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성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388호 무브먼트 투게더]

2023-02-28     강은빈

브레히트의 시 〈임시 야간 숙소〉를 좋아한다. 겨울 저녁마다 한 남자가 뉴욕 길거리 한 귀퉁이에서 무숙자들을 위해 돈을 걷어 임시 야간 숙소를 마련해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 /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다 / 그러한 방법으로는 착취의 시대가 짧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고통 겪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삶의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하겠습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2021. 8. 17.)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합동 사회장. (이하 사진: 필자 제공)

2021년 여름, 청계천 광장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합동 사회장’이 열렸다. 내가 활동하는 청년기후긴급행동 이름으로 현장에 연대하기 위해 전철을 타고 광장 분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광화문역 광고판 기둥 앞에 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서계셨다. 할아버지는 대뜸 나에게 5만 원만 달라고 하셨다. 나는 걸음을 멈춰 서서 왜 돈이 필요하신지 여쭤보았다. 다리가 붓고 온몸이 쑤셔서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고 싶은데 돈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나는 돈을 드리면 곧장 병원에 갈 수 있는지 여쭤봤고, 그렇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에게 5만 원과 함께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드렸다. 병원에 다녀와서 꼭 전화 달라, 말씀드린 후 나는 다시 내 갈 길을 갔다.

며칠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할아버지였다. 이름은 김학성이고, 1947년 9월생 충청도 출신이라고 했다. 나와 꼭 50살 차이가 났다. 이날 통화를 마친 뒤에도 할아버지와 나는 서로 안부를 묻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브레히트는 거리 무숙자들의 숙소비를 마련해주려는 이에게 말한다. 하룻밤 동안 바람은 그들을 비켜갈 것이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눈은 길 위로 떨어지겠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이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다고. 브레히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치열히 살아가던 나의 일상에,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가난하고 병든, 성질 고약한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함께한 1년 3개월

초반에 만난 할아버지 모습은 꽤나 거칠었다. 사람들에게 쉽게 언성을 높이고 욕도 많이 하는 험상궂은 70대 노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았고, 늘 존댓말을 사용했다.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필요한 것들을 나에게 잘 말해주었다. 처음에는 도움 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은혜도 못 갚을 신세인데 염치없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친구 사이에 미안한 게 어딨냐, 미안해서 말 안 하면 할아버지만 손해라고 말했다. 돕기 어려워지면 바로 못 하겠다고 말할 테니, 할아버지도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필요한 게 생기면 일단 말해주기로 약속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먹고 싶은 간식, 반찬, 옷, 파스 등 필요한 것들을 술술 말해주기 시작했다.

우연히 응급실 차트에서 본 할아버지 진단서에는 “음주력: 젊었을 때부터 하루에 매일 1~3병씩. 4년 전부터 판막증 진단되며 금주”라고 적혀있었다. 술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고단한 세상살이 탓이다. 실제로 할아버지는 많이 편찮으셨고, 필요한 것도 많으셨다. 그렇지만 친구가 된 이상 그에게 쏟아야 할 시간과 돈에 대한 이해타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의 여생에 내가 얼마나 실질적인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무엇을 함께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 선고된 남은 생은 3개월 남짓. 의사는 2022년 2월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3개월하고도 1년을 더한 시간을 나와 함께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할아버지와 나는 조금씩 서로의 시간을 내어 일상을 공유했다. 동대문 시장에 가고, 전철을 타고, 안과에 가고, 이웃과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차를 마시고, 매운탕과 전복죽을 먹고, 청계천 거리를 걷고, 인천 앞바다에 다녀오기도 했다.

김학성 할아버지와 필자(오른쪽)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2021년 가을쯤이었다. 할아버지는 지내시던 은평구 쪽방에 불이 나서 급히 이사를 해야 했다. 은평구에서 용산구로 갑자기 주소지를 옮기면서 복지행정상 공백이 생겼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충당해야 할 생활비 금액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당장 필요한 돈을 구해야만 했다. 가족 없고 노동력 없는 병든 몸, ‘쓸모없는’ 몸을 가진 할아버지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틈틈이 할아버지 안부를 묻던 나조차 마음이 편치 않아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는 할아버지의 모든 필요를 충당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할아버지와 나의 이야기를 SNS에 공유했다. 감사하게도 60명 이상의 지인들이 기꺼이 일시·정기 후원으로 할아버지를 함께 보살펴주었다. 나는 그저 중간 다리 역할을 했을 뿐인데도, 마치 그들이 나를 보살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김학성 할아버지를 통해서 나는 혼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 된다는 걸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었다.

동자동 새 쪽방에 자리 잡을 때쯤부터 할아버지는 매일 밤 나에게 날씨 예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몇 시에 깨야 하는지 말하면, 그 시간에 맞춰 어김없이 모닝콜을 해주셨다. 바쁜 잠꾸러기인 나를 할아버지가 보살피고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아침에 잘 일어났는지, 밥은 먹었는지, 잠은 언제 잘 건지, 언제 할아버지 집에 들를 건지 궁금해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편했다. 많은 말과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관계. 있는 모습 그대로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나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관계는 왜인지 모를 해방감을 주었다.

