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종교화된 시대, 사회선교운동의 역할은?

[387호 무브먼트 투게더 3] 30년 기독교 사회운동 활동가의 충언 2

2023-01-31     구교형

시대와 세대의 고민

성서한국 사무총장 임기를 마친 지 8년 만인 2022년에 이사장이 되어 돌아본 복음주의 사회선교운동 진영은 많은 변화가 느껴졌다. 개별단체들은 여전히 자기 분야를 벼리지만, 단체나 운동가들 사이에 같은 시대의 접점을 만들기 어렵고, 세대 사이의 공감과 협력도 큰 과제로 떠올랐다.

특히, 지난 대선을 앞두고 후배 세대와 선배 세대의 간극이 드러났다. 민주당 정권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정치판 물갈이를 우선한 좀 더 젊은 후배 세대와 그래도 ‘미친 운전사가 운전하도록 방치할 수 없지 않으냐’는 ‘본회퍼적 충정’을 가진 선배 세대의 견해차가 확인되었다. 선거 후에도 선배들은 반년 만에 형성된 검찰 공안 정권의 칼춤에 ‘관대한’ 후배들을 이해할 수 없고, 후배들은 이런 시대를 만들어낸 양당정치, 대결 정치를 바꾸는 데 무관심한 선배들을 힘들어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이다. 30년 사회선교운동, 20년 성서한국 운동의 제법 긴 세월 동안 청년이었던 이들은 중년을 지나고, 새로운 세대가 청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우리는 달라진 시대도, 담론도, 생각과 방법도 서로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작년 12월 말 시국을 염려하던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50~70대 중견 운동가 몇 명이 모였다. 한 시대를 현장과 거리에서 함께 보낸 우리는 처음에는 시국에 대한 염려와 울분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선후배들 사이에 대화와 소통보다는 너무 현안만 앞세웠다는 탄식과 반성, 이제라도 마음 열고 대화에 나서자는 ‘엉뚱한 결의’로 끝맺었다.

나 역시 비슷한 심경으로 본지에 ‘이제는 ‘민주당 복음주의’를 떠나보내야 할 때’(2022년 4월)라는 글을 기고했던 사람으로서, 그때 털어놓지 못했던 남은 이야기를 보태려 한다.

시대정신의 변화

다시 한번 우리는 분명한 시대 변화를 말해야 한다. 그 변화는 10여 년 전 벌써 감지되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 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반년 동안 진행된 광우병 촛불 집회에 참여할 때 나는 뭔가 낯섦을 느꼈다. 천민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진 이명박 정권 자체가 싫어서 열심히 참여했지만, 교복 입고 책가방 메고 참여한 청소년들이 학교급식과 0교시 수업을 비판하고, 또 나들이하듯 가족들 손잡고 와서 춤추고 노래하고 집에 갔다가 다음 날 또 공연을 즐기는 모습들은 노동 탄압, 반전 평화, 핵폐기장 반대 등 지금까지 싸워왔던 운동들과는 주제도, 방식도 참 달랐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낯설었다.

2010년대 이후 이런 추세는 더욱 분명해졌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대한민국 미래 이슈 2019〉 보고서는 2029년까지 앞으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10가지 의제를 ▲저출산·초고령화 ▲격차 심화로 인한 사회불안정 ▲저성장과 성장전략 전환 ▲남북관계 변화 ▲고용불안 ▲기후변화 적응 실패 ▲제조 혁명 ▲건강수명 증대 ▲자연 재난 ▲산업구조의 양극화로 예측했다. 또, 2019년 7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청와대 국민청원이 개설한 2017년 8월 17일부터 올해 5월 31일까지 게시된 국민청원 중 2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이 이뤄진 청원은 모두 98개였는데, 그중 39개(39.8%)가 젠더 이슈 관련 청원이었다. 1만 명 이상 동의를 받은 청원 882개 중 224개(25.4%)도 젠더 이슈였다.

우리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모든 시대마다 당대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중요한 중심 과제들과 그 해소를 통해 하나님 당신의 중요 가치들이 표현되고, 발전해간다고 믿는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그런 면에서 시대정신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향을 읽을 수 있는 표지다. 식민지 수탈, 전쟁, 가난, 독재, 민주주의, 통일 등이 지금까지의 과제들이었다면, 최근 그것들은 분명히 달라지고 있다.

