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공간
[388호 공간 & 공감]
손기정문화도서관에 갔다. 예배를 마치고 천천히 걸어 만리동 시장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신 뒤 찾아간 이 도서관은 마라톤선수 손기정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 안에 있는 중구구립도서관이다. 오래된 빨간 벽돌 건물 외관과 쾌적한 실내 공간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의 공통점이랄까. 옅은 회색에 연두색과 주황색으로 포인트를 준 효율성 높은 가구 대신, 곡선형 원목 책장에 높은 층높이, 캠핑 의자와 라운지 소파, 그리고 조명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공간을 보고 마음속으로 ‘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동네 공공도서관을 이용할 때면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리는 6인용 테이블이 불편해서 가운데 자리를 비워두고 양 끝에 앉았었는데 손기정문화도서관은 1-2인 책상을 여러 개 두어 서로 안전한 거리를 확보했다. ‘이런 공간, 누가 기획했을까?’ 공공시설물이라고 해서 ‘예산’만 따지지 않고,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만든 기획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도시락을 가져와 종일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요즘 내가 주로 책을 읽는 공간은 ‘자연스럽게’라고 이름 붙인 개인연구실이다. 방 2개인 집에서 함께 사는 생활 동반자가 내게 가장 큰 방 하나를 내주며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라고 해 갖게 된 개인 공간이다. (물론 그는 내 개인연구실을 자기 집처럼 드나든다.) 이 공간은 책상 2개, 의자 2개, 라운지체어 2개, 티테이블 1개로 채워져 있고, 주 용도는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개인연구실이라고 했지만 특별한 연구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때마다 관심 있는 책을 읽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기록하고, 그 밖에 일기와 계획을 정리한다. 토요일 저녁에는 가구 배치를 조금 바꿔 영화를 보고, 가끔 스트레칭과 요가를 한다.
7시쯤 일어나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 간단하게 씻은 후 ‘자연스럽게’에 앉아 따뜻한 물 한잔 마시며 창문에서 들어오는 희붐한 겨울 아침의 빛에 기대어 책을 읽는 시간이 좋다. 적당한 자리가 없어 내가 사는 집에서도 어디에 앉아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이 공간의 여백이 만들어준 삶의 만족은 크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방을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게 된 덕분에 꾸준한 독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더 들어가보면 삶의 여백을 만든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평일에는 집과 사무실을 반복하다가 주말에는 교회 그리고 새로운 공간을 탐방하는 것이 전부인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모임은 꼭 필요할 때, 에너지가 가능한 만큼만 갖는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이렇게 당연하고도 단순한 생활을 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가야 할 것 같아서, 나만 정보에서 소외될까 봐(포모증후군 - 흐름을 놓치거나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 증상, 우리가 방금 확인한 인스타그램을 다시 확인하는 이유), 원하지 않는 시간으로 삶을 채웠었다.
친구들과 평소처럼 만나 ‘남 이야기’를 하면서 사회적 관계가 탄탄한,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증명했다. 남들 다 가니까 나도 가야 할 것 같아서 떠나기 전날 밤 울면서 배낭여행 갔고, 여성으로의 가치를 확인받기 위해 소개팅도 나가봤다. 보통 내 또래 여성들이 소개팅하고 결혼하길래.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애를 낳느냐는 말, 지금 만나 결혼해서 애 낳아도 노산이라는 말을 듣고 실체 없는 공포에 떠밀리듯 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당시 나는 비혼을 지향하고 있었고 출산을 희망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졸업하면 취업하길래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근로소득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같은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해치우듯 살아왔다. 이러한 삶의 명령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볼 틈도 없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최선이었을 것이고 또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비슷하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아깝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자신을 탐구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나에게 소중한 것들로 삶을 채워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남는다. 조금만 더 삶의 여백을 마련해서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들도 자주 했더라면 하는, 이제는 소용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 이제라도 단순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당위로 둘러싸여 숨겨져 있던 삶의 여백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추동하는 목소리가 차츰 희미해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고 나서부터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공인중개사로 개업하고 생활을 이어오면서, 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만 약속된 결혼 생활을 시작할 즈음부터였을까. 새로운 변화를 만나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굴곡을 지날 때마다, 당연한 것들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일을 힘들어하고, 어떤 활동에 만족하는지. 무슨 일을 할 때 자신감을 얻고 어떤 상황일 때 자존감이 떨어지는지. 어떤 주제에 흥미를 보이고, 누구와 있을 때 에너지가 생기는지, 언제 얼마나 자고 일어나야 개운한지.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일에 화가 나는지. 이렇게 나에 대한 기본 정보를 하나씩 조금씩 짚어가면서.
