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 붐

[386호 민민과 생귄의 대중문화 돌려보기]

2022-12-28     이민형

공포와 종교

종교적 신앙의 대상, 즉 신적 존재는 마냥 자애롭고, 친밀하며, 사랑스러운가? 구약성서에 기록된 ‘경외’라는 표현은 신적 존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존경심과 두려움을 하나로 묶어낸 것이다. 예수의 출현 이후, 인간의 모습을 한 신에게서 느껴지는 친밀함으로 인해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기독교인들은 두려움의 감정을 다소 잊은 듯하다. 하지만, 이는 관성에 빠진 어리석음으로 인한 망각일 뿐, 그들이 믿는 신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인간은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힌다고 이야기한다. 신을 마주한 인간은 자신의 이성이 멈추어 선 시점, 인간 역사의 필연성이 부정되는 찰나, 신적 차원의 역설이 작동하는 순간에 놓이게 되고, 실존의 자각은 이내 공포로 이어진다.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존재나 현상은 인간이 묘사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넘어서고, 자신의 한계와 위치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루돌프 오토는 종교적 의미의 성스러움, 즉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적 존재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누멘적’(numinous)이라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출애굽기에 기록된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한 사건을 예로 들며 이를 마주한 인간들은 ‘누멘적인 것’을 경험했다고 해석한다. 그들은 번개와 천둥, 불, 구름, 연기, 진동이 한데 어우러진 신의 위엄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토는 이것이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위험에 대한 경고로서의 공포가 아닌, 신적 존재의 거룩함이라는 미지의 영역에서 기인한 공포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러한 공포가 비단 기독교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성스러움과 거룩함이라는 특성이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는 한, 다양한 종교, 심지어 공인되지 않은 종교나 이성과 경험 너머에 있는 신비의 존재를 탐구하는 활동에서도 인간은 누멘적인 것으로 인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는 대중문화 역시 실존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의 공포에 관심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스릴러와 같이 인간이 공포의 주체이자 대상이 아닌, 미지의 존재가 공포의 원인으로 등장하는 장르를 가리켜 ‘오컬트’(Occult)라고 한다. 이는 ‘숨겨진’ ‘비밀의’와 같은 뜻을 가진 ‘오쿨투스’(occultus)라는 라틴어에서 기인한 말로 이성적 사고나 과학적 추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특별히 오컬트 장르라고 하면 주술이나 점성술, 예언이나 악령, 빙의와 축사 등과 같이 신비하고, 종교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상황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나 소설 등을 말한다. 장르 구분상으로는 호러의 하위일 수 있으나, 오컬트 장르물이 다루는 주제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종종 호러 장르와 구별되지 않고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들어 심령물들을 중심으로 오컬트 장르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공포영화와의 구분을 위해 ‘괴기영화’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오컬트 장르?

오컬트 장르물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1973년에 제작된 영화 〈엑소시스트〉이다. 소녀의 몸에 빙의된 악령과 예수회 소속 구마 사제들의 대결을 그린 이 작품은 사람들의 상식을 넘어선 이미지 연출과 역동적인 특수 효과를 통해 악령과의 조우를 매우 섬뜩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악령이 빙의된 소녀의 모습과 행동은 영화 안에서뿐 아니라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도 미지의 존재를 마주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개봉 당시에는 관객 중 일부가 졸도하는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오컬트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낸 매우 낯선 종류의 공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괴한 연출로 인해 극대화되어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갔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포영화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비단 영화적 연출이 준 충격 때문만은 아니다. 공포영화를 제작하고 연구하는 이들은 이 영화가 당시 서구 사회에 만연했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서구의 중심에서 발발한 두 차례 세계 전쟁 이후 찾아온 냉전 시대, 그리고 그 갈등이 터진 베트남전쟁을 목도한 서구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믿어왔던 근대사상과 가치의 허무함을 적나라하게 경험했다. 지나치게 높아진 사회적 불안감은 자신들의 종교적 배경이었던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불신으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에 들어 기독교의 종교적 방편이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여긴 이들을 중심으로 신비주의 사상이나 동양의 사상이 접목된 컬트 종교에 관심을 두는 일명 ‘뉴에이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구 사회를 지켜오던 가치들 ―종교, 이성, 과학 등― 이 붕괴한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두려움과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의 시선을 〈엑소시스트〉가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다. (사실 서구 오컬트 장르는 지금까지도 〈엑소시스트〉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문명에 대한 회의, 세속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부재하다는 자각, 나약한 인간을 위협하는 인지 영역 밖의 존재들이라는 공식을 지속해서 유지해왔다.)

