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함께한다는 것

[388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2023-02-28     강동석

“계속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관계가 끊긴 한 지인의 인사말에 저렇게 답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그는 내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된 후, 매번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냥 그래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대꾸했다. 이따금 시니컬한 태도를 드러냈지만 담아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마주침이 잦은 사이였다. 다른 얘길 하다가도, 공백이 생기면 그는 꼭 내 ‘몸’으로 화제를 돌렸다. 먹는 약은 없는지, 얼마큼 불편한지,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듣거나 답하다 보면 짜증이 밀려왔다. 당시에는 선의로 해석해서 참고 참았다. 실상은 ‘관심 없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을 또 물었고, 들었던 대답을 또 들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면’ 묻는 게 당연하겠으나, 정도가 지나쳤다. 근육이 점차 약해진다는 설명 한 번만 들어도 몸 상태를 반복해서 물어보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처럼 똑같은 대답을 반복한 적도 처음이었다. 기대한 적 없지만 질문 말고 무언가 받아본 기억도 없다. 줄곧 ‘아픈 사람’을 걱정해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의무감의 발현이었나. 로완 윌리엄스는 말했다. “윤리의 핵심은 단순히 반응하는 게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데서 윤리가 시작되지요.”(《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비아, 118쪽)

현재 다니는 교회 사무장도 종종 내 몸의 현재 컨디션을 물어온다는 점에서 일견 위 경우와 비슷해 보인다. 그의 물음에는 최대한 솔직하게 답하려 한다. 사무장과는 2015년부터 알고 지냈다. 보통 처음 내 장애를 인지한 사람이 장애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기 마련인데, 투박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했던 그는 만남 초기부터 내 장애에 관한 화제를 에두르지 않았다. 내가 교회에 등록했기 때문에 직원으로서 응당한 대처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저곳 탐방하는 외부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교회라서, 부축해야 하거나 환경적 고려가 필요할 때 적절히 대응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지금 상태가 어때?” “옆에서 어떻게 해주면 편하겠어?” 처음부터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초기에는 교회 직원과 교인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이 녹아있는 물음이라는 판단하에, 간접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곤 했다. 그러다 일본·중국 등을 함께 여행하고, 그의 견해와 생활 습관을 관찰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자신과 다른 이들을 올곧은 눈으로 ‘주시’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정’이 쌓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누구보다도 내 몸의 불편함을 잘 헤아리는 ‘곁’으로 자리 잡았다.

출석하는 교회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가 어수선한 중에 시끄럽게 굴면 교인 대부분은 모른 척하거나 내버려두곤 하는데, 사무장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아이 행동에 대해 때론 부모처럼 꾸짖기도 하고, 교회학교에서 반을 나눌 때 그 아이와의 일대일 공과 공부를 자원하는 등, 정면에서 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정도 쌓아온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사무장이 보여준 태도는 누군가를 회피하지 않고 하나의 존재로서 진실하고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대화하는 일이 무엇인지 숙고해보게 했다.1) 그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전염 위험성 때문에 함께하는 일손이 확연히 줄어든 노숙인 복지시설의 공백을 메우는 등, 자신의 시선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리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투박한 구석이 있지만 일련의 실천들은 시몬 베유가 《신을 기다리며》(이제이북스)의 한 에세이에서 지적한바 “우리가 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웃 사랑도 그 실체는 집중이다”(91쪽)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했다. 정확히 이 지점에서 그는 앞서 언급한 지인과 달라 보였다. 말하자면, “그 시선은 일단 주의 깊은 시선이다. 이때 영혼은 자신의 고유성을 깡그리 비워 냄으로써 자기가 바라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92쪽)

ⓒ이예은

“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향한 진실하고도 주의 깊은 시선은 어떻게 가능한가? 차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다른 사람과의 거리와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기본적이고도 평범한 ‘상냥한 호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166쪽) 로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아, 당신을 이해해요”가 아니라 “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당신이고 저는 그것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가 아닐까 싶다고요.”(150쪽) 사무장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기울이는 노력은 본인이 내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차원에 있지 않다. 그는 나와 자신의 다름을, 어떤 존재든 서로가 서로를 오롯이 이해하기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안다. 내가 도로 경계석을 오가거나 내리막 혹은 오르막길에서,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올라야 하는 순간에 어떻게 도움을 줘야 내 몸에 편한지 그는 경험상 알고 있지만, 먼저 나에게 선택권을 주곤 했다.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서로를 오롯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르게 빚어진 존재’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상대를 존중하는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또한 모두의 하나님이시며 모두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한국기독교연구소, 305쪽)이라고 강조하며, 성서에 나타난 보편적인 언약(노아 언약)과 특수한 언약(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모두 인식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유대교 랍비 조너선 색스의 창세기 해설(11장 ‘정의의 보편성, 사랑의 특수성’, 283-306쪽)은 이와 관련해서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아 언약이 나오는 대목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는 ‘엘로힘’으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언급할 때 표현되는 ‘보편성의 하나님’을 지칭한다. 이는 정의, 공정, 피해 주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전 인류에 적용되는 의무적인 도덕 실천의 기초석이다(292쪽). 반면, 아브라함 언약에서 지칭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하쉠’은 특수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고유명사이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노래하는 연인들 간의 농익은 애정 표현으로 채워진 아가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밀성과 관계성의 용어이며, ‘사랑의 하나님’을 나타낸다(293쪽). 다말, 룻, 라합, 밧세바 등이 언급되는 마태복음 1장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보여주듯이 아브라함 언약은 혈연적 차원, 덕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나와 다른 ‘타자’ 또한 하나님과의 특수한 사랑의 관계 아래 놓인다는 신앙의 바탕이 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원리는 내가 다른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신비 앞에 서는 것이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 그들의 실존에는 오로지 하나님하고만 관계가 있기에 내가 다가갈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에 나오는 말로 하면, 사람들이 듣든 듣지 않든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주시는 은밀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베푸는 존중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이시는 존중과 잇닿아 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 《제자가 된다는 것》, 복있는사람, 108쪽)

