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더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다

[386호 나의 최애들]

2022-12-28     박혜은

누군가는 ‘나의 최애들’이라는 이 연재를 일종의 ‘작가론’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떤 ‘론(論)’을 쓰고자 이 글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론’이 되었을지라도 이 글은 그저 울분 섞인 질문에서 시작한 책 읽기가 2020년대라는 시대를 만나 빚어진 아웃풋 정도로 보면 적당하겠다. 그래서 이 연재는 어느 한 시기의 나와 책 사이에 이루어진 ‘케미의 기록’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 ‘케미’를 ‘화학작용’이라 쓸 수도 있겠지만 굳이 ‘케미’라 칭하고 싶다. 그래야 나와 책 혹은 작가 사이에 일어난 격정의 시간이 정확히 표현될 것 같아서다.

그 ‘케미의 기록’을 오늘 글로 일단락하려 한다. 이제 화는 충분히 낸 것 같으므로(물론 내일 또 화날 것 같지만). 일단락의 순간에 나의 최애로 선택한 작가는 마지막 글에 꽤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이 작가는 내 대학 생활 마지막에 흔히 ‘진로’라는 것을 선택할 때 결정적 영향을 끼친 작가이자, 삶의 모퉁이마다 어디로 꺾어져 들어가야 할지 조곤조곤 일러주는 안내자였으니까. 그는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다.

아래로 내려가기

지금까지 한국 작가들만 다루다가 연재 마지막 글에 갑자기 외국 작가를 이야기하는 게 어색하기도 하지만 헨리 나우웬은 왠지 한국 작가급으로 친근하다(기독교 출판계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만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접근성 때문인지 그의 책에서 때마다 소소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한국 기독교 출판계는 독자에게 ‘헨세권’(헨리 나우웬에게 접근할 수 있는 독자의 선택권)을 제공했다고나 할까. 물론 아무리 가까이 있는 작가여도 모두 나와 케미가 맞았던 것은 아니므로, ‘헨세권’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함이 헨리 나우웬에게 있다.

권정생 작가가 내게 ‘주변부’라는 삶의 자리를 보여주었다면 나우웬은 ‘아래’라는 삶의 방향성을 꾸준히 속삭여줬다. 삶의 자리를 경계 바깥으로 정하는 문제만큼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하는 일은, 삶의 어느 순간에나 중요한 문제였다.

가령, 한국에서 여성으로 나이 드는 일은 아래로 내려가는 삶의 좋은(?) 예다. 그 일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난 케이크와 내 가치가 비교되는 모욕을 견뎌야 하는 일이며, 여자 나이 몇이면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상품화 발언을 공공의 자리에서 듣게 되는 치욕 또한 버텨야 하는 기나긴 시험의 연속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그냥 한 해 한 해 인간성을 배양하며 살았을 뿐인데 그리스도의 하향성의 길을 온몸으로 배울 기회를 얻어버렸다.

그렇게 나이 들어가며 나는 여느 때와 같이 홀로 조용히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았다. 3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누가복음을 펴고 마리아 찬가를 묵상하며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실 메시아를 높이는 마리아와 함께 이제 시원하게 내려갈 일만 남은 내 삶의 내리막을 경축했다. 진심이었다. 이 무슨 《아큐정전》의 아큐 같은 정신 승리인가 싶겠지만 하향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내 안에 훈련된 영성이었다.

그 영성의 시작은 대학생 때 참여했던 2002 선교한국(글을 쓰는 2022년 12월 현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2002년은 여러모로 역사적인 해였다. 그해에 ‘꿈은 이루어진다’고 배웠는데, 20년이 지나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좀 더 희망적인 가르침을 얻었다)에서 소책자로 먼저 만났던 헨리 나우웬의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읽으면서부터다. (그때 참가자들에게 소책자 형태로 나눠주었던 짧은 글을 다음 해 IVP에서 약 8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출간했으며 2020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이 얇은 책을 읽고 나는 빨간 약을 삼킨 것처럼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내 삶의 방향을 가늠해야만 했다. 권력과 성공을 지향하는 넓은 길로 갈 것인가, 유혹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하향성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강렬한 도전이었다.

십자가의 길, 즉 하나님의 하향성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아있는 그리스도들로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의 길이 된다. 영적인 삶은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삶이다. 이 삶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사로잡힌 가운데 자유롭게, 고통 가운데 즐겁게, 가난한 가운데 부요하게 해준다. 또한 상향성의 사회 한가운데 살면서도 구원에 이르는 낮아지는 길을 가게 해준다.
―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2003), 32쪽.

다시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이제 막 진로를 결정해야 했던 대학 4학년생이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어떠했겠는가. 그동안 헨리 나우웬이 어떤 인물을 이야기했고(《아담》), 어떤 삶을 살았으며(《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상처입은 치유자》), 어떤 영성을 추구했는지(《마음의 길》·《영적 발돋움》) 오랫동안 귀 기울여온 나는 이 책을 만나며 내 삶의 초점이 한곳으로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피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단 하나의 길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라 걸어가게 된 길이었다.