〈엑소시스트〉 스틸컷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구 대중문화 관점을 차용한 우리나라 대중문화였다. 〈엑소시스트〉가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후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너 또한 별이 되어〉 같은 오컬트 영화는 대부분 〈엑소시스트〉의 서사나 연출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전까지의 한국 오컬트물이라 불릴 만한 ‘귀신영화’와는 맥을 달리하는 흐름이었다. 한국의 오컬트는 ‘처녀 귀신’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의 한 맺힌 원혼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서양의 악령과 달리 우리나라 오컬트물에 등장하는 공포의 대상은 사연이 있는 존재들이었고, 그 사연 때문에 원귀가 되었으나 해원하고 나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무속과 같은 전통적인 종교의 힘이 대항마로 등장하곤 하지만, 이들은 원귀와 대결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을 알아내고, 그들이 한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엑소시스트〉 이후 한국 오컬트 장르의 서사가 변한다. 원한을 가진 귀신이 등장하는 대신 이유를 알 수 없는 빙의 현상이 일어나고, 인간은 (유사)과학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대항한다. 기독교가 종교적 배경이 아닌 한국 사회이기에 당시만 해도 악령에 대항하는 구마 사제들이 직접 등장하는 연출은 없었지만, ‘심령학자’의 등장, 그리고 인간과 원령의 대결 구도는 이전까지의 한국 오컬트물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학자들은 이 역시 당시 한국 사회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한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에 힘입은 과학적 사고와 기술의 발전은 이전까지 전통적 해석에 의존해왔던 한국 사회의 면면에 일대 개혁을 일으켰고, 그것이 초자연적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다. 서구 오컬트물이 과학적 사고의 한계, 제도화된 종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면, 한국 오컬트물은,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오컬트물을 오마주한 한국 오컬트물은 서구 사회의 근대적 사고와 과학적 합리성을 향한 동경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한국 오컬트물은 초자연적 현상이 주는 공포보다는 인간이 이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근대화와 산업화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990년대에 들어 한국 전통 오컬트물의 서사가 부활한다. 1990년대 말 개봉한 〈여고괴담〉의 흥행 이후 매년 여름마다 관객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귀신 이야기’는 과학적 접근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해석하려 했던 1970년대 오컬트물의 사고방식을 부정했다. 어쩌면 밀레니엄을 앞둔 사람들의 불안감, 즉 자신들이 일구어놓은 기술 집약적 사회가 프로그램 오류로 인해 붕괴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의 관심을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회귀시켰는지도 모른다. 당시 종말론적 신앙에 집착하게 된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1990년대 말 한국 오컬트물은 분명 그러한 현상 이면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불안감을 형상화한 영화 속의 초자연적 현상은 결코 인간이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역할은 다시 해원으로, 아니면 철저한 희생양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밀레니얼 괴담 중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게 되자 불안감이 팽배하던 한국 사회는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이후 디지털 기술을 토대로 한 사회의 진일보로 인해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근대정신의 절정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세상이 무너질 것이라 여겼던 밀레니얼 버그를 허망할 정도로 무효화시킨 인간의 기술이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디지털 기기까지 개발했으니, 인간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무한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테다. 어찌 되었건 인류 발전의 유산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초자연적 현상이나 신적 존재의 위엄은 또다시 그들에게 위협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의 것들이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 서사를 펼치는) 오컬트물의 인기는 다시금 시들해갔다. 여전히 〈여고괴담〉 유의 공포영화가 여름마다 개봉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보내는 관심은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

Y2K보다 더 불안한 2015년?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던 2015년쯤, 한동안 잠잠했던 오컬트물들이 다시 한국 대중문화계에 등장했다. 시작은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이었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했던 〈엑소시스트〉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서구 오컬트물 서사를 이어간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의 등장, 악령에 빙의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구하고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싸우는 구마 사제들.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 오컬트물의 흐름으로 보자면 전통(1970년대 이전)-서구(1970년대)-전통(1990년대), 그리고 다시 서구적 오컬트 서사로 돌아온 셈이다.