교회는 장애인들 개개인을 실존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는 존재로서 존중하고 있는가? 똑같은 그리스도인이자 공동체 일원으로 인정하고 있다면, 장애인들이 교회 내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데 별다른 제약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교회 생활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으니, 한국교회 일반적인 장로교 예배를 기준으로 잡았을 때 찬양, 기도, 말씀 봉독, 설교 등을 맡은 이의 면면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개교회가 누구의 언어를 존중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중직이나 목회자가 맡기 마련이고 현실적인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장애인들에게도 충분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장애인주일조차도 지키지 않는 교회가 대부분인 현실을 고려한다면 현장의 실태는 어느 정도 알 만하다.

지적장애인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장애인들의 예배 접근성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일부 짚어보았다. 여기서는 지적장애인에게 성찬을 주는 문제2)와 관련한 사안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로완 윌리엄스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복있는사람)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받쳐 주는 네 기둥’(14쪽)인 ‘세례’ ‘성경’ ‘성찬례’ ‘기도’ 각각에 담긴 풍성한 의미를 입체적으로 풀어내는데, 이 네 가지는 비장애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적장애인들에게 불가능한 과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문화랑은 지적장애인들의 예배 및 성찬 참여 문제를 논하는 글(《예배학 지도 그리기》 부록, 199-229쪽)에서 최신 인지과학, 특수교육 등의 교육학적 연구를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낸다. 지적장애인 또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예배하는 인간’(homo adorans)이며,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서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기에, 예배와 성찬을 통해 지적장애인들이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가 인내를 갖고 함께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글에 따르면, 미국 연합장로교회, 북미 개혁교회 등은 지적장애인의 공예배 및 성례 참여에 대한 실제적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 가톨릭, 루터교회 등에서도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한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고신 교단에서 관련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보통 지적장애인들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을 갖거나 신앙고백하는 데 필요한 인지 능력이 결여돼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최신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어떤 아이들이든지 각 연령에 따라 나름의 종교적 개념을 갖추고 있으며, 의사소통이나 학습이 어렵더라도 시각·청각·촉각·미각 등을 자극하는 종교적 ‘경험’과 ‘학습’을 반복하여 이를 몸과 마음에 축적하면 ‘의미의 그물’을 엮어나갈 수 있다. 지적장애인들의 신앙 형성을 촉진하려면, 오히려 경험에 제약을 두지 않고 예배와 성례에 참여하는 기회를 더욱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예배와 성찬 참여 자체가 학습과 변화의 중요한 동기를 제공한다. … 참여를 통한 내주(indwelling)는 몸에 새겨지는(inscribed)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지적 장애인들의 접근 자체를 막는 것은 그들의 신앙 형성에 큰 장애가 된다.”(228쪽)

성찬의 문제를 살펴보면, 이를 다루는 대표적 구절인 고린도전서 11:17-34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행적 해석이 적지 않은 이들을 ‘주의 만찬’에서 배제하기도 했다. 권연경은 《오늘을 위한 고린도전서》(IVP)에서 이 대목을 주해(441-477쪽)하면서 28절3)에 근거하여 “미처 해결하지 못한 죄가 있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한국교회 관행은 바울을 잘못 해석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약 40쪽 분량의 논증 중 일부를 정리하면, 28절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마치 선결 조건(자신을 살피는 행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읽히는데, 실상은 ‘조건’이 아니라 ‘방식’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 후에야”(개역개정), “그런 다음에”(새번역)라는 시간적 선후 관계를 의미하는 표현이 ‘오역’으로 잘못 들어갔고(책에 따르면, 오역된 부사는 대부분 ‘이처럼’ ‘이런 식으로’로 번역된다), 이를 바로잡으면 자신을 살핀 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며’ 성찬에 참여하라는 말이 된다.

