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도회주의는 대안인가?

[388호 수도회, 길을 묻다]

2023-02-28     최종원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요청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는 고전적인 수도회주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주류 종교개혁 진영의 흐름과 달리 다양한 종교개혁 분파는 수도회주의가 담보했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재세례파의 경우 전통적인 제도교회와 긴장을 유발했다. 그들 시각에서는 4세기 이래 지속된 제국 종교로서의 로마 가톨릭이나, 16세기 종교개혁 이래 등장한 국민국가의 국교가 된 주류 개신교파들은 이른바 세속 권력과 종교가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었다. 반면 재세례파는 이 땅에 속해 살아가지만 정신적·물리적으로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의 공동체로 존재했다. 국가주의에 속한 종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살아내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였다. 산상수훈은 그들이 살아내야 할 제자도의 가치였다. 전통적인 수도 공동체처럼 독신을 주장하거나 청빈이나 순명과 같은 가치를 앞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국가라는 세속의 길 너머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며 지속적으로 세속과의 긴장을 유발했다. 그렇지만 그들 스스로 수도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재세례파 운동이나 그 후 종교개혁의 다양한 운동들은 제도교회와 완전히 분리되는 정체성을 가졌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제도교회와 연결된 수도 공동체와는 차이가 있었다.

수도회는 대항문화의 성격을 지녔지만 제도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수도회는 제도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촉매였다. 그 제도교회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수도 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은 필요했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유럽 대부분의 개신교 국가에서는 국가교회가 강화되면서 교회는 사회의 윤리·도덕·문화를 형성하고 때로 변혁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 한편으로 기독교의 가치를 담아내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이념과 지향에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거나 이용당하는 현실이 분명해졌다. 종교가 세속 권력에 긴장을 주기보다 근대 개별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스도교와 세속 권력이 결합해서 탄생한 콘스탄티누스주의는 근대 제국주의 각축 가운데 견제 없이 확장되었다.

종교는 이제 보편적인 덕과 윤리의 보루가 아니었다. 제국의 힘 앞에 종교는 무력했다. 양차 대전은 유럽이 덕을 잃어버린 야만의 시대로 접어든 신호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떠안은 독일이 1933년 히틀러를 새로운 국가 지도자로 선출하면서 독일 그리스도교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독일 개신교 지도자들 중에는 교회가 공산주의 무신론과 맞서 싸울 보루라는 인식이 있었다. 강력한 독일을 위해 교회는 국가의 가치를 대변하는 자리에 서고자 했다. 하지만 국가와 교회의 이러한 관계를 단순히 독일의 특수한 상황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적어도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국가주의를 수호하는 적극적인 수단이었다. 나치 제국에 맥없이 무릎 꿇은 독일 교회에 깊은 좌절을 경험한 본회퍼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 출현에서 교회 회복을 기대했다. “교회의 회복은 분명 새로운 종류의 수도회주의에서 나올 것이며, 그것은 오래된 것과 공통점이 없으며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타협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사람들을 모을 때가 왔다고 믿는다.”1)

이로써 근대 개신교 역사에서 신수도회주의라는 자의식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본회퍼는 2년 남짓 지속된 핑켄발데 신학교에서 자신이 구상한 수도회 정신을 실험했다. 새로운 수도회는 수도 서약을 매개로 한 독신 공동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옛 수도회와 공통점이 없다. 그럼에도 국가주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타협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인 수도회와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

그 후 수십 년간 개신교에는 신수도회주의라 부를 수 있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본회퍼가 꿈꾼 이상의 직접적 유산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신수도회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초기 수도회가 나왔을 때와 유사하다. 제국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로 향하는 것이었다.

파편화된 사회와 공동체의 도덕

1998년 조너선 윌슨의 《파편화된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기》(Living Faithfully in a Fragmented World: From ‘After Virtue’ to a New Monasticism)는 도덕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을 분석하면서 신수도회주의를 정의하는 데 구체적인 디딤돌을 놓았다. 윌슨은 윤리 이론을 바탕으로 서구 문화를 광범위하게 분석해낸 매킨타이어의 저술을 통해 현대 교회가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문화의 파편화와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실패를 분석한다.2)