〈검은 사제들〉 스틸컷

그 무렵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오컬트 장르는 〈여고괴담〉 이후 최고 전성기를 누리며, 관객들 사이에서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인기를 얻었다. 극장에서는 〈검은 사제들〉 이후로 〈곡성〉 〈사바하〉 〈사자〉 〈변신〉 〈클로젯〉과 같은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하였다. TV에서 방영된 드라마는 〈구해줘〉를 필두로 〈손 더 게스트〉 〈프리스트〉 〈프리스트〉 〈빙의〉와 같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제작되었다. 이들 영화와 드라마는 모두 근대적 산물의 한계를 느낀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감을 초자연적인 현상을 마주한 주인공들로 형상화한 서구 오컬트물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종교의 힘뿐 아니라 의학, 법학, 과학, 심지어는 무속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악령에게 대항한다는 점에서 오컬트 장르의 확장과 혼종을 이루어냈다. 비록 모든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지는 않았으나,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이전과는 다른 관점을 담은 오컬트물들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분명 한국 사회에 또 다른 불안의 기운이 감지되었다는 의미였다.

매해 기술의 정점이 갱신되던 시대,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 개발로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던 시대, 원하는 만큼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이든 탐색이 가능해져서 세계관이 무한대로 확장된 시대, 그만큼 인문학적 관점이 중요해지고, 이성과 도덕성의 함양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에 살던 인간들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자신들이 만들어낸 유산을 들고 싸울 의지조차 잃어버린 채 또다시 초월적인 힘의 개입만을 기대하는 존재로 낮추었는가? 당시 사람들이 인류적 열패감을 느낀 이유야 다양했겠지만, 모든 이유를 하나로 압축하여 듣는 이들을 단번에 납득시킨 표현이 그즈음 한국 사회 전반에 퍼졌으니, 그것이 바로 ‘헬조선’이었다. 말 그대로 지옥에서나 경험할 법한 고통이 사회 전반에 가득해, 한국 자체가 지옥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표현은 2014년쯤 온라인을 중심으로 널리 퍼진 유행어였다.

2014년, 인간이 만든 제도의 부패와 부정으로 인해 수많은 어린 생명을 잃어야만 했던 세월호 사건을 기점으로 이 사회에 만연해진 불안감은 지속해서 악화하는 청년 경제 실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부와 고위 관료들,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불균형과 불평등으로 인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시를 살아가던 청년들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으로 자신을 재단하는 ‘수저론’에 얽매였고, 연애, 결혼, 출산 등 세 가지를 포기하던 ‘3포 세대’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N포’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그들에게 열정과 노(오)력만을 권장했으며, 그들의 아픔은 그 나이 때 겪어야 하는 성장통과 같다는 식의 위로만을 전달했다. 그들은 이 사회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현실은 그저 ‘더 나은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닌 ‘이보다 더 못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로 인지되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포는 지옥에서 온 무언가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지옥 그 자체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찾아온다.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절망과 고통과 위협이었던 그들에게 값싼 지식과 허망한 연대, 알량한 기술은 모두 무의미했다. 공포와 불안을 해결해줄 어떤 것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초월적인 힘으로 눈을 돌렸다. 2015년 전후로 한국 대중문화계에 일어난 오컬트 붐은 이러한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그중에서도 청년세대의 공포와 불안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시대를 살아가던 청년들에게 자신을 구원할 힘은 없었다.

〈사바하〉, 〈지옥〉 그리고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더욱 안타까웠던 점은 종교가, 특히나 개신교가 그들에게 어떤 희망도 줄 수 없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오컬트물이 바로 〈사바하〉이다. (〈사바하〉는 〈검은 사제들〉을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작품이다. 같은 장르의 작품을 제작하였음에도 서사와 톤이 바뀐 점을 보면 두 작품 사이의 시간 동안 한국 사회의 불안감과 공포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바하〉 주인공인 박웅재 목사는 극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목사임에도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그 믿음에 근거한 힘을 갖지 못한 인물이다. 합리적 추론과 눈에 보이는 증거에만 집착하는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모순적인 모습에 스스로 신앙을 저버렸음을 고백한다. 그는 영화 속 사건 ―초월적 존재들의 비이성적 행태와 이를 추종하는 이들의 악행― 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진 채, 자신의 무력함만을 드러내는 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영화 속 인물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절망적인 상황으로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개신교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늘날 갈수록 줄어드는 청년 기독교인의 수는 그들의 부족한 신앙을 드러내는 지표가 아니라 개신교라는 종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지옥이라면, 그 반대 세상, 즉 천국의 완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개신교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천국을 만들어 나가기는커녕 당장 청년들이 안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할 방편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종교, 그저 현실적인 조언만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종교로서의 개신교는 지옥 속에서 사는 누구에게도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현실을 이겨내는 신적 존재의 신비한 힘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청년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고, 그것이 〈사바하〉와 같은 당시의 오컬트물에 그대로 투영된 셈이다.

