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의 종말 앞에서 ― 떼제 공동체와 라브리 선교회

[386호 수도회, 길을 묻다]

2022-12-28     최종원

저항하는 부조리 인간

양차 대전은 근대 세계에서 과학과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헛된 환상이었음을 드러낸 암울한 사건이다. 인류가 공통으로 향유할 수 있는 객관적 가치와 본질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기존의 사유에 깊은 의문을 제기했다. 고대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것이 때로 신과 섭리를 중심에 두었던 사고 체계에 균열을 가져왔지만, 그 체계가 절대정신이나 이성으로 대체될지언정 본질에 대한 천착은 포기하지 않았다. 단순화해 표현하자면, 신의 대체재는 이성 혹은 과학이었다.

그러나 이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상이 등장한다. 실존주의는 공통으로 사유하는 본질이 아닌 개별 존재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 등장은 단순히 그리스도교나 신에 대한 반발 수준을 넘어선다. 때로는 신의 이름으로 때로는 이성의 이름으로 근대 세계에 굳건히 자리 잡았던 합리성과 합목적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전면적 재고였다. 인간과 세계는 완성태로 향해 나아갈 수 없고 불안정하며 가변적이라는 점이 전제된다.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기존 틀을 넘어 인간과 사회가 가진 우연성, 가변성, 불합리성에 주목했다. 존재의 본질을 찾는 시도는 끊어져버린다. 인간은 이 세계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 따라서 불안이라는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어쩌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철학은 이 불안과 우연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신 존재의 정당성을 추구해왔는지 모른다. 심지어 실존주의 철학 안에도 본질이 배제된 현실의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신을 소환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존재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이건 유신론적 실존주의이건, 실존주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서 경험한 실존적 고민에 대응하는 체계이다. 고민의 배경에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와 과학주의가 약속한 미래에 대한 낙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들이 존재한다. 프랑스혁명이 상징하는 근대 세계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세운 혁명의 피비린내와 더불어 유럽 열강은 그 가치와 배치되는 호고(好古)적 낭만주의에 기반한 제국의 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신을 배제한 윤리는 제국의 윤리였고, 그들이 추구한 보편주의는 유럽의 보편주의였다. 유럽이 사회·정치·경제·문화적 자신감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한껏 치켜세운 ‘벨 에포크’나 ‘빅토리아시대’는 그 외 지역이 제국주의 침탈로 점철된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 이 낭만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의 욕심이 야기한 제1차 세계대전, 미국의 대공황, 그 혼란한 틈을 탄 독일 나치즘을 위시한 전체주의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인류의 진보를 약속했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는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부조리한 시대였다. 진보라는 약속이 너무 달콤했기에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한계는 더욱 컸다.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는 이성과 합리로 풀어낼 수 없는 사회 그 자체를 부조리로 규정했다. 유한한 미완의 존재인 인간이 본질이라는 이데아를 추구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의 한계가 명확하다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흐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불완전한 세계 자체는 열려있는 곳이고, 그 안의 존재는 구속되지 않는 자기 결정권을 가진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이 본질추구와 무관하게, 부조리한 세계라는 현재 상태(status quo)에서 길을 모색하는 힘이 된다. 그 안에서 카뮈가 제창한 ‘부조리 인간’(l'homme absurde)이 탄생한다. 부조리 인간은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냉소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부조리한 세계를 의식적으로 저항하며 살아가는 깨어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부조리한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낸 현실은 부조리한 세상을 성찰하며 극복해나가는 개인을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주체적 삶을 위한 선택이자 적극적인 저항의 한 형태이다.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근대 세계의 종말을 가져온 부조리한 현실에서 그리스도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 긍정과 성찰 없는 진보의 폭주 앞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근대가 쌓은 과학기술은 단기간에 6백만 명을 학살하는 데 부역했고, 원자폭탄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내린 징벌이었다.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지, 종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비판이 제기된다. 교회는 실존하는 고통에 참여할 능동적 의지를 상실하고 추상적인 본질에 천착했다. 가톨릭교회는 19세기 후반 들어 교황 무오류설, 마리아 무흠잉태설, 마리아 승천설 등과 같은 근원적인 교리를 제정하여 교회를 지키려는 시대착오적 움직임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보인 행태도 충격적이다. 독일 루터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적극 동조했고, 가톨릭교회는 홀로코스트 속에서 중립을 내세우며 철저히 침묵했다.

