터 받았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로 하는 일이었고, 당시로는 외관상 내가 가진 장애를 특정할 요소가 딱히 없었음에도 그랬다. 즉답을 했으나, 그들은 이력서에 적힌 내 장애를 지목하면서 ‘일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 거듭 물어왔다. 확약을 받듯이 내 대답을 들은 후 본격적인 면접이 진행되었다. 그 질문에 약간의 의구심이 담겨있었다고 느꼈는데, 콕 집을 수 없어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여서인지, 대학생 때는 장애인이 맞는지 의심받기도 했다. 군대 가기 싫어서 꾀병 부리는 것은 아닌가 궁금증을 담아 질문해온 사람도 있었다. 한 친구는 ‘아프면 운동하고 고칠 생각을 해야지, 왜 노력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헬스로 살을 빼고 탄탄한 몸을 만들었던 한 지인은 ‘혹독한 트레이닝을 통해 병을 고쳐주겠다’며 자신 있게 단언했다. 불가능하다 말해도 설득되지 않아, 의학적 정보가 자세히 정리된 자료를 건네주고서야 놓여날 수 있었다. 《장애이론》에서 문제 삼는 ‘능력 이데올로기’적 명제들 중 하나가 떠오른다. “장애는 의지력이나 상상 행위를 통하여 극복될 수 있다. 장애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것이다.”(26쪽)
‘몸’과의 곤혹스러운 관계 맺음
몸을 갖고 살면서 겪는 또 다른 곤혹스러움은 몸과의 관계 맺음에서 나온다. 이 관계 맺음에서 나는 무시로 난항을 겪는다. 내가 고백하는 몸의 버거움은 이와 연관이 있다. 헤르베르트 플뤼게는 《아픔에 대하여》(돌베개)에서 몸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간은 몸을 ‘소유’하면서 몸으로 ‘존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몸을 ‘자신 앞에 놓인 대상’으로 바라본다.”(112쪽) 플뤼게는 원칙을 따지자면 몸은 늘 ‘상황’이며, “건강한 사람이든 병자든 이 ‘상황’ 안에서, ‘상황’과 마주하며 ‘의미’를 부여한다”(113쪽)고 강조한다.
근이영양증이 내게 하나의 사건으로 체험되는 상황 중 꽤 많은 경우는,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다녔던 계단이나 턱 앞에서 망설이게 될 때이다. 병이 진행되어 달라진 몸의 감각 탓이다. 성큼 발을 내딛지 못한다. ‘어떻게 오르는 거더라?’ 불쑥 난처함이 담긴 헛웃음이 나온다. 병의 존재가 배경으로 있다가 전경(前景)으로 드러난다.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 앞에서 몸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이상하게 계단의 높이가 눈대중으로 가늠이 안 된다. 난간 모양이나 상태에 따라, 어떻게 이용해야 편할지 종종 판단이 안 선다. 버티는 힘이 약한 장식용 난간이면 전략을 달리해야 한다.
절뚝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순간순간 오가는 은근한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괜스레 딴청을 피우며 먼저 보낸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편이 천천히 움직이는 데 더 수월한 탓도 있다. 때론 부축 등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인이 옆에서 “어떻게 도와줄까요?” 하며 먼저 물어온다. 어떤 식으로 해달라고 설명하면 되는지 종종 난감해진다. 내려갈 때는 옆에서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받쳐주면 확실히 편하다. 올라갈 때는 어떻게 도움을 받으면 괜찮을지 감을 잡기가 어려운 순간이 존재한다. 턱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한 번 넘고 만다. 가파른 오르막이나 계단을 오르는 일은 최대한 피하려 애쓰고 있다.
내가 몸을 사리는 이유가 단순히 그때그때의 상황 모면을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계획을 짜고 조심하는 것은 근이영양증의 불확실성 때문이다.1) 몸 전반에서 근육 손상이 진행되는 이 병은 출생된 남자아이 3천 5백 명 가운데 1명꼴로 발병한다는데, 진행 속도나 증상 정도가 조금씩 다르다. 근육 손상이 그나마 천천히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일이 관건이다. 골격근, 심혈 관계를 잡아주는 운동이 필요하나, 많은 양의 활동은 오히려 손상을 가속한다. 병을 멈춰 세울 수 없다는 점은 기정사실이다. 어디까지가 한계이고 어느 정도 운동이 얼마큼 유익을 가져다줄지 예측하기 어렵다. 근육이 약해서 할 수 있는 운동도 제한적이다. 근력 강화가 아니라 일상 건강 증진 및 유지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지치면 역효과가 날 수 있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비장애인의 동행이 권장된다. 무리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물리치료, 스트레칭 등 몸을 조금이나마 유연하고 탄력 있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일상생활을 무사히 영위해가는 것이 활력을 줘서, 우선 과제로 제시된다.
