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고통의 만남
[385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 이 설교문은 ‘피에타’(누가복음 13:1-5)라는 제목으로 2022년 11월 13일 주일에 설교한 내용이다.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눅 13:1-5, 새번역)
피에타, 리스바
지금 보시는 조각상은 천재라 불리던 미술가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입니다. 호흡이 끊어진 아들 예수를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피에타’(pietà)는 슬픔 혹은 슬픈 탄식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조각상의 여인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만, 피에타에 젖었던 또 다른 어머니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근래의 상황이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의 아내 리스바입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후궁 중 한 명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사울과 그 일가족은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살아있는 한, 현재 권력의 눈에 과거 권력의 남은 혈육들은 껄끄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리스바가 다시 등장한 때는 해를 거듭하여 3년간 이어진 가뭄으로 흉년이 닥쳤을 때입니다. 흉년으로 민심이 좋지 않자, 다윗은 가뭄과 흉년이 일어난 까닭을 묻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사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데 대한 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가서 어떻게 하면 저주를 풀게 되고 보상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주면,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무리하고 무도한 요구인데, 다윗은 그 요구를 허락합니다. 자기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제외하고, 리스바의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이 낳은 다섯 아들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정녕코 그 일곱 아들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입니다.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일입니다. 성경에서 이 이야기는 학살을 자행한 잘못에 대한 필벌로 여겨지지만, 이른바 차도살인-남의 칼을 빌려 숙적을 제거하는 비열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3년간 이어진 가뭄은 사울 자손들의 죽음으로도 그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리스바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피붙이들을 그냥 떠나보낼 수 없었습니다. 리스바는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큰 바윗돌 위에 펴놓고, 아들과 손자들의 주검을 그 위에 두었습니다. 낮에는 새들이 아들들의 주검 위에 내려앉지 못하게 하고, 어두운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무너지는 억장을 부여잡고, 아들과 손자들의 주검을 지켰습니다. 보리를 베기 시작한 봄철부터 가을비가 내리기까지, 자그마치 반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눈물을 삼키며 아들들의 주검을 지켰습니다. 부당하게 살해당한 아들들의 억울함을 알리려 했던 어머니의 울부짖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리스바의 모습은 다윗과 권력자들에게 부담을 안겼습니다. 지도자들의 비열함과 무정함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까닭입니다. 결국 다윗은 희생자들의 뼈를 수습하여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합장하였습니다. “그 후에야”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이어지던 가뭄이 그쳤습니다(삼하 21:1-14).
길 가는 나그네들이여
하지만 그런들 리스바의 슬픔과 비통함이 사그라졌을까요? 이미 사라져버린 아들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하기에 리스바는 여전한 피에타에 사무쳤을 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참사를 당한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참사 두 가지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갈릴리에서부터 먼 길을 지나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한 순례객들이 성전에서 학살을 당한 겁니다. 갈릴리 사람들 중 적잖은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대항해 독립 투쟁을 벌였던 탓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갈릴리 사람들은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그래서 순례를 위해 성전을 방문한 갈릴리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은 겁니다. 무고한 순례객들을, 다만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제단에 그들의 피를 뿌린 겁니다. 또 하나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열여덟 사람이 그 아래 깔려 죽은 겁니다. 당대 인구를 고려하면, 대형 재난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이 참사를 어떻게 해석할지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족들이 느꼈을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요?