기성종교는 부조리극의 어설픈 조연 역할에 매우 충실했다. 제도교회는 현실을 읽어내고 싸워나갈 힘을 갖지 못한 채 천상의 신비와 추상의 본질에만 매달렸다. 실존적인 고민을 나누고 질문하며 길을 모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교회에 남느냐, 교회를 떠나느냐의 물음으로 귀결하기에는 층위가 한껏 복잡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늘 그래왔듯 제도교회가 마주한 한계를 넘어설, 제도 바깥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흐름이 요구되었다. 길게 돌아왔지만 근대성의 종말 앞에서 생성된 근대 수도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를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그리스도교 체계는 어떤 철학보다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원형과 본질을 추구한다. 그 본질은 이 땅의 가시적인 제도교회를 통해 구현된다는 전통적인 신뢰가 있었다. 그러나 기성 그리스도교가 제공한 완성태로서의 교리나 가르침, 신앙의 실천 등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유의미하게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맞았다. 본질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관념 속에서 합의했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니, 차이가 없으면 안 되었다. 전체주의 세계에 저항하지 못하고 인류의 참상에 눈감은 종교를 신의 본질을 대리하는 종교라 지칭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 공동체는 완성태인 기성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포장해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본질주의를 향한 천착보다는 오히려 유신론적 가치를 매개로 실존의 고민을 풀어나가려는 시도에 가깝다. 제도나 권위에 의해 동원되지 않고 아래로부터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위한 선택을 지지한다. 근대성이 무너진 정신적 공황의 한복판인 유럽에서 부조리한 삶에 회의하고 절망하는 전후 젊은이들이 저항할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왔다. 유신론이라는 매개를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어떤 전제도 없이 치열하게 기도하고 찬양하고 읽고 논쟁하며 신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떼제 공동체와 화해

매년 프랑스 시골의 떼제(Taizé)라는 작은 마을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세계 전역에서 온 젊은이들이 모여 며칠 동안 함께 살며 기도하고 찬양한다. 그리고 흩어진다. 전통적인 수도 공동체처럼 모이는 공동체가 중심이기보다는, 잠시 들렀다 흩어지는 개별 순례자들이 더 주목을 받는 공동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프랑스 개신교 수도사 로제(Roger Schütz) 수사가 이곳에 정착했다. 1940년에 공식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공동체는 처음 몇 해 동안은 주로 유대인 난민들을 위한 피난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몇몇 젊은이들이 합류하여 현재와 같은 수도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부를 거절하고 자급자족을 실천하며 수도회 밖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교파를 넘는 에큐메니컬 수도회를 발전시켰다. 무엇보다도 젊은이에게 인기가 있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방문하는 순례객을 수용하고 공동체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 1962년 설립되어 ‘화해의 교회’라고 명명된 이 교회는 그 후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교회 뒤 담장을 허물고 확장했다.

로제 수사(1915-2005).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람들은 대부분 일요일에 도착해 일주일 동안 머문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하며 신을 찾기 위해 떼제로 간다. 떼제 공동체에 거주하는 수사들은 25개국 이상의 국가로부터 왔으며 가톨릭과 다양한 개신교 배경을 갖고 있다. 그들은 찾아온 방문객들을 소그룹을 통해 만나며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질문한다. 공동 기도 외에도 신앙·정치·사회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워크숍을 통해 교제한다. 신과의 교감만이 아니라, 동시대 다른 공동체와의 교감을 강조한다. 서로 질문하고 함께 답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영혼의 치유와 평화를 경험한다.

참가자 개인들은 찬양과 기도 시간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신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러나 떼제가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평화에 머물지 않는다. 떼제 정신은 ‘화해’(reconciliation)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1) 화해는 상호적이어야 하며, 평화의 부재 즉 불화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다. 평화의 부재는 전쟁을 통해 세계가 경험했던 부조리에서 도드라진다. 그리스도교와 사회 사이에도 불화가 존재한다. 세속 사회와 세속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달하는 일도 큰 숙제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교리나 교단의 차이로 인한 배타성이 소모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 간 화해와 일치가 공동체의 중요한 가치이다. 로제 수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말씀을 듣고 침묵하며 찬양을 통해 신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는 정신이 싹트고 화해가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교파 간 화해, 에큐메니컬 정신이 떼제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교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를 특징적으로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동방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지난한 박해 시기를 인내할 수 있었고, 그들이 담아냈던 수도회주의는 관상의 전통을 서구에 전달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와 사회 문화 사이 친교의 보편성을 천 년 이상 가시적으로 구현해온 장점이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말씀을 듣고 삶에서 실천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교파 외에도 서로 다른 대륙 간 그리스도교 교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재와 다양성을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일어나는 화해의 실천은 그들이 속한 사회와의 화해를 향한 결심으로 이어진다. 신뢰와 화해를 촉진하기 위해 떼제 공동체는 매해 지구 공동체를 위한 신뢰의 순례를 한다. 매년 여러 대륙에서 온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이 순례에 참여해 사람들 사이 화해와 평화, 그리스도 복음의 전달자 역할을 수행한다.