매킨타이어는 현대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가 아닌 파편화된 사회라고 도발한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차이를 용인하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다원주의라면, 파편화된 사회란 공동체를 지탱하는 공통의 윤리와 도덕성이 상실된 야만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비교적 일관된 공동체와 전통이 있었던 시대가 사라지고, 이제는 파편화된 시대가 되었다.3) 매킨타이어는 유럽에서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단정한다. 계몽주의는 유럽에 이어져 내려온 도덕적 전통을 부정하고, 인간 이성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한 새로운 인간상을 기대했다. 이제 서양 문화는 도덕성에 대한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정당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계몽주의 이래 유럽인의 진보에 관한 환상은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에 대한 침탈로 이어졌다.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야만의 시대를 정당화했다. 과거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이민족의 침입기와 같은 암흑기가 펼쳐졌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살아있는 전통이란 역사적으로 확장되고 사회적으로 구현되는 합리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전통이 보수적일 수는 있지만 정적이지는 않다. 어떤 전통들은 변화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해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전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생하는 내외부의 긴장과 모순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여 전통을 이어가거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기도 한다. 전통과 도덕이 사라진 곳엔 야만이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야만의 주체인 국가나 제국은 보편적인 도덕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이 불러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기대왔던 근대 계몽주의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근대가 약속한 진보 대신 암흑이 깊게 드리웠다. 매킨타이어는 새로운 공동체 구축을 대안으로 삼는다. 그는 로마제국 말기 새로 등장한 공동체를 소환한다. “선한 의지를 가진 남녀들이 로마제국을 지지하는 의무를 벗어버리고, 제국의 유지와 시민성 및 도덕 공동체의 지속을 동일시하기를 그만두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비록 그들이 한 것에 대해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성취를 이루었고, 그 결과 도덕적 삶을 유지하여 다가오는 야만과 암흑의 시대에도 도덕성과 시민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4)

매킨타이어가 지적한 것은 제국의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환원하여 스스로 정당화해온 유럽 문명을 향한 고발이었다. 도덕성과 시민성이 상실되고 폭력과 광기가 지배하는 극단 사회에서 어떤 대안이 제기될 수 있을까? 그는 오래전 서구 사회에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제국을 지지하는 행위를 멈추고, 제국의 가치와 시민성, 도덕성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인식한 바로 그 시점이 어둠을 벗어버리는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이 출발은 위로부터 형성되지 않았다. 선한 의지를 가진 아래로부터 형성된 흐름이었다. 그와 더불어 출발한 새로운 공동체 등장에 주목한다. 제국의 가치와 자신들의 가치를 동일시하지 않고, 제국의 목적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도덕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제국으로 대표되는 야만과 암흑의 시대에 문명을 일구어갈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매킨타이어는 덧붙인다.

우리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나의 설명이 맞다면 우리도 이제 그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닥친 새로운 암흑시대를 통해, 시민성을 갖춘 지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암흑시대 속에서도 덕의 전통이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면, 희망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야만인들이 국경 너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꽤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했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틀림없이 매우 다른, 성 베네딕트를 기다리고 있다.5)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매킨타이어는 유럽 문명이 마주한 전대미문의 암흑기에 시민성을 갖춘 지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지역 공동체는 제국이 지배하는 가치를 거부하고 그 너머의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제국은 자신들의 지배적인 문화를 강제하며 힘에 의한 지배를 추구한다. 그 가치에 저항하기란 간단하지 않다. 야만의 제국은 외부의 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 삶에 익숙하게 뿌리내렸다. 유럽인들은 자신들 내부에 자리 잡은 야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진보와 근대화의 이름으로 식민 침탈을 정당화했다. 오랫동안 제국이 약속하는 풍요와 제국의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인 폭력을 방관했다.

매킨타이어는 이 암흑시대를 헤쳐가기 위해 덕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야만의 땅에서 그리스도교의 덕을 바탕으로 유럽 문명을 가꾼 베네딕트 수도회 창시자 성 베네딕트를 기다린다. 세계대전의 야만이 쓸고 지나간 부조리한 자리에 누구인지 모를 ‘고도’를 기다리는 현실에서, 그는 또 다른 형태로 등장할 공동체를 기대했다.

윌슨은 또 다른 베네딕트를 기다리는 일을 새로운 수도회주의에 대한 요구로 읽었다.6) 그렇게 되면, 제국과 시민 공동체의 관계는 제국의 가치를 고스란히 담은 제도교회와 새로운 수도회의 관계로 치환할 수도 있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 성장에 국가교회는 정신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고, 종교 윤리와 도덕을 제국의 가치와 동일시했다. 종교적 덕목으로 제국 문명을 바꾸는 문화 변혁을 꿈꿨지만, 국가라는 세속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긴장은 일정 부분 타협하여 해소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문화와 가치를 변혁하기 위해 제국의 중심부에 진입해야 한다는 명제는 교회의 삶이 제국의 문화와 깊이 얽히도록 만들었다.

