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388호 시대를 잇는 읽기] 미로슬라브 볼프의 《기억의 종말》(IVP, 2022)
난처한 변호
미로슬라브 볼프는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삶의 이야기를 신학의 언어로 풀어내어 진솔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신학자다. 어린 시절 그는 동네 사람들이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서로 싸우던 모습을 지켜봤으며,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 작은형이 군인들의 실수로 죽는 사건을 경험했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엄청난 상실과 고난을 경험한 볼프에게 용서와 화해는 그저 신학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실존의 문제였고, 어떻게든 풀어내야 할 삶의 현실이었다. 용서와 화해는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확연히 구분된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권면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정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만 하는 신앙의 결단일 수도 있다. 또한 용서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말 한마디, 눈짓 하나의 디테일이 갖는 전달력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민감하고 어려운 감정의 경계선을 볼프는 차분한 신학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전달한다. 문제는 이 책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보편적 정서를 거스른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래서 나는 이 책과 볼프의 견해를 옹호하고 변호할 자신이 없다. 최대한 볼프의 입장에서 이 책의 논리와 주장을 설명해보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먼저 이 책의 저술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사회적 참사나 어떤 악한 일을 당한 희생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어떻게 가해자를 용서하고, 그와 화해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또 이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다루는지 이야기한다. 따라서 악한 일을 한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어떻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에 관한 언급이나 희생자를 돕기 위한 사회제도,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후속 조치를 둘러싼 언급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마음 한쪽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다. 저자가 아예 처음부터 책의 목적이 그런 내용을 다루는 데 있지 않다고 했으니 일단 넘어가자. 하지만 심기가 더 불편한 부분은 볼프가 올바른 기억을 위해 희생자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점이다.
이 책은 기억과 용서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 두 가지를 교정한다.
첫째, 우리가 사회적 참사나 악행의 희생자를 기억하는 이유는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규명해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안전한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다. 그런데 볼프는 이를 위한 희생자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걱정한다. 희생자의 기억은 가해자를 공정하게 다루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을 부풀리는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기억이 바로 상징권력으로 바뀌어 보복을 위한 수단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자 하는 목적은 가해자의 잘못을 정확하게 복원하는 데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희생자의 왜곡된 기억을 교정하기 위함이다. 볼프는 희생자 편에서 그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그들의 기억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도리어 가해자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관대한 쪽으로 기억을 복원하자고 말한다.
둘째, 우리가 희생자와 연대하기 위해 함께 외치는 구호, 즉 ‘기억하자’ ‘절대 잊지 말자’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악행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소멸하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코’ 잊지 말자는 말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억의 종말에는 사랑과 화해가 있고, 그것이 궁극적인 기억의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최종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희생자가 악행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이 남긴, 구원은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말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가 분명하지만, 그것이 기억의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기억 치유하기
희생자가 기억을 그토록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기억을 통해 어떤 것을 이루려는 목적이다. 뭔가를 하려 한다. 볼프가 지적하는 바는 과연 그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원수 갚음? 보상? 회복? 치유? 옛날의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일 자체가 행복이듯, 과거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 자체가 고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기억해야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까? 실제로 고통의 기억이 치유되고 회복되기 위해선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할까? 볼프는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가해자에게 보복하는 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기억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억을 통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은 행복이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랑이어야 한다. 볼프는 기억이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고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절차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치료(Healing). 고통의 기억은 개인의 치유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경험이다. 치유는 기억과 함께 인격을 해석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치유는 단순히 지난날 아픈 과거의 사건과 감정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기억을 해석해내고, 더 큰 의미의 맥락 속에서 기억을 다시 새겨 넣을 때 일어난다. 따라서 치유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할 때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재해석할 수 있다.
인정(Acknowledgment). 기억이 구원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고백과 인정이 필요하다.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앙드레 뒤 트와(André Du Toit)는 인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 살인의 희생자들은 다시 살려 낼 수 없고, 고문과 학대의 피해와 트라우마는 어떻게 해도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들에게 가해진 일의 진실을 밝히고 인정함으로써 희생자와 피해자들이 시민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공개적으로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해자 청문회의 기능이자 목적이었다.” 중요한 점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정직하고 정확하게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이다.