내 몸은 현재 상태로만 말하자면, 걷기가 조금 불안정해도 지팡이 없이 그럭저럭 돼가는 처지다. 길이 조금 꺼진다거나 하면 곧바로 삐끗하거나 자빠져버리기 때문에 유의하며 천천히 걷는다. 발을 잘못 디뎠을 경우 발생하는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려 애쓰고 있다. 걷는 도중 주저앉게 되어 생기는 타박상도 피해야 한다. 근육통이 일어나면 회복이 늦는다는 점은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 무리하면 다리·가슴 등 힘 들어간 부위에 살살살 바늘로 긁는 듯한 통증이 찾아들고, 얼얼한 느낌을 안고 앓는 소리 삼키며 생활하게 된다. 이런 때는 몸을 최대한 사린다. 무리한 상태가 심화되기 쉬우니까. 어찌저찌 몸의 예후가 대강 짐작되기는 한다. 상대적으로 심각해 보이진 않는데, 예측대로만 흘러가리라 확언할 수 있을까?
변수를 피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삶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심적으로 압박을 받는 스트레스 상황에선 근이영양증이라는 존재가 속을 헤집어놓고 다닌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 한 공간을 단단히 차지하고서 나를 자꾸 흔든다. 어쩌다 거울을 통해, 병의 진행으로 체형이 변해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왕왕 그렇다. 같은 병을 가진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킬레스건이 짧아지고 엉덩이가 조금씩 뒤로 나옴과 동시에 배를 앞으로 내밀며 어정쩡한 자세로 바뀌는 중이다. 근이영양증이 강하게 의식되는 날에는, 간혹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유영하며 그 속으로 더욱더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따금 바닥이 꺼지는 감각에 사로잡히며 황급히 잠에서 깬다.
톰 셰익스피어는 《장애학의 쟁점》(학지사)에서 근이영양증을 다발성경화증과 더불어 ‘급성적인 퇴행성 장애’의 대표 사례로 언급한다.2) 이 유형에는 아동기부터 장애 문제가 드러나는 이들이 많다. 주로 살아가다가 손상 여부를 알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발병 이전에 비장애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했다. 병증이 약했거나 드러나지 않았던 시절을 경험했기에 장애를 더 크게 체감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경증이고, 장애인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받아들이려 하나, 시간에 따른 손상의 심화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데 심리적 장벽이 존재함을 느낀다.
병의 내막을 잘 모르면, 대개 내가 장애인임을 알더라도 다리가 불편하다는 정도로만 지레짐작한다. 약속 장소로 선정되는 곳이나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자리가 내 몸에 더없이 불편한 상황도 드물게나마 생긴다. 장소를 미리 확인했을 때 바꿔달라 요청하기도 하나, 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 조율을 끝낸 상황에서 아무도 문제 제기하지 않는 가운데 ‘나만 조금 불편을 감수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무리하는 일도 발생한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상황을 모면하지만, 역시나 이후 시간 동안 근육통에 시달리며 후회하게 된다.
결국, 일상의 자리에서 이런저런 문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은 최대한 계획을 짜서 미리 대처하는 것이다. 프로그래머였던 아버지가 당신의 업과 관련해 유일하게 가르쳐주신 것은 ‘순서도 그리기’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프로그램 짜는 계획을 수립할 때처럼 프로세스가 실행되는 과정을 각종 도형과 흐름선 등의 기호로 도식화하는 순서도를 제대로 그리는 게 중요하다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마주하든지 당황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상황을 도식화하여 순서도를 그리면, 그대로 되지 않더라도 한 걸음 물러나 복기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가르침이 내가 일할 때 체계적으로 목표까지 다다르는 사고를 지향하도록 노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봤다. 그 또한 한몫했겠으나,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나의 장애였다. 장애를 안고서, 질병을 안고서 일상을 무사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악영향을 주는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계획하고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이란 예측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 아무리 시뮬레이션하며 순서도를 촘촘하게 그려도 버그를 원천 봉쇄할 수 없는 노릇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뜻밖의 일을 만나는 것은 필연이다.