교회와 세속 문화 사이의 긴장이 상실될 때,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닮아갔다. 확장하기 위한 효율과 통제는 국가나 교회가 모두 추구했다. 영웅적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지도력을 기대하는 수직적 위계를 형성했다. 가장 효율적인 지배와 통제의 방식은 전체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에서만 발견되는 양상이 아니라, 효율과 효과를 극상의 가치로 놓고 다름과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한 근대성의 한 부정적 특성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해야 하는 곳이 되었다. 이를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관리 방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실천의 장이 되었다. 또한 교회는 국가주의 가치를 공공연하게, 혹은 내밀하게 지지하는 정신적인 지지 세력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정치와 종교가 서로 지나치게 친밀하게 얽혀있는 가운데, 제국 너머의 가치를 추구할 고등 종교의 자리는 줄어든다.

정치화된 종교란 단순히 국가의 지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속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교회가 지닌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맞서는 일 역시도 제국의 가치를 담은 종교의 특징이다. 이는 세속적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매킨타이어의 분석을 교회로 옮겨온 윌슨은 도발적인 제안을 던진다.

서양 문화 속에서 교회의 삶에 대한 나의 비판이 타당하다면 교회가 신실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의 삶을 문화와 분리하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삶을 문화로부터 분리하는 우리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 문화가 교회 일부가 되기에는 너무 악해서 문화에서 손을 떼는 것은 아니다. 복음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증언하는 증인으로서 세상 속에 있어야 하는 게 교회의 사명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더 이상 신실하게 사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교회의 삶이 굴복한 때가 있다. … 그럴 때 교회는 “나쁜” 사회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실한 삶을 회복하고 교회의 사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기 위해 신수도회주의로 물러나야 한다.7)

윌슨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제국의 문화와 가치를 거부하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공인과 제도화를 경험한 이래 교회에는 역사 속에서 늘 세속 문화에 개입해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제국의 중심부, 심장을 향한 추구는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패배적, 도피적, 심지어 급진적이라 보았다. 후기 그리스도교 사회의 현실에서 선택할 길은, 교회가 옛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있지 않고 제국과 교회가 긴장 속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자리임을 분명히 했다. 그 자의식이 신수도회주의라는 이름 속에 담겨있다. 신수도회주의는 교회의 세속화를 자각하고 자발적으로 사막에 들어간 수도사들이 남긴 자취를 따라, 21세기 제국 문화 속에서 같은 자각을 가진 이들이 건설해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들은 분명 대항문화적이지만, 교회와 대립하는 반교회성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제국 교회의 현실에서 본회퍼가 처음 제기하고, 제국의 어두움과 야만이 지배한 근대 세계에 대한 반성으로 조너선 윌슨이 다시 불러낸 이래 신수도회주의를 내세운 다양한 실험이 북미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새로운 수도회의 열두 가지 표지

쉐인 클레어본의 ‘심플 웨이’와 조너선과 레아 윌슨하트그로브 부부가 시작한 ‘룻바 하우스’는 신수도회주의 자의식을 가지고 수도회의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공동체이다. 펜실베이니아의 버려진 뒷골목의 이웃들과 함께하기 위해 1998년 쉐인 클레어본과 6명의 친구들은 한 건물을 구입하고 입주하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공동체를 시작했다. 2003년 조너선과 레아 윌슨하트그로브 부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이라크 평화여행단 멤버로 이라크를 방문했다. 여행 중, 부상당한 동료 한 명이 최근 미국의 폭탄 공격을 받은 룻바 마을 한 이라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라크인 의사는 치료비를 받지 않고, 대신 조너선과 레아에게 룻바에서 일어난 일을 세상에 알려달라고만 부탁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조너선과 레아는 그곳에서 경험한 환대를 실천하고자 인종 간 화해를 실천하는 공동체인 룻바 하우스를 시작했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사들처럼 규칙을 발전시켜 공동체를 운영했다. 심플 웨이와 룻바 하우스는 모두 산상수훈을 실천하기 위해 인종과 계급 분열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공동체이다. 그들은 제국 내 버려진 곳으로 이주했다. 스스로 중산층 삶의 혜택을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로 선택한다.