시대정신의 변화
  20세기 시대정신 21세기 시대정신
시대적 특징 양의 시대 질의 시대
주요 기본권/중심점 생존권/정치와 구조 중심 행복(추구)권/사회문화 의제들
표출 가치 노동, 평화와 안보, 식량, 정의
사상과 이념, 분배
대의민주주의(기본권)
개인의 자유와 권리, 성정체성
공정성, 환경, 삶의 질, 소수자, 인권
생활민주주의, 차이의 중요성
특징적 구호 ‘잘살아보세!’ ‘살려내라!’
(외친다)
‘이게 국가냐?’ ‘정말 행복하냐?’
(묻는다)
핵심 목표 수구세력 축출을 위한
연합전선(민주당 중심)
지속가능성, 미래 생존적 보편과제
(비당파적 연합)
주된 관심층 50~70대(기독운동 1, 2세대) 2030, 40(기독운동 3, 3.5세대)

그러나 시대정신은 하나가 완전히 완결되고 난 다음에 진행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새로운 과제들이 중심을 향해 치닫는 중에도 지금까지의 과제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이의 갈등은 우리 앞서 이를 겪어온 서구 선진국들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실 변화는 너무 자연스럽다. 20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족, 국가, 체제, 이념과 사상 같은 거대한 명분 아래 깔려 일방적으로 희생되고 소외되었던 한 개인과 소수, 소외자들의 생각과 삶을 존중해달라는 말이다. 영웅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리를 인정해달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에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는데 왜 그래?’라며 의아할 수도 있지만, 시대정신은 항상 그 과제가 최악일 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반면, 21세기에 떠오르는 시대정신을 붙들었다고 해서 인종, 민족, 국가, 체제, 계급을 기반으로 한 거시적 구조 문제가 이미 극복된 듯 착각하면 안 된다.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권이 한반도 평화를 책임지게 되면서 위험천만한 위기가 확대되고 있고, 장애인들을 폭도요 개혁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참담한 시대가 되었다. 각자도생적 해결과 심리적 위로, 마음의 안정을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 또한 분명하다. 또 모든 구조적 속박으로부터 자유와 권리, 욕구와 행복을 얻으려는 시도 역시 의도와는 다르게 산업자본의 전리품으로 이용당할 위험도 크며, 가장 큰 바탕인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할 우려도 크다.

정치의 종교화, 종교의 정치화

세대, 계층, 지역, 그리고 정치 성향과 종교까지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 할 보편과제가 너무 많다. 지난 글에도 썼지만, ‘지속가능성’과 ‘선순환적 생태계’를 목표로 함께 지혜와 행동을 모으지 않으면 지구가, 인류가, 한반도가,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려되는 생존 위기다.

가뜩이나 절박한 기후위기는 세계적인 경제난과 국제분쟁, 에너지 부족 등을 이유로 더더욱 뒷전이 되고 한국 정부는 너무 무사태평하다. 미·중 대립의 동북아판으로 더욱 확장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신냉전과 군비경쟁은 가속화되고 있다. 본격적인 인구 감소 시대에 지방은 아예 소멸 또는 오지 수준으로 전락할 위기에 빠졌다. 저출산 고령화의 늪에 빠진 한국은 오래전부터 엄청난 국가 예산을 쏟아붓고도 백약이 무효하며, 이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많은 노인을 떠안아야 할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다.

정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 정치는 이러한 필수적 보편 과제를 해결은커녕 해소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정부와 여당은 정권을 가졌지만, 야당의 협조를 얻을 수 없는 반감 속에서 검찰 공안 통치의 재미에 빠졌다. 민주당 역시 국회에서 압도적인 169석을 자랑하고 있지만, 어떠한 정치적 열매를 만들어낼 의지 없이 당과 대표 방어에만 명운을 건다. 그 외 정당들은 존재감조차 찾기 힘들다.

왜 그럴까? 지금 한국 정치는 대통령과 정부도, 의회도 대의민주주의의 전제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본질은 덜 선명해 보이더라도 합의와 타협을 통한 공동선, 교집합의 추구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정치인도, 국민도 시국을 ‘전쟁 상황’으로 선포하고, 상대 당과 지지자를 선명하게 ‘적’이라 규정한다.

이런 극단의 시대에 등장하는 모습이 정치의 종교화와 종교의 정치화다. 종교화한 정치는 상생과 협력의 기술을 그만두고 자기들만이 진리임을 주장하며 선악의 심판자로 나서려는 우상숭배적 정치다. 가장 대표적인 게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다. 그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 말살, 무신론의 공산주의 박멸, 동성애자, 집시를 없애 모든 불순물로부터 정통과 순수혈통을 보존하고, 단순 소박한 독일 민족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현존 하나님 나라를 참칭했다. 지금 한국 정치도 감히 달콤한 그 착각을 묵상 중인 것 같다.

반면, 종교가 말씀의 감화력과 자기희생이 아닌 권력(정치, 법, 숫자)과 자본으로 진리를 강요하려 할 때 종교의 정치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아랍권의 이슬람 왕정국가들에서 전형적인 사례들을 봤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이를 흉내 내고 있다. 장로 대통령론, 기독당 운동, 한기총 운동을 거쳐 지금은 동성애, 이슬람, 좌파를 박멸하려는 범기독교적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전광훈은 이를 가장 선명하게 대표하는 상징이기에 끊임없이 구설에 오르고 이단이라 평가받음에도, 여전히 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화하면 예수 당시 사두개파, 제사장 집단들처럼 이미 종교가 아닌 세속화한 부패 집단이 된다.