먼저 참석한 ‘부유한’ 신자들이 뒤에 올 ‘가난한’ 신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만찬을 가져다 먹으면서, 배고픈 상태로 모임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속출했던 고린도 교회의 ‘파당적 행태’를 비판하는 고린도전서 11:17-34의 상황적 맥락을 고려하면 “자기를 살피는 것은 식사 중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위를 의미한다”(473쪽)고 해석해야 한다. 권연경은 만약 자격이나 조건을 붙여서 성찬에 참여하도록 할 경우, 은혜의 복음을 강조하는 바울의 메시지가 의도하는 바와 전혀 동떨어진 결과를 맞게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바울에게 있어서 성찬에서 배제되는 유일한 상황은 아예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경우”(474쪽)라고까지 못 박는다. 그가 강조하듯이, 죄책감 혹은 특정한 조건이나 제약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그때야말로 ‘주님의 몸과 피’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간이며, 하나님의 은총은 그 순간 가장 혁명적으로 임한다(477쪽).

질병과 장애는 우리를 성숙의 길로 이끌까?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희소한 상품’처럼 느껴진다.4) ‘최대한 시간을 짜내어 최대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지상명령인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사람들이 예찬하는 ‘속도’와 ‘효율성’이야말로 시장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앙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인들의 시간적 리듬에 발을 맞추는 행위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생존경쟁으로 몰아세우는 이 사회 가운데 위험천만한 도전이자 ‘낭비’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타자’를 진실하게 알아가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며 그의 언어와 리듬을 파악하는 ‘배움의 시간’ 가운데 자신을 던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때때로 이 길은 누군가에게 평생의 분투이다.

장애인은 그들의 일부가 된 장애를 안고 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늘 상기시킨다. 사실 비극의 대부분이 교만과 거대주의, 만용 등과 같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는 헛된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약함과 그 약함을 안고 사는 삶을 제시한다. 따라서 인간은 더 위대해지기 전에 더 원만해져야 하고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더 오래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인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이런 것들을 삶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안교성, 《장애인을 잃어버린 교회》, 홍성사, 227쪽)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자신의 질병 경험을 풀어낸 책 《아픈 몸을 살다》(봄날의책)에서 “신은 창문을 닫으시면서 문을 여신다”(246쪽)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질병과 장애는 언제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가? 우리를 성장과 성숙의 길로 이끄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익히 들어서 알고 있듯이, 사도 바울은 몸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두고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라고 표현했다. ‘간질’ ‘안질환’ ‘다리를 절었다’ ‘그 밖의 다른 장애’ 등, 바울이 활동하는 데 제약을 주었던 이 질병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실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로완 윌리엄스, 《바울을 읽다》, 비아, 47쪽). 바울은 이를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12:8), 기도 응답은 ‘치유’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12:9)라는 말씀을 받고,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12:10)라는 고백에 다다른다. 아서 프랭크의 말이나 바울의 신앙고백, 질병과 장애의 의미에 대한 여러 증언은 아름답고 은혜롭지만 한편으로는 크나큰 무게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장애인 정체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내 병을 갑자기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무어라고 답하게 될까? 기약 없는 이 ‘침묵’ 앞에서 나는 내 질병과 장애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가? 만약에 병을 고치는 약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이것을 먹을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곤혹스러운 물음들이 아닐 수 없다. 삶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여정’으로 다가온다. 이를 둘러싼 이야기는 연재의 마지막을 맞는 다음 글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 주

1) 그렇다고 해서, 발달장애 아이의 행동을 짐짓 모른 척하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이 또한 상대를 존엄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배려하기에 나온 반응일 수 있다.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2장(‘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에서, 이처럼 일상 가운데 벌어지는 배려의 상호작용을 ‘존엄의 퍼포먼스’라고 설명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66쪽) 등, 상대를 존중하기에 배우들처럼 ‘순간’을 연기하는 장면이 사례로 소개된다. 장애인은 상대적으로 행위규범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이 순간을 자주 맞이한다.
2) 참고할 만한 자료로는 김해용의 《발달장애인 성례지침서》(한장연, 2009), 김홍덕의 《교회여! 지적장애인에게 성례를 베풀라》(대장간, 2013)와 문화랑의 《예배학 지도 그리기》(이레서원, 2020)에 실린 ‘지적 장애인들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을까?’가 있으며, 이 대목은 문화랑의 책에서 주로 도움을 얻었다.
3)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이하 새번역)
4) 본 단락의 내용은 《로완 윌리엄스와의 대화》 제7장 ‘믿음에 관하여’, 그리고 월터 브루그만의 《완전한 풍요》(한국장로교출판사) 제4장 ‘시간’을 참고하여 작성했다.


강동석
본지 기자. 베커근이영양증을 진단받은 경증장애인이다. 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으며, 기독교 독립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