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환대하는 세 가지 방법
[387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0:14-15)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요 실천이 된다고 할 수 있는 환대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구약성서 전체를 보면, 나그네(이방인, 이민자)를 환대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지요. 첫 번째는 환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너희도 나그네였으니 다른 나그네들을 환대해야 한다’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환대한 이야기를, 19장에서는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가 두 천사를 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능욕해 심판 가운데 들어가는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환대하는 장면은 성서 전체를 흐르는 환대의 원형이지요. 환대를 통해 신적인 만남이 일어났으니까요. 분명히 이 이야기를 아브라함 후손들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히브리서 기자가 13장 2절처럼 말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으므로 심판에 처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유는 마태복음 10장 14-15절에 잘 나오는데요. 하나님의 천사들, 어쩌면 하나님 자신이셨을 수도 있는 그분들을 환대하지 않고 능욕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께서도 환대와 종말의 심판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태복음 25장 34-40절을 보면,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장면 바로 다음에 임금께서 이를 나누는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주목할 지점은 예수께서 자신을 이방인 혹은 이민자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만 네 차례 나옵니다. 이는 주린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가운데 이방인이요, 이민자요, 사회적 약자인 예수를 부지중에 환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구약에서 나그네를 환대해야 하는 이유 두 가지가 예수님 안에서 통합되지요.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이방인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환대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동시에 나그네를 환대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으면 예수와 하나님을 환대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심판이라 할 수 있지요. 아브라함과 예수의 이야기는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하나님 혹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대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신약에서 ‘환대’라는 뜻의 헬라어는 필로제노스(φιλόξενος)라고 하는데요. 앞부분 ‘필로’와 뒷부분 ‘제노스’를 합성해서 만든 단어입니다. 필로는 형제애 혹은 형제같이 사랑하기라는 뜻이고, 제노스는 이방인 혹은 이주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노포비아라는 말은 이민자 혹은 이방인을 향한 혐오를 말하는데, 앞부분 제노는 바로 제노스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환대, 필로제노스는 ‘이방인/이민자들을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친분 있는 사람의 방문을 환영하고 잘 대접해주는 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죠. 환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이들을 형제로서 사랑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당시 이방인이나 이주자는 상황에 따라 원수 혹은 적일 가능성도 있어서, 필로제노스라는 말은 원수 혹은 적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환대라는 말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기독교의 핵심 사상에 가까이 들어가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급진적/근원적 환대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요 실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방법 1: 멈춤
그렇다면, 21세기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환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시간상 세 가지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멈춰야 합니다. 제가 어릴 적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집어서 선 채로 다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삶을 위한 정지》였는데, 술술 읽히면서도 깊이가 있었지요. 책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스프링복이라는 영양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건조한 초원의 풀을 뜯어먹고 살면서 수백 마리의 무리를 형성합니다. 시속 94킬로미터로 달리는 통에 치타조차 쉽게 따라잡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스프링복들이 집단적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밝히기 위해 그들의 습성을 연구했답니다. 타고난 식욕을 가진 스프링복은 무리를 지으며 풀을 먹곤 하는데 뒤에서 풀을 먹던 그룹들이 앞선 그룹들보다 많은 풀을 먹기 위해 더 빨리 앞으로 달려나갔고, 앞에 있는 녀석들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보다 빨리 앞으로 달려 나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수백 마리가 목적을 상실한 채 사력을 다해 달리다가 강이나 절벽 앞에서 멈추지 못하고 뛰어들어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얘기였지요.
저자는 ‘삶을 위해서는 멈추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우리가 계속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타인에게 자리를 주지 않고 산다면, 그리고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프링복처럼 끝없는 경쟁 속에 달리다가 전멸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삶을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멈춤. 이를 성서의 언어로 바꾸면 ‘안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만으로 살려는 모든 인위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안식은 그러한 삶의 방식을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쉼 없는 경쟁의 질주를 멈추고 삶과 생명의 리듬을 회복해야 합니다. 결국 삶을 위한 정지는 생명 경외에서 나오게 된다는 말이지요.
저는 이 이야기가 환대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환대는 타인을 영접하는 행위에서 출발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영접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하고 있는 생각을 멈추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에야 가능해지지요. 요한복음 1장 12절, 우리가 예수를 영접한다는 구절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타인(예수)을 환대하기 위해, 나를 다른 사람(예수)에게 내어주기 위해 멈춤이 필요하다고요.
방법 2: 생명 경외
둘째로, 생명을 경외해야 합니다. 생명 경외가 결국 환대의 근간이 됩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이 자신들 형상을 세워 왕권을 세뇌시키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하던 시대에, 특권층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착민들과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이민자들과 사회적 약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환대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줍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는 일이 하나님의 정의라고요.
반대로 생명을 경시하는 모든 체제, 국가, 종교, 문화, 사회는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을 대적하지요. 정의의 궁극적 목적은 가해자-피해자-공동체가 회복/치유되는 데 있고, 이는 생명 경외를 근간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적 참사에도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공동체가 둘러앉아 일어난 피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하고요. 회복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합니다. ‘바르게 기억하기’와 그에 따르는 ‘삶을 돌이키는 진정한 사과’는 이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회복적 관점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세계관을 바꿀 정도로 본질적이며,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가야 할 방향도 제시해줍니다.