대개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공동체 설립자와 동일시된다. 이 점에서 떼제 공동체는 예외적이다. 공동체를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인류를 위한 헌신을 촉구해 정신적 영향을 끼치고 영성과 기도에 대한 저술을 통해 대중과 연결돼 있었지만, 그는 좀체 미디어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5년 8월 16일, 저녁 기도 중 정신질환을 앓던 한 여인이 찌른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사후에도 공동체는 같은 가치를 지키며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다.

프랜시스 쉐퍼와 스위스 라브리

라브리 선교회(L'Abri Fellowship)는 미국 출신 신학자인 프랜시스 쉐퍼와 아내 이디스 쉐퍼가 1955년 프랑스어권인 스위스 알프스의 우에모에서 시작한 공동체이다. 라브리는 프랑스어로 ‘피난처’를 뜻한다. 떼제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공동체는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열린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답을 추구하고 예배하며 쉼과 노동을 하는 현대적 수도 공동체이다. 라브리는 신앙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대하고 함께 토론하는 문화를 형성해왔다. 실존의 물음을 풀어가는 데 떼제 공동체가 주정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면, 라브리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이다. 설립자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 역사, 정치를 인식하고 분석·비판하여 그리스도교의 실재를 변증하는 데 주력했다. 종교에 관한 어떤 질문도 이성적 토론의 대상이 된다고 믿었던 만큼, 라브리는 질문하는 데 안전한 공간을 제공했다. 쉐퍼 박사는 자신의 세계관을 토대로 한 광범위한 저술 활동을 통해 라브리를 알려왔으며, 그의 강의 테이프 역시 라브리의 지향과 정체성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설립 이듬해 스위스 라브리에 많은 방문객이 찾기 시작하면서, 라브리는 내부적으로 개신교 수도회라 불러도 될 만한 독자적 틀을 갖추게 되었다. 몇 채의 건물은 라브리에 상주하며 의사 결정을 내리는 리더, 방문객들을 접대하고 그들과 토론하는 간사들, 일정 기간 머물며 학습과 노동에 참여하는 방문객들과 단기 방문객들이 이용한다.

쉐퍼 박사(1912-1984). (출처: 플리커)

라브리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라는 지향에서 보듯, 라브리의 존재 목적은 인생과 신앙에 대한 고민을 갖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인격적이고 무한하며 실재하는 절대자 안에서 해답을 찾도록 하는 데 있다. 여타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라브리는 기도와 노동과 학습의 체계로 구성된다. 정해진 수업 과정은 없다. 녹음된 강연 테이프를 들으며 라브리에서 상주하는 구성원들과 정기적으로 토론하며 보낸다. 노동하는 시간에는 요리, 청소, 유지 보수 등과 같은 일을 돕는다. 쉐퍼 박사는 그리스도교와 일상의 삶을 통합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합리성과 정합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복음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영역을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는 대화 상대가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분명하다. 일련의 저술을 통해 제시한 쉐퍼 박사의 해답은 여전히 근대적이고 본질적인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변증하고 옹호하는 색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라브리를 통해 쉐퍼 박사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나 스위스 라브리 이후 쉐퍼 박사의 인맥은 정치적으로 우파, 신학적으로 보수 근본주의에 머물렀다. 라브리가 에큐메니컬 정신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거칠게 표현하면, 라브리는 시대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질문이 달라지고 고민이 중층화된 시대에서도 여전히 쉐퍼 박사가 제시한 세계관에 기반한 답변 이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수도회에 지속성의 짐까지 지우는 일은 부당하다. 프랜시스 쉐퍼 박사가 남긴 라브리의 유산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 세계에 복음의 정합성을 여전히 그리고 통합적으로 변증해냈다는 데 있다. 이 운동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동일한 근대적 명제를 붙들고 교회 밖에서 성장해 기성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긴장을 주었던 개신교 학생 지성 운동 등이 라브리의 유산이라고 하는 설명은 과장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를 보아도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대부분의 복음주의 캠퍼스 선교단체들이 결성되어 성경공부와 소그룹 및 소책자 운동을 통해 통합된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해왔다. 그 형성과 발전기에 프랜시스 쉐퍼 박사와 라브리가 수행한 사상적 구심점 역할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이는 적어도 개신교에는 긴장을 주었다. 그러나 동일하게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보수, 근본적인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쉐퍼 유산의 일부이다. 더 나아가 세계를 인식하는 그의 인식론이 갖는 한계는 그에게 영향받은 보수 개신교계의 한계로 자리매김했다.

