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스러운 날들

[388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2023-02-28     이범진

죄책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저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30여 년 전, 아들을 잃고 구순을 훌쩍 넘긴 어느 노모는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하고는 “젊은 애들인데 불쌍해서 어떻게 해. 나 같은 늙은이나 데려가지, 한창 젊은 애들이 뭔 죄가 있다고…”라고 했다지요.(박래군 활동가 ‘페이스북’)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스럽다 느껴지는 그 긴 세월을 가늠하는 일조차 겁이 납니다.

문제는 죄를 느끼는 깊이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처한 위치와 환경 때문이기도 하겠고, 본성의 영향도 없지 않겠지요. 이번 커버스토리는 진정한 사과를 주제로 우리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지난 2월 7일, 3월호를 준비하며 서울중앙지법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가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국내 공식 기관이 최초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인정한 것이었는데요. 진정한 사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은 분명합니다.

필자와 인터뷰이를 따라 용서, 화해, 사과의 의미를 되새기다 보니, 현실에서는 매우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사실을 다시 절감합니다. 일상에서 왕왕 느끼듯 진정한 사과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가능을 확인한 그 지점을 기준 삼아 반면교사와 한 발 더 멀어지는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성과일 것입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는 지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제 일상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섬찟 놀랍니다. 업데이트되는 사상자 수를 확인하며 짧은 애도를 하지만, 다시 정교하게 맞물린 현실 세계로 돌아옵니다. 이런 때 균열을 내는 이들은 현장의 소식을 급박하게 전해오는 선교사들이지요.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 현장에는 늘 선교사가 있습니다. 2010년 아이티 지진 때도 대다수는 처음 들어보는 그 나라에 한국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반 미디어에서도 선교사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지금도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있는 선교사들은 침착하게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한국 교회 및 NGO와 논의하며 도움의 루트를 설계합니다. 평소엔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갈등을 조장하는’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라 비난받는 그들이지만, 재난의 순간에는 정말로 열방을 치유하며 나아갑니다. 물론 어김없이 목사의 막말이 공유될 테고, 누군가는 한몫 챙기려 하겠지요. 그러나 인류를 형제자매로 끌어안고 기도해온 이들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머물며 자기 죄를 부여잡고 웁니다. “함께 울기 위해 우리는 우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던 故 임보라 목사의 글(2017년 9월호)을 다시 읽으며, 죄스러운 봄을 맞습니다.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