결국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처할 어떤 능력도 갖추지 못한 종교는 총체적 혼란에 빠질 뿐이다. 2021년에 방영된 〈지옥〉은 지옥에 사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그저 무용한 습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가장 잘 서술한 작품이다. 〈지옥〉은 서사의 기본 틀을 기독교에서 가져왔음에도 철저하게 제도 종교를 분해하는 해체주의적 태도를 지향한다. 어느 날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얼굴이 나타나고, 그 얼굴은 사람들에게 죽을 시간을 고지한다. 고지를 받은 사람은 고지받은 사망일에 괴물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한다. 죽음의 이유는 알 수 없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도 공통점이 없다. 그것은 심판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다. 그저 인간보다 강한 능력을 갖춘 존재들이 즐기는 제비뽑기식 살해에 불과하다.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종교는 이러한 현상을 해석할 수 없다. 대항할 수도 없다. 그래서 침묵한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모두 이 작품에서는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도 그들을 찾지 않는다.

오컬트물이 묘사하고자 하는 공포의 원인이 초월적인 존재나 현상이라면, 이는 인간의 논리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 맞다. 인간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전부이겠지만, 그런데도 서구식 오컬트물이 희망적이었던 이유는 인간이 종교적 혹은 신비주의적 힘에 의지해 불안과 공포의 대상을 이겨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장면이 연출되지 않는다. 나름의 일관된 세계관이나 논리가 깨져버린 이상, 종교는 그 기능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용해왔던 기도문이나 상징물, 특별한 도구나 부적 등이 모두 무용하다면, 종교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상황의 해석에 근거한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종교에 절망한 인간의 가슴에 파고드는 것은 그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사이비일 뿐이다.

2014년을 기점으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맞닥뜨린 현실이 이와 같다. 과연 종교가 그들에게 어떤 힘이 되었던가? 종교인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격다짐으로 이해시키려다 보니 말도 안 되는 해석만이 난무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과연 무슨 힘을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허무맹랑한 소리로 인해 상처받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기며 그 시간을 버텨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어쩌면 종교가 무용해진, 그것이 가진 신비한 힘을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이 상황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공포가 아닐까? 모두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나날이 절망에 빠져 살아갈 뿐, 어떤 희망이나 힘을 찾지 못하는 이 상황이 진정 오컬트일지도 모르겠다.

민민의 한마디

민민님, 이번 오컬트에 관한 글은 흥미진진 그 자체였습니다. 오컬트 장르의 역사와 흐름을 한눈에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또 한국에서 어떻게 차용되는지와 사회학적 해석까지 풀어내주셔서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기독교 대중잡지에서 만난 오컬트 이야기가 낯설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 경험 속에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외’가 어느샌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세련되고 부드러운 메시지가 많은 사람에게 거부감보다 친근한 이미지로, 위로와 희망이 되어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련됨이 현실의 냉혹함과 처절함을 오롯이 담아내기엔 부족해 보일 때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이불 속에 숨어서 보던 〈전설의 고향〉은 단지 무서운 괴담만은 아니었어요. 우리 민족의 한(恨)과 설움이 담긴 이야기였고 힘든 시절을 이겨내기 위한 아우성이었습니다. 민민님 표현처럼, 최근 다시 등장한 오컬트 영화들이 단지 한 장르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고단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니 씁쓸한 마음마저 듭니다.

최근 가슴 아픈 사건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젠 정말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놀랍고 두려운’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민민님, 이번 글은 분명 기독교 잡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오컬트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오히려 어느 때보다 은혜로운(?) 것 같습니다.

이민형(민민)
중학생 시절, ‘낮은울타리’의 ‘반-대중문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그동안 듣던 팝송 테이프들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이것이 맞는 선택인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직접 공부해서 밝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 대학에서 브라이언 스톤 교수를 만났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화와 신학을 연구할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말에 박사학위까지 지원해, 결국 한국교회가 대중문화를 유용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에서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중문화, 미디어, 기독교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