물론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려면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고, 가해자를 대화 자리에 앉히는 일도 어렵습니다. 명백히 드러난 범죄에 대해서도 죄를 시인할 줄 모르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발적으로 피해자와의 대화 자리로 나오기를 기대하기란 더욱 어렵죠. 회복의 출발점은 바르게 기억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일인데요. 권력을 가진 범죄자들은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하기에 회복적 정의 사이클을 시작하지도 못한 사건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회복적 정의가 응보적/징벌적 정의에 기초한 현재의 사법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회복을 위한 대화 자리로 나오지 않는 자들에겐 여전히 응보적이고 징벌적인 정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피해자들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이지요. 가해자 처벌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목표는 무너지고 깨어진 관계의 회복, 특히 피해자 회복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방법 3: 구조적 저항
타인을 환대하는 세 번째 방법은,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함께 타자를 환대할 것인가’로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나 자신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오고 있지요. 이를 위해 이웃 개념과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제가 속한 메노나이트를 비롯해 사촌격인 아미시(Amish)는 역사적으로 사회와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이웃의 바운더리를 협소하게 그었지요. 마치 200여 개의 언어 그룹이 거주하는 LA 메트로폴리탄에 살면서도 한국인들끼리만 모여서 서로를 챙기고 사회 시스템이나 이웃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일과 유사합니다. 노예는 없었지만, 흑인을 노예 삼고 착취하고 살해하는 악한 시스템(정사와 권세)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웃이라는 바운더리에는 흑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지난 반세기 동안 메노나이트 안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남녀평등이나 인종차별 등 구조적 문제에도 비폭력 저항을 하는 메노나이트들이 많아졌습니다. 무저항 노선에서 변한 것이지요. 물론 지금도, 처음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주창했던 무저항으로 가야 한다는 분들이 계시긴 합니다만, 비폭력 저항을 통해 사회정의에 참여하는 일이 이웃사랑이라는 흐름의 대세인 듯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내용의 핵심은 삶의 자리에서 이웃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겸손하고 착해 보일지라도 시스템을 통해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나 타인을 억압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시스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이웃사랑 계명에서는 멀어지게 되겠죠.
한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이웃은 바뀌고 있습니다. OECD 기준으로 어떤 나라의 전체 인구 중 체류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5% 이상인 경우를 다문화 사회라고 합니다. 최근 한국 법무부 통계로는, 약 5,200만 인구 중 2019년에는 250만여 명, 2020년에는 200만여 명이 체류 외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조금 줄기는 했지만, 지난 3년간 체류 외국인 수가 전체 인구 중 4% 이상이 되었는데요. 아직 수치상 다문화 사회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귀화한 동포와 서류 미비자까지 고려하면 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이주는 인류 역사 속에 늘 있어왔지만, 새 삶을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 숫자가 근래와 같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출생한 곳과 다른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숫자가 2015년 통계로 2억 4,800만 명이라고 하는데요. 이들이 한 국가를 이룬다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국가가 된다고 하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도 이주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웃들과 더불어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교육과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변화가 필요한데, 아직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은 사회와 국가 시스템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에 개인적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으면, 우리들의 모든 수고와 애씀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20년 전 한국에 있을 때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들을 제가 돌보아야 할 이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이분들을 도와드린다고 해도, 결국 법과 제도와 장치가 바뀌지 않으면 이들의 삶은 곰팡이가 가득 핀 방 세 칸에 스무 명이 몰려 사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법과 제도와 정치와 경제 시스템과 문화를 바꿔나가야 하겠구나,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죠.
성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환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희년과 안식년입니다. 자유, 휴식, 해방을 위한 1년으로 자원, 노동, 재정과 재산 등에도 적용되었지요.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크게 세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노예해방과 부채 면제, 그리고 땅을 쉬게 하는 일입니다.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 해 속죄일에 선포되는데, 안식년을 더욱 강화된 형태로, 앞서 말씀드린 안식년 규정에다가 땅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이 더해집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단순히 경제 영역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노예를 해방하는 일은 정치권력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사회 모든 분야를 뒤흔드는 것이었고, 이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향했습니다. 희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힘의 불균형과 부정의 문제를 언약 공동체 안에서 바로잡는 역학을 만들어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희년을 하나의 ‘제도화된 은혜’로서 죄와 탐욕에 구조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했듯이, 신약의 하나님 백성들인 교회 안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제야 교회는 세상이 바라보는 산 위의 도시가 되겠지요.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합니다. 죽어가는 것들이란 아직 살아있는 것들, 생명 있는 것들, 살아남은 것들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나눈 마태복음 25장의 나그네, 이방인, 가장 작은 자, 변두리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은 너무 고마워하실 겁니다. ‘네가 살아남았구나….’ 돌아오는 탕자의 목을 끌어안고 환대하는 아버지 입에서 차마 나오지 못하고 맴돈 말이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문 앞에 서서 또 다른 생명, 살아남은 자들이 나를 찾아오는 데 대한 감격과 경외심에서 환대는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한 환대의 시작은 그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더불어 거하며 형제애를 나누는 삶을 통해 하나 되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교제에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겠지요. 성부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자 예수의 본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허현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인 교회는 지금 여기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가정과 교회, 지역사회와 국가,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지 길을 찾는 중이다.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 소속 목사로 LA에서 한인 메노나이트교회와 다민족교회의 lead pastor로 섬겼고, 아시안화해센터(ReconciliAsian)의 co-director, 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 이사로 다문화, 다민족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