장애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건물 내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거나, 엘리베이터가 작동은 하는데 내가 가려는 지하 1층, 지상 2층 버튼은 누르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거나. 화장실 위치를 비롯해 공간 구조로까지 생각을 뻗으면, 변수 목록은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돌발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 장애인들의 취약하고도 치명적인 위치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3) 보통 지진이나 화재 등 재해가 일어나면 엘리베이터는 작동을 멈춘다. 거의 대부분의 재난 매뉴얼도 엘리베이터 이용을 금하며 계단을 통한 탈출이 가장 먼저 제시된다. 단적인 예로, 그렇게 되면 휠체어 이용자는 이동이 제한되어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 한국은 비상용 엘리베이터, 장애인 대피용 기구 등의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지 않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등이 빠르게 안내받을 수 있는 시스템 또한 갖춘 경우가 드물다. 장애인 대상 매뉴얼들은 대체로, (안내벨 등을 통해) 도움받을 수 있는 비장애인에게 연락하고 기다리라는 식의 지침을 내세운다. 위험한 상황 가운데 속수무책 방치되는 셈이다.
장애는 개인의 신체 문제를 넘어서서 이해되어야 한다. 비장애인이 장애를 이해하는 방법 중 실질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장애 모의체험’은 장애학의 관점에서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다. 모의체험은 주로, 장애인들의 제약을 경험함으로써 장애인을 향한 비장애인의 태도와 인식을 개선하는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재활이나 복지 분야 종사자들의 환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청소년들 교육 및 활동 프로그램의 하나로, 교회 같은 경우 비장애인-장애인 통합 예배 준비 과정이나 장애인 봉사 및 선교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물론 프로그램으로서 전혀 의미가 없다 할 순 없으리라. 인식 개선의 효과를 입증하는 논문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고, 여전히 장애를 이해하기에 유효한 방법으로 시행되는 듯하다. 다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장애이론》(54-63쪽)에서 지적하는 바는 위험성에 대한 것이다. 눈을 가리거나 휠체어를 타고 일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체화된 지식의 감각’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되레 장애의 한 관점, 한 위치에서 피상적이고 일차원적인 차원으로 ‘장애가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지’만 체험해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토빈 시버스는 ‘복합적으로 체화된 사회적 구성’으로서 장애를 이해하기 위한 원칙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지식은 사회적으로 위치해 있다’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어떤 신체들은 지배적인 사회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제된다’(63쪽). 체험 활동 후 던져지는 질문들도 ‘장애가 발생하면 자신이 어떻게 바뀔 것 같은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문화적 상상 행동이 아니라 개인적 상상 행동”(56쪽)으로만 끝날 공산도 충분하다. 더 나아가, 잠깐의 모의체험을 통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능력’에 따라 ‘무엇이 더 나쁜가’ 줄을 세워보는 일종의 ‘게임’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전한다.
시각장애가 되는 것이 더 나쁜가 아니면 청각장애가 되는 것이 더 나쁜가, 다리를 잃는 것이 더 나쁜가 아니면 팔을 잃는 것이 더 나쁜가, 마비되는 것이 더 나쁜가 아니면 청각장애·언어장애·시각장애가 되는 것이 더 나쁜가? 그 결과는 장애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상이다. (56쪽)
장애를 입은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인간의 삶을 ‘모의체험’하지 않으셨다. 기독교는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개입하시는 하나님 모습을 그린다. 그것은 성육신 이후에 꽃을 활짝 피우지만, 창세기의 창조 사건부터도 이미 그러했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함께하기로 한 사랑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불완전성과 의존성 앞에 자신을 내어놓으신 ‘자기를 제약’(Kenosis)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자신의 권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기계장치가 아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역동적 구조로 만드셨습니다. … 그렇기에 창조는 은혜의 하나님께서 피조적 타자에게 자기를 수여하고자 피조물의 오해와 반발과 불순종의 ‘위험’마저 무릅쓰기로 한 신비로운 결단이자 자기 제약적인(self-limiting)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김진혁,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하여》, 복있는사람, 68-69쪽)
창조를 통한 관계 맺음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를 심화해갈 수 있는 ‘성육신’은 인간 편에서 고려하는 힘의 위계와 전능에 대한 이해를 전복한다. 《성육신》(비아)을 쓴 윌리엄 윌리몬 말마따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은 인간의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것이다. “오늘날 성육신 교리가 정말 믿기 어려운 이유는 언젠가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현대인인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이 오시기를 바란다는 데 있습니다.”(61쪽) 하나님은 무도한 힘의 논리로 나라들을 평정하고 착취를 자행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작은 시골 마을에 연약하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내려오셨다. 성육신은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내어줌의 사랑이 어떤 형태로까지 나아가는지 되새기게 만든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함은, 당신의 다함 없는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통해 마침내 관철해내는 자유로운 의지의 구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전능함이라는 것을 손목 하나 까딱함으로써 우리 자신, 그리고 모든 이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하려 합니다. … 그런 전능한 힘, 거대하지만 제멋대로인 의지는 우리를 불안하게 할 뿐입니다.”(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비아, 36-37쪽)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마 4:1-10)에 떨쳐냈던 권능에 대한 환상들이 무엇인지를 기억한다면, 이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전능함이 얼마나 기독교적 가치와 동떨어져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이는 장애학의 능력 이데올로기 비판과도 맞닿는 측면이 있다.