헨리 나우웬(1932-1996).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죠이 스피릿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 같은 책, 21쪽.

이 말씀을 기본 정신으로 삼은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사람으로, 대학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구절 중 하나인 빌립보서 말씀을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다시 읽으니 더 강력했다. 그러고 보면 난 이 정신이 알알이 채워진 그 작은 선교단체의 안쪽에서 대학 시절 내내 잇대어 살았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헨리 나우웬이 하향성이라는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쓴 책을 만나기 전에 이미 몸으로 그 정신을 보고 배우고 있었다는 의미다.

복음주의권에서 알아주는(?) 규모와 색깔을 가진 단체는 아니었지만, 한양대 죠이 공동체에서 만난 간사님과 선후배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배우고 경험한 일들은 너무도 독창적이고 놀라운 것들이어서 오로지 뛰어난 감독이 만든 영화 혹은 사회문화적 감수성이 충만한 시인이 쓴 긴 서사시로만 표현될 수 있으리라. 작아서, 그리고 어떤 이의 입장에서는 평가할 만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아서 진가가 가려진 공동체였다.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한 교수님께 들은 잊을 수 없는 명언(!)이 생각난다.

“어떻게 죠이 출신이 이런 논문을 썼지?”

“????????????????????”

거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급 멘트였는데 이 말이 칭찬인지, 멕이는 건지 당시에는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에는 진실이 숨어있었다. 풀어 해석하면, 보수적인 선교단체에서 간사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권정생을 연구 주제로 선택했느냐는 의미겠지만, 그건 죠이가 작고 느슨한 공동체여서 얼마든지 다양한 변종을 배출해낼 수 있는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한 ‘중심’의 시각이자 일반화에 익숙한 권력자의 시각이었다. 그 관점을 뒤집으면 정확히 진실에 가닿는다. 죠이 출신이어서 이런 논문을 썼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책은 내가 대학 생활 내내 배우고 익혔던 그리스도의 세계를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로 응축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아직까지는 몸소 체험하며 기쁨을 누렸던 ‘죠이’라는 그 작고 낮은 세계를 표현해줄 뛰어난 영화감독과 시인을 만나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나우웬은 영성의 언어로서, 대학 시절 내 삶을 이끌어준 사람과 공동체를 가장 잘 표현해준 영화감독이자 시인으로서 나의 최애로 남아있는 것만 같다.

가까이 있던 헨리 나우웬들

잘 생각해보니 내게 헨리 나우웬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던 한양 죠이 담당 간사님이었다. 지금은 멀리 캐나다에 계셔서 자주 안부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스승의날’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그때 우리 간사님이다. 간사님 때문에 헨리 나우웬을 따라 읽기 시작했고, 간사님으로부터 책을 사랑하는 마음과 말씀을 생생하게 읽는 태도를 배웠다. 간사님에게서 공동체의 ‘아담’을 발견하는 관점을 훈련받았고, 서로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방식을 배웠다. 그리고 한양 죠이 선배들이 읽고 동아리방 책장에 꽂아두었던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고 나와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는 ‘영적 발돋움’을 이루어나갔다.

그러고 보면, 헨리 나우웬은 나의 최애일 뿐 아니라 그 시절 우리의 최애였고, 헨리 나우웬이 그토록 친근했던 것은 ‘헨세권’ 때문이 아니라 그와 닮은 영성가들이 내 주위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헨리 나우웬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있는 이유는, 그리고 여전히 그의 책을 읽고 그를 따라 영혼의 투쟁을 하고 싶은 열정이 불타오르는 이유는 가까이 있던 그 시절의 헨리 나우웬들 덕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일한 이야기이다. 바로 이 이야기로부터 다른 모든 이야기가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 같은 책, 64쪽.

세상의 길로 갈 것인가, 그리스도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강렬한 도전은 비단 진로를 결정하던 시기에만 유효한 질문은 아니다. 이 질문을 ‘진로’를 택하는 데 적용했던 시절은 오히려 모든 게 비교적 명료했던 단순한 시절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한 이 질문은 이제 매일의 사소한 순간에 혹은 복잡한 권력과 이해관계 속에서 더 강렬해진다. 그리고 확신하게 된다. 어디서 무엇을 선택하든, 내려가는 방향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길이라는 것을. 해가 바뀌고 더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다.

■ ‘나의 최애들’은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박혜은
단 한 번도 책 그만 사라고 말씀하신 적 없는 부모님 덕에 몇천 권의 반려책과 올림픽공원 옆에 거주한다. 사무실 내 책상 주변으로 책더미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걸 장려하는 일터에서 십만여 권의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강 옆에서 책을 고르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