우리 또한 10·29 참사로 비탄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저 불가피한 사고로 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까요? 애가에 기록된 예언자의 탄식이 떠오릅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이 슬픔,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애 1:12) 10·29 참사로 죽거나 다친 이들 대다수는 학창 시절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세대입니다. 또한 수학여행을 비롯한 단체 행사들이 취소되는 경험은 물론이고, 안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 숨죽여 지냈던 세대입니다. 최근 3년간은 코로나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누릴 분출구마저 틀어막혔던 이들입니다. 누가 그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로 자책하고 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 틈새에서 목이 쉬도록 소리치며 울먹였던 경찰관의 모습을 영상으로 접하셨을 겁니다. 비극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거리를 통제하기 위해 애쓴 그는 지금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소방 구조대원들과 현장에 있던 의료진들, 어떻게든 팔을 걷어붙이고 구조에 힘썼던 이들은 자신의 힘이 부쳤을 뿐인데, 죄의식의 그림자를 오롯이 덮어쓰고 있습니다. 심지어 참사의 책임을 그들에게 물으려는 시도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희생당한 이들과 다치긴 했으나 살아남은 이들, 현장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힘쓴 이들을 향해 무도하고 비정한 말들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비난의 말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쭙잖은 위로를 전한답시고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참사를 해석하거나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실로암
오늘 본문이 전하는 당시 사람들 역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참사를 해석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원인을 희생자들에게 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5) 그들이 죽은 까닭을 그들 개인에게서 찾지 말라 거듭 말씀하십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이 일들을 통해서, 당시 사회 공동체가 갖고 있던 문제점들을 드러냄과 동시에 공동체의 죄를 여실히 드러내어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이 전하는 참사가 벌어진 곳과 연관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 말 역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드러내는 물음입니다. 판단과 정죄의 시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시죠.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가 날 때부터 눈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 있다면, 그가 진정 눈먼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눈먼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또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예수께서 분명히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눈먼 사람의 눈에 당신 침을 이긴 진흙을 바르시고,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 연못의 이름이 실로암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기 위해 세상에, 고통 한복판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판단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해석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파하는 이들 곁에서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도록 보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슬픔과 아픔이 다시 거듭되지 않도록 애쓰라고 실로암-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요 9:1-7).
앞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조각상을 보았지요. 사실, 슬픔을 표현했다기엔 마리아의 모습이 지나치게 아름답고, 고통을 표현했다기에 조각상은 매우 매끄럽고 빛이 납니다. 그래서일까요?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또 다른 피에타상을 만들었습니다.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전까지 작업에 매진했지만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표면이 거칩니다. 하지만 표면이 거친 것이 어쩌면,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예수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고, 마리아의 얼굴은 늙고 지쳐 보이는 데다 얼굴 윤곽마저 흐릿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 두 사람의 형상입니다. 첫눈에는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뒤에서 감싸 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 달리하면, 죽은 아들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를 업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분명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부축할 수밖에 없는데, 죽은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가 자기 왼쪽 어깨에 놓인 마리아의 손을 보면서 말을 건네는 듯하고, 마리아는 아들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이는 듯 보입니다. 참 기묘합니다. 부축하는 이가 오히려 부축을 받고 위로받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와 마리아의 몸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일러주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매개가 비록 고통이기는 하여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위로를 전해주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비한 은총입니다.
피에타, 이소선
오늘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52주기입니다. 평화시장 어둡고 좁은 다락에서, 하루 16시간씩 고된 노동을 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대다수가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볕도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은 탓에, 10대임에도 불구하고 관절염과 각혈 등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대다수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이들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일터에 나왔지만, 오히려 고치지 못할 질병을 안고, 이전보다 더 무거운 가난을 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그렇게 일하다가 삶을 잃어버리는 노동자를 위해서 애쓰다 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헤아릴 수 없는 피에타-슬픔에 짓눌렸을 겁니다.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직 화기(火氣)가 있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근로자를 위하여 애쓰는 태일이의 뜻이 이 모양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기도를 마친 어머니에게,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그 말에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웬일인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답니다. 비록 아프고 슬프지만, 고통을 통해서 어머니는 아들과, 또 세상과 연결되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이 그랬을까요? 신비한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그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과 연결되고 아픔에 공감할 때에 그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우리 일상의 안온함은 깨지고, 평안 대신 한숨과 눈물이 자리하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 땅에 보냄 받은 까닭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도 고통 한복판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손과 발이 되는 은총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1) 이 단락에 있는 대화는 ‘조영래, 《전태일 평전》(돌베개), 299쪽’에서 인용.
김도영
하나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