이들 공동체에는 가톨릭, 주류 개신교, 재세례파 등을 포함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리보다는 공통된 삶의 지향을 매개로 모였다. 2004년에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신수도회주의의 12가지 표지로 정리하여 발표했다.8) 이 지표는 특징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향한다. 제국의 버려진 장소로의 이동은 새로운 수도회 운동이 제국이 대표하는 주류 문화와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의 방식을 따르지 않아서 발생한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선택이다. 새로운 수도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혁명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장소이다. 제국의 통치가 닿지 않고 제국의 관심에서 멀어져 남겨진 사람들을 찾아가 경제적 자원을 나누고 환대를 실천한다. 조너선과 레아가 이라크 룻바에서 경험했던 환대는 낯선 나그네, 이방인에게 베풀어졌다. 우리는 누구나 한때 이방인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낯선 이방인을 향한 환대의 의무를 강조한다. 나그네와 식탁을 나누고 친절하게 맞아주는 행위는 천사를 대접하는 행위이다. 나그네를 향한 환대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공동체 내 인종적 분열에 대한 화해의 실천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교리로 구별 짓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인, 헬라인과 야만인의 경계를 넘는 보편적 인권을 실천하는 공동체였다. 분열된 언어로 인종과 문화를 나누는 행위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분열이 아닌 포용과 통합을 이야기할 때 존재 의미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지역 공동체와의 연계를 강조한다. 본회퍼는 교회 회복이 신수도회 운동의 목적이라고 했다. 교회 밖 갱신 운동은 스스로를 세상과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적인 교회 공동체와의 연계마저 끊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파라처치(parachurch)가 아닌 프로처치(pro-church) 정체성을 내세웠다.9) 지역 경제의 지원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을 돌보는 행위는, 이 세상을 긍정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움직임이다. 지역사회 내에서 폭력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며 평화를 만드는 일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이상적인 논의가 아닌 현실에서 순종하고 추구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셋째, 공동체 규율과 개인의 덕성을 훈련한다. 신수도회가 제국의 버려진 사람들을 향하고 지역 공동체와 연대하는 일을 지향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성이다. 그 공동체성을 위해 오래된 수도회 방식을 인용한다. 물론 수도회의 청빈과 순결, 순명의 서약도 공동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지만, 신수도회주의는 수도 서약을 한 개인이 아닌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좀 더 느슨한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의 유지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서 보였던 더 큰 규모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방식을 따른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재화를 공유하기도 했다.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련의 삶을 규칙으로 만들었다.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지리적 근접성은 일상의 삶에서 예배, 기도, 교제 또는 영적 지도 등을 용이하게 구현할 수 있게 해준다. 공동체는 규율로 유지되지 않는다. 관상생활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도와 독서, 사색 등을 통해 공동체 개개인이 단독자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설 수 있을 때, 공동체는 사회적 저항을 향해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본회퍼가 문제 제기한 이후 북미를 중심으로 생성된 신수도회주의의 흐름에 전형적으로 젊은 백인 중산층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운동이라는 비판도 있다. 제도교회와 마찰을 야기할 분파적 성격을 지닌다는 비판도 그러하다. 또한 명시적으로 수도회라는 ‘가톨릭’적 가치가 드러나기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수도회 운동은 현대 개신교가 가진 취약점을 성찰한 산물이다. 소비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가치에 젖어있는 제도교회 현실을 오랜 과거의 거울 앞에 비춰볼 수 있게 해준다. 개신교의 열광적이고 분주한 이미지, 또는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도 포함한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모습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고 근원적으로 다른 모습의 가능성을 열어두기에, 교회다움이 무엇인지 순수하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선을 끈다.

사회·정치·경제·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제국에서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평화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깊어져야 한다. 고민이 진지하다면, 새로운 수도회주의도 열린 마음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안이냐는 물음에 대해

오늘 교회의 위기는 신학교의 위기인지도 모른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출되는 목회자들의 목소리는 모두 근대성에 뿌리내리고 있다. 상호적 관계가 아닌 비인격적 공동체 구조 속에서 구성원은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관리 대상이 된다.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교회 직제와 그 정점에 있는 설교권은 비대칭성을 무한히 확대한다. 이제는 이 구조의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회는 공동체성을 잃었다. 공동체는 너와 나의 존재가 동등하게 인정되고 다름이 존중될 때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 공동체성이 상실되면 교회도 물질적으로 환원하여 성장과 번영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은 배제된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소비주의를 거스를 수 없으며, 사회 여러 문제를 국가주의 통치의 효율에 기반하여 풀어가는 국가 폭력에 저항할 수 없다.

신수도회 운동의 지표들 중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제국의 버려진 장소로의 이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그저 관념적으로 받아들여 왔음을 일깨운다. 과연 교회가 제국의 버려진 장소, 즉 잊히거나 힘이 없고 추방되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버려진 장소를 고민하는가? 맥킨타이어에 따르면, 덕성의 발전은 공동체의 맥락과 분리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가 가진 주변성, 타자성에 대한 고민의 깊이만큼 그 속의 개인도 가치를 공유하고 발전할 수 있다. 교회가 중심을 지향하고, 걸리적거리는 요소들을 배제하고 차별한다면 교회는 산상수훈이 가리키는 평화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시민성과 도덕성을 상실하고 제국의 가치에 따르는 교회는 본회퍼가 지적한 대로 교회일 수 없다. 교회 회복은 버려진 장소, 주변성의 회복에서 시작한다. 사회변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영향력의 덫에서 이제 빠져나와야 한다. 제국이 정해놓은 틀과 방식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길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과격한 형태의 저항이다.

