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388호 내 인생의 한 구절]

2023-02-28     김희룡

신앙생활에서 느꼈던 회의

예비역 복학생 시절에 인상 깊게 읽은 동화가 있습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어느 숲의 나무에 애벌레 한 마리가 태어났습니다. 애벌레는 혼자 살면서 매일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벌레는 문득 ‘매일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몸집을 불리는 것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질문을 따라가보기로 마음먹은 애벌레는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길을 가다 얼룩무늬 애벌레를 만나 길동무가 되었습니다. 둘은 함께 가다가 크고 높이 솟은 거대한 기둥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서로의 머리를 밟고 위로, 위로 오르는 애벌레 떼로 이루어진 기둥이었습니다. 이제 막 기둥에 합류하는 애벌레들에게 이 기둥을 오르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정확한 이유를 아는 애벌레는 없었습니다. 일단 정상에 오르면 알게 될 거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두 애벌레도 거대한 애벌레 기둥에 합류해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이 가까워져서 두 마리의 애벌레가 다시 만나 서로의 머리를 밟고 올라야 하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주인공 애벌레는 얼룩무늬 애벌레의 머리를 밟고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오른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애벌레는 너무 놀라서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바로 아래에 있던 애벌레가 나지막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조용히 해. 모두가 알게 되면 이 기둥은 무너진단 말이야.” 이유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정상에 오르는 것 역시 의미 없이 매일 몸집을 불리는 일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애벌레는 그 기둥에서 내려와 다시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애벌레는 그렇게 한참 가다가 난생처음 보는 생명체를 만납니다. 자기와 전혀 다른 몸짓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생명체였습니다. 애벌레가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야?” “나는 나비야.” “나비가 뭐야?” “나비는 네가 되어야 할 그것이야.” 애벌레는 나무에 올라 고치가 되었습니다. 한 점 빛조차 들지 않는 고치 안에서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애벌레는 나비가 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저는 기독교학과에 복학한 학생이었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목사가 될 계획을 세웠지만, 신앙생활에는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고백하는 ‘구원’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실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모르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동화에 나오는 애벌레와 나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습니다. 나비가 될 운명이지만 나비가 무엇인지 몰라서 묻고 있는 애벌레와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구원’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몰라서 묻고 있는 제가 같은 처지 같았지요. 애벌레가 나비를 만나는 사건, 즉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던 애벌레가 자기 정체성의 비밀을 발견하는 사건이 바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경험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계속 진행되는 ‘구원’ 과정

그런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에 제 마음에 다가온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새번역)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구원’에 대한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게 구원이란 이미 이루어진 특정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라는 말씀을 보면 구원은 특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제 안의 회의는 사실 구원이 불확실해졌다기보다 구원의 ‘개념’이 불확실해진 데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제가 청소년기까지 가지고 있던 구원의 ‘개념’이 청년이 된 나에게 효용을 다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한 건 이미 효용을 다한 개념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아니라 구원에 대한 탐구를 더 진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신학을 공부하는 일이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저는 기독교학과 공부를 지속하되 더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학과 과정을 마쳤고 교단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신학부까지 가서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신학 공부에 대한 제 열정이 끝까지 치열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박사과정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와서 인생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1977년부터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노동교회, 민중교회 전통을 이어가는 성문밖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저는 올해로 만 8년째 성문밖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문밖교회 목사로서 교회 목회도 했지만, 해고노동자들의 거리 농성에 참여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종로구청 뒷골목 이마빌딩 삼표시멘트 본사 앞 거리에 천막을 치고 시작된 삼표시멘트 해고노동자들의 농성 연대를 시작으로 목동열병합발전소 75미터 굴뚝에서 427일간 이어진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354일간 이어진 김용희, 이재용 삼성 해고노동자들의 강남역 사거리 CCTV 철탑 농성,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800일 가까운 농성을 이어가다 998일 만에 대법원 승소를 얻어낸 아시아나케이오 청소노동자들의 농성까지. 저는 7개 기독교 연대 단위로 구성된 ‘기독교대책위원회’ 회원으로서 해고노동자들과 연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라는 말씀은 17년에 이르는 신학 공부 여정 내내 저와 동행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이 말씀 덕분에 목회와 현장 연대 가운데 엄습하는 두려움과 떨림을 절망의 징조로 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떨림을 우리의 연대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알게 하는 징조로 받아들이도록 시야를 틔워주었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문밖교회 예배당에서. (사진: 필자 제공)

현재에 매몰되지 않도록 돕는 한 구절

빌립보서 2장 12절은 제 삶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각을 결정하는 말씀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 ‘구원’이라는 점과 제 삶이 언제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게 합니다. 그리하여 제 일상과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과 단 한 번뿐인 현재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대할 수 있도록 시야를 열어주는 말씀으로 늘 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저는 일상을 전부로 여겨 일상에 매몰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세상에 헌신하면서도 이 세상을 마치 영원히 머물 안식처로 여겨 세상을 신뢰하거나 집착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줍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현재의 삶에 집중하면서도 미래의 약속을 잊지 않음으로써 현재의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살아갈 힘과 지혜를 얻습니다.

제 20대를 줄곧 사로잡았던 이 말씀은 여전히 계속되는 질문인 ‘나의 신앙이 고백하는 구원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실을 지시하는가’ 앞에 저를 세워놓습니다. 대답을 조금씩 얻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답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구원의 ‘개념’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도 맛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추신.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을 주제로 글을 쓰다가 임보라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목회 일생 내내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는 이들을 친구로 삼은 임보라 목사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현실’에 헌신하시며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힘겨웠던, 그러나 아름다웠던 구원의 경주를 마친 당신의 딸을 주님께서 두 팔 벌려 안아주시리라 믿습니다.

김희룡
영등포구 당산동에 위치한 성문밖교회 목사. 성문밖교회는 1977년 창립되어 노동교회, 민중교회, 녹색교회 전통을 이어가며 우리 사회의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 및 다른 피조물들과의 연대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