근대성의 종말 앞에서 실존의 고민을 마주했지만, 라브리가 제시한 해답은 다시 근대성을 붙드는 것으로 회귀하는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적으로 공동화된 유럽 사회의 질문을 쉐퍼 박사가 진지하게 마주했지만, 그 역시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라브리 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지적 유산이 유의미하게 인용되지 못하는 것은, 라브리가 프랜시스 쉐퍼라는 설립자를 넘어 지속할 독자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신수도회주의

떼제 공동체나 라브리 선교회의 역할과 성과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부조리를 넘을 만한 흐름이 생성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떼제 공동체의 화해와 평화의 몸짓은 상징성 너머 구체적인 운동성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미미하게 느껴진다. 쉐퍼를 비롯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을 자처했지만 실존주의의 문제 제기를 부정하며 다시 본질주의의 가치를 붙든다. 답은 너무 명확하게 정해져있다. 냉정하게 보면, 근대 이후 탄생한 두 수도 공동체의 메시지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수습하고 지지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두 공동체로 대표되는, 삶의 부조리와 실존적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모색이 수치 환산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영향력을 그리스도교 세계에 끼쳐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운동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기보다 안전한 공간을 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공감의 공간이자 타자와의 다름을 경험하고 수용하여 화해에 이르는 공간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나만 홀로 고뇌하지 않고 부조리 인간들이 모여 저항하는 공간이다. 이 공동체의 등장은 세속화와 자본화에 힘없이 무너진 근대 대중의 갈망을 대변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이 수도 공동체는 그리스도교가 중심이던 중세나, 종교적 영향력이 건재하던 근대사회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오히려 안타까운 몸짓이라 할 수 있는 이 운동은 부조리한 문명사회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리스도교는 힘이 아니라 갈망이어야 한다.

그 갈망은 그리스도교의 본원적 가치를 향한 갈망이다. 이는 20세기 후반, 수도회에 대한 전에 없는 관심으로 이어졌다. 학문적인 면에서 1960년대 이후 중세 연구자들이 수도원 기록 보관소를 통해 중세 수도원의 풍부한 전통을 복원했다. 동방 그리스도교 수도회주의를 향한 관심은 사막 교부들로부터 시작된 수도사 영성의 현대적 적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표적 인물이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 토머스 머튼이다. 그는 수도회 간 대화를 발전시키고 수십 편의 글을 통해 상상력이 풍부한 영적 탐구를 추구했다.

개별 인물을 향한 관심과 연구를 넘어, 수도회에 대한 사회사 연구는 수도회가 추구하는 신학적·경제적·정치적 요인을 탐구해 수도회의 현대적 적용으로 이어졌다.2) 그 결과, 20세기 후반에는 신수도회주의라 부를 만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신수도회주의는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두고자 하는, 수도회 서약을 한 소수 소명자가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상호성과 수평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깊은 신학적 성찰을 통해 세상에서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의 회복을 꿈꾼다.

부조리한 근대의 종말 앞에서 떼제나 라브리의 실존적인 고민을 나누는 가치가 소환되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와 자본 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신수도회주의는 하나의 시대적 요구일 수 있다. 수도회주의는 그저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가치로 돌아가는 복고적이거나 반동적인 운동이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교가 잃어버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한 핵심 조각이다. 그 조각은 역사 속에서 부조리한 교회와 시대에 저항하며 탄생했다, 뒤안길로 사라졌던 대안 공동체로서의 전통이다.

■ 주

1) Taizé, A call for the reconciliation of Christians ― Taizé. (n.d.), Retrieved December 10, 2022, from https://www.taize.fr/en_article5541.html
2) Jonathan R. Wilson, 《Living Faithfully in a Fragmented World: lessons for the church from MacIntyre's After Virtue, Harrisburg》(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8), 72-75쪽.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