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자식을 버리다
[388호 그 사람의 설교 노트]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눅 13:31-35, 이하 새번역)
아름다운 전통, 독이 되는 전통
1세기 원시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전통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교회가 아름답게 이어가고 있는 전통 중 하나는 절기입니다. 특히 부활절과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을 기리는 매우 중요한 절기로 거의 모든 교회가 지키고 있습니다. 성탄절은 언제나 12월 25일인데, 부활절은 해마다 날짜가 바뀝니다. 처음 절기를 정한 때의 달력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력 기원후 325년, 로마제국의 한 지방인 니케아(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니크)에서 세계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를 엽니다. 주교들은 춘분 이후 보름달이 뜬 다음 첫 주일에 부활절을 기념하기로 협의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주일을 뺀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주일이 사순절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예배)의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대교회로부터 이어온 유산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의 정신 위에 세워졌고, 그 정신이 전통으로 발현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전통을 아름답게 계승해야 하고, 그 정신을 교회의 밑절미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이 독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전통이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경우입니다. 만일 전통 때문에 주변부로 밀려나는 이가 생긴다면, 그 전통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즉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유산입니다. 전통을 존중하되, 언제나 비판적으로 숙고하고 성찰하며 동시대에 온당하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 개혁교회는 우리에게 이것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전통에 사로잡힌 집단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 수호를 목숨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정신이 아닌 조항에 집착했기에 그들이 세운 전통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보다 빼앗고 죽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안식일 법이 좋은 예가 됩니다.
‘안식일’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되려면 재산이 많은 주인이 모든 식솔에게 참된 쉼을 제공해야 합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의 안식일 법은 모든 사람이 아닌 식솔을 거느린 성인 남성을 향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출애굽기 23:10-13을 보면 안식일에 사람과 가축이 온전히 안식하기 위해 가장이 쉬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율법이 ‘전통’으로 기능하고 있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그 정신을 완전히 왜곡해 버렸습니다. 목동의 존재가 대표적인 보기입니다. 목동은 안식일에 쉴 수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내일은 안식일이니 아무 노동도 해서는 안 된다, 밥도 지어서는 안 되니 하루 전날 미리 준비해놓은 것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면 안식일에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축을 돌봐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식일에 새끼를 낳으면 받아야 하고, 먹을거리도 주어야 하고, 무리로부터 이탈한 양이나 염소를 찾아 나서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참 아이러니하게도 예수 당시에 목동들은 직업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요. 그렇게 유대 종교 공동체는 ‘죄인’을 생산하는 기구로 전락했습니다. 전통을 아주 잘못 쓴 결과입니다.(눅 14:1-6 참고)
그들은 왜 예수에게 떠나라고 했나
오늘 본문은 그런 율법의 수호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떠날 것’을 요청하는 내용입니다. 헤롯 왕이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도망가라는 말입니다. 어떤 주석에는 바리새인 중에 예수께 호감을 느끼고 있던 무리가 예수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라고 해설하는데, 그 반대의 해석이 더 신빙성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로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요한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았고 이에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팔레스타인의 인기 스타였습니다. 많은 민중이 그를 따랐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역을 통치하는 헤롯 입장에서 큰 세력을 거느린 요한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아마 요한에게 지역을 떠나라고 여러 번 종용하지 않았을까? 상상력을 발휘해봅니다.
헤롯은 자기가 직접 요한의 처형을 결정하지 않고 의붓딸이 요청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모양새로 일을 해결합니다. 결국 요한은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바로 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창문 너머 구경꾼 둘이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두 사람을 바리새인이라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 종교적으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바리새인들.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한을 따르고 있으니 배가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헤롯이 요한을 죽였을 때 가장 기뻐했을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예수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과연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떠나라고 말했을까요? 자기들의 영역에서 활개 치는 예수가 몹시도 꼴 보기 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복음주의권에서 매우 권위 있게 여기는 ‘WBC 성서 주석’에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의도에 대해 여러 가설을 내놓으며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유일하게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호감을 나타낸 이 본문을 호의로만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예수는 어디에 계시든 존재감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존재감이 축복인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존재감이 거북스러운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율법의 수호자였던 바리새인, 통치자였던 헤롯은 예수가 거북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누가 예수를 따르고 누가 예수를 거부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사람 잡는 예루살렘
예수는 헤롯을 여우에 비유하며 그의 야비함을 꼬집으십니다. 사실 헤롯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야비함도 지적하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피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예루살렘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와 제자들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 길 위에서 예수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하늘 복음을 가르치십니다. 34절 이하에서는 당신이 가셔야 할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를 죽이는 곳,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자식들을 새들이 새끼를 돌보듯 보호하려고 하셨지만, 예루살렘은 그 보살핌을 거부했답니다.
율법에 보면, 거짓 선지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있습니다(신 13:5).
예언자나 꿈으로 점치는 자들은 당신들을 미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에서 당신들을 인도해 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당신들을 속량하여 주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며,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당신들을 떠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서 당신들은 당신들 가운데서 그런 악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반만 따르고 반은 버립니다. 아주 대표적인 보기가 역대기하 24:20 이하에 나옵니다.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되어,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나 하나님이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님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없앨 음모를 꾸몄고, 드디어 왕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성전 뜰에서 그를 돌로 쳐죽였다.
율법서는 분명 ‘거짓 예언자’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죽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악을 뿌리째 뽑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요아스 시대에 종교개혁을 이룬 여호야다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 앞에 나아가서 선포한 예언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분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그를 죽입니다.
그렇게 헤롯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도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갈 길을 가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안식일 논쟁’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구실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할까. 예수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죽어야 마땅한데, 성경과 교회의 오랜 역사에 새겨진 전통은 참 선지자들이 죽어간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버린 도시에 가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행위를 ‘자식을 버린 것’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돌보려 했으나, 예루살렘, 그러니까 예루살렘 종교 시스템이 선지자들을 죽여 거부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되새겨보니 섬뜩합니다.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성과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둔갑시켜놓은 이 세대가, 아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당히 받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다음 세대를 어떻게 길러내고 있는지 성찰해봅니다.
왜 죽었는지를 물어 마땅한 일에 왜 거기에 갔는지를 캐물으며 이미 떠난 젊은이들을 두 번 죽이는 교회, 너무나도 손쉽게 ‘이단’ 딱지를 붙여 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박살 내는 교회, 숨죽이고 살아가는 이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며 자신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교회…. 예수께서 자식을 버렸다고 꼬집으신 예루살렘 상황과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묵묵히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고창병 든 사람을 고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천국 복음을 전합니다. 수많은 병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연약한 자들 편에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십니다.
앞서 언급했던 질문을 다시 나눠봅니다. 누가 예수를 따르고 있고, 누가 예수를 배척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식을 버린 예루살렘의 종교 문화는 현재 진행형이기에 이 질문은 여전히 유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나누는 우리가 자식을 죽이는 예루살렘의 종교 문화를 더 공고히 하는 자리에 서있는지, 예수의 발걸음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고 있는지. 간절히 바라건대, 예수를 따라 자식을 버린 예루살렘으로 가서 생명을 건져내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민대홍
책 만들며 목회하는 일목. 작음을 지향하되 연대를 추구하며, 평신도와 목사가 서로 행복한 교회, 예배와 예전 등 모든 교회 사역을 공동체 구성원들과 골고루 나누는 목회를 꿈꾼다.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서로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