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들의 연대
[386호 무브먼트 투게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장례
눌리고 짓이겨진 몸은 살아있을 때의 물성을 이미 잃었다. 골절로 부어오른 발목과 젖혀진 팔꿈치를 가지런히 편 후, 찢어진 무릎 상처를 닦고 반창고로 덮었다. 굳은 몸을 돌려 눕혀 수의를 입히고 머리는 단정히 빗긴 후 앙다문 턱과 볼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힘을 풀어줬다. 이제 반쯤 뜨고 있는 눈을 감기면 입관식 준비가 마무리된다. 말없이 누워있는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는 이내 무릎을 꿇고 소리 없는 울음을 쏟아냈다.
장례지도사로서 죽은 이의 몸을 살아있는 내 손으로 거두고 마지막 인사 자리인 입관식을 진행하다 보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느낀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이던 이들이 차갑게 식어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내 몸도 차갑게 식고 굳는 때가 오리라고 느낀다. 죽음을 마주하고 기억하는 자리는 나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현장이다. 그래서 장례는 남아있는 이들의 삶을 추동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네는 일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이 뒤엉켜버린 이태원 그 좁은 골목. 산 자와 죽은 자가 제 한 몸 가누지 못할 만큼 뒤엉켜 온몸으로 서로를 받아내야 했던, 삶과 죽음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현실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참혹하고, 현실이 아니라 하기에는 엄연한 실재가 우리 모두를 짓누르고 있다. 고통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앞에 두고 우리 모두는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가….
이렇게 보면, 10·29 참사 희생자들의 장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을 온전히 거두기에는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관해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 또한 책임 있는 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그에 합당한 조치도 어느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덩그러니 방치된 희생자들의 죽음과 쫓기듯 치뤄버린 장례는 남아있는 자들의 삶에도 남길 것이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온전히 수습하고 고통을 정갈히 거두어야만, 남은 자들이 그 죽음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비로소 갖게 된다.
시스템 너머 고통의 자리에
희생자와 유가족의 시공간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골목 틈바구니에 멈춰 절망스러운 고통과 어둠으로 박제되어있다. 우리는 경청과 연대를 통해 극심한 고통에 처해있는 유가족이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도록 우리의 호흡을 나눠야 한다. 그런데 이 호흡은 과하지 않아야 한다. 거칠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깊은 호흡으로 차분히 나누어야 한다. 극도의 분노와 무기력이 우리를 더 이상 덮치지 않게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가리거나 앞서지 않도록, 그들 옆과 뒤에서 경청하는 일이 절실하다. 유가족들이 덩그러니 방치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함은 물론이다.
많은 사람들은 참사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법과 제도, 시스템을 살펴 그것이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끝까지 밝히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 연대의 손길이 대책을 세우고 책임을 묻는 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 현실 정치는 일상의 자유와 평안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의 더욱 치밀하고 적확한 조치가 중요해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공백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의 일상적이며 주도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채워야 하는 공백들조차 제도에 의존한다면, 일상은 경직되고 심지어 멈추게 될 것이다. 시스템을 끊임없이 정비하면서도 공백들을 찾아내 메우는 노력 사이의 균형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이러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 없다면, 진상을 규명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결국 희생자들의 죽음을 오로지 타인이나 시스템의 탓으로만 돌리게 한다.
일상의 주체로서 이 참사에 나의 책임은 없는지 성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참사 원인과 결과 그리고 고통스러운 과정 가운데 나의 자리는 어디이며, 그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참사의 자리에 내가 없었음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음을 자각하면서, 같은 일상을 공유하던 희생자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성찰이 필요하다.
각자도생의 한가운데
그날의 이태원을 다시 성찰한다. 10월 30일 일요일 새벽, 뉴스 속보를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잠시 현실감을 잃었다. 참사 현장을 보며 삶과 죽음이 뒤엉킨 데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목도하는 기시감도 느꼈다. 이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그래서 무감각해졌던 각자도생의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의 자리에서, 나 하나 살아보겠다고 허우적대는 이 작은 몸짓이 누군가에게 혹여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을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참사 희생자 가운데 키가 작고 약한 여성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우리 가운데 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자리가 저렇게 낮고 좁은 것은 아닌지 불현듯 묻게 되었다. 모두가 삶의 자리를 위협받는 가운데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며 고통의 늪으로 휩쓸린 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날의 이태원을 성찰하며 다시 고민되었던 지점이 있다. 법이나 제도의 오류, 특정인의 과실을 묻기 전에 참사는 이미 숨죽여 다가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참사의 위험과 위험에 노출된 약자들에 무감각해지고 돌아보지 않는 우리 일상이 비로소 그 참상을 드러낸 것은 아닌지. 물론 사건으로서 참사와 일상적 참사는 다르다. 그러나 일상적 참사로서 약자의 고통과 위험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참사로 돌아올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아직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우리에게 희망은 없으므로.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고 이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삶이란 손과 발을 서로에게 내밀어 고통을 나누는 연대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기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 참사의 희생자들과 함께하실 것을 소망한다. 아무 잘못 없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해야 했던 예수의 희생을 기억하는 이들이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허무는 날을 기다리면서. 죽음도 고통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할로윈은 그날 완성될 것이다.
이춘수
일하는 목회자. 임마누엘하우스교회 목사이자 프리랜서 장례지도사로 활동하며, 남양주시 별내동에서 아내와 함께 동네책방 ‘오롯이서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