‘거북이는 토끼보다 길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라는 칼릴 지브란의 글처럼, 굴곡이 만들어낸 변화의 틈에서 나는 내 삶에 대해서 할 말이 생겨나고 있었던 걸까.
변화와 굴곡이 만들어낸 균열과 그 틈 덕분에, 자신을 재발견한 나는 단조로운 삶이 아니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분야의 책들을 읽고 재미를 느낀다. 뇌과학, 진화심리학, 자기계발서, 성공학, 사주 명리, 자본주의, 한국소설, 브랜드, 조선백자 등 과거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왔던 이야기를 읽는 기쁨이 크다.
5회 이상 반복해서 본 영화 〈어바웃 타임〉은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 팀과 그의 가족을 통해 삶의 중요한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팀이 자신의 아버지에게(팀의 아버지도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시간여행 능력을 무엇에 사용했냐고 묻자 그의 아버지는 “나는 책을 팠어. 인간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은 두 번씩. 디킨스는 세 번”이라고 답한다. 반복되는 인생을 재밌게 사는 방법! 물론 모든 책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길고 지루한 사막 풍경 같은 구간을 한참 견뎌야 마침내 작은 우물 같은 문장 하나 발견하게 해주는 책도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만난 책 대부분은 순식간에 사건 현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하고, 재판정에도 세웠다가, 팔을 잃은 로봇을 나도 모르게 같이 걱정하고 있는 미래로 내던졌다가, 치열한 사업 현장으로 보내기도 하고, 살아본 적도 없는 시대의 아픔 속으로,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 세워놓기도 한다. 이렇게 책을 통해 만나는 세계는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도록 내 삶에 또 다른 공간을 준다.
책으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의 슬픔과 빛을 배웠고(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 생각과 감정까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를 보았고(1984, 조지 오웰), 교통도 기술도 마땅치 않던 시대의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고(밝은 밤, 최은영), ‘조금 부스러지긴 했지만 파괴되지 않은’ 마음에(경애의 마음, 김금희) 마음이 울렸다. 작지만 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었고(크게 그린 사람, 은유), 우리 선조들의 미감에 감탄하고(안목의 성장, 이내옥), 행복을 위한 자본주의식 성공 방법(역행자, 자청)의 민첩함과 치열함에 매우 놀랐다.
책의 이야기들은 내 삶과 만나 서로 엮이며 새로운 방향으로 인생 궤적을 넓혀주고 있다. 책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책은 분명 다른 삶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어떤 것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책에서 만난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오히려 나의 삶을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서울시에서 작은 도서관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정된 자원을 책임 있게 나눠야 하기에, 중요한 가치에 관한 판단과 그에 대한 책임은 정치권력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묻고 또 답해야 한다. 타인의 삶을 위한 내 삶의 여백과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공간 없이 함께 잘 사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시민의 권력과 자원을 너무 쉽게 넘겨주고 나 몰라라 한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 갈등 지수는 왜 OECD 최상위권을 기록하는지.
작은 도서관 예산은 삭감되지만, 우리는 더 넓은 공간을 열어젖히기를 바란다.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