장애신학에서는 성육신을 “하나님 스스로 무한한 자유를 버리고 자신을 유한하게 제약하신 하나의 장애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장애화(障礙化) 사건’이다”(최대열, 《장애 조직신학을 향하여》, 나눔사, 169쪽)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장애신학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장애를 입은 하나님’(Disabled God)4)이라는 표현이 있다. 장애인 당사자였던 여성신학자 낸시 아이슬랜드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이 개념을 설명했다. 부활한 예수의 몸에는 못 자국과 옆구리 상처 등 십자가 처형으로 인한 손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제약을 받거나 차별을 겪지 않는 몸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일반적이지 않은 몸과 그로 인해 때때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며, 그분의 본성이 사랑이시며 정의와 연합의 편에 서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에 의해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희망을 제공하여 준다.”(177쪽)
욥기를 법정 드라마 형식으로 해석한 장애신학자 김홍덕의 책 《당신이 고통을 알아?》(대장간) 결론부에 나오는 ‘성경 읽기와 적용’ 방식에 대한 지적은, ‘장애를 입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유효한 방식으로 숙고해보게 만든다. 김홍덕은 그동안 우리가 ‘위에서 내려다보는’(from above) 성경 읽기에 익숙해져서, 마치 자신을 하나님 위치에 놓고 성경 속 인물과 사건을 대함에 있어 정죄하는 버릇을 유지하는 데 길들여진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아래서 올려다보는’(from below), 사건 당사자 시선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과 세상이 보이고, 치유와 해법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고 말한다(314쪽).
1) 이하 근이영양증 관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란 E. H. 에머리가 쓴 《근이영양증》(백의)에서 5장(치료)과 6장(근이영양증과 함께 살기),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근육장애정보’ 중 듀센 근이영양증(DMD)의 ‘의료관리’ 부분(www.kmda.or.kr/445)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2) 자세한 내용은 6장 ‘고지가 바로 저긴데: 치료(cure)의 문제’에서 188-194쪽을 참고하라. 저자는 장애와 치료를 대하는 태도를 네 가지 경험으로 구분하여 논지를 전개한다. ‘태어날 무렵부터 고정된 손상을 입은 사람’ ‘급성적인 퇴행성 장애가 있는 사람’ ‘노화 과정의 결과로서 손상을 입게 된 사람’ ‘후천적으로 고정적인 손상을 입게 된 사람’이다. 첫 번째 유형은 상대적으로 장애인 정체성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세 번째 유형은 숫자로는 장애 인구 중 가장 많으나 대체로 비장애인의 자아감을 유지한다. 네 번째 유형은 정체성 인식에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3) 이 단락에 나오는 재난 시 장애인이 처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사들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더 자세한 실태는 기사 참고. 김혜미, “재난 때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휠체어 탄 사람은요?”, 〈비마이너〉(2018.7.5.), 강혜민, ‘국가 재난’이 된 강원도 화재…그러나 불길 속에 방치된 장애인들, 〈비마이너〉(2019.4.16).
4) 낸시 아이슬랜드가 본격화한 이 개념은 한국에서 주로 ‘장애를 입은/입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된다. 장애신학자 김홍덕은 ‘Disabled God’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2010년 출간한 《장애신학》(대장간)의 각주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478쪽). 그는 ‘장애 하나님’ ‘장애인 하나님’으로 직역해야, 인식에 충격을 주고자 하는 낸시 아이슬랜드의 의도를 살릴 수 있다며 ‘장애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 하나님의 인성만 강조되는 측면이 있기에 ‘장애를 체험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정도가 무난하리라 생각된다고 덧붙인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