2천 년 교회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상 주변성과 경계성의 가치를 새롭게 들고나온 수도 공동체가 있었다. 기성의 사회나 제도교회에서 바라볼 때는 늘 급진성이라는 혐의가 가해지기는 했지만, 수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실천하고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초대교회의 삶을 살아내려는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구태의연해 보이지만 진지한 물음, 즉 ‘성경적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고 해서 그르다 단정 짓는 성급함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와 별개로, 새로운 수도 공동체가 기성 교회의 대안이냐는 물음은 좀 다른 고민거리를 던진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층위로 답할 수 있다.

첫째, 제도교회를 대체하는 목적을 지니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안은 아니다. 제도교회는 2천 년 흘러온 대로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수도 공동체에는 아픈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건강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이 있다. 본회퍼가 그랬듯,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가 그랬듯, 새로운 수도회주의는 ‘교회 회복’을 목표로 한 운동이라는 자의식을 지닌다.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는 “아무리 안에서 악취가 나더라도, 그것(교회)이 이 세상을 살아서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로 결심하신 방법”이라고 인정한다.10)

둘째, 기성의 익숙한 종교성과 종교적 실천을 재고하도록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대안이다. 근대 세계 출현과 더불어 발전한 개신교는 효율, 생산성 및 효과적인 관리라는 근대성이 가장 잘 구현된 공간이다. 한국적인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자. 교회는 성장해야 했고, 모든 개척교회 목표는 자립이어야 했다. 더불어, 교회는 이른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여야 했다. 성장과 자립이 하늘로부터의 복이라는 명제 앞에 한 개인의 가치는 결국 숫자로 환원된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명목으로 교회는 기성 사회가 설정한 구조와 가치를 충실하게 따랐다. 개인이 존중되는 공동체성이 퇴색하고,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대항성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수도회 정신은 교회 목표가 성장과 (목회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자립이 아니며, 교회가 반드시 세상 속에서 변혁의 주체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한 해에 수천 명씩 배출되는 목회자들이 미자립교회를 자립으로 전환할 대상으로 보기보다 성과 속의 구별 없이 같은 소명을 지닌 형제와 자매의 공동체라고 여긴다면, 성직주의에 기반한 제도교회를 넘어선 상호 평등한 자립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제국의 중심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살아가는 대조 공동체의 실천에 무게중심을 옮긴다면 오히려 작금의 상황이 다양한 시도를 가능케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인 수도사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수도사의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표면적으로는 수도사 제도를 없앤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사와 같은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한 사건이다.

 ■ 주

1) E. Bethge, Revised and edited by Victoria Barnett, 《Dietrich Bonhoeffer: a biography》(Fortress Press, 2000), 462쪽.
2) Jonathan R. Wilson, 《Living faithfully in a fragmented world: From after virtue to a new monasticism》(Cascade Books, 2010).
3) 위의 책, 24-39쪽. 
4)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2nd ed.)》(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263쪽.
5) 위의 책, 263쪽.
6) Wilson, 《Living faithfully》, 69-70쪽.
7) 위의 책, 70-71쪽.
8) Jonathan Wilson-Hartgrove, 《New Monasticism: What It Has to Say to Today’s Church》(Brazos Press, 2008), 34쪽.
①제국의 버려진 장소로의 이전 ②공동체 구성원들 및 가난한 사람들과 경제적 자원 공유 ③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겸손한 복종 ④공동의 삶에 대한 규칙을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과의 지리적 근접성 ⑤낯선 사람에 대한 환대 ⑥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공동생활 육성 ⑦마태복음 18장을 따라 지역사회 내 폭력의 한가운데서 평화 도모 및 갈등 해결 ⑧교회와 공동체 내의 인종적 분열에 대한 애통과 적극적으로 공정한 화해 추구 ⑨주어진 하나님의 땅 돌봄 및 지역 경제 지원 ⑩부부와 그 자녀들 및 독신자들 지원 ⑪옛 수도회의 노선에 따라 그리스도의 길과 공동체 규칙의 형성 ⑫관상생활 훈련에 대한 헌신
9) 위의 책, 199-120쪽.
10) 위의 책, 120쪽.

 

 

■ ‘수도회, 길을 묻다’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