이렇듯 정치는 종교화하고, 종교는 정치화하면, 그 둘이 만나 정치와 종교가 합리적 절차와 설득에 따른 감화보다는 감언이설 선전이나 벼락 같은 요행만 바라는 미신성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도 제왕적 대통령제, 승자독식적 선거 방식을 바꿔 국민의 표심을 최대한 반영하는 정치 개혁에 범(凡)기독교, 초(超)기독교적인 힘을 모아보면 어떨까? 또한, 오랜 세월 어렵사리 쌓아왔던 평화와 민주, 경제 정의는 물론 세계적 생존 과제인 기후위기, 성평등과 기본인권조차 무시하는 정권의 행태를 바꾸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2023년의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

2023년은 사회선교 진영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다. 올해는 2021년을 건너뛰고 다시 4년 만에 성서한국 전국대회가 예정되어있다. 또 2024년에는 한국에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린다. 2025년은 성서한국 창립 20주년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모두를 선동할 어떤 구호로 이 글을 맺을 생각이 없다. 다만, 두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지난 기고에서 나는 선배 세대에 속하지만, 최대한 후배 세대의 관점을 소개해보려고 노력했다. 이제 한국 사회도, 교회도, 운동도 지난 20-30년 동안 앞장섰던 우리가 아니라 후배 세대들이 더 ‘책임져야 할’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년 한 해 후배들의 도전적 목소리들이 나는 반갑고, 계속 힘을 보태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애정과 진심을 담아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먼저 ‘우리가 뭔가 책임질 수 있는 여건도, 기회도, 자산도 없다’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30년 전 사회선교운동을 시작할 무렵 선배들은 ‘기껏’ 부목사였고, 우리는 20대 청년, 학생이었다. 20년 전 성서한국 운동을 시작할 때도 ‘겨우’ 교회를 개척했거나 간사, 국장 정도 맡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내가 ‘민주당과 586 기득권’을 언급한 것은 1980년 민주화운동 간판 하나로 30년 동안 정치를 주도하며 기득권을 향유하는 주류 정치와 우리 운동을 더는 같은 배를 탄 운명 공동체로 동일시하지 말자는 의미에서였다.

우리는 10여 년 전부터 ‘40대(이제 50대)-남성-목사’가 주도하는 ‘아저씨 복음주의’ 소리를 들었지만, 변명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아무도 떠맡으려 하지 않았기에 해야만 했다. 기득권은커녕 목사들은 교인과 재정부 눈치를 보며 없는 살림에 박박 긁어 여기저기 부채를 충당해주었고, 가진 게 몸밖에 없는 우리 실무자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해가며 몸으로 때웠다. 언론사, 단체 등이 존폐의 기로에 섰지만, 그때마다 없는 돈 다시 털어 생활비 줄여가며 버티고 버텨 지금까지 왔다. 왜 더 지혜롭고 유능하지 못했는지 비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득권자는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버텨준 우리 선배들과 동료들을 무한 존경하고, 늘 감사하다.

이제, 요한복음의 한 이야기(5:1-9)를 결론 삼아 소개하고 싶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물이 동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많은 병자들. 주님의 시선은 그 가운데 척 봐도 병이 오랜 줄 알만 한 38년 된 전신마비 환자에게 닿았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보면 모르나? 전신마비 환자 앞에서 이게 할 말인가?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낫지 못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다(7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없지만, ‘그런 많은 이유 때문에’ 그는 이미 낫기를 단념하고 그저 목 좋은 이곳에서 구걸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온 것 같다. 다시 주님은 다른 말 없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다. 그가 또 일어설 수 없는 당연한 이유들을 설명하며 그냥 앉아있었다면 주님도 도우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9절).

거창하게 사명이니 운동이니 할 것도 없다. 이 물음은 같은 시대와 과제를 안고 조금씩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나름 문제를 이렇게, 저렇게 잘 분석하면서, 그러나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여러 이유들을 설명하면서, 2023년 올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 것은 나으려는, 일어나려는 의지가 진짜 있는지다. 그게 있다면 우리는 주의 도우심 가운데 일어날 수 있으나, 그게 없다면 주님도 우리를 도우실 수 없을 것이다.

구교형
총신대학교 신대원을 졸업한 예장합동 목사로 현재 성서한국 이사장,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공동대표이며 새숨병원에서 설교하고 있다. 1993년 경실련 기청협을 시작으로 남북나눔운동, 교회개혁실천연대, 평화누리, 하나누리, 성서한국에서 실무책임자로 일했다. 50대 이전에는 주로 일만 보았다면, 50대 이후 하나님의 마음을 새삼 느끼면서 힘껏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 《뜻으로 본 통일한국》과 사회선교운동 30년사를 기록한 《하나님나라를 응시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