‘무연고자’로 처리된 할아버지의 죽음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변하는 계절 따라, 할아버지는 점차 기력을 잃어갔다. 그는 매일 밤마다 병마와 싸우다 지쳐 잠들고, 이렇게 아프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며 울기도 했다. 배에는 복수가 차고, 몸의 마디마디가 겨울 가지처럼 앙상해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공개적으로 할아버지 사진이나 근황을 나누기도 조심스러워졌다. 면회가 제한된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은 점점 잦아지고 길어졌다. 할아버지는 스스로 핸드폰을 사용하기 어려워지셨다. 대신 할아버지 이웃분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2022년 12월 초, 이제 퇴원해서 집에 왔다고 하시기에 파스와 간식거리를 들고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갔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할아버지가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두 주가 지나도 퇴원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송구영신 인사차 할아버지 이웃분께 직접 전화를 드렸다.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그는 내가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다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할 때 ‘무연고자’로 접수되어서 무연고 사망 처리가 되었던 것이다. ‘무연고자’ 할아버지와 연고가 있던 나로서는 황망할 따름이었다. 문득 내게 할아버지 안부를 묻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직접 할아버지의 요양보험을 알아봐준 채희, 부산에서 지내는 나 대신 할아버지께 맛있는 거 사드리라며 돈을 부쳐주곤 하던 은지, 내가 전화 안 될 때마다 할아버지가 전화 기다리고 계신다고 귀띔해주던 해와 채원…. 이들에게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감히 부고를 알리는 게 맞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격리된 병동에서 홀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나의 쓸모는 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사회적 친족’

이 황망한 소식을 혼자서 삼키지도 머금지도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여느 때와 같이 정기 회의가 있는 날, 회의가 끝날 무렵 나는 동료들에게 할아버지 소식을 전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감사하게도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함께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지 제안해주었다. 2023년 1월 18일, 할아버지가 승화원 화장터에 몸을 맡기는 날 밤, 우리는 ‘사회적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추모식을 진행하기 위해 모였다. 청년기후긴급행동 멤버들뿐 아니라 김학성 할아버지를 멀리서, 또 가까이서 지켜봐주셨던 분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채워주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멤버들은 각자의 몫으로 추모에 동참했다. 해의 헌화, 주석의 사회, 현지의 촬영, 채원의 추도사, 소영과 윤석의 피아노 연주가 이어졌다. 나는 노래로 추모의 마음을 나누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부네요〉라는 곡을 준비해갔다. 노랫말에 담긴 나의 마음을 풀어보면 이렇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늘도 바람이 부네요. 그곳에선 춥지 않으신가요? 할아버지 얼굴이 문득 떠오르는 밤입니다. 쉽게 곁을 내주지 않던 저의 마음을 열게 만든 할아버지의 웃음과 목소리가 생각나요. 할아버지, 산다는 건 정말 신비한 축복입니다. 바쁘고 치열하게만 살아가던 저의 삶에 할아버지가 스며든 건 더욱 더 신비한 축복이었습니다. 제게도, 할아버지에게도요.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촘촘하게 복잡하게 얽혀있어요. 저마다의 몫이 주어진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요. 이 세상엔 쓸모없는 삶, 필요 없는 삶은 없어요. 내가 잘 살아간다는 건, 곧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에요. 할아버지는 이곳을 떠났지만, 내 주변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할아버지를 함께 기억해주는 귀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저는 제게 허락된 앞으로의 삶 동안 마음을 열고, 옆에 있는 이들의 손을 잡고, 마주하려고 해요. 할아버지와 제가 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 맘껏 의지하고 함께했던 것처럼요.

추신.
지면을 빌려 특별히 감사드릴 분들을 떠올려봅니다. 혼자서는 할아버지 약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고민하던 때에 SNS 모금을 해보라며 제안해주고, 첫 번째이자 마지막 후원자로 묵묵히 시종을 함께해준 상현이. 연말연시 바쁜 일정에 할아버지 부고를 마주할 엄두도 못 내던 제게 선뜻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함께 할아버지를 추모하자고 제안해준 주석님. 덕분에 저도 주변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꺼내고, 도움을 청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청년기후긴급행동의 사연을 듣고 기꺼이 추모 공간을 내어주시고 늦은 밤 시간까지 환대해주신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채비’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김학성’들을 위해 한결같이 동자동 골목에서 목회하고 계실 하늘소망교회 구재영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강은빈
더 나은 지구를 상상하는 청년기후긴급행동(김공룡과 친구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2020년 기후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베트남 석탄발전소 수출에 반대하는 기후불복종 행동 이후 민/형사 재판을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