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386호 공간 & 공감]
임인년을 보내고 계묘년을 맞이하는 요즘,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토요일 저녁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생활에 몰두하다가 (직업 특성상 주 6일 일한다.) 저녁에야 비로소 안식이 시작된다. 해가 빨리 지고 늦게 뜨는 계절 탓에 잠도, 이불 속 꾸물거림도 늘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일이 더 꿀맛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토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영화. 티브이 없이 지낸 지 5년이 넘었다. 종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일하는데, 일을 마치고 휴식하는 시간까지 영상과 화면에 붙들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좋은 영화, 재밌었던 영상을 보고 싶을 때 아껴두었다가 토요일 저녁 안식일에 입장하는 마음으로 본다. 특히,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새로운 영화가 주는 긴장감은 없지만,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영화 감상이 끝나면 찾아오는 두 번째 기대감은 교회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예배 현장에 참여하는 기쁨을 되찾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건 다섯 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엄마 증언에 따르면 옆집 아주머니 전도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교회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살 때. 초등부 언니·오빠들이 성탄절을 맞이해 뮤지컬 ‘쏠티와 함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고, 단체 동작으로 율동을 하고, 짜임새 있는 동선으로 역동적인 극을 구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부러워했다. 나도 합류하고 싶은 마음, 저 멋진 대열의 한 부분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게 어렴풋 기억난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구역예배’에 따라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구역예배는 주중에 하루, 같은 그룹원 집을 방문해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교회 문화였는데, 네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소그룹 형태의 ‘구역’은 주로 가까운 지역 거주자들과 비슷한 연령대로 구성되었다. 어른들끼리 성경을 읽고 나누는 예배가 어린 나에게 뭐 좋을 게 있을까 싶지만, 구역예배 꽃인 접대용 간식이 있었다. 사는 모습이 비슷비슷한 동네에서 대단히 특별한 간식이 나오지는 않았다.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잘 차려진, 정성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잘 깎인 과일이나 디저트용 포크 같은 것들.
안타깝게도 내가 초등부에 갔을 때 초등부는 더는 ‘쏠티와 함께’를 하지 않았다. 또 ‘구역’ 체제는 ‘목장’으로 개편되면서 주중에 집집이 서로 방문하는 모임은 사라지고 일요일 예배 사이에 잠깐 모이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했는데 한국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IMF 경제 위기, 2002년 4월 시범 시행된 주 5일 근무, 인터넷 대중화 등은 교회 안팎의 변화를 초래했다.
쏠티도 없고 구역예배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교회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초등부를 거쳐 청소년부와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교회 활동은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특히 20대 시절 모든 주말은 교회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 8시 교회학교 교사 모임과 기도회로 일요일 일정은 시작된다. 9시 청소년부 예배를 드리고, 담당한 학년의 분반 공부를 진행한다. 10시 20분 성가대 연습을 하고 11시 대예배(?)를 드리며 성가대로 봉사한다. 12시 점심을 먹고 1시에 다음 주 성가대 연습을 한다. 3시부터 청년부 예배 찬양팀 연습을 하고, 간식 등을 준비한다. 4시 청년부 예배를 드리고, 이후 청년부 조별 모임을 마친 뒤 청년부 리더 모임을 한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10시쯤. 티브이에서는 〈개그콘서트〉의 마지막 밴드 음악이 흘러나왔다. 교회에서 분명 점심을 먹었는데도 고당도, 고열량 음식으로 중간마다 피로를 해소해야만 소화 가능할 정도의 살인적인 일정. 30세가 될 때까지 주말에 데이트 한 번, 소개팅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교회 탓이다!) 이 활동을 뭐라고 명명해야 할까. 봉사, 섬김, 헌신, 사역? 그것이 무엇이든, 그 많은 일을 했던 이유 또는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교회를 좋아했던 이유.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도 지치지 않았던 이유. 지치더라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
교회에 가면 내가 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고,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았던 나는 학교에서 반장 한 번 한 적이 없었지만, 교회에서는 지도력이 있다고 인정받았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많은 질문이 허용되었다. 성경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교회에서만큼은 가감 없이 질문하고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토론 중 일어난 갈등은 은혜(?)로 어쨌든 마무리가 되니까. 그런 말들이 보상이 되어 더 열심히, 더 성실하게 활동에 참여할 수 있있던 것은 사실이다. 설령 그런 말들이 나를 더 잘 써먹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 나는 분명 교회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인정과 존중이 참 좋았다. 아는 척도 많이 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억지로 주장한 적도 있고 오류도 많고 상처도 많았던 내가, 나여도 괜찮은 공간이 교회였다.