연대(Solidarity). 기억이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희생자와 연대하는 일이다. 희생자와의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치유할 수 있고, 과거를 교정할 수 있으며, 새로운 삶으로 회복시켜줄 수 있다. 우리가 희생자와 연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치유는커녕 위험하기까지 하다. 희생자에게는 함께 공감해주고 고통을 경감시켜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호(Protection). 희생자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 희생자는 그들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희생자는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나중에 자신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기억을 구속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기억을 하더라도 치료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억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 중요하다. 기억을 통해 희생자가 가해자가 될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고, 진전 없이 그저 과거에 매여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최소한 실용적인 차원에서라도 기억을 통해 현재의 내가 행복해야 한다.
정체성과 기억
역사상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자아정체성을 기억에서 찾곤 했다. 볼프는 우리의 정체성이 두 가지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한다.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하지만 정체성은 자신에 대한 타자의 기억을 통해서도 형성된다. 우리는 타자의 기억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기억이 현재 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특별히 아프고 슬픈 기억들은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기독교 철학자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면 “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입니다”라고 밝힌다. 이보다 더 진실하게 자신의 실존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정체성을 나와 나에 대한 타자의 기억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분명 우리의 과거가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형성한 것처럼, 미래의 나를 규정하고 만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아픔은 단순히 흘러가버린 지난 시절 한때의 사건이 아니다. 시간을 뚫고 지나와 현재의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현재화(재현)하는 힘이 있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기억에 의존해서만 오늘의 나를 만들어간다면, 우리는 그저 과거에 매여 사는 존재가 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의 기억으로 모두 환원될 수 없는 잉여 부분, 곧 자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미래의 우리를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가실 수 있다. 미래에서 오시는 분은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이 가해자의 폭력에 잠식당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부여되며, 그것이 희생자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준다. 비록 가해자의 악행이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릴지라도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는 가해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망각의 은혜
희생자의 기억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다. 희생자의 기억을 역사 속에 묻어둘 때 우리는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 없다. 과거의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희생자를 위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하여금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의 효과를 가져온다. 폴 리쾨르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 수행능력이라 했다. 행동에 책임지는 인간만이 진정한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이다. 희생자의 고통을 망각한다는 것은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다. 따라서 희생자를 기억하는 일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희생자를 기억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감추어졌던 역사 속에서 그들을 구속하는 것이 참된 정의이고 윤리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 후에 망각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망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기억의 악몽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자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통해 정화되고 회복된 기억은 이제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 나가기 위해 망각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희생자의 미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희생자와 가해자는 서로를 치유하고 동시에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때 경험되는 망각은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일 것이다.
악이 승리하는 방법은 끝까지 기억되는 것이다. 악은 궁극적으로 기억에서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형벌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행한 기억은 끝까지 간직할 필요도 없고 기억으로 남을 이유도 없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악에 대한 가장 큰 복수(?)일 수 있다.
소박한 변호
원래 조건 없는 용서와 원수 사랑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정의감’과는 영 거리가 먼 개념이다. 사과도 안 했는데 용서부터 하라는 말이나 희생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부풀려서 기억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 잔인하다. 생각해보면 볼프의 모든 책에는 늘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서들이 깔려있었다.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가려서 악행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내고, 다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오가면 좋겠는데, 전혀 없다. 희생자에게만 너무나 큰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래도 한 번 더 볼프를 변호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상대방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더 오래 기억할까,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더 오래 기억할까? 아마 전자를 더 오래 기억할 거다. 왜 그럴까? 실제로 상처를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아서? 그렇다면 다들 상처를 받기만 하고 정작 상처를 준 적은 없단 말인가? 볼프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희생자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기억을 바르게 할 수 있을까? 희생자가 가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볼프가 제시하는 올바른 기억의 몇 가지 단계나 절차를 숙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기억의 목적, 기억의 내용, 기억의 활용을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다시금 자신을 성찰해보는 게 아닐까? 우리는 왜 그렇게 기억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을 하려고? 사랑하고 화해하려고? 복수하려고? 아니면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하려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최경환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교육원에서 일하면서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공공신학과 현대 정치철학의 대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