30대가 되면서 삶의 고단함이 쌓여서였을까. 풀리지 않는 질문들 ―왜 교회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서 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는가, 왜 예쁜 친구들이 마리아 역할을 맡는가, 왜 나의 활동은 당연한데 잘나가는 친구들은 참석만으로 고마워하는가, 왜 목사님 반찬은 다섯 가지이고 우리들 반찬은 세 가지인가, 왜 장로님들은 남성이고 권사님들은 여성인가, 왜 공부 잘해서 장학금 받는 친구는 앞에서 박수를 받는가, 왜 여전도회는 모두 기혼 여성인가, 왜 가장 중요한 다음 세대는 더울 때 가장 덥고 추울 때 가장 추운 곳에서 예배드리는가― 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교회에서의 나의 활동은 서서히 소멸하였다. 그마저도 단번에 무 자르듯 된 것은 아니었고 질척거리며, 아름답게 축복과 격려를 받기보다 ‘갑자기 왜 저래’라는 시선을 받으며, 어느 것은 중단하고 어느 것은 또 지속하면서 느슨한 끈들이 뒤엉킨 것처럼 지지직거리며 점점 소멸하다가 마침내는 30년 동안 다니던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활동을 많이 하던 때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던 때도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셨다. (스스로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러셨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30대가 돼서야 주말을 되찾았다. 나보다 교회 활동을 더 많이 한 동거인은 일요일 오후 카페에 앉아 햇볕을 쐬며 책을 읽다 말고 단호한 목소리로 눈물을 약간 글썽이며 말했다.
“교회는 청년들에게 일요일 오후의 햇빛을 돌려주어야 해!”
2020년 겨울 성탄절에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전에 다니는 교회 말고 집 근처 다른 교회에 가서 성탄절 예배를 드리는데 한 시간 동안 왜 이렇게 잡생각이 나고 딴짓하고 싶은지, 집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교회에 간다. 그리고 교회 가기 전날 밤 일찍 잠들면서 교회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 좋다. 교회에, 사람들 사이에 가는 것이 좋다. (음원이 아닌)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 일이 얼마 만인지. 찬송가의 가사, 구성원의 기도, 설교자의 메시지, 심지어 광고까지도! 나의 인간됨을 되찾아주는 시간임을 충만하게 느낀다.
교회 : 예배 의식이나 그 밖의 모임을 위해 세운 건물. 또는 신자들의 공동체 (표준국어대사전)
교회는 어쩌면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대 시절 강도 높은 활동을 지속하게 해준 것도, 다시 교회가 그리워진 것도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던 교회 때문인 듯하다. 비록 사람이라서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또 실망하게 하기도 했지만, 사람들 틈 사이에서 경험했던 찐한 우정 같은 것들 (사랑이라고 하면 너무 부담스러울까) 덕분에 조금 더 좋은 인간이 되고자 애쓸 수 있었다. 엉뚱하고 날카롭고 잘난 척하고 유난스럽고 부딪히고 연약하고 아슬아슬했던 20대의 나를 뜯어고치려 하지 않고, 틀에 욱여넣지 않고, 색안경 끼지 않고 그냥 let it be 해줬던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가 그리워서 교회를 찾아갔고 다행히 그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지금 다니는 교회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내 이름, 내 나이, 내 성격 등 나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런데도 괜찮다. 속회에 가입할까? 성가대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은 나를 진정시키고 있다. 그저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용기가 생기면 사람들 사이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고 싶다.
얼마 전 성수동의 한 교회가 클럽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어떤 분들은 통탄하셨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오 굉장하군. 교회는 천장이 높은데 조명과 음향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클럽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내가 그 클럽에는 가보고 싶어졌다. 애석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경험했던 교회 때문인 것 같다. 교회는 건물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사이에, 아픔과 상처를 덮어주는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 닮기를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교회가 클럽으로, 전시 공간으로, 물류 센터로, 공연장으로, 사무실로 